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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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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투명사회>가 출간되었을 때, 알라딘에서 <00사회>라는 제목의 책들을 픽업해서 소개했는데, 그 목록이 흥미로웠다. 한병철의 전작 <피로사회>를 비롯하여, <단속사회> <감시사회> <위험사회> <불안증폭사회> <분노사회> <잉여사회> <팔꿈치사회> 등등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의 명사수식어가 붙은 책들이 많았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현대 사회를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정확히 어떤 사회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사회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투명사회"라는 키워드는 얼핏 보기에 위의 책들과 달리 긍정적인 뉘앙스가 느껴진다. 실제로 며칠 전 뉴스에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라는 이름의 NGO가 나오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투명사회는 지향해야 할 가치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투명사회"는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제도적 투명성이 아니라 SNS를 통해서 개인의 사생활이 여과없이 전시되는 투명성을 가리킨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러한 투명사회에 대한 긍정적인 통념을 정반대로 역전시켰다는 점에 있다. 즉, 현대사회는 투명사회로 규정될 수 있는데, 투명사회야말로 감시와 통제의 원흉이라는 것이다.

 일단 저자는 스마트폰, 페이스북, 트위터 등 디지털 문명에 대해 부정적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디지털 매체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전시하고 폭로하는 데 열심이다. 즉, 디지털 매체는 사람들의 관계에 생기기 마련인 불명확한 여지나 굴곡을 제거하여 투명하게 만든다. 현대의 투명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사람들의 상호불신과 의심에 의해 요구된다. 저자는 자기규율의 내면화를 상징하는 벤담의 파놉티콘(원형감옥)을 원용하여, 투명사회를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명명한다. 이 책 전체의 요지는 다음 문단에 농축되어 있다.

 오늘날 세계 전체가 하나의 파놉티콘으로 발전한다. 파놉티콘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오늘날 감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기를 내맡긴다.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중략)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 (101, 102. 강조는 원문)

 위 문단에서 드러나듯이, 저자가 비판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은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지향이 상호감시와 통제에 대한 자발적 참여로 전화되고, 결과적으로 감시와 통제가 지배하는 사회를 만든다는 역설(irony)이다. 

 책을 읽으며 이상과 같은 저자의 논지에 대해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저자의 논리 전개에 무릎을 탁 치며 감탄할 수도 없었다. 그러한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이 니체, 하이데거, 벤야민, 아감벤 등의 철학자들을 인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아포리즘을 가미한 철학 에세이이기 때문이다(역자해제에서 역자는 이 책이 에세이임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책이 체계적으로 쓰여있지 않았고, 두서없이 이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난해하다. 

 잘 와닿지 않는 독일어 언어유희 또한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저자는 한국 사람이지만, 원래는 독일어로 쓰여진 책이다). 그 대표적인 문단을 인용하겠다.

 "디지털"이라는 단어는 본래 손가락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digitus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는zählen 손가락이다. 디지털 문화는 세는 손가락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역사는 이야기Erzälung다. 역사는 세지 않는다. Zählen은 포스트역사적 범주다. 트윗도 정보도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되지 않는다. (164, 강조는 원문)

 이러한 스타일의 글에 익숙치 않은 나 같은 독자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과도하게 두드러지는 굵은 강조와 독일어 원문 병기를 보면 '셈'과 '이야기'의 독일어 스펠링을 두고 언어유희를 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말장난은 책의 곳곳에 드러나는데, '주체(subjekt)에서 프로젝트(projekt)로'(176)나 '행동(handlen)에서 손가락질(fingern)로'(160)와 같은 슬로건들을 보면, 내가 독일어를 몰라서 그런지 상당히 썰렁하게 느껴진다. 말장난만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책 같은 인상이 들어 읽기 불편했다.

 결국 저자의 논지는 디지털 문명에 대한 구세대의 상투적인 거부감에 철학적 조미료를 쳐서 다르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어닐까? 자유가 결과적으로는 압제를 낳는다는 역설 역시 자유(주의)에 대한 오래된 클리셰적 비판의 하나가 아닐까 싶은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푸코의 파놉티콘 이론을 현재에 적용하여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분석했다는 점은 저자의 독자적인 문제의식인 것 같다. 약간 난해하긴 하지만 현대사회의 단편을 잘 분석해 낸 책이라 할 수 있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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