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여성SF작가 6인의 단편집이 출판되었다.

여성이자 미약한 청각장애인이자 포스텍 학석출신으로서, 여성과학자이자 소수자를 모두 표방하는 김초엽은 한국문학이 정확히 그러한 작가를 필요로 하던 시점에 등장한 혜성같은 작가다. 작가의 글 자체도 흥미로운 부분이 있지만 공인(public figure)으로서 작가가 상징하는 위치가 있다는 말이다. 작가의 글은 거의 중소기업과 같은 가부장적 위계구도의 연구실에서 힘들어하는 숱한 여성과학도들의 마음을 어루어 만져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과학하는 마음과 문학하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도 존재로서 증명해주었을 것이다. 리얼리즘 문학으로 도배되었던 문학판에 과학문학가들이 양자역학, 사이보그 등의 낯선 어휘로 이런 글도 가능하다고 판을 깨고 주류로 들어온지 어언 10년이 넘어, 이제 과학문학도 나름의 위상을 단단히 잡았다. 김초엽 작가는 한국과학문학사 중흥기 초엽에 위치해있다.

한글 문학의 가장 재밌는 부분은 젠더가 밝혀지는 지점이다. 영어를 포함해 유럽어는 명사에 젠더가 명확하고, 문법적으로 문장에 주어가 반드시 존재해야하기 때문에 한 페이지, 아니 한 문단도 지나지 않아 주인공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드러난다. 특히 유럽어는 동일표현 중복을 지양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말처럼 사람의 이름을 계속 반복할 수 없어서 어느순간 명사어미 등에서 젠더가 부득이하게 드러나게 되어있다. 게다가 우리말은 이름만 가지고는 캐서린 헬렌 마이클 레오처럼 성을 분별하기 힘든 경우도 많다. 예컨대 예소연 작가의 영원에 빚을 져서에서 등장하는 인물 "석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확히 이해하려면 조금 읽어나가야할 수 있다. 영어였으면 He, She 주어에서 드러나거나 아니면 his she 소유격에서 드러났을 것이다. 등장인물이 젠더를 아웃팅하기 전에 독자는 이미 알아버린다.

그런데 한글은 그렇지 않다. 이 책 첫 꼭지 김초엽의 양봉이야기에서도 오전작업하고 고단해서 작업복을 벗고 속옷차림으로 누워있는 백단하에게 여자가 다가와 내려다보는데, 이 두 번째 인물은 "여자"라고 표현이 되지만 백단하가 정확히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읽어내려가다가 "같은 여자끼리"라는 부분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단하라는 이름만 가지고 젠더를 완전히 추측할 수 없어서 이 장면이 어린 여자가 벗은 나이든 남자를 내려다보는 신인지 어린 여자가 벗은 나이든 여자를 내려다보는 신인지 알 수 없고 따라서 퍼즐이 나중에 풀리는 재미가 있다. 그렇게 야한 신은 아니다. 그냥 지친 채로 자고 있는데 갑자기 예상치못한 손님이 나타나서 졸다가 퍼뜩 놀라는 신이다. 만약 유럽어로 번역되었다면 이 장면이 나오기 이미 이전에 백단하에 대해 소개하는 부분부터 he, she 혹은 il, elle, 혹은 er, sie 등으로 젠더가 만천하에 드러나서 수수께끼가 나중에 풀리는 재미는 없었을 것이다. 이게 한글문학을 읽을 때 재미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홍길동 아들이 연출한 영화 <해피엔드>에서 AI 탐지견이 노숙자 발견하는 장면과 학교에서 복장위반을 AI카메라로 잡아내는 장면만으로 퓨쳐리스틱한 느낌을 줄 수 있음을 증명했다. 블레이드러너처럼 한자간판의 마천루가 없어도 미래적 느낌을 줄 수 있다. 홍콩 센트랄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동양식 사이버펑크적 도시공간연출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SF는 가능하다. 어깨에 힘을 빡 주지 않아도 미래적 느낌이 날 수 있다는 뜻이다. 채끝살을 넣고 끌이지 않고도 소고기 풍미를 주는 라면처럼말이다. 김초엽도 음성변환, 네트워크 전송메시지 같은 부분에서 가볍게 SF적인 풍미를 넣었다.

스토리는 규은이 단하를 찾아오고, 단하가 규은의 목적을 알아내고, 둘이 의기투합해서 세계의 비밀을 찾으러가는 순서로 되어있는데 후반부는 미래세계의 인물 하나하나를 찾으러 떠나는 구도와 그들의 캐릭터디자인과 맛깔스러운 대사가 마치 어린왕자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왕자의 진행과 사실상 유사하다. 스포일러라 각자 사서 읽을 것.

두 번째 꼭지 저우원은 중국어가 좌횡서 즉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구도가 아니라 우횡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구도로 바뀌는 것을 상상하고 쓴 소설이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에 셈어(아랍어, 히브리어 등) 이야기할 때부터 복선이 있었다. 실제로 대사가 거꾸로 쓰여있다. 여기! 하이! → 기여! 이하!

김청귤 천선란도 재밌다. 그런데 이제 청년 남성은 이런 문학책을 읽지 않는 것 같다. 취향에 맞는 직선적인 서사는 무협과 회빙환 판타지 등 웹소 웹툰이다. 갓오브블랙필드와 나혼렙, 천애협로, 화산전생 등이 대표적이다. 이제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속해있는 계층이 드러날 정도다. 즉 독서취향이 나이 학력 직업을 판별할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다. 늘 그렇듯 반례는 있고 아닌 케이스도 있다. 큰 범위의 경향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민음사 창비 문학수첩 등 거대출판사의 어떤 작가를 어떤 독자가 읽는지 소비패턴 데이터를 긁어모아 시각화하면 분명 경향성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그 출판사도 이를 알아서 잘못된 곳에 마케팅을 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과학도는 김초엽을 읽고 3-40대여성은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20대 여성은 에세이를 읽고, 2-30대 남성은 웹소 웹툰을 읽는 경향이 어느정도 정착이 되었다. 조부모세대는 자본주의vs공산주의, 부모세대는 보수vs진보였다면, 이제 청년세대는 훗날 취향갈등이 전면에 드러나게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저런 책을 다 읽는 멀티태스커가 귀하다. 그런데 이런저런 장르의 독서를 함께 겹쳐 읽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제너럴리스트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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