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는 딸이니까 니한테만 말하지 - 멀고도 가까운 세 모녀 이야기
김소영 외 인터뷰어, 최숙희 외 인터뷰이 / 딸세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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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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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를 오래 한 사람이라는 티가 날 때가 있다. 특히 그 지명을 말할 때 현지발음으로 하는 경우 그리고 한국어에 없는 발음을 잘 구사하는 경우


우리말에서는 기능정지된 장음을 쓰는 일본어의 경우

오오사카, 니이가타할 때 그리고 영어의 Z보다 약간 순화된 이빨소리 치츠와 자지즈제조 발음을 제대로 할 때

음 일본어 좀 하셨군


우리말에서는 기능정지된 성조를 쓰는 중국어의 경우

베이찡! 1성 썅↘하이 4성

중국 북방은 권설음 얼화가 심하고 남방은 상대적으로 담백하게 칭송하게 말하는데서 지역구분을 할 수도 있다.

상하이 복건성과 대만 사람 둘 다 표준어를 가볍게 발음하지만(워쒸 라오쉬가 아니라 워스 라오스에 가깝게)

미안하다를 빠오치엔이냐 뚜이부치를 쓰는가

너한테 말할 거 있어에서 말하다를 어떤 동사로 쓰는가, 워건니쟝(講)이나 워건니슈어(說)에서 차이가 난다.


영어는 인토네이션이 관건인데

억양 하나로 캘리인지 미드웨스턴인지 동부인지 텍사스인지 웨일스이지 아이리쉬인지 구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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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에 다녀왔다.

미국 포틀랜드미술관의 〈구운몽도 병풍〉과 덴버미술관의 〈백동자도 병풍〉을 복원하고 원소장지로 반출하기 직전 전시해두었다. 오늘까지였다.

1. 사실상 일은 다한 문화재 수리복원가와 연구소가 전면에 부각되지 않은 점이 아쉽다. 지난 리움미술관의 피바디박물관 소장 평안감사 도과급제자 환영도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전시관은 강조되었으나 단국대 석주선기념관에서 복원했다는 점은 전면에 드러나지 못했다. 하여 동영상 끄트머리에 있는 엔딩크레딧의 조그마한 글씨를 보고 이 글에서 분명히 밝힌다.

구운몽도 병풍은 고창 문화재 보존에서 한 것이고

백동자도 병풍은 정재 문화재 보존에서 한 것이다.


2. 구운몽도 동영상의 영어자막에 용왕은 dragon king, 선녀는 celestial maiden천상의 하녀라고 쓰여있다. 영어 자막을 읽는 사람과 한국 자막을 읽는 사람은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 파친코나 작은 땅의 야수들 같은 영어가 원전인 한국역사문화 소설

역시 한국어 번역본으로 이해한 사람들과 영어 원서로 이해한 독자들은 상이하게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과 같다. 대안은 무엇이냐? 아직은 없다. 그저 외국인과 한국인이 서로 더 많이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것밖에 없다.

비슷한 의미로 복원가들이 '장황직물'이라고 쓰는 용어를 영어권 사람들으 장식용 테두리 decorative borders로 이해하고 있는데 무엇이 맞고 틀린게 아니라 언어의 뉘앙스가 서로 다르다. 일견 같은 말인 것 같으나 지시하는 대상은 같아도 문화적 맥락이 다르다. 이 부분은 장기간에 거친 조율이 필요하다. AI시대에 더더욱 필요한 것은 문화적 번역가다.

백동자도 영상에 의미한다를 denote나 impart로 쓰는 것은 다소 곤란하다.


3. 그림이 그려진 병풍은 옛 버전의 그래픽노블이었을 것이다. 귀스타브 도레가 대중화시킨 삽화같은 것이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를 시각적 보조장치를 통해 더욱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다.

문맹률이 높았던 시대에 문자문화는 남성 지배 엘리트계급의 전유물이었고 여성과 피지배계층은 구술문화를 주로 향유했다. 그러나 입에서 입에서 전해지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그림 같은 시각문화는 강력한 툴이다. 유럽의 경우에서도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의 트레이닝을 거친 신학생에 한정되었고 대다수의 농민은 성당의 십자가, 성상, 스테인드 글라스화, 12 순교자의 길에서 보이는 도상들과 같은 시각 보조장치를 거쳐 이해했다.

구운몽도 한문버전과 언문버전 등 여러 버전과 복본이 있다는 연구가 있다. 구한말에 병풍으로 그려진 구운몽도는 이야기의 얼개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스토리를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4. 결손부를 메우고, 찢어진 부분을 보강하고, 배첩을 새로하고, 틀을 새로 짜서 단단하게 지탱하고, 구운몽도의 본 순서대로 1,3,6,7폭을 재배열하는 모든 시도가 훌륭하다. 인상깊은 점은 두 가지로, 장황직물에 가려져있던 부분을 뜯어내고 그 가려져있던 옷과 얼굴 등의 부분을 보이게 한 다음 테두리를 2.5cm 뒤로 만들어 더 온전하게 그림을 복원하였다는 점. 또 하나는 배첩과 보강과정에 쓰인 1910년대 종묘자료, 1960년대 매일신문을 찾아냈다는 점이다.

쇼쇼인(정창원) 문서에서 신라촌락문서를 발견한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18-19세기에 네덜란드 등지에 수출된 일본 도자기를 쌌던 종이에서 옛 일본문서를 발견한 것과 비슷한 예 아닐까? 복원가들도 놀랐겠다.

5. 여장, 남장 크로스드레싱은 가부장적 전통문화에서의 일탈

6. 남성1명에 여성8명의 스토리 구조는 생리학적으로 읽을 수 있다.

7.액자형호접지몽

지난 리움미술관 미국피바디소장 평안감사 도과급제자 환영도에 대한 글

https://blog.aladin.co.kr/797104119/16296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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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석원 전경


자하문로에 있는 목석원에 다녀왔다. 석파정 서울미술관과 환기미술관 근처다. 자고로 목석원과 자하를 걸어서 갔다오지 않은 사람은 전시애호가 고급과정 입학시험에서 자격미달로 탈락하리라. 차가 아니라 걸어서다.

사실상 등반코스인 이 무지막지한 언덕길을 올라가면 고생을 깨끗하고 선명한 하늘로 보상받는다.

자하 1층에는 발의 각질마저 흰색으로 그린 윤위종 작가의 극사실적 그림이 걸려있고, 2층에는 김창열의 물방울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오마주한 그림이 걸려있다. 윤형근식 된장색 옛 장지에 하이퍼리얼리스틱한 물방울을 그리는 것은 같으나, 물방울을 혼합제재로 입체감을 돋우기도 하고, 김창열이 그리지 않은 무당벌레나 네잎클로버, 초록새 혹은 거대한 먹빛 필획을 쓰기도 한다.

디테일, 윤위동_영광7_모래에 레진, 아크릴물감_180×60cm_2017


자하 윤위동전 2층 전경



자하와 목석원 둘 다 북한산과 평창, 부암 일대가 원경에 잡히지만 조금 각도가 다르다. 삼세영, 세줄, 자인, 가나아트 있는 평창의 특이한 잠망경 잠수함집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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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일과 날 보았다. 9명의 노동하는 순간과 그들의 생각을 날 것 그대로 담은 서정적인 다큐다. 박민수와 안건형 감독은 내레이션 없이 노동자의 삶 자체를 화면에 담는데 집중했다. 엔딩 크레딧에도 출연자 이름이 먼저 나오고(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직장명과 직종명은 제외한 듯) 감독이 아닌 연출자 이름으로 나중에 등장할 정도로 출연자를 중심에 두었다. 기승전결의 서사가 없기에 배역이나 주인공은 아니다. 존재를 대우했다는 뜻이다.


사실 그리 특별한 것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삶의 단면을 나열한 것 같으나 묘하게 흡입력있다. 유투브에 공장 메이킹 영상을 롱테이크로 담는 채널이 있는데 그 댓글에 보면 시각적으로 만족스럽다 visually satisfying이라고 댓글이 달려있다. 그런 느낌이다.


맨 처음에 스틸컷으로 영화제목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기원전 7세기 헤시오도스의 글이 인용했다. 위키피디아를 인용해보면, 《일과 날》(고대 그리스어: Ἔργα καὶ Ἡμέραι, 에르가 카이 헤메라이, 라틴어: Opera et Dies, 노동과 나날로도 번역)은 헤시오도스가 쓴 약 800편의 그리스어 운문으로 이루어진 시가 작품이다.


영화 초반에 언급된 인용문과 그 글의 원전에서는 농업 위기, 노동 소외, 환경 우려 등에 대한 레퍼런스를 약간씩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평범한 유투브 메이킹 롱테이크 영상으로 환원될 수 있었던 영화가 이 인용문과 이에 해당하는 출연자의 혼잣말로 인해 지적 고민이 있는 영화로 환골탈태했다.


언뜻 디즈니식의 명확한 서사와 갈등구조 없이, 과거 제철소 근무했던 염전노동자, 전국을 돌아다니는 프리랜서 PD, 육아휴직 중인 두 아이 엄마의 가사노동, 마라톤 풀코스 40번 완주한 재활용분류, 백반집 요리하는 할머니, 40년 매일 출근한 동네 전파사 할아버지, 독실한 기독교인 영어학원 데스크 사무직, 양조장에서 일하고 영어공부 주경야독하는 청년, 아이가 보고 싶어도 단가를 맞추기 위해 주말출근해 마네킹 합성수지 제작하는 9명의 노동을 카메라에 담았다.


등장인물이 모두 임금노동자는 아니다. 자영업자도 있고 영세업자도 있고 노동이라고 분류되지 않은(현재 사회적으로 논의가 진행중인) 가사노동자도 있다. 따라서 부여되는 노동과 자기가 자기에게 주는 노동을 모두 포함해 노동의 외연을 넓게 담았다.

연출적으로도 잘했다. 감독은 이들의 하루를 브이로그로 담는 안일한 선택을 현명하게 피하고, 순서대로 반복해서 병치해서 지루함을 주지 않았다. 중간중간에 약간씩 초점이 정합적으로 맞춰지는 부분이 있어서 거칠고 느슨하게 영화를 세 등분해보자면, 처음은 노동의 순간, 두 번째는 노동의 의미, 세 번째는 노동의 미래와 과거다.


출연자는 각자의 언어로 일의 의미를 정의하고, 하루의 일과에 대해 평가한다. 직업의 귀천에 관계없이 향후 AI와 저출산 고령화에 대해 고민한다. 나아가 지금-여기의 노동을 어떻게 버틸지, 그리고 앞으로 삶은 어떻게 꾸려할지 각자의 방식으로 고민한다.


느릿하니 서정적이고 보통 우리가 볼 수 없는 일거리의 모습 자체를 알 수 있는 좋은 다큐다. 육아, 요리, 코팅, 복사, 다듬기, 밀고 닦기, 물청소하기, 자기, 유투브나 뉴스보기, 운동하기 등 선명한 동사로만 구성된 다큐다. 김훈의 건조하면서 생동감있는, 단단한 술어로만 구성된 문장 같다.


다만 9명의 노동은 어떤 노동이지 노동의 일반명사가 아니다. 중저임금 노동을 위주로 담았기에 부분집합으로서 '어떤 노동'이지 모든 노동이 아니다. 노동의 귀천이 없다는 말이 맞으려면, 투자자의 노동, 엔지니어의 노동, 외화내빈인 재벌의 노동 이 모든 것도 노동이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도 하루의 태스크를 쳐내는 자의 일이란 모두 동일하게 귀하고 소중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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