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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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보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의 뒷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책 소개가 실려 있다.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 1776년, 애덤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그러나 당시 애덤스미스가 잊은게 한 가지 있다. 바로 이기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저녁을 차려 준 그의 어머니다.

이 문장을 보고 딴지를 걸고 싶어졌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의 어머니는 왜 지나가던 옆집 아저씨가 아니라 아들에게 저녁을 차려줬을까? 그야 당연히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이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저녁을 차려주는 것이 아무런 사랑도 느끼지 못하는 타인에게 저녁을 차려주는 것보다 더 많은 기쁨과 만족감을 제공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기심과 사랑은 이 책이 전제하는 것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 관계가 아니라, 사랑 역시 넓게 보면 이기심이라는 동기의 일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이기심에 대해서 금전적 의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협소한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예화(例話)에도 드러나듯이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종종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복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결과 자신이 손해를 본다 해도 말이다.
실제 사람들은 다시는 가지 않을 식당에도 팁을 남긴다. 경제적 인간이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팁을 남기지 않아도 종업원이 자신의 수프에 파리를 넣는 등의 복수를 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그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팁을 다시 자기 주머니 속에 넣는다. (146)

팁(tip)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종업원의 복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주는 것이라고? 한국이나 일본 등의 팁 문화가 없는 나라 사람들이 미국 등 팁 문화가 있는 나라 사람들보다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면, 팁은 이기심/이타심의 문제가 아니라 관습의 문제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들르지 않을 가게 종업원에게 팁을 주는 이유는 종업원의 복지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관습적인 생각을 벗어나서 팁을 안 주기로 결정할 경우에 발생하는 어색함이나 민망함, 스트레스보다는 팁을 주는 데 드는 금전과 시간 귀찮음이 비용이 덜 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는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경제학이 전제로 하는 경제적 인간이라는 관념이 남성중심적이라고 다음과 같이 비판을 가한다.

남성은 항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경제학에서도 그랬고 성 문제에서도 그랬다. 여성에게 이 자유는 금기 사항이었다. (중략)
여성에게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임무가 주어졌다. 여성은 출산과 생리라는 신체적 제약 조건이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합리적일 수가 없고, 이 때문에 그들은 합리성과 정반대의 개념이라고 규정되었다. (51)

이런 주장을 한 경제학자가 있단 말인가? 깜짝 놀라서 미주(尾註)를 확인해 보았다. 이 책의 미주는 인용하거나 참고한 문헌이 언급되는데, 해당 부분에 대한 미주는 없었다. 아마도 "여자는 남자보다 덜 합리적이다"라는 속설과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경제학의 전제를 혼동해서 허수아비 때리기를 한 것 같다. 이는 영어권에서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남자(man, men)가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던 것에 기인한 오해다. 물론 man이 인간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비판 받아야 하겠지만,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 經濟人)과는 관련이 없다. 적어도 여성이 남성보다 덜 합리적이라고 전제하는 경제학 이론은 없을 것이다.

저자는 경제학의 경제적 인간이 여성을 배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다른 누구보다 저자 자신이 성별에 관한 고리타분한 이분법(남성=인공/여성=자연, 남성=합리적/여성=비합리적, 남성=이성적/여성=감성적, 남성=정신/여성=육체)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인간이 남성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관념이며, 경제학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리라. 그보다는 성별이나 인종, 문화, 연령,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이 추상적이고 합리적인 경제적 의식으로 농축될 수 있다"(260)는 경제학적 설명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물론 이 책에서 드러나는 경제학에 대한 비판 중에는 생각해 볼 점이 적지 않다. 경제학이 이상적인 이념형(ideal type)만을 전제로 한 결과 현실을 잘 설명하지 못하거나 정책적 실패를 야기했다는 지적, 여성들의 노동이 저평가받고 있다는 비판, 전세계의 여성들이 대부분 저임금노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최고경영자가 되지는 못한다는 지적 등은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런데 경제학은 인간은 합리적이라고 전제한다. 고로 경제학은 틀렸다. Q.E.D."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거나 성급한 추론이 아닐까? 경제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합리성 문제에 대해서 더욱더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경제학에서 사라진 여성의 경제활동을 논하면서 저자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1820-1895)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 대해 긍정적으로든, 비판적으로든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신기하다.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의 <가부장제와 자본제> 역시 이 문제에 관해서는 본격적인 연구를 다루고 있어 비교하며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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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 (마음산책X) 개봉열독 X시리즈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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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마음산책, 은행나무, 북스피어 세 출판사가 표지를 감추고 저자와 제목 등 어떠한 정보도 없이 책을 판매하는 '개봉열독'이라는 기획이 있었다. 그 중에서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복면도서'로서 판매한 소설은 로맹 가리의 <마법사들>이었다. 이러한 선택이 흥미로운 이유는 저자인 로맹 가리가 말 그대로 복면작가로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이미 작가로서의 명성을 가지고 있던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한다.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의 필명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했고, 덕분에 로맹 가리는 평생 한 번밖에 수상할 수 없는 공쿠르 상을 두 번(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 이름으로 각각 한 번씩) 수상한 인물이라는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이 사실은 로맹 가리가 1980년 권총으로 자살할 때 고백하면서 밝혀진다. 자신이 쓴 소설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소설을 발표했던 로맹 가리의 소설이야말로 아무 정보 없이 책을 판매하는 개봉열독의 취지와 부합하는 것 같다(단, <마법사들> 자체는 로맹 가리 본인 명의로 발표된 소설이다). 


<마법사들>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포스코 자가라는 작가인데, 여러 면에서 저자 로맹 가리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소설의 배경은 1770년대,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의 제정 러시아다. 포스코 자가의 아버지 주세페 자가는 베네치아에서 온 광대(사실은 마법사)로 러시아 궁정과 귀족들 사이에서 마법으로 밥벌이를 한다. 사춘기 소년인 포스코는 자신보다 몇 살 더 많은 새엄마 테레지나에게 첫사랑을 경험하고, 푸가초프의 반란이나 아버지의 몰락, 러시아 추방 등을 경험하며 성장한다는 소설이다. 포스코 또한 아버지의 혈통을 따라 마법사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마법사적 재능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형태로 발현되어, 훗날 작가가 된다. 여기서 마법사들의 '마법'은 예술을 상징하는 것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과 함께 이 소설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는 화자인 포스코 자가가 18세기부터 200년을 살았고, 20세기의 시점에서 200년 전을 회고하고 있다는 설정이다. 마법사 일족에게 주어진 불멸성 덕분이라는 것이 화자의 설명인데, 굳이 이러한 현실성 없는 설정이 필요했을지 처음에는 의문스러웠다. 사실 이러한 설정은 예술(소설에서는 마법으로 은유된다)의 불멸성을 상징하는 장치다.

또한 1770년대라는 배경은 프랑스혁명 직전의 계몽주의 시대, 즉 근대가 시작되기 직전의 시대다. 이 소설은 1770년대 당시 러시아를 뒤흔든 농민반란, 푸가초프의 반란을 중요한 사건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야만성과 폭력성을 드러낸 푸가초프의 반란은 러시아혁명 이후의 소련의 억압과 중첩된다. 화자가 20세기 시점에서 18세기의 일을 회고하는 이유는 근대에 반복되는 그러한 폭력성의 문제를 의식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저자는 1914년 제정 러시아령이었던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혁명이 있고 난 1928년에 프랑스로 망명했고, 나치스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드골의 저항군에 합류하여 공군으로 참전했다. 저자가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던 소년 시절의 기억을 예카테리나 시절에 푸가초프의 반란 때문에 서유럽으로 이주해야 했던 화자의 이야기로 풀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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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이정철 지음 / 너머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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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어느 인터넷 유머 사이트에서 "탕수육으로 본 붕당의 이해"라는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되었다. 탕수육 부먹-찍먹 논쟁에 조선시대 당쟁을 비유한 이 글에는,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는 사람들은 동인,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는 사람들은 서인, 동인 중에서도 붓기 전에 양해는 구하는 사람들이 남인, 양해 없이 붓는 사람들은 북인, 서인 중에서 살짝만 찍어먹는 사람들이 노론, 푹 찍어 먹는 사람들이 소론, 반은 찍어먹고 반만 붓는 것이 탕평책, 소스 없이 먹는 사람은 서학 등, 절묘한 비유가 있어 많은 패러디를 낳는 등 화제가 되었다.

조선시대 당쟁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이 있겠지만, 당쟁이 정치적, 사상적 내용과 유리되어 그저 당쟁을 위한 당쟁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 문제점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당쟁의 최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예송논쟁은 효종이 사망했을 때, 인조의 계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에 관한 논쟁이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1년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3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그게 뭣이 중헌디!"라고 생각되기에, 오늘날 예송논쟁은 허례허식 때문에 일어난 소모적 논쟁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당대에는 신권을 중시하는 서인(이후, 노론)과 왕권을 중시하는 남인의 입장이 반영된 정치사상적 내용을 담고 있는 심각한 논쟁이었다 할 수 있다.(여담이지만, 소설가 이인화가 <영원한 제국>을 출판한 이후, 남인과 정조에 우호적이고, 서인 노론을 악의 축으로 그리는 작품들이 대중매체에 자주 등장한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이나 <비밀의 문>, 영화 <역린>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유교국가였던 조선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정치인과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시험은 사서오경을 비롯한 유교 고전들을 시험 문제로 제출했었고, 공자왈 맹자왈을 잘 외우는 것이 정치인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조선의 정치인들은 정치인인 동시에 학자였고, 지식인이었다. 조광조 이후의 성리학자들은 말 그대로 유교의 성인군자를 이상적인 정치인의 모델로 삼고 있었고, 정치를 통해 유교 이상사회를 실현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유교 경전을 어떻게 해석해서 상복을 얼마나 입을지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정치사상 논쟁이 되었던 것이다.(반면에 서양에서는 정교분리와 정교통합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립의 축이라 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성경에 나온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말이 나타내듯이 정교분리가 원칙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는 선조가 친정을 시작한 선조 8년부터 임진왜란 직전의 선조 23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 세력이 몰락하면서, 외척과 훈구파를 대신하여 사림파가 집권하게 된 선조 시대. 우연한 계기로 사림은 노장 그룹인 서인과 신진 그룹인 동인으로 분열하게 된다. 이는 서인의 영수 심의겸의 집이 한양 서쪽에, 동인의 영수 김효원의 집이 한양 동쪽에 위치했던 데서 기인한 명명이다.(참고로 오늘날 통용되는 우파, 좌파는 프랑스혁명 직후, 보수파가 국회의장 오른쪽에, 혁명파가 국회의장 왼쪽에 앉았던 데서 유래했다.)

동인들은 인순왕후의 동생이었던 심의겸을 외척으로 보고 배척했다. 율곡 이이는 동인과 서인 사이에서 이들을 화합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동인들에게 배척 당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된다. 이후 동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양자의 균형자 역할을 하던 선조는 정여립의 난 직후에 일어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의 정철을 앞세워 동인(특히 강경파였던 북인)을 숙청한다.

저자는 조선 중기를 지배했던 당쟁의 기원을 분석하면서, 동서분당의 원인이 권력에 대한 욕망과 도덕적 확신에 있었다고 말한다. 동인은 심의겸과 서인을 사파로 규정하고,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정치의 세계에서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고 배척하게 될 때의 위험성은 오늘날의 정치현실을 생각할 때도 참조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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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정상회담이 끝났다. 작년 이맘때,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이 있었을까? 트럼프 대통령 당선은 전세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도대체 최근 20여년간, 미국에 무슨 일이 생겼길래 트럼프가 당선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책 10권을 선정해 보았다.

 

1. <도널드 트럼프> 강준만

 

 

작년 11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전후하여 '도널드 트럼프'를 제목으로 달고 나온 책은 족히 스무 권은 넘을 것 같다. 그 가운데 한 권을 고르자면, 미국사, 미국정치에 대한 책을 꾸준히 집필해 온 강준만의 책을 고르고 싶다. 도널드 트럼프의 인생 역정을 밀도 있게 소개하면서, 미국 정치사에서 그가 차지할 위치까지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도널드 트럼프에 관해서 읽을 만한 최선의 책이라 생각한다.

 

2. <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 리처드 솅크먼(강순이)

 

 

조지 W. 부시의 당선을 보며 저자는 유권자가 현명하다는 신화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미국 현대사에서 유권자들이 잘못된 선택을 한 사례들을 추적한다. 유권자들은 편향된 정보만을 믿거나 선동당하거나 근시안적 사고를 하는 탓에 선거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에 도사린 함정들을 파헤침으로써 보다 나은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책이다.

 

3.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조지 레이코프(유나영)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코끼리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것이 인지언어학자인 저자가 주장한 '프레임'이라는 것인데,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진보좌파 진영에서 주목을 받으며 유행한 담론이기도 한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치적 논쟁과 선거에서 프레임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4.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을 위해 투표하는가> 토마스 프랭크(김병순)

 

 

가난한 사람들이 왜 그들을 실질적으로 대변할 민주당 대신에 부자들을 위한 정당 공화당에 투표하는가, 라는 질문을 품은 저자는 캔자스의 공화당 지지자들을 취재하여 그들이 왜 "계급배반투표"를 하는지를 분석한다. 이번 트럼프 당선에도 이른바 "러스트 벨트"라 불리는 전통적 민주당 지지 지역의 노동자들이 트럼프를 선택한 것이 큰 요인이었다고 한다.

 

5.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 토머스 프랭크(함규진, 임도영)

 

 

2008년 금융위기라는 큰 실패를 야기한 공화당 정권이 불과 몇 년 사이에 다시 선거에서 승리했따는 사실은 이해하기 힘든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왜 미국인들은 민주당은 무능하다고 믿는 반면, 공화당의 실패에 대해서는 쉽게 망각하는가? 오바마 정권은 경제적 성과를 냈고, 임기 마지막까지 높은 지지율을 자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이유를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6. <그것은 정말 애국이었을까> 클레어 코너(박다솜)

 

 

이슬람, 멕시코인, 이민, 중국, 여성 등에 대한 노골적 혐오발언을 통해 인기를 끌고 당선까지 된 트럼프는 미국의 극우주의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이 책은 극우 인종차별주의 단체 회원이었던 저자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반성하는 책이다. 적대와 증오, 공포를 선동하는 극우주의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7.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벤저민 긴스버그, 매튜 크렌슨(서복경)

 

 

미국 민주주의가 나빠졌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판된 책이다. 정치의 장에서 시민이 고객으로 변화하면서 대중민주주의가 개인민주주의가 쇠퇴하는 과정을 민영화, 이익집단, 여론조사, 사법과 시민운동의 다양한 영역에서 벌어진 현상들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

 

8.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앨버트 허시먼(이근영)

 

 

프랑스혁명 시대부터 현대까지 보수의 수사를 저자는 다음 세 가지 명제로 요약한다. 1.변혁은 문제를 개선시키지 못한다, 2.변혁은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킨다, 3.변혁은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서양사에서 보수의 수사가 어떻게 되풀이되며 등장했는가를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9. <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태터(유강은)

 

 

어떻게 트럼프가 클린턴을 이길 수 있었을까? 혹은 어떻게 조지 W 부시가 고어나 켈리를 이길 수 있었을까? 선거의 결과를 이변으로 여기는 대전제는 '유권자는 지성이 더 높은 후보를 선택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 한해서는 이러한 대전제가 사실이 아닐 수 있다. 미국사회에 뿌리깊은 반지성주의 때문이다. 반세기도 더 전인 1963년에 출판되었던 반지성주의 연구의 고전이 최근에 한국에 번역되었다. 일독을 권하고자 한다.

 

10. <미국의 민주주의> 알렉시스 드 토크빌(임효선, 박지동)

 

 

마지막에는 최근의 시사적 내용을 다룬 책들 대신에 고전으로 돌아가 보자. 19세기 미국을 방문한 프랑스의 사상가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가진 특징을 간파했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가진 특유의 의의와 위험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면 200여년 가까이 읽혀 온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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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100쇄 기념 아트 에디션)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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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양대 전란이라 할 수 있는 임진왜란/정유재란과 정묘호란/병자호란을 비교하면 병자호란이 훨씬 암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의 활약은 말할 것도 없지만, 각지에서 의병들이 궐기하기도 했고, 권율, 김시민, 곽재우, 유성룡, 윤두수, 이산해, 이덕형, 이항복, 곽재우, 김천일, 조헌, 서산대사, 사명대사, 논개, 허준 등의 쟁쟁한 위인들이 활약했다. 반면에 삼전도의 굴욕으로 끝난 병자호란의 경우에는 꿈도 희망도 없다. 파죽지세로 진격해 오는 청나라 군대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간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청나라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도망친 인조와 최명길, 김상헌, 김류, 이시백, 그리고 성 안의 대장장이 서날쇠와 나루터 사공의 딸 나루 등의 인간군상을 그리고 있다. 원군은 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청군에 비해 성 안의 조선군은 상대가 되지 않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 물자는 점점 떨어져 가는 남한산성의 사람들은 하루하루 절망의 나날을 살아간다.

(전략) 안팎으로 통하는 길이 멀고 외가닥이어서 한번 막히면 갇혀서 뚫고 나가기가 어려우며, 아군이 성문을 닫아걸고 성첩을 지키면 멀리서 깊이 들어와 피곤한 적명이 강가의 너른 들에서 진을 치고 앉아 힘을 회복할 수 있고, 성 밑이 가팔라서 안에서 웅크리고 견딜 수는 있으나 나아가 칠 수가 없으며, 좌우가 막히고 가운데가 열려 적이 열린 곳을 막으면 목이 눌리고, 목이 눌리면 안팎이 통하지 못하여 원군을 불러서 부릴 수가 없으며, 또 성이 산에 기대어 있다 하나 성 밖 산봉우리에서 성 안이 손샅처럼 굽어보여 내리쏘는 적의 화포를 피할 길이 없고, 성 안 농토의 소출이 백성들의 일용에도 못 미쳐서 적이 성을 깨뜨리지 않고서도 말려 죽일 수도 있고, 도성과 민촌이 가까워서 멀리서 온 적들이 약탈과 노획으로 군수를 충당하며 머물 수 있으니 병서에 이른 대로, 막히면 뚫기가 어려워서 멀리 도모할 수 없고, 웅크리고 견딜 수는 있으나 나아가 칠 수 없으므로 움직이면 해롭고, 시간과 더불어 말라가니 버틸수록 약해져서 움직이지 않아도 해롭고, 버티고 견디려면 트인 곳을 막아야 하는데 트인 곳을 막으면 안이 또한 막혀서, 적을 막으면 내가 나에게 막히게 되니 막으면 갇히고, 갇혀서 마르며, 말라서 시들고, 적이 강을 차지하니 물이 적의 쪽으로 흐르고, 안이 먼저 마르니 시간이 적의 편으로 흐르는 땅이 바로 여기라 말하는 지관들도 있었는데, 그 또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덕의 거룩함을 말하는 목소리는 컸고, 곤궁함을 말하는 목소리는 작았다. 큰 목소리는 높이 울리면서 퍼졌고, 작은 목소리는 낮게 스미면서 번졌다. (35,36)

원군이 올 가망이 없는 가운데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남한산성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게 변한다. 성문을 열고 항복할 것인가, 아니면 싸우다 전멸할 것인가? 책 소개에는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라는 말이 있다. 이순신 장군의 "생즉사 사즉생(生即死 死即生)"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 속에서 죽어서 살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척화파 김상헌이고, 살아서 죽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주화파 최명길이다. 양쪽 모두 절망적인 상황에서의 나름대로의 논리와 고뇌를 가지고 있다. 김상헌은 "무도한 문서를 성 안에 들인 수문장을 벌하시고 적의 문서를 불살라 군병들을 격발케 하옵소서. 애통해 하시는 교지를 성 밖으로 내보내 삼남과 양서의 군사를 서둘러 부르셔야 하옵니다. 이백 년 종사가 신민을 가르쳐서 길렀으니 반드시 의분하는 창의의 무리들이 달려올 것입니다"(145,146)라고 말한다. 최명길은 "세상이 모두 불타고 무너진 풀밭에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날 터인데, 그 꽃은 반드시 상헌의 넋일 것이옵니다. 상헌은 과연 백이이오나, 신은 아직 무너지지 않는 초라한 세상에서 만고의 역적이 되고자 하옵니다"(314,315)라고 말한다. 

인조는 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뇌한다. 영의정 김류는 "출성과 수성은 결국 다르지 않을 것"(238)이라며 오락가락한다. 척화를 주장하는 김상헌이라고 해서 수성하여 버틸 수 없음을 모르지 않고, 주화를 주장하는 최명길이라고 해서 청나라 군대에 임금이 무릎을 꿇는 것이 치욕스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출성과 수성은 모두 가야만 하는 길이고, 갈 수 없는 길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인조와 최명길, 김상헌의 내면 묘사는 상당히 깊이가 있으며 무게감이 느껴진다. 문제는 소설에서 민초들의 대표로 등장하는 성 안의 대장장이 서날쇠와 뱃사공의 딸 나루다. 이들은 소설 속에서 대상화되고, 인조나 김상헌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기능적 역할만을 수행한다. 나루는 변변한 대사조차 없고, 서날쇠 역시 조정이 성에서 나가야 백성들이 살 수 있다는 말을 할 뿐이다. 나는 인조와 대신들의 이야기만으로 이 소설이 충분히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저자는 서문에서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5)라고 말한다. 만약 저자가 서날쇠와 나루를 등장시켜 전란 속에서도 살아남고 삶을 이어가는 민초들의 꿋꿋한 인생을 그리고자 하였다면, 그 부분은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인조나 김상헌, 최명길에 비해서 서날쇠나 나루의 인물 묘사는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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