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과 지적 사기 - 통섭은 과학과 인문학을 어떻게 배신했는가
이인식 기획, 김지하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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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과와 이과,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대화만큼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전형적인 문과인간으로서 이과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지라, 항상 자연과학에 대한 막연한 경외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몇 년 전, 한국에서 때 아닌 "통섭" 열풍이 불었다. 미국의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1998년 쓴 Consilence: The Unity of Knowledge라는 책을 2005년, 최재천, 장대익이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하면서 <통섭: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제목을 붙였던 것이다. 이후, 최재천, 장대익 교수를 중심으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화라는 의미로 통섭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런데, 이 통섭, 혹은 Consilence라는 개념은 그 애매한 의미 때문에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통섭과 지적 사기>라는 이 책은 통섭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들의 논고를 모아 출판한 책이다. 이인식은 통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컨실리언스'는 원산지인 미국에서조차 지식융합이나 기술융합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데, 한국으로 수입되어 원효스님의 이름을 팔아 '통섭'이라는 그럴싸한 단어로 둔갑해서 융합과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동안 학식과 사회적 지명도가 꽤 높은 지식인들의 말과 글에서 통섭이 융합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생뚱맞게 사용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자괴감과 수치심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259)

 원래 윌슨이 사용하는 Consilence라는 개념은 최재천 교수가 전파하고 있는 통섭과 다른 의미이고, 미국에서는 한국처럼 통섭 개념이 유행하지도 않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 통섭이라는 개념의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자연과학의 틀로만 보려는 "자연과학적 제국주의"의 함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원주의적 시각은 진화생물학과 뇌과학의 유행으로 드러난다. 유전자와 뇌를 통해서 인간의 의식과 행동을 파악하려는 환원주의의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틀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환원주의에 대해서는 나 역시 경계하고 있고, 특히 유전자와 뇌과학에서 보이는 결정론적 시각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지고 있기에 그러한 시각에서는 흥미로운 책이었다. (반면에 이 책의 저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과학자들이 그렇게 단순한 환원주의를 주장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다양한 저자들의 논고를 모은 책인 셈 치고는 논고들 사이에 중복되는 내용이 많다는 것이다. 조금 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의 논고를 모았다면 더 충실한 책이 되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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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리고 19 - 18대 대선으로 본 진보개혁의 성찰과 길
이창곤.한귀영 엮음 / 밈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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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8대 대선에서 야권은 왜 졌을까? 정상호 서원대 교수는 "18대 대선은 환경만을 놓고 본다면 결코 야당에게 불리하지 않았던, 정확하게 말하면 제법 유리하였던 (중략) 오히려 예외적 상황 속에서 치러졌다"(161)고 말한다. 이명박 정부의 지지도는 추락했었고,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정권 교체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후보는 100만 표 이상의 차로 졌다.

 다음이나 트위터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서는 간단한 대답을 얻을 수 있다. 첫째, 부정선거 때문이다. 둘째, 50대가 1번을 찍었기 때문이다. 물론 국정원과 국군 사이버사,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은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될 심각한 문제다. 두 후보의 TV토론이 있었던 2012년 12월 16일 밤 있었던 경찰의 국정원 댓글조작사건에 대한 중간수사결과 발표에 대해 야권 지지자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그러한 사태의 심각성과는 별개로, 댓글 때문에 100만 표 이상의 큰 차이로 진 것 같지는 않다. 둘째로 50대보수화론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이야기다. 50대에서 득표율에 뒤졌다면, '왜 50대가 야권에 투표하지 않았는가'를 탐구해야 할 일이다. 그러한 분석 대신에 50대 유권자들의 선택을 무개념과 몰상식에 의한 것으로 단죄하는 데 그친다면, 그야말로 "자신과 상대로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과도한 적대의식을 보이면서 국민들에게 양자택일을 종용하는"(175) 일이 될 것이며, 진정한 성찰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도 18대 대선에 대한 각계 전문가들과 학자들의 전문적인 분석이 나왔다. 2013년 12월, 18대 대선으로부터 1년쯤 될 무렵 나온 책이 바로 이 책, <18 그리고 19>다. 세대문제, 중도, 안철수, 리더십, 지역운동, 언론, 외교안보, 복지, 경제민주화, 노동, 정치개혁 등의 다양한 논점들에 대해 총 21명의 필자들의 논고를 모았기 때문에 보다 총체적이고 다각적인 관점에서 18대 대선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다.

 물론 다양한 관점에서의 분석이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결국 어떤 변인이 대선 패배의 진짜 원인이었는가를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책에서 열거된 주요한 원인들을 내 나름대로 종합해 보자면, 1.복지 등의 주요 공약에서 여당에 의제를 선점당했고, 2.문재인 후보의 리더십이 약했고, 3.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이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고, 4. 그러다 보니 TV토론에서 이정희가 보여준 것과 같은 네거티브 캠페인에만 치중했던 것이 역효과를 낳았고, 5.애시당초 민주당과 진보진영의 기반이 약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매체들에서도 한번쯤은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들이지만, 실증적인 데이터 분석을 통해 잘 정리된 만큼,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 된다. 결국 민주당의 무능이라는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민주당은 정권교체 여론이 60%를 상회하는 분위기에서 치러진 총, 대선에서 졌다. 선거는 구도라고 하는데, 이렇게 좋은 구도에서 패배했으니 결국 사람이 문제라고 할 수밖에 없다. 갑자기 터진 악재 때문에 무너졌다면 할 말이라도 있겠으나 그것도 아니다. 또 한 번은 그럴 수 있으나 두 번이나 졌다는 점에서 불운을 탓할 수는 없다. 민주당은 딱 부러지게 실력 때문에 졌다. 더도 덜도 아니고 자신이 가진 역량만큼만 보여주는 선거를 치렀기 때문에 패배했다. (140)

 선거정치에 한해 말한다면 민주당은 시종일관 노무현 모델에 의지하고, 그에 매몰되어 있었다. 새로운 집권 전략을 마련할 상상력도, 당의 체질을 바꿀 담대한 용기도 보여주지 못했다. (147)

 이 책이 나온 이후, 요란스럽게 민주당과 안철수신당이 합당을 했지만, 지지율은 저공비행 중이고, 야당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여전히 야권은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박근혜 대통령은 공약을 줄줄이 후퇴시켰다. 대선 당시 TV토론에서 "그래서 제가 대통령 되려는 거 아니에요"라고 말했던 것이 무색하다. 새누리당의 홍문종 사무총장은 지난 2월 25일, 공약 후퇴에 대해 "아버지가 다이아 반지와 세계여행 약속 못 지켰지만, 어머니는 행복하게 잘 산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40303125411479)고 한다.

 문제는 문재인 의원이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과도한 복지공약에 대한 후퇴는 불가피했으리라는 점이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대선 당시 문재인 의원의 복지 공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박근혜 후보에 비해 큰 복지 공약을 지닌 문재인 후보가 재정조달 면에서 차이를 드러낼 부분은 증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민주통합당을 비롯한 문재인 후보 캠프는 증세를 적극적으로 주창하지 못했고, 구체적인 방안도 내놓지 못했다. 부자감세가 100조 원이라며 이것만 철회하면 동일한 금액이 마련될 것처럼 주장했다. 하지만 이 금액은 2008년 감세가 예정대로 진행되었을 때 추계한 상징적 규모로 2009년부터 이루어진 부분적 감세 철회를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감세 혜택이 중소기업과 중간계층에도 제공되었기에 이 몫까지 제외하면 부자증세 방식으로 되돌릴 수 있는 세수는 실제 그리 많지 않다. 그만큼 문재인 후보의 증세 공약이 부실했고 이 카드로는 복지 논쟁을 적극적으로 돌파하기 어려웠다.
 (중략) 야권이 내놓은 재정지출 혁신방안은 원론적 수준에 그쳤고, 보편복지를 주창한다면서도 실질적인 증세방안도 내놓지 못했다. 중간계층 이상이 참여하는 보편증세론은 등장하지도 못했고, 부자증세론 역시 1% 최상위층을 명시했을 뿐 여기서 얼마만큼의 재정이 조달되는지 분명히 말하지 못했다
. (246)

 만약에 당선이 되었다면 증세 없는 복지라는 문제를 어떻게 풀었을지 상상도 안 되지만, 당선되고 나서 "아버지가 다이아 반지와 세계여행 약속 못 지켰지만, 어머니는 행복하게 잘 산다"라는 이야기를 할 거라면, 선거는 실현가능성과 관련없이 '누가 더 뻥을 그럴 듯하게 치느냐'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대선으로부터 1년 반 가까이 지났지만, 한국정치의 현재는 여전히 카오스적 상황이다. 앞으로 과연 한국정치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는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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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데이비드 하비 지음, 한상연 옮김 / 에이도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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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강 이북 주민이다. 중학교 시절, 당시에도 충분히 복잡하게 얽혀 있던 서울 지하철노선도를 보면서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분당선과 8호선을 타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수도권 지하철노선도를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간 이 도시는 끝없이 성장하여, 지금은 신분당선, 9호선, 공항철도, 수인선, 용인경전철, 의정부경전철, 경의선, 중앙선 등 새로운 노선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다. 수원까지 가던 1호선은 천안까지 그 촉수를 뻗쳤고, 춘천으로는 기차 대신 전철을 타고 갈 수 있게 되었다. 점점 복잡해져 이제는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의 지하철노선도를 보면, "서울"이라는 도시가 마치 괴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흔히들 하는 이야기지만, 전세계의 도시들이 점점 비슷해져 가면서 개성이 없어졌다고 한다. 파리나 베를린, 모스크바 같은 유럽 도시들은 몰라도, 서울, 도쿄, 베이징, 상하이, 타이베이, 두바이, 뭄바이 등의 도시들은 모두 '빌딩들, 빌딩들, 더 높은 빌딩들'로 묘사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도시들마다 나름대로의 개성이 있기는 하겠지만, '도시'는 동시다발적인 세계화의 최첨단을 보여준다. 세계화로 인한 압축적 발전은 각 도시들이 겪은 역사적 시간들을 없애고, 비슷비슷한 모양새로 획일화시킨다. 데이비드 하비는 <반란의 도시>에서 세계화, 자본주의를 압축해 놓은 공간, 즉 도시의 역사를 분석하고 있다.

 하비는 "도시 공간의 형성은 자본주의 역사 내내 과잉 자본과 노동을 흡수하는 주요 수단이었다"(85)고 말한다. 19세기 파리나 런던에서부터 20세기의 뉴욕, 그리고 오늘날의 상하이나 뭄바이까지 모든 도시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도시의 부동산 개발을 통해 저소득층을 외곽으로 몰아내고, 이주노동자들에게 노동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도시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주택이 가차 없이 압류되고 도시 주택시장에서 약탈 수법이 횡행하며 사회적 서비스가 감소하는 상황, 더불어 거의 모든 도시 노동시장에서 고용기회가 사라져 몇몇 도시에서는 고용 전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오늘날의 위기는 예전에도 그랬듯 도시 위기의 양상을 띠고 있다." (102)

 저자에 따르면, 2008년의 서브프라임 사태는 그러한 자본주의의 위기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저자의 제안은 자본주의로부터 도시에 대한 권리와 도시의 공동성을 되찾자는 것이다. 저자는 '대도시는 공동적인 것을 생산하는 공장'이라는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정의를 인용하면서 이를 반자본주의 운동의 시발점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저자의 진단이 다소 원론적인 반면, 그 처방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도시를 통해서 자본주의의 위기를 진단할 때, 저자가 들고 있는 사례들은 추상적이거나 단편적인 감이 있어 하나의 체계적인 분석을 구축하기에는 원론적으로 느껴진다. 반면에 도시를 되찾기 위한 반자본주의 운동의 예로 들고 있는 것이 파리코뮌, 68혁명,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이라는 점에서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원서가 나온 2012년까지만 해도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이 무언가 거대한 가능성을 가진 운동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을지 몰라도, 지금은 2008년 한국에서 있었던 광우병 반대 촛불시위와 마찬가지로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운동, 잊고 싶은 과거가 되지 않았는가?

 마르크스주의자인 저자는 인정하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오늘날 도시에서 '반란'은 불가능하다. 지하철노선도가 아무리 복잡해도, 사흘이 멀다하고 미세먼지 주의보가 내려도, 집값이 내릴 줄을 몰라도, 살기 좋은 도시는 아닐지라도, 나는, 그리고 우리 대다수는 '도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쨌든 자본주의 도시는 나름대로의 매력을 가지고 있고, 이를 쉽사리 극복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자본주의 운동을 주장하기 보다는 자본주의 도시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모색하는 것이 훨씬 유의미한 실천으로 생각된다.

 저자의 진단과 처방은 다소 이상적일지 몰라도, 도시와 자본주의의 문제를 사유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는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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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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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투명사회>가 출간되었을 때, 알라딘에서 <00사회>라는 제목의 책들을 픽업해서 소개했는데, 그 목록이 흥미로웠다. 한병철의 전작 <피로사회>를 비롯하여, <단속사회> <감시사회> <위험사회> <불안증폭사회> <분노사회> <잉여사회> <팔꿈치사회> 등등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의 명사수식어가 붙은 책들이 많았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현대 사회를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정확히 어떤 사회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사회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투명사회"라는 키워드는 얼핏 보기에 위의 책들과 달리 긍정적인 뉘앙스가 느껴진다. 실제로 며칠 전 뉴스에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라는 이름의 NGO가 나오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투명사회는 지향해야 할 가치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투명사회"는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제도적 투명성이 아니라 SNS를 통해서 개인의 사생활이 여과없이 전시되는 투명성을 가리킨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러한 투명사회에 대한 긍정적인 통념을 정반대로 역전시켰다는 점에 있다. 즉, 현대사회는 투명사회로 규정될 수 있는데, 투명사회야말로 감시와 통제의 원흉이라는 것이다.

 일단 저자는 스마트폰, 페이스북, 트위터 등 디지털 문명에 대해 부정적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디지털 매체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전시하고 폭로하는 데 열심이다. 즉, 디지털 매체는 사람들의 관계에 생기기 마련인 불명확한 여지나 굴곡을 제거하여 투명하게 만든다. 현대의 투명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사람들의 상호불신과 의심에 의해 요구된다. 저자는 자기규율의 내면화를 상징하는 벤담의 파놉티콘(원형감옥)을 원용하여, 투명사회를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명명한다. 이 책 전체의 요지는 다음 문단에 농축되어 있다.

 오늘날 세계 전체가 하나의 파놉티콘으로 발전한다. 파놉티콘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오늘날 감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기를 내맡긴다.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중략)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 (101, 102. 강조는 원문)

 위 문단에서 드러나듯이, 저자가 비판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은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지향이 상호감시와 통제에 대한 자발적 참여로 전화되고, 결과적으로 감시와 통제가 지배하는 사회를 만든다는 역설(irony)이다. 

 책을 읽으며 이상과 같은 저자의 논지에 대해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저자의 논리 전개에 무릎을 탁 치며 감탄할 수도 없었다. 그러한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이 니체, 하이데거, 벤야민, 아감벤 등의 철학자들을 인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아포리즘을 가미한 철학 에세이이기 때문이다(역자해제에서 역자는 이 책이 에세이임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책이 체계적으로 쓰여있지 않았고, 두서없이 이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난해하다. 

 잘 와닿지 않는 독일어 언어유희 또한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저자는 한국 사람이지만, 원래는 독일어로 쓰여진 책이다). 그 대표적인 문단을 인용하겠다.

 "디지털"이라는 단어는 본래 손가락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digitus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는zählen 손가락이다. 디지털 문화는 세는 손가락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역사는 이야기Erzälung다. 역사는 세지 않는다. Zählen은 포스트역사적 범주다. 트윗도 정보도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되지 않는다. (164, 강조는 원문)

 이러한 스타일의 글에 익숙치 않은 나 같은 독자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과도하게 두드러지는 굵은 강조와 독일어 원문 병기를 보면 '셈'과 '이야기'의 독일어 스펠링을 두고 언어유희를 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말장난은 책의 곳곳에 드러나는데, '주체(subjekt)에서 프로젝트(projekt)로'(176)나 '행동(handlen)에서 손가락질(fingern)로'(160)와 같은 슬로건들을 보면, 내가 독일어를 몰라서 그런지 상당히 썰렁하게 느껴진다. 말장난만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책 같은 인상이 들어 읽기 불편했다.

 결국 저자의 논지는 디지털 문명에 대한 구세대의 상투적인 거부감에 철학적 조미료를 쳐서 다르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어닐까? 자유가 결과적으로는 압제를 낳는다는 역설 역시 자유(주의)에 대한 오래된 클리셰적 비판의 하나가 아닐까 싶은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푸코의 파놉티콘 이론을 현재에 적용하여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분석했다는 점은 저자의 독자적인 문제의식인 것 같다. 약간 난해하긴 하지만 현대사회의 단편을 잘 분석해 낸 책이라 할 수 있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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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 <진보의 착각> 크리스토퍼 래시(이희재)

 

 

 

 

 칼라일, 케인스, 에머슨, 페인, 마르크스까지. 지난 300여년간  서구의 지성사에서 '진보'라 불리웠던 다양한 사상적 조류들을 조망한 역작이다. 서구 지성사에서 진보사상은 어떻게 탄생하였고,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왜 실패했는가? 지난 대선 이후, 패배감과 무력감에 휩싸여 있는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다.

 

 2. <러시안 다이어리> 안나 폴립스카야(조준래)

 

 

 소치올림픽과 크림공화국 합병으로 인해 푸틴에 대한 인상이 안 좋아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티즌들 사이에서 "푸짜르" "푸간지"의 인기는 작지 않았다. 정작 푸틴이 당선된 현실을 러시아의 민주주의자들은 어떻게 바라보았고, 어떻게 견뎌냈을까? 양심적 저널리스트 안나 폴립스카야는 2003년에서 2005년까지의 러시아를 절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기록했다. 그리고 2005년, 그녀는 괴한의 총을 맞아 사망하고 만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말 그대로 목숨을 바쳐 싸웠던 저널리스트의 이야기가 정말 궁금하다.

 

 3. <보이드> 프랭크 클로우스(이충환)

 

 

 

 명색이 "인문, 사회, 과학, 예술" 분야 신간평가단인데, 나의 독서경향은 인문사회 분야에 편향되어 있다. 그래서 일부러 과학책도 좀 추천해야지 싶었는데, 전형적인 문과 인간인지라 과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이 책은 내용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교양서다. 그러나 그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우주, 그리고 무(無). 이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이전의 무(無)는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듣기만 해도 가슴이 쿵닥거리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4.<국가를 되찾자> 힐러리 웨인라이트(김현우)

 

 

 

 유럽 국가들의 참여민주주의 실험을 리포팅하고 있는 책이다. 시민들이 국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에 대해서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 불리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회자되고 있는 요즈음,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국가가 무엇인가에 대해 알기 위해 읽어 보아야 할 책인 것 같다.

 

 5.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신명호

 

 

 아마 동아시아 근세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엇이 19세기 후반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갈랐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1852년, 같은 해 태어난 고종황제와 메이지천황, 비슷한 시기에 왕위에 올랐다는 점 또한 비슷하다. 그러나 1910년, 메이지 천황은 조선을 병합하고, 고종은 망국의 설움을 맛보게 된다. 고종과 메이지라는 두 명의 통치자에 초점을 맞추어 한일근대사를 살펴 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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