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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할머니는 무려 15년 동안이나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셨다. 이미 상당히 진행된 후에 발견되었으니, 어쩌면 20년일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할머니 자신은 물론,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던 가족들과 그 외 가족들의 생활과 관계가 모두 무너졌음은 물론이다. 난 할머니 때문에 엄마, 아빠 사이가 좋지 않은 게 싫었고, 가끔 우리집에 와 계시는 할머니의 하고 또 하시는 말씀과 밤마다 돌아다니시는 습관, 잠시만 눈을 떼면 자꾸 탈출하시는 그 완력(힘도 어찌나 센지..)이 너무 싫었다. 그때엔 어리기도 했지만 치매라는 병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몰라서 자꾸 할머니 탓만 했었던 것 같다.
예전엔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들만 걸리는 병인줄 알았던 치매가 "알츠하이머"라는 이름을 달고 젊은 사람들도 걸릴 수 있는, 나이들어 저절로 생기는 현상이 아닌, 하나의 "병"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조발성 알츠하이머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져 이젠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 어떤 매체로도 이 병을 앓고 있는 환자 본인에 초점이 맞춰진 적은 없는 것 같다. 이 병으로 인한 가족과 주변인들과의 관계(무시못할 가장 중요한 점이기 때문에)에 주로 관심을 보여왔다.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는 50세의 하버드 심리학 종신 교수 앨리스가 조발성 알츠하이머에 걸리면서 일어나는 일들과 그 병을 앓는 그녀의 사고를 따라가는 이야기이다. 워낙 젊고 튼튼하고 똑똑한 앨리스였기에 그녀는 더욱 이 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마도 폐경기 현상일 거라고, 아니면 자신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보다고 생각했던 현상들이 사실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전병이라는 사실 때문에 앨리스는 더욱 힘들어한다.
소설은 철저하게 앨리스의 의식을 따라가기 때문에 알츠하이머라는 병이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온다. 또, 앨리스의 행동과 생각을 따라 그녀가 해야하는데 잊었던 것을,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고 독자만 기억하기 때문에 더욱 가슴 졸이고 더욱 마음이 아파온다. 병에 걸리기 전의 "나"가 있고, 자신이 알아왔던 수많은 기억과 행동들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가 있다면, 후자쪽의 나는...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기억하는 추억과 내가 좋아하는 취향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해도 과연 "나"라고 정의할 수 있는 걸일까... 앨리스는 자신의 뇌가 무너지기 전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그리고 자신다운 자신으로 남기 위해 미래의 앨리스에게 단서들을 남긴다. 하지만 앨리스의 기억은 점점 왜곡되고 잊혀진다.
치매는 워낙 긴 싸움이라 가족들은 지치고 힘들어한다. 이 책은 이런 가족들의 반응들도 잘 다루고 있다. 남편 존은 점점 망가지는(어디까지나 자신의 눈에) 앨리스를 계속 보고있기가 힘들어 더욱 일에 매진하고, 그녀의 자녀들은 그녀 앞에서도 그녀가 없는듯이 그녀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이런 모습들은 실제 치매 환자의 가족들 중에서도 아주 흔히 일어나는 일들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앨리스의 생각을 따라 읽으며 이런 행동들이 얼마나 이들을 무시하고 배려하지 못한 행동들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앨리스는 비록 자신이 사랑하는 딸이나 남편을 못알아볼 정도로 심해진 환자라도 앨리스 "자신"으로 남을 수 있음을 증명해보인다.
"여러분, 우리에게 제한을 두지 말고 힘을 주십시오. 척추 부상을 당하거나 팔다리를 잃거나 뇌졸증으로 기능 장애를 갖게 된 환자들의 경우, 그들이 장애를 딛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가족과 전문가들이 열심히 재활을 도와줍니다. 우리와 손을 잡아 주십시오. 우리가 기억력, 언어, 인지 능력의 손상을 딛고 나름의 기능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326p
책을 읽는내내 할머니를 생각했다. 이 철없는 손녀의 무관심하고 신경질적인 행동이 할머니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을지를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이 책을 읽지 못했다면 절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알츠하이머 환자 본인들에게도 끊임없는 자기 생각과 의견을 갖고 있으며 자신들도 자신들의 실수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말이다.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이해하고 이 병에 걸린 환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읽어볼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