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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언제부터인가, 내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 있다. "사는 게 다 그런거지, 뭐."라는 말. 이 말은 내가 내 삶을 포기하거나 체념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저 조금 힘들거나 아플 때... 그렇게라도 나 자신을 다독이기 위해서, 위로해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혹은 내 주위에 힘들어하는 지인들에게... 그러니 힘들어하지 말라고 해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말조차도... 모모에게는 해줄 수가 없다. 그가 안고 있는 출생의 비밀이 너무 커서, 그가 안고 가야할 짐이 너무나 커보여서, 그럼에도 당당하게 "자기 앞의 생"을 진지하게 내다보고 사색하고 나아가려는 모모가 기특해서 난 그저 조용히 모모를 지켜볼 뿐이다.
모모가 어떤 아이인가!
창녀들이 법을 피해 몰래 낳은 아이들을, 또한 불법으로 보살펴주고 있는 로자 아줌마네 집에서 가장 큰 맡형 노릇을 하고 있는 아이이다. 너무나 갖고 싶었던지라 훔칠 수밖에 없었던 강아지 쉬페르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남에게 줘버리기까지 했다. 그는 이미 아홉 살이라는 나이에 자신이 사는 환경보다 나은 환경을 강아지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런... 진짜 "사랑"을 알고 있는 아이였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마약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다짐하는 아이였고,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기 위해 하염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던 아이였다.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252p
"여러분도 알겠지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나도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죽을 맛이었다. 이건 아닌데, 생이 이런 건 아닌데, 내 오랜 경험에 비춰 보건대 결코 아닌데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뇌리를 스쳐갔다."...232p
모모의 주변 인물들은 하나같이 3류 인생을 사는 사람들 뿐이다. 그 외의 인물들에게서 모모는 위화감과 불안을 느꼈고, 오히려 소년의 주변 인물들 속에서만 그는 편안함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모모는 우리가 상대하고 싶어하지 않을 사람들에게서 교훈을 얻고, 삶을 배워나간다.
모모가 살아오는 동안, 자신에게 부모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정체성으로 혼란을 겪었지만 모모에게는 하밀 할아버지와 로자 아줌마와 이웃들이 있었기에 자신의 "생"에 대해 진지할 수 있었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하밀 할아버지의 말을 곱씹으며 모모는 로자 아줌마의 사랑을 자신의 사랑으로 되갚는다.
"사랑"만으로 모든 일이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언제나 삶은, 생은... 만만치가 않다. 그럼에도 모모가 자신의 출생을 극복하고 로자 아줌마의 죽음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향해 한걸음 내딛는 것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에게 위로가 될 무언가 아주 작은 것이 존재한다면... 그 힘만으로도 우리는 그 삶을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P.S <<자기 앞의 생>>은 에밀 아자르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나 알다시피, 에밀 아자르는 로맹 가리이다. 이 책에는 로맹 가리가 죽기 전에 써놓은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 함께 있다. 거기서 로맹 가리는 자신에게 왜 또다른 필명이 필요했는지, 에밀 아자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밝히고 있다. 위대한 작가가 필명을 사용하여 또다른 작가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작가로서의 고뇌와 그당시 문학계를 비꼬았던 그의 행동과 그 결과에 그가 얼마나 흡족해 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