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지기 전에 - 1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
김정섭 지음 / Mid(엠아이디)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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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은 제1차세계대전 발발 100주년, 내년은 제1차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이 된다. 지금 제1차세계대전이 주목 받는 이유 중 하나는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세력전이가 일어나려 하고 있다는 것이 당시 영국과 독일 사이의 관계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패권국과 도전국 사이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발칸반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반도가 그 무대가 될지도 모른다.


1870년 통일에 성공한 독일은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비스마르크는 유럽 각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으며 프랑스를 고립시키려 했으나, 비스마르크가 퇴임한 이후 독일이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형국이 된다. 알자스-로렌을 빼앗긴 복수심을 잊지 못한 프랑스, 독일이 패권국으로서의 위치를 위협할지도 모른다 생각한 영국, 독일의 동맹국 오스트리아와 발칸반도를 둘러싸고 경쟁관계에 있던 러시아가 손을 잡으며 삼국협상이 성립된다. 유럽대륙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뭉친 삼국협상과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삼국동맹 사이의 양극체제로 재편된다.

1914년 세르비아의 암살자에게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오스트리아 vs. 세르비아의 전쟁은 오스트리아vs. 러시아의 전쟁으로 독일 vs. 프랑스, 러시아, 영국의 전쟁으로 비화되며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낙엽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던 약속은 허무하게도 장장 4년여의 지루한 참호전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천만 명이 전사하고, 러시아제국, 오스만투르크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독일제국, 네 개의 제국이 붕괴했고, 승리한 영국도 미국에 패권을 물려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낙엽이 지기 전에>는 사라예보 암살사건부터 전쟁 발발까지 각국 지도부의 외교적, 군사적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다. 저자는 전쟁의 원인이 제국주의나 양대 동맹의 군비경쟁, 민족주의라는 기존의 통설을 부인한다. 그렇다고 특정 국가나 지도자의 침략 야욕이 부른 전쟁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 대신 지도부의 오판과 무능, 민군관계의 문제를 전쟁의 원인으로 지적한다. 당시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의 지도부들은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과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먼저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짜르의 표현대로 하면 "힘을 과시함으로써 평화를 지킨다"는 정책이었다. 문제는 모든 나라가 같은 생각으로 부딪혔다는 데 있었다. (중략) 위기의 먹구름이 모두의 시야를 가릴 때 절제의 용기를 보여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고, 유약하게 보이지 않기를 원했으며, 상대방이 굴복할 것이라는 환상에 매달렸다. (156)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이 말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어떤 나라가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준비한다 해도, 그 자체로 다른 나라에는 위협이 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전쟁을 준비하다가 결국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던 사건이 제1차세계대전이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외교부 장관이었던 그레이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을 일이킬 목적으로 준비하는 것과 전쟁에 대비하여 준비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차이가 분명하거나 확실치 않다." (322) 

게임이론 중에서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가 있다.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고 상호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각각의 행위자가 자신에게 최선인 선택을 한 결과 전체적으로는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는 국제정치에서는 안보딜레마로 응용된다. 즉 "상대방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위협에 직면한 국가는 자구 노력을 기울이지 없는데, 이 자위적 조치가 불가피하게 상대방의 안보를 위협하는 딜레마 상황을 말한다." (320)

죄수의 딜레마 상황 아래선 선제공격이 상책이다. 예를 들어 미소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은 서로 상대방이 먼저 핵공격을 할 수 있다는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먼저 맞기 전에 먼저 때리는 것이 상책이다. 북핵문제도 마찬가지다. 한국, 미국, 일본은 "북한이 핵을 만들기 전에 선제공격을 하자"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법이 될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도 한미일의 생각을 알고 있다면 당연히 "선제공격 당하기 전에 핵을 써버리자"고 생각할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제3차세계대전이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도 자제력을 발휘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북한의 김정은과 미국의 트럼프는? 물론 둘 다 자신에게 가장 합리적 선택을 하겠지만, 그 합리적 선택의 결과가 우리가 생각하는 최선의 해법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느낀 교훈은 인간은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전쟁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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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전쟁 - 대한민국 안보를 파멸시킨 탐욕의 세력들
김종대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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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전쟁>은 진보진영의 안보 전문가로 알려진 저자가 작년에 정의당 비례대표로 당선되기 전에 쓴 책이다. 북핵, 사드, 주한미군, 사이버전쟁, 무인기, 방산비리, 내무부조리, 군내 인사 문제까지 한국의 군사와 안보를 둘러싼 여러 이슈들에게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북한과 대치 중이라는 특수성과 군대란느 조직의 특수성 때문에 한국 군대는 참 문제가 많은데도 이를 정면에서 비판하기가 쉽지 않은데 신선한 시각을 통해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생산된 최루탄이 터키나 바레인 등의 독재 국가에 수출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보수진영에서 수시로 자극하는 위기론이 안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한국의 안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책의 전체적인 주장에는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다.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군대 내 인권 문제에 대해 저자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문제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람직하다(참고로 이번 회기에 국회 국방위원회에 소속되겠다고 자원한 국회의원이 저자를 포함해 세 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이 지난 해 총선 전 출판된 책(책에 수록된 각각의 글들은 그 이전에 언론에 발표된 것들)이다보니 북핵위기에 대해서는 2017년 9월 현재 시점에서 읽었을 때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부분이 많다. 특히 북핵문제는 지난해와 올해에 급변했다. 지난해에는 4차, 5차 핵실험이 있었고, 올해 들어 최근에는 6차 핵실험과 ICBM 실험까지 벌이며 말 그대로 핵보유국이 되기 직전의 상황이다. 수소폭탄과 ICBM 실험이 성공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마음만 먹으면 LA에 핵미사일을 날려버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현실화되고 있다.

물론 다분히 결과론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저자가 북핵문제에 대한 진단은 다소 나이브한 것 같다. 보수세력의 북핵 위협론이 지난 몇 년간 실제보다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상상력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이미지"(63)라고까지 평가절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은 지난 몇 년간, 아니 십수년 간 북한은 차근차근 핵보유국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왔던 것이 아닌가? 저자는 이 책에서는 물론, 지금도 사드 배치에 열렬히 반대하고 있다. 진보세력은 북핵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꾸준히 대화를 주장해 왔지만, 핵실험을 끊임없이 해 온 북한에 대해 적절한 해법이 될 수 있는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은 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보면 한국의 보수정권, 진보정권 모두 북핵문제 해결에 실패해 왔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비롯한 국제사회도 마찬가지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도,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신뢰프로세스도,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도, 결과적으로는 북한이 핵보유국을 향해 한 걸음 한걸음 다가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안드레이 란코프가 <리얼 노스 코리아>에서 말한 비유를 빌리자면 북한에게 "채찍은 충분히 아프지 않고, 당근은 충분히 달콤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주변국들은 북한의 핵무장화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한국은 북한의 위협을 가장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다.

올해는 한국과 미국에 정권교체가 일어나 새로운 정치 지도자들이 선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북핵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은 북한으로부터 무시당했고, 트럼프는 트위터로 전쟁 위협을 고조시키고 있다. 아베는 북핵문제를 과장해 우경화를 진전시키고, 시진핑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김정은을 통제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다. 진보진영, 특히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10년 전 햇볕정책을 다시 한 번 꺼낼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한반도의 핵전쟁을 막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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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김영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이 개봉했다. 제목에 나타난 대로 살인자가 영화의 주인공(들)이며, 직접적인 살인사건의 묘사가 등장한다. 남성에 대한 살인 장면과 함께 여성에 대한 살인 장면 또한 반복적으로 나온다. 내가 알기로는 아직까지 이 점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하는 논조는 없는 것 같다. 앞서 개봉한 <V.I.P.>가 잔혹한 살인 묘사로 논란이 된 것과는 대조적이다(<살인자의 기억법>이 15세, <V.I.P.>가 청불인 만큼 두 작품의 수위에는 차이가 있다).

 

<V.I.P.>의 잔혹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두고 "여자 죽이는 영화"라고 요약한다. 이러한 요약은 세 가지 이유에서 부적절한 것 같다. 첫째로 <V.I.P.>에서는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죽는다. 수적으로 보면 남자가 더 많이 죽는다. 둘째로 영화의 러닝타임 중에서 여성에 대한 살인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은 대략 25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정확히 재 본 것은 아니다). "여자 죽이는 영화"가 아니라 "여자 죽이는 사이코패스를 둘러싸고 경찰, 국정원, CIA, 북한 간첩이 암투를 벌이는 영화"가 보다 적절한 요약이 될 것이다. 셋째, 이 영화를 "여자 죽이는 영화"라고 요약한다면 <양들의 침묵>도, <살인의 추억>도, <블랙 달리아>도 "여자 죽이는 영화"가 될 것이다.

 

"여자 시체" 역이 아홉 명이나 등장한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었지만, 영화에서 시체로 나오는 여성은 두세 명, 말그대로 시체로서 스쳐가듯이 등장할 뿐이다. 영화의 여성 피해자 중에서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묘사된 인물은 프롤로그의 여학생이다. 이 영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두고 "스너프 필름"과 다름없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본 바로는 이 장면이 관객의 성적 쾌감을 자극할 목적으로 찍힌 것이 아니라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폭력성을 나타낼 목적으로 찍힌 것이다. 영화 속에서의 해당 장면은 에로스보다는 타나토스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물론 <V.I.P.>에서처럼 살해 장면(영화에서 강간 장면은 없다)을 직접적으로 묘사할 필요가 있었냐는 비판은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보스턴에서 가톨릭 교회의 성추행 실화를 영화화한 <스포트라이트>가  실제 강간 장면을 넣지 않고도 묘사했다며 비교한다. 가톨릭 교회라는 추상적 구조와 싸우는 기자들을 그린 <스포트라이트>와 악마적 성격을 가진 사이코패스 살인마와의 대결을 그리는 <V.I.P.>는 장르도 다르고 지향하는 바도 다를 수밖에 없다.

 

<V.I.P.>와 관련된 논란에 대해 어떤 관계자는 자기검열 때문에 "디즈니 영화나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 발언은 잘못된 것이다. 디즈니 영화는 아무나 만들 수 없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 많다. 그러나 전체관람가, 혹은 12세관람가 영화만이 좋은 영화인가라는 문제 제기는 유효할 것이다.

 

나는 <스포트라이트>, <더 테이블>, <원더우먼>, <아가씨>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영화가 그런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V.I.P.>가 좋은 영화인가 하면 그에 대해서는 개별적 작품에 대한 비평이 필요하다. 피해자 외에 여성 캐릭터가 전혀 없다는 부분은 "여성혐오"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페미니즘은 작품을 분석하는 데 있어 하나의 유용한 틀이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치스가 "퇴폐 예술"을 분류했듯이, 소련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반하는 반동 예술을 분류했듯이, 페미니즘 비평이 "여혐영화" 딱지를 붙이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야말로 페미니즘의 왜소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가 도덕적 선악의 개념으로 해석되어 '올바른 영화'와 '틀린 영화'로 구분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V.I.P.>를 보고 잔혹한 장면에 혐오감을 느끼는 관객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집에서 지상파 TV를 보다가 채널을 돌려 우연히 보게 되는 아침드라마가 아니다.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다. 영화를 보기 위해 돈과 시간을 소모해야 하는 관객이라면, 영화의 시놉시스는 1분만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더라도 영화와 관객의 미스매치가 일어날 수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하나는 <파이 이야기>를 보러 갔다가 호랑이가 동물들을 잡아먹는 장면을 보고 무서워서 극장을 뛰쳐나왔다고 한다. 그렇다고 <파이 이야기>가 나쁜 영화라는 의미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P.S. 이른바 "별점테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욕을 하려면 보고 욕하고, 보지 않았으면 욕하지 마라"는 전통적 견해에 근거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누구나(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어떤 작품에 대한 평가를 내릴 자유가 있다. 물론 영화에 대한 다른 사람의 감상평을 보고 비판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비판을 보고 쓴 비판을 보고 쓴 비판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아무도 영화를 보지 않은 채 영화에 대한 비판만 무한히 재생산되는 건 문제다. 실제 영화를 본 관람객이 내린 평점과 일반인이 내린 평점을 따로 표시되는 추세가 되고 있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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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모두가 각기 나름의 역할을 가지고 있는 사회야말로 건전한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상대방을 "빨갱이"니 "수꼴"이니 매도하며 서로 다투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보수주의에 관해서는 태극기집회나 일베, 친일, 독재 옹호 등의 부정적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실제로 한국현대사에서는 그러한 비판이 틀렸다고 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진정한 보수주의란 무엇이고, 보수주의가 나아갈 길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을 10권 골라 보았다. 

 

1.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에드먼드 버크(이태숙)

 

 

그야말로 진부한, 혹은 보수적인(!) 초이스인 것 같기도 하지만, 역시 보수주의에 관한 책이라면 에드먼드 버크의 책부터 꼽지 않을 수 없다. 자유, 평등, 박애를 주장한 프랑스혁명을 비판한 이 책은 오늘날까지 보수주의의 불후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역시 보수주의의 기원에 해당하는 버크의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을 읽어야 할 것이다.

 

2. <오크숏의 철학과 정치사상> 김비환

 

 

버크와 더불어 보수주의 사상의 대표로 꼽힐 수 있는 인물이 마이클 오크숏이다. 그런데 오크숏의 글이 난해한 탓도 있고 해서 국내에는 잘 소개되어 있지 않다. <오크숏의 철학과 정치사상>은 오크숏에 대해서 치밀하고도 방대한 연구서로 그의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3. <노예의 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엄밀히 말해서 하이에크는 보수주의보다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로 분류되지만, 그의 경제학은 국가에 의한 복지정책을 비판하고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경제적 보수주의의 대표적 선수로 분류되고 있다. 한국의 진보좌파에서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주적으로 삼고 있는데, 과연 신자유주의란 무엇인지 하이에크의 대표작을 읽어보자.

 

4.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 로저 스크러튼(박수철)

 

 

합리적 보수를 찾는다는 제목은 그만큼 합리적 보수가 보기 드물다는 방증일 것이다. 제목만 보면 보수주의를 비판하는 책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저자는 영국의 대표적 보수주의자라고 한다. 보수주의자가 보기에도 오늘날의 보수는 문제가 많다는 뜻이다. 진정한 보수주의란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고찰해 볼 수 있다.

 

5. <품격있는 보수를 꿈꾸다> 김일영

 

 

합리적 보수만큼이나 드문 게 품격있는 보수인가보다. 한국 보수의 이데올로그였던 고 김일영 교수의 칼럼집이다.   

 

 

6. <공부하는 보수> 이상돈

 

 

지금은 국민의당으로 가 버렸지만, 보수 논객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상돈 교수의 서평집이다. 보수의 입장에서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특이한 포지션이 흥미롭기도 하고, 보수주의에 대한 책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어 북가이드로서의 가치도 있다.

 

7. <자유의 적들> 전원책

 

 

인기 프로그램 <썰전> 등으로 유명한 보수 논객 전원책의 책이다. 과격한 주장 때문에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보수주의의 관점에서 진보 좌파를 비판한 논점이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8.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박지향 외

 

 

흔히 뉴라이트 사관이라고 하면, 친일사관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기도 하지만, 민족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한국사 이해에 균형을 가져온 긍정적 의의도 있을 것 같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그런 정치적 맥락과는 별개로 진지하고 새로운 시각의 근현대사 연구라는 점에서 일독의 가치가 있다.

 

9. <한국의 보수와 수구> 이나미

 

 

보수와 수구는 구분되어야 한다고들 하는데, 과연 그 구분은 어떻게 정의되는지를 한국 현대사를 통해서 분석한 책이다. 보수주의의 이념과 역사에 대해서 가장 명료하게 분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10. <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강원택

 

 

최순실게이트 이후로 한국의 보수 정당에게 '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라는 의문이 절실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전세계적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당인 영국 보수당의 역사는 배울 만한 점이 많을 것 같다. 공화당의 트럼프나 자민당의 아베보다는 보수당의 메이가 상식인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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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 - 기자들, 대통령을 끌어내리다
한겨레 특별취재반 지음 / 돌베개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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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무렵이었나, SNS에서 "#그런데 우병우는? #그런데 최순실은?"이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했다. 다른 기사들에 현혹되지 말고 우병우와 최순실을 추적해야 한다는 네티즌들이 벌인 운동이었다. 당시 99%의 국민이 그랬듯이 나 역시 최순실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었기에, '어디서 또 이상한 음모론 주워왔나보네'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때는 최순실게이트라는 이름을 일대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최순실 딸 정유라에 대한 이대 특혜 의혹이 보도되기 시작할 때도 설마 이런 일이 진짜일까 싶었는데, 10월 말 JTBC가 최순실 태블릿 피씨와 연설문 유출을 보도하면서 사태가 급격히 진전되었던 것이다.

JTBC와 손석희. 최순실게이트에 있어서 가장 임팩트 있는 한방이 JTBC에서 나왔음은 부정할 수 없다. 만약 그 보도가 없었더라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JTBC가 최순실게이틔의 모든 것을 밝혀냈던 것은 아니다. 이대 미래라이프 반대 투쟁에서 이대에 대한 비리 혐의가 불거져 나오고 있었고, 안민석 의원은 최순실 모녀에 대한 의혹 추구를 2014년 무렵부터 시작했었다고 한다. 우병우에 관련된 의혹에 대해 조선일보가 비판 논조를 내기도 하는 등 전조는 있었다. 그리고 한겨레신문은 9월 무렵부터 미르, K스포츠재단에 대한 전담 팀을 꾸리고 취재를 시작했다.

한겨레 기자들이 쓴 <최순실 게이트>를 읽고, 미르재단과 K스포츠, 그리고 최순실을 둘러싼 특종들 중 상당수가 한겨레 기자들이 발로 뛰어서 밝혀낸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태의 발단부터 전개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서 최순실 게이트에 관한 전모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한겨레 기자들의 노력이 상대적으로 가려졌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영상매체와 신문매체의 파급력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종이신문의 기사 역시 인터넷을 통해 접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진영논리를 동원해 욕할 때를 제외하면) 신문 이름을 눈여겨 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한겨레, JTBC, TV조선, SBS 등 언론들의 활약으로 최순실게이트의 정체를 만천하에 밝혀내고,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영화였다면 이제 의혹을 밝혀낸 기자들은 박수받으며 해피엔드를 맞이했겠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정권교체에 성공한 이후, 일찍이 일베에서나 들을 법 했던 "한걸레"라는 명칭이 여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의 여당 성향 커뮤니티에서는 조중동이나 다른 언론보다도 한겨레가 적폐 언론의 대명사로 난타당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대통령 부인의 이름 뒤에 '여사'가 아닌 '씨'라는 호칭을 사용했다거나, 한겨레 전 편집장이 페이스북에 "덤벼라 문빠들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등의 사건들이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한국 언론들에 문제가 많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고, 진보 언론으로 분류되는 한겨레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최순실게이트 보도 또한 몇몇 정의로운 기자들의 영웅적 투쟁의 결과로 서사(narrative)화되어서는 안 될 문제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겨레가 최순실게이트 국면에서 큰 활약을 한 만큼, 앞으로도 비판 정신이 살아있는 언론 보도를 계속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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