전시장에 가서 사진 찍고 바로 온라인에 올리면

일이 쉽고 팔로워도 술술 들어올텐데

굳이 이렇게 힘줘서 글을 쓰며 번거롭게 하는 까닭은

팔로워수를 늘려 노출광고수익을 창출하는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직접 가서 보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글로 정돈하기가 목적이다

작품을 보면서 떠올린 착상을 써내려간 글만이 내가 창작한 것이고

작품은 작가의 것이다


그러니 작품만 올리는 것은 지양하는 편

일부러 알라딘블로그나 스레드를 선택한 것도

네이버같은 애드수익이 구조적으로 없기 때문

작가의 소중한 작품인데 저작권문제를 간과할 수는 없었다


이전에 말한 수익화는 내가 쓴 글, 즉 내 창작물의 수익화에 대한 것이었지

작품 무단도용으로 인한 수익은 아니다


향후 문화예술이 크게 부흥하리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거기에 내 나름의 능력으로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 는 고민


여행유투버는 해외에 가서 사람이나 거리를 허락없이 사실상 무단촬영을 하는 셈인데

해외가서 미술관영상을 찍을 수는 없고 외관촬영이 고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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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세계를 감각하는 법 -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은 생각하는 방식도 다를까?
케일럽 에버렛 지음, 노승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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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아마도예술공간에 다녀왔다. 아라리오와 함께 공간이동이 아주 특이한 전시공간 중 하나다.


배한솔×김제희의 8분 남짓한 영상, 포인트클라우드는 픽셀로 구성된 사람과 사물을 보여주면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장치는 세상을 연산한다. 장치는 매 순간 신호를 보내고 회수한다. 연산된 세상은 원본과 같은가?


장치는 세상을 연산한다. 그러니까 센서는 빛을, 마이크는 진동을, 안테나는 주파수를 잡아낸다. 신호를 수집하고 디지털 언어로 번역해 스크린에 표시한다. 시점은 고정되어있고, 이미 지나가버린 것인데 우리는 과거를 현실이라 부른다. 그러니 연산된 세상은 원본과 같은가?


모든 것은 흐른다, 판타레이를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는 대표적인 유전론자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게놈(발음주의)을 다루는 Genetics 유전遺傳론말고, 세계가 변화하고 흐르고(유) 전환한다는 流轉말이다. 이보다 더 극단적인 유전론자인 크라튈로스는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으니 손을 담그는 순간조차 모든 것이 바뀌고 있어 단 한 번도 같은 강물에 몸을 담근적이 없다고까지 했다.


픽셀의 아이디어는 점묘법 포인틸리즘을 기술적으로 발전시킨 것 같이 보인다. 조르주 쇠라의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1884, 시카고미술관소장) 같은 회화말이다. 인간의 세필붓대신 유기발광다이오드로 바뀌었을 뿐.




변화는 끊임없지만 변화하는 상태의 연속성은 인정했던 헤라클레이토스라면 점묘회화가 구성하는 포인틸리즘의 전체상에 집중했겠다. 변화는 급격하기에 지칭하는 언어조차 무효하다고 생각한 크라틸로스라면 픽셀이 표현하는 순간의 점들마저 결코 동일하지 않고 2진법의 전자기신호가 메모리속에서 휘발되고 있음을 직관했을 것이다.


센서로부터 입력된 자료의 흐름을 연산해 유의미한 값으로 고정하려고 하는 픽셀스크린은 데이터의 강이다. 크라튈로스를 빌려 말하자며 이 변화의 흔적을 시각으로 따라갈 수는 있되 한 번도 같은 데이터를 본 적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전자기적 픽셀은 현실을 좌표화한다. 세계는 정밀하고 연속적인 수치의 격자 위에 존재한다. 포인틸리즘의 회화는 인간의 손과 붓로 세밀한 점을 찍는다. 멀리서 보면 완성된 상이 보인다. 물론 인간이 찍은 점은 올레드 디스플레이보다 불완전하지만 우리의 감각은 그 불완전 속에서 전체의미를 재구성한다. 픽셀은 데이터를 추구하고 의존하며 점묘는 지각을 탐색하고 확장한다.


픽셀과 점묘의 차이는 기술적 구분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의 대립이라 볼 수도 있다. 픽셀은 세계를 캡처하려 하고 점묘는 동기감응하려 한다. 픽셀은 객관적 진실을 좇지만 점은 주관적 진실을 쌓는다. 픽셀은 세계를 측정 가능한 수치로 환원하며 객관성을 추구하나 점묘는 인식의 과정 자체를 드러내고 주관성을 드러낸다.

그러니 픽셀과 점묘은 세상을 해석하고 구성하는 인식에 대한 두 가지 다른 패러다임이다. 공통점은 세계는 곧바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점과 점 사이의 지각적 해석을 통해 구성된다는 점. 점묘에서 픽셀로 시각표현기법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결국 사람의 인지와 해석, 심상적 재구성이 연산이다.


조금 더 비틀어 생각을 확장해보자면 인간과 기계의 이분법적 전제에 대해 도전해볼 수 있다. 기계는 정확하고 인간은 모호하다, 기계는 완전하고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이분법적 전제를. 그러나 장치가 포착한 데이터 역시 필터링된 선택이며 의미는 사회적으로 구성되어야만한다. 통계데이터를 어떻게 시각화하느냐에 따라 파급력이 달라지듯. 인간의 감각이 더 복잡한 의미망을 제공할 수는 없는가? 또한 연산된 세상은 진짜가 아니다라는 전제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현실은 중계되고 번역된다. 애초에 원본이란게 존재하는가? 어쩌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실은 이미 하나의 해석된 세계일 수 있고, 연산이나 감각도 동일한 번역의 층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전제를 뒤집으면 인간과 기계는 진리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르지만 조화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공명시키는 존재로 재인식될 수 있다.


연산된 세상이 진짜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연산 너머에 감각을 되돌려주는 우리의 상상력이 관건이다. 마치 360도 광각카메라를 통해 인식된 세상을 보는 우리의 뇌가 현저히 다른 의미체계를 생산해낼 수 있는 것처럼. 혹은 360도의 평면과 360도의 버블구체를 비교해 흥미로운 시냅스연결을 창출할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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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쓸모 (특별 합본판) - 삶을 깨우는 마흔세 가지 역사의 통찰 역사의 쓸모
최태성 지음 / 프런트페이지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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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에 다녀왔다. 어제 그리스작가 소피아 미촐라의 전시가 오픈했다


이름이 어마무시한 아리스토텔레스대학교 테살로니키 시각예술학부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아리스토텔레스대학교라니, 비슷한 느낌으로 우리에게 단군대학교 박혁거세대학교 이황대학교라는 이름이 가능할까?


아스트로푸들, 즉 우주댕댕이라는 제목의 전시로 알루미늄호일로 감싼 메탈릭한 느낌의 벽에 회화를 전시한 것이 특징이다. 작가는 여성의 몸을 테마로 신화조각과 일본애니의 작화를 합쳤다. 지난 신민작가의 전시는 털에 대한 식당의 혐오를 주제로 여성노동자의 위생과 강박을 보여주는, 철사로 털을 표현한 거대 설치작품이었다. P21는 작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작가의 메인주제 하나에 집중해 전시함으로써 유능한 저격수마냥 깔끔하게 원샷원킬로 승부한다.


80m 떨어진 윗쪽 2관에서는 알몸으로 특정기구 밑에서 담배를 태우는 윌리엄 켄트리지풍 5분 애니가 상영되고 있다. 점화에서 끽연까지 과정 묘사가 자세하다.


https://p21.kr/artist/Sofia_Mitsola/b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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