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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구
김이환 지음 / 예담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정말 특이한 책이다. "특이하다"라는 단어로 이 책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읽었던 책 중에서는 그렇다. 무거우면서도 침체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다가도 이해 되기도 한다. 느리다가 빨라지는가 하면 끝없이 내면을 탐구하는가 싶다가도 사건이 연달아 발생한다. 정말로, 소설의 모든 요소를 갖춘 듯한 책이다.
"그 일의 시작은 그냥 희한했을 뿐이다. 담배를 사러 밖에 나갔더니 세상이 멸망해 있다면 당신은 기분이 어떻겠는가?"...12p
정말로 어떻겠는가. 자신이 특별히 무엇을 하지도 않았는데 모든 사람은 죽고 이 세상에 혼자만 남는다면... 세상의 멸망에 대한 다른 소설이나 영화는 몇 편 읽거나 보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절망의 구>와는 다르다. 무엇이 다르다고 콕 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인공이 영웅이 아니라는 점이, 세상의 멸망 앞에 끝없는 절망을 맛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마치 영화를 보는 듯이 이 소설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점이, 그만큼 "재미"가 있다는 점이 내게 이 소설이 끌리는 이유인가보다.
어느 날, 남자는 담배를 사러 산책을 나갔다가 어두운 골목길을 가로막은 2m 정도의 커다란 구를 발견한다. 그 구는 실체를 가졌으면서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다른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사람을 흡수한다. 일정한 속도로 계속해서 사람만을 쫒아가 흡수하는 이 구로 서울은 마비되고,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남자가 처음 이 구를 발견한 후 약 한달 후에 세상은 멸망한다. 그리고 남자만이 남는다.
처음에, 구는 도대체 왜 생겨났을까? 남자는 도대체 누구이길래 이 구를 처음 발견한 목격자가 되었으며, 이 남자만이 구에 흡수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갑자기 구는 왜 사라졌을까.
많은 의문이 남지만, <절망의 구>를 통해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의문보다는 바로 사람들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정부나 군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위험한 결정만 내리며 강도들에게 살해당한 일가족의 이야기나, 종교라는 믿음으로 굳게 뭉쳐 그들만의 논리로 검은 구를 막아보겠다는 단체, 세계의 멸망을 눈앞에 두고서도 "돈"만을 쫒아 사람을 살해하는 강도들...
"모두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가 잘난 게 무슨 소용인가, 세상은 멸망했지 않는가! 며칠 전에야 재산과 직업과 인간관계가 자랑스러운 일이었겠지만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발목을 묶고 앉아 있는 지금은 아무 소용없지 않은가. 아니야, 그렇지 않아, 가치 있는 일이야, 다시 가치 있어질지 몰라, 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남자는 그럴 수 없었다. 눈을 돌리면 보이는 수많은 검은 구들이 남자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265p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 모든 인간은 가장 인간다워지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처절한 밑바닥의 본성을 드러낼 때가 바로 죽음의 공포 앞에서라고 이 소설은 말하는 듯하다. 검은 구에 흡수되었다 돌아온 사람들은 "죽음과, 고통과, 슬픔과, 좌절과, 한계와, 절망을 "(...348p)느껴 이 구를 "절망의 구"라고 부르게 되지만, 다시 살아난 그들은 더더욱 원초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산다는 것의 가치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이용하고, 거짓말 하고, 속이는 모습이 아닌, 좀 더 스스로에게 성실하고 정직하며 당당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걸까. <절망의 구>를 통해 해 본 생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