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본 이란 감독의 영화 2편 다 좋았다.
모함마드 라술로프의
<신성한 나무의 씨앗>
자파르 파나히의 <그저 사고 였을 뿐>
엊그제 개봉한 후자의 영화에서는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윤리적 딜레마가 특징적이다. 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을 일견 상기시킨다.
라쇼몽식 다중 서사와 파나히 감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혼란과 불편함을 제공하지만 둘 다 관객에게 윤리-정치적 성찰의 여지를 줌으로써, 진실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의 체념과, 체제 억압 속의 빠른 포기를 넘어 새로운 공동의 질문을 제공한다. 즉 관점의 충돌이 반드시 무기력으로 끝나지 않으며 우리로 하여금 윤리적 사유를 촉발시킨다는 것이다.
자파르 영화 이야기의 대부분은 차량, 정비소 같은 한정된 공간에서 누가 가해자인지 확증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정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추적과 갈등으로 전개된다. 밀실 스릴러와 윤리적 딜레마에 더해 불법 촬영, 은밀한 제작과정이 작품의 정치적 메시지를 증폭한다는 특징이 있다.
소수의 비공식 촬영과 필름의 밀반출 및 국제영화제 출품이라는 현실 스릴러적인 과정이 영화 텍스트 바깥의 정치적 퍼포먼스, 즉 체제에 대한 까발리기식 고발로 기능한다. 복수 스릴러의 서술을 빌려 검열된 현실을 노출해 촬영자가 처한 정치적 억압을 고발하는 것이다.
현실은 평화로운데 작품에서는 추적과 복수의 대환장 파티가 벌어지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스릴러에선 네러티브로 정치를 고발하지 않는 점과 차이가 있다.
세속국가의 정교분리 원칙처럼 작품-정치 분리라고 할까. 이란은 정교일치의 신정국가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상징계와 상
상계가 긴밀하게 얽혀 상호작용한다.
하여 제작 유통의 은닉이 역으로 소리없는 아우성이자 보여주기식 항의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저예산 및 검열이라는 시련 속에 어쩔 수 없이 동반된 어지러운 화면이나 어긋난 초점 등 불완전성은 작품의 퀄리티를 떨어뜨리지 않고, 되려 영화적 긴장과 정치적 진정성을 강화한다.
으레 사건에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고 기대한다. 그러나 <라쇼몽>은 사실이란 주관적 기억, 이해관계의 교차물임을 폭로한다. 사건은 반복되지만 사실은 사람마다 달라진다. 기억의 불일치는 사회적 위선을 드러내기에 사건의 사실성보다 자기서사(자기정당화)가 드라마적 핵심이다.
구로사와 감독은 한 사건에 대한 여러 진술을 점잖게 나열해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진술을 신뢰할 것인가를 고민하게끔하면서 판단을 윤리적 행위로 승화시킨다. 이는 전형적 미스터리에서 누가 범인인가 그놈을 조지자 추적하고 체포하자 같은 나이브한 진행과 차원이 다르다
구로사와와 자파르 감독 모두 가해자은 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듯하다. 그러나 라쇼몽은 서로 다른 증언들을 순서대로 진열하며 개인의 서사가 어떻게 사회적 체면이나 이익관계 혹은 욕망에 의해 주관적 기억으로 변형되는지 보여주며 진실의 부적합성에 도달한다. 이에 반해 그저사고였을뿐은 텍스트-현실의 관계를 실험적으로 보여주며 개인의 실존적, 도덕적 선택의 승기를 들어주는 한편
라쇼몽의 "어떻게 우리가 사건을 말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우리가 존재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진실은 상대적이다에서 멈추는게 아니라 그 혼란스러운 관계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행위에 방점이 있다. 어려운 현실을 딛고 출품해서 폭 넓은 전세계 관객에게 이 모순을 보여주려는 그 모든 과정이 이런 의지를 증거한다.
메타인지로 생각수준을 한 층 높여 작품 감상하면서 진실 탐구의 방식 자체를 질문하게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