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사건의 철학 중에서

ㆍ사건이란 무엇인가?
철학에서 말하는 ‘사건’이란 순간적인 존재이다. 예컨대 운동장에 깃발이 서 있고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불어 깃발이 흔들렸다. 그리고 바람이 그쳐 이제 깃발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때 모든 사물은 그대로인 상태이지만, ‘흔들림’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런 순간적으로만 존재하는 것, 그럼에도 인간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 그것이 바로 사건이다. ‘A나 B’가 아니라 ‘A에서 B로’ 넘어가는 짧은 시간 속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 이런 시뮬라크르(순간적인 것, 이미지, 환영)를 사유하는 것이 현대철학의 핵심 과제 중 하나가 되었다.
플라톤 이래의 철학사가 움직이지 않는 사물의 철학을, 고정된 실체를, 본질=이데아를 사유해 왔다면, 사건의 철학은 순간적인 것, 시뮬라크르를 사유한다. 바람에 의한 깃발의 흔들림, 누군가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 한 장소의 일정한 분위기, 순간적으로 생겨나 우리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고는 허공으로 사라지는 말, 빛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색 등 ‘사건’이 존재한다. 본질철학에서 탁자가 네모나다고 말한다면 사건철학은 자세히 보면 네모나지 않다고 말하며, 본질철학에서 탁자가 녹색이라고 말한다면 사건철학은 빛에 따라 녹색 아닌 다른 색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현실의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도 역시 ‘사건’이다. 스포츠나 드라마 속의 반전과 같은 사건을 인간은 일부러라도 만들고 즐기고 싶어 하며, 대학이나 입사시험에 ‘합격’하고 발표되는 순간과 같이 결정적 변화를 맞이하는 일을 경험한다. 이 책은 이렇게 (들뢰즈를 비롯한 후기구조주의 사유 성과를 이어받아) ‘사건’을 철학사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위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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