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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과 지적 사기 - 통섭은 과학과 인문학을 어떻게 배신했는가
이인식 기획, 김지하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문과와 이과,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대화만큼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전형적인 문과인간으로서 이과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지라, 항상 자연과학에 대한 막연한 경외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몇 년 전, 한국에서 때 아닌 "통섭" 열풍이 불었다. 미국의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1998년 쓴 Consilence: The Unity of Knowledge라는 책을 2005년, 최재천, 장대익이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하면서 <통섭: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제목을 붙였던 것이다. 이후, 최재천, 장대익 교수를 중심으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화라는 의미로 통섭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런데, 이 통섭, 혹은 Consilence라는 개념은 그 애매한 의미 때문에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통섭과 지적 사기>라는 이 책은 통섭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들의 논고를 모아 출판한 책이다. 이인식은 통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컨실리언스'는 원산지인 미국에서조차 지식융합이나 기술융합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데, 한국으로 수입되어 원효스님의 이름을 팔아 '통섭'이라는 그럴싸한 단어로 둔갑해서 융합과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동안 학식과 사회적 지명도가 꽤 높은 지식인들의 말과 글에서 통섭이 융합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생뚱맞게 사용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자괴감과 수치심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259)

 원래 윌슨이 사용하는 Consilence라는 개념은 최재천 교수가 전파하고 있는 통섭과 다른 의미이고, 미국에서는 한국처럼 통섭 개념이 유행하지도 않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 통섭이라는 개념의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자연과학의 틀로만 보려는 "자연과학적 제국주의"의 함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원주의적 시각은 진화생물학과 뇌과학의 유행으로 드러난다. 유전자와 뇌를 통해서 인간의 의식과 행동을 파악하려는 환원주의의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틀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환원주의에 대해서는 나 역시 경계하고 있고, 특히 유전자와 뇌과학에서 보이는 결정론적 시각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지고 있기에 그러한 시각에서는 흥미로운 책이었다. (반면에 이 책의 저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과학자들이 그렇게 단순한 환원주의를 주장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다양한 저자들의 논고를 모은 책인 셈 치고는 논고들 사이에 중복되는 내용이 많다는 것이다. 조금 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의 논고를 모았다면 더 충실한 책이 되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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