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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잘해요 ㅣ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평점 :
"시봉과 나는 시설에서 처음 만났다."(...9p)라는 첫 문장을 읽고 <<내 심장을 쏴라>>를 떠올린 사람은 나 뿐이었을까? 시설에서 만난 두 남자가 주인공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참 다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심장을 쏴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중함을 유지한 반면, <<사과는 잘해요>>는 너무나 섬칫하고 살벌한 배경 속에서 자꾸만 실소를 자아낸다. 아마도 시봉과 진만의, 그 어이없을 정도로 솔직하고 직설적인 말과 행동 때문이리라.
첫 문장에서 밝혔듯이, 시봉과 나(진만)는 시설에서 만난 사이이다. 언제부터 시설에 있었는지, 시간은 얼마나 흘렀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매일 복지사들에게 맞고, 약을 먹고, 일을 한다. 사건의 시작은 어느날 이들의 방에 새로 들어온 노숙자가 시설로부터 구해달라는 메세지를 밖으로 내보내고, 시설의 기둥들이라고 생각했던 시봉과 내가 이 노숙자를 도와 결국 시설의 비리가 밝혀지면서 시작된다. 소설은 시봉의 동생 집으로 온 시봉과 내가 겪는 경험과 그들이 시설 안에서 겪었던 경험들이 오버랩된다.
"나는 바스락거리는 비닐을 만지작거리며 내 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무언가 분명 큰 죄를 지은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25p
복지사들은 시설원들에 대한 자신들의 구타와 폭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죄의 고백"을 원했고, 시봉과 진만은 단지 덜 맞기 위해 없는 죄를 만들어낸 후에, 그 죄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위해 같은 죄를 지었다. 이 죄의 고백은 시봉과 진만이 시설의 반장이 된 후 대리 사과라는 형태를 통해 발전된다. 이 과정은 후에 시설을 나와 그들이 이에 관련된 일을 시작하며 본격화된다.
"핸드백을 뒤지기 전, 시봉과 나는 잠든 시연의 앞에 서서 사과했다. 핸드백을 뒤져서 미안하다고, 돈을 가져가서 미안하다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시연은 말이 없었다. 시연의 지갑엔 지폐가 한 장밖에 들어 있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들고 나왔다. 우리는 이미 사과를 했기 때문이다. "...112p
이들의 죄와 사과는 마치 어느 것이 먼저일까..하는 닭과 계란의 문제인 것 같다. 죄를 짓고나서 사과하는 것이 아닌, 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먼저 사과하고난 후 죄를 짓는다. 그리고 미리 사과를 했기 때문에 이들은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너무나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이들의 순수함(시설에서 맞은 폭행과 그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린 약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이 또한 모순이지만..)을 생각하면 풋! 하고 웃음이 나와버린다.
하지만 계속해서 웃을수만은 없다. 이야기는 이들의 모순을 더욱 크게 부풀려 사건은 점점 더 암울해진다. 이야기 진행은 너무나 빠른데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좀처럼 정리가 되지 않는다. 빠르기가 다른 탓이다. 이 소설이 가진 진짜 의미를 생각할 시간을 별로 주지 않는다. 머리 속에선 바쁜데 이야기는 끝나버리니 무언가 좀 허전하다.
'나'는 정말 괜찮은걸까? 언제나 시봉과 함께였지만 이제는 시봉이 없는데 그는 홀로 설 수 있을까? 아부지의 존재를 확인한 후에도 감정은 아무렇지 않은건가? 이 모든 것은 그저 독자의 몫인지... 아님 나만 이렇게 헤매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