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시절 처음 읽었던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은 내게 어른이 되는 관문인 것처럼 여겨졌다. 이제는 다 컸다고 생각했으나 뭔가 비밀스러움을 간직한 이 소설들을 쫓아가기엔 내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들 소설이 더욱 특별해졌던 것은 이 소설의 저자들이 자매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후 샬럿이나 에밀리 뿐만아니라 그들의 여동생인 앤까지도 작가였다는 사실은 브론테 일가의 사람들이 얼마나 작가로서의 역량이 대단했는지, 하지만 그런 재능을 가지고도 왜 모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뜰 수밖에 없었는지 등에 대한 궁금증까지 갖게 했다. 여기 <<샬럿 브론테의 비밀 일기>>가 있다. 비록 시리 제임스라는 작가에 의해 소설화 되기는 했지만 "샬럿 브론테"의 일기라는 구성을 가지고 샬럿 브론테의 일생과 브론테 일가의 이야기를 담은 아주 소중한 소설이다. 세부적인 사항이야 물론 그 시대에 그곳에서 살아보지 않았으니 당연히 허구이겠지만 샬럿과 에밀리, 앤이 자라고 사랑했던 영국의 황무지와 그들간의 우애, 사랑, 헌신의 이야기가 정말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샬럿과 그녀의 자매들이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읽으면서 <제인 에어>에 그녀 자신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투영되어 있는지 깨닫게 된다. 성직자들의 딸들이 다녔던 음울했던 학교의 모습들과 그곳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두 언니에 대한 애정과 슬픔, 브뤼셀에서 사랑했던 므슈 에제와 <제인 에어>의 배경이 된 집안과 건물에까지... "내 자신의 경험에서 끌어낸 그 어린 소녀에게 대담하게 내가 갖고 싶었던 모든 감정들을 부여하고, 과거에 내가 그토록 즐겨 쓰던 종류의 열정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면 될 것 같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손끝발끝까지 온몸이 찌릿찌릿했다."...322p 세 자매가 서로에게 신랄한 비판과 충고를 아끼지 않으며 집필하는 모습은 정말로 부럽고 감동적이다. 그런 내 자신과도 같은 이들을 잃는 슬픔은 얼마나 클까! 그토록 재능있던 그들 자매들은 왜 그리도 약한 육체를 지녔는지! 그 자리를 대신할 평생의 반려자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러진 샬럿조차도.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작년인가 샬럿 브론테의 <빌레트>를 발견했다. 출판된 지도 오래되었고 곧 절판될지도 모른다는 근심으로 한 일주일을 고민하다가 얼른 구매했다. 아직 읽히지도 못한 채 책장에 꽂혀있지만. 이 책을 읽고있자니 비로소 <제인 에어>가 좀 더 가까이 느껴진다. 얼마 전 영화에서 느꼈던 감정들과 오버랩되며. 다시 그녀와 자매들의 작품들을 읽고 싶어졌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알았으니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올 것 같다.
세계사를 배울 때 아무래도 역사의 시작은 유럽에서부터 시작하죠. 우리의 역사가 아니기에 어렸을 적부터 접하는 신화나 전래 동화 등도 우리에겐 낯선 이야기가 많습니다. 사실 알고보면 모든 이야기는 "역사"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죠. <<하프와 검의 노래>>는 영국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11세기에서 12세기... 그 이전부터 살고 있던 종족들과 프랑스에서부터 넘어온 노르만 족 간의 싸움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들의 지역 이름도, 종족 이름도 잘 알지 못해서 마구 헷갈리기는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그들의 역사와 관련된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1세기의 영국, 프랑스에 정착했던 노르만족이 영국으로 넘어와 노르만 왕조를 세웠습니다. 그 전부터 터전을 잡고 살아왔던 사람들은 난폭한 노르만족의 침략에 장렬하게 맞서 싸웠고 윌리엄 왕은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를 잇달아 침략했죠. 평화로운 한 때를 지내던 프리다는 네 살 때에 마을 전체가 불에 타 가족의 목동 그림의 어깨에 매달려 탈출을 하게 됩니다. 가족은 난데없이 사라지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전혀 새로운 환경에 접하게 된 프리다가 정착한 곳은 고원 지대의 깊은 계곡에 자리잡은 스칸디나비아 인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모든 것이 두렵고 무서웠던 때에 다가온 비요른만이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이었죠. 한 해 한 해가 흐르고 비로소 이들 사이에서 적응을 해 가는 프리다이지만 이젠 이곳 또한 안전하지 않습니다. 노르만 족의 침략은 계속되고 있고 점점 이 높은 고원지대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죠. 전쟁의 한복판에 서게 된 두 아이. 자상하게 돌봐주던 어른들이 전쟁에서 하나 둘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비요른도, 프리다도 이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과연 자신들이 안전할까, 어떻게 하면 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임박한 이 대전투가 실제로 노르만족과 우리 종족 간의 마지막 싸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미래가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삶의 끝이 될 거야." "생각해 본 적 있어, 두려워. 하지만 새로운 삶도 그 나름대로 모험이 될 거라고 난 생각해."...233p 음유시인의 자질이 있었던 비요른과 프리다는 하프와 단검을 지니고 노르만족의 한복판에 잠입합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자신들의 종족 안전을 위해 사용하기로 한 거죠. 어려서부터 비요른은 적의 고문에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말하게 될까봐 두려움에 떨었지만 막상 중요한 순간에 커다란 용기를 보여줌으로서 그가 한단계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어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이 책을 읽기 위해 그들에 대한 역사 공부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흐름을 알아두면 책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거죠. 뒷쪽의 "관련 지식 쌓기"란을 통해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이 책을 읽게되면 저절로 공부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어요. 11세기 당시 그들에겐 이미 신화가 된 베오울프나 천둥의 신 토르 등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거든요.^^ 아름다운 정경 묘사와 서사적 서술이 뛰어난 작품이었습니다. 고학년 이상 아이들에게 진한 감동을 줄 작품이에요.
최근 아프리카 소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저 역사로 이해하고 뉴스로 접하는 아프리카와는 전혀 다른, 조금 더 마음으로 느껴지는 글들이다. 내가 직접 겪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많기에 소설은 마치 내가 그들인 것처럼 느낄 수 있게 해주어서 좋다. 그저 자신들의 터전에서 잘 살던 그들이 느닷없이 나타난 백인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는 역사를 접하는 것과 그곳에서 처절하게 살았을 사람들 개개인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이라도 뜨거웠을까?>>는 두 소년의 이야기이다. 표지 그림에서처럼 케냐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원주민 키쿠유족의 소년과 할아버지가 그들의 땅을 헐값에 사들여 이제는 한 농장의 어엿한 도련님으로 자라고 있는 한 음준구(백인 한 사람) 소년의 이야기.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와서 모든 것을 함께 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이이지만 하인과 주인이라는 벽이 존재한다. 그래도 그들 나름의 틀 안에서 나눌 수 있는 "우정"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사이에 "정치"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소설은 1950년대의 케냐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직 영국의 식민지였던 때. 이제 서서히 독립하려고 움직이는 그때,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닌 폭력과 폭력이 난무하던 때이다. 몇 몇의 백인들을 위해 움직이는 사회를 견디지 못한 폭력 단체인 마우마우들을 막기 위해 말도 안되는 더 큰 난폭한 수색작전이 일어나던 그 때... 소년과 소년은 더이상 우정을 나눌 수 없게 된다. "모든 일이 혼란스러웠다."...145p (무고의 이야기 중) "다른 어떤 일꾼보다도 아빠가 믿었던 충실한 카마우...... 언제나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 쓰고...... 돌봐 줬던 무고...... 어제만 해도 엄청난 재앙으로부터 나를 구해 주려고 무척이나 애썼던 그 무고에게 죄가 있다니!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188p 무고의 혼란과 매슈의 혼란은 다를 수밖에 없다. 무고는 빼앗긴 자로서 이유도 없이 계속되는 억울함에 대한 혼란이며 매슈의 혼란은 왜 그들이 헤어질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할 수 없는 데서 생기는 혼란이다. 그것은 빼앗긴 자와 빼앗은 자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혼란이다. 작가는 그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객관성을 지니기 위해 두 소년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때문에 그때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보다는 진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두 소년이 각자의 위치에서 행할 수밖에 없었던 행동에 대한 이해와 그렇게 멀어져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깝게 전해져 온다. 정말 슬픈 역사이다. 무고의 가슴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누가 잠재울 수 있을까.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이해되지 않는 그 상황에서 도대체 누가 뜨거워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 분노가 내게까지 전해진다.
예전에 한 TV 프로그램에서 전국민 책읽기 운동을 한 적이 있었다. 어린아이서부터 어른들까지 읽을만한 좋은 책들을 소개했었다. 그 중의 한 권이었던 <<톨스토이 단편선>>은 최고의 작가인 톨스토이의 다소 무겁고 진중한 주제들을 지닌 장편소설보다 가볍고 인간으로서 살아가며 한 번쯤은 꼭 생각해보아야 할 주제를 우화처럼 담은 단편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야말로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두루 읽고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작은 활자에 빽빽하고 두꺼운 책은 아이들에겐 역시 조금 무리이다. <<BEST 톨스토이 명작>>은 아이들만을 위한 톨스토이 단편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톨스토이의 가장 유명하고 의미있는 단편 5편을 모아 묶었다. <바보 이반>과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작은 악마와 농부의 빵 조각>, <세 그루의 사과나무> 그리고 이 모든 단편들을 아우르는 주제를 담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바보 이반>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여서 톨스토이라는 작가를 몰라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이야기이다. 형들과 주위 사람들에겐 바보라고 손가락질 받지만 그 어떤 욕심이나 꾀를 부리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행복을 찾는 이반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욕심 많은 형들과 대비시켜 악마의 꾀임에도 넘어가지 않는 이반이 다소 바보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일한 만큼 거두어 일상의 행복"을 얻을 수 있음을 배울 수 있다. <작은 악마와 농부의 빵 조각>은 넉넉하고 풍족한 물질이 어떤 식으로 사람의 욕심을 부추기는지를, <세 그루의 사과나무>는 죄와 벌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는 다소 기독교적인 내용을 담는다. 하느님과 천사가 등장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이야기. "나는 사람을 지탱하는 것이 자신을 보살피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중략) ... 내가 사람이 되어서도 무사히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나를 걱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연히 나를 지나가던 사람과 그 아내에게 사랑이 깃들어 있어, 그들이 나를 가없게 여기고 사랑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1020p 다섯 편 모두를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타인에 대한 사랑"이다. 나 자신도 사랑해야 하지만 나 홀로서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보살필 수 있는 마음이 모여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게끔 돕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남"보다는 "나"가 중요하고 내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아이들에게 아주 큰 교훈이 되지 않을까!
난해하다. 주인공 "나"의 의식과 감정에 온전히 빠져들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나는 유대인도 아니고 그 전쟁을 겪은 세대도 아니며 무엇보다 그들의 역사에 폭넓은 지식을 갖고있지 못하다. 때문에 주인공이 겪는 이러한 심리적 착란 증세와 집착이 이해가 될 듯 하면서도 점점 멀리하고픈 생각만 가득하다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동안의 딜레마였다. 어쩌면 시간의 순서와 전혀 상관없이 주인공의 사유에 따라 진행되는 글의 순서도 한 몫을 한 듯하다. 원인과 결과를 유추하기 전에 또다른 원인이나 사건이 나타나고 때문에 결과를 추론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 그렇다고 끝까지 의문투성이인 채로 끝나지는 않는다. 결국 독자는 그가 무엇을 고민하고 추구하려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이 열린 결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이야기가 막 시작된 듯한데 툭! 하고 끝내버린 느낌.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인 파올은 한 가정을 책임진 가장이다. 하지만 전쟁 고아(홀로코스트 속에서 홀로 살아남은)로 자란 자신의 정체성에 자신이 없다. 파올은 이름조차 몰랐던 부모의 존재를 찾기도 하고 상상도 하면서 자신을 찾아가려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타난 쌍둥이 형의 존재. 그럼에도 왜 지금 그는 홀로일 수밖에 없는 걸까. 편안한 가정도 그에게 위안이 되지 못하고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배우고 싶어하지도 않는 학생들 사이에서 파올은 점점 염증을 느낀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일탈". 그렇게 시작된 그의 연구와 함께 프랑스에서 만난 폴린, 그리고 사진 속에 찍힌 자신과 같은 얼굴을 가진 한 남자. 이 모든 것들은 결국 파올의 정체성과 연결된다. "당신은 태어나서 부모님 얼굴조차 본 적이 없지요. 당신은 고아로 부모님이 수용소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는 의식 속에서 성장해왔기에,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돌이키기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99p "만약..."이라는 단어는 항상 후회를 남긴다. 조금만 상황이 달랐다면 조금 더 나은 오늘이 있었을텐데... 라는 후회. 파올이 집착하는 루이 16세 가족의 탈출기는 바로 이런 만약이라는 가정 하에 무수히 바뀌게 될 역사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바로 파올 자신의 정체성과 직결된다. 만약 부모님이 살아계셨다면, 친척들이 존재했다면, 형 필립이 살아있다면.... 사진 속의 남자가 정말 필립이었을까. 그저 파올의 착각이었을까. 그 사람이 정말로 형이든 그렇지 않든... 평안과 안정을 줄 가정조차 버릴 정도로 파올에게 중요한 것이었을까. 역사는 이미 일어난 일들이 쌓인 결과이고 때문에 지금의 파올조차 역사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토록 우연을 부정하고 싶었던 한 남자의 처절한 여행이 하편으론 가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