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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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음.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었다. 1인칭 화자 주인공은 초상화를 그려서 생계를 꾸리는 화가다. 어느날, 아내가 이혼을 통보하자 집을 나가서 자동차를 타고 한동안 정처없이 방황한다. 주인공의 사정을 알게 된 친구 아마다 마사히코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던 고택에 잠시 살면 어떻냐고 권유한다. 아마다 마사히코의 아버지 아마다 도모히코는 일본화의 거장이었는데, 현재는 요양원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아마다 도모히코가 살던 오다와라(小田原)의 고택으로 이주하게 된다.

한국 독자에게 오다와라는 낯선 지명일 것 같다. 가나가와(神奈川)현에 위치한 오다와라는 인구 20만의 도시로, 가나가와와 시즈오카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다. 도쿄에서 오사카로 가는 신칸센을 타면 요코하마 다음 역이 오다와라역이지만, 신칸센 중에서 정차하지 않는 열차도 있다. 즉, 아주 시골은 아니지만 대도시도 아닌, 지방도시치고는 제법 큰 도시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고택에 살게 된 주인공에게 어느 날부터 기이한 일이 연이어 벌어진다. 멘시키 와타루(免色渉)라는 이름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부호가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고, 고택의 다락방에서 아마다 도모히코가 그린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제목의 기이한 그림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밤마다 집 근처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이렇듯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사건들에 휘말리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긴장감 있게 전개되며 독자들이 몰입하게 만든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발단-전개-위기'까지는 재미있는 작품을 써 내려간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불가사의한 '무언가'를 암시하는 그의 필력은 탁월하다. 반면에 불가사의한 '무언가'의 정체가 밝혀지는 절정과 결말은 하루키 소설의 약점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떡밥'을 던지는 능력은 탁월하지만, 수습을 잘 못하는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무언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수수께끼로 남겨둔 채 찝찝하게 끝나곤 한다. 혹은 소설 속에서 그 불가사의의 정체가 밝혀질 경우에는 아주 시시해져 버리고 만다. 밤마다 들려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방울 소리와 우스꽝스러운 말투로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는 60cm의 그림 속 인물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의미심장한지는 분명할 것이다. 소설이 전개되면서 불가사의가 밝혀질수록 독자를 사로잡는 힘이 줄어드는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하루키의 소설치고는 결말이 말끔하고 명확한 편이다. 멘시키 와타루의 또다른 인격 정도만 수수께끼로 남았을 뿐, 나머지는 대략적으로나마 설명이 가능한 매듭이 지어졌다. 주인공은 클라이맥스에서 실종된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현실 세계의 이면(裏面)에 있는 세계로 모험을 떠난다. 주인공은 이 탐색(quest)으로부터 무사히 귀환하고, 그녀를 구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판타지 소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주인공이 어렸을 때 죽은 여동생, 여동생과 닮았다는 이유로 결혼한 아내, 그리고 주인공이 구하게 되는 소녀 아키가와 마리에는 이 모험에서 하나로 이어지게 된다. 모험을 통해 여동생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한 주인공은 결말에 이르러 이혼 절차를 밟고 있던 아내와 재결합을 하게 된다.

저자는 인터뷰에서 동일본대지진이 소설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데, 그래서인지 결말 부분은 다소 설명적이거나 설교적인 느낌을 준다. 주인공이 결말에서 선택하게 되는 실존적 믿음을 통한 극복 역시 하루키치고는 진부한 교훈이다. 긴장감 있게 전개되던 이야기가 용두사미로 끝난 것 같아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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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법치주의 국가다. 입법, 행정, 사법의 3부는 각각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처벌하는 역할을 한다. 말 그대로 법이야말로 국가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법이란 여전히 일반인들에게는 어렵고 낯선 분야로 남아있는 것 같다. 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책을 10권 선정해 보았다.

 

1. <부러진 화살> 서형

 

 

영화로도 만들어져 큰 화제를 모은 책이다. 김명호 교수가 해임에 반발하여 제기한 소송에서 패소하자 판사를 석궁으로 쏜 실제 사건을 논픽션으로 만들었다. 김명호 교수라는 특이한 캐릭터와 한 개인이 법원에서 마주하게 되는 부조리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재미있게 읽힌다. 하나의 사건을 통해 한국사회와 사법부의 문제를 엿볼 수 있다.

 

2. <신들을 위한 여름> 에드워드 라슨(한유정)

 

 

미국에서 있었던 재판에 대한 논픽션도 소개하고자 한다. 1925년, 테네시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교사가 고발 당한다. 이 재판은 진화론과 창조론, 과학과 종교의 일대 법정 대결로 비화되면서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 역사적 재판을 추적한 <신들을 위한 여름>은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3. <사법부> 한홍구

 

 

해방 이후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독재정권 시절, 한국의 사법부는 법의 지배를 관철시키는 대신,당대의 권력자들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판결을 내렸다. 한국 현대사에서 사법부가 저지른 문제적 역사를 되돌아 봄으로써 오늘날의 사법부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사유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4.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권석천

 

 

중앙일보 권석천 논설위원의 칼럼의 칼럼은 언제나 명쾌한 논리 전개를 바탕으로 하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믿고 보는 권석천 칼럼" 중에서도 특히 전문분야인 사법 관련 기사들은 남다른 통찰과 분석을 바탕으로 하여 신뢰가 갈 만하다. 그가 최근에 대법원의 역사에 대한 책을 출판하였으니 꼭 읽어볼 만하다.

 

5.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 이범준

 

 

이번 탄핵정국에서 헌법재판소는 말 그대로 탄핵의 가부를 결정하는 기관으로서 몇 달간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헌법재판소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 역사를 그린 책이다. 1988년 탄생부터 노무현 대통령 탄핵과 수도 이전까지 헌법재판소가 걸어온 길을 다루고 있다.

 

6. <법은 정치를 심판할 수 있을까?> 최강욱

 

 

그동안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판검사들의 엘리트주의와 권위주의, 줄서기 등 한국 사법부의 문제들을 낯낯이 알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책이다. 대중강연을 바탕으로 책으로 출판된 것이라 내용도 쉽고 재미있다.

 

7. <저주 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프레드 로델(이승훈)

 

 

1939년 뉴딜 시대 미국에서 법률가들을 비판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던 책이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읽어도 재미있다. 고대에는 주술사들이, 중세에는 성직자들이, 현대에는 법률가들이 있다는 저자의 말에 법률가들이 말하는 법률이 일상생활에서 유리되어 난해한 용어들만이 남게 되었다는 그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8. <혐오에서 인류애로> 마사 누스바움(강동혁)

 

 

동성애를 법으로 금지하던 시절에서 2015년 동성결혼 합헌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사법부 역사에서 동성애에 관한 판결이 변화해온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한국사회에서도 뜨거운 감자라 할 수 있는 동성결혼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9. <헌법논쟁> 하세베 야스오, 스기타 아쓰시(김일영, 아사바 유키)

 

 

헌법학자 하세베 야스오와 정치학자 스기타 아쓰시가 각자 입헌주의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헌법에 대해 토론한 책이다. 대담 형식으로 쓰여진 책이지만, 논의는 상당히 수준이 높은 편이라 비전문가가 읽기에는 어려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헌법과 입헌주의, 민주주의에 대해 깊이있는 사고를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 생각된다.

 

10. <지금 다시 헌법> 차병직, 윤재왕, 윤지영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지만, 헌법 조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조문마다 이해하기 쉬운 해설들이 있어 이해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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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 사회 - 냉소주의는 어떻게 우리 사회를 망가뜨렸나
김민하 지음 / 현암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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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발발하여 엄청난 규모의 시민들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당시에 미국산 소고기와 광우병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집회를 주도했던 이들의 주장을 지금 검증해 보면, 잘못된 정보가 적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오늘날, 일베를 비롯한 우파 네티즌들은 이 사건을 두고 "광우뻥"이라고 부르며 조롱하며, 좌파에 의해 선동된 전형적인 사례로 보고 있다. 일베를 통해 진실에 눈을 떴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당시 촛불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지만 이후에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괴담에 근거한 것이었는가를 깨닫고 일베로 전향하였다고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미국산 소고기 촛불집회의 열정과 열광이 식고 난 2010년대에는 냉소주의(cynicism)가 시대정신으로 자리잡았다. 2012년의 대선과 일베의 등장은 그러한 풍조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냉소는 열정과 열광의 대척점에 존재하며, 정의나 도덕을 비웃는다. 한국사회에서 공식적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민주주의와 남녀평등과 같은 가치를 상대화시키고 희화화함으로써 재미를 느꼈던 일베는 냉소주의가 만들어낸 괴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진보좌파 진영은 촛불집회 이후, 무력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광장에서 울려퍼졌던 "MB OUT"이라는 구호는 정권에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타격만을 가했을 뿐이고, 2012년 대선에서도 정권교체는 실패하였다. 현실세계에서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해 "광우뻥" 괴담 논란으로 인해 정당성까지도 흔들렸다. 시위의 열기로부터 빠져나와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산 소고기가 수입되면 변종 프리온으로 인해 광우병이 공기로 감염된다는 소리는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보기에도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경우가 많아졌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도대체 광우병 촛불집회는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쉽게 긍정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생겨났다.

선동에 속았다는 느낌에 빠진 사람들은 어떤 가치나 대의도 의심부터 하고 보는 회의주의적, 상대주의적 외피(外皮)를 둘러싸게 된다. 냉소주의의 이면(裏面)에 있는 방어기제(防禦機制)는 무언가를 믿었지만 그것이 거짓이었을 경우에 받을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러한 냉소주의의 본질에 대해 김민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냉소주의자의 어법은 그래서 '진정한 무엇은 있다'와 '진정한 무엇은 없다' 사이를 불규칙하게 오고 간다. '진정한 무엇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주장하고 싶은 것은 '지금 여기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무엇'을 찾을 때까지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다.(12)

이렇듯 무력감과 체념이 뒤섞인 채 뒤틀린 냉소주의는 2016년 10월부터 박근혜 탄핵을 요구하며 벌어진 촛불집회와 함께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2008년 촛불집회의 전말(顚末)을 알고 있는 냉소주의자들은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 대해서도 냉소적인 태도를 피력했을 것이다. 아무리 촛불집회를 해 봐도 새누리당이 100석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서 탄핵안이 가결되기 어려울 것이고, 설사 가결이 된다 하더라도 헌재 재판관들의 성향으로 보건대 탄핵이 부결될 가능성이 크고, 촛불집회 자체도 시간이 갈수록 그 열기가 사그라들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이 냉소주의의 태도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냉소주의가 틀렸다. 연인원 1500만 명 넘게 동원한 촛불집회는 불가능해 보였던 박근혜 탄핵을 성사시켰고, 이후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진보좌파 진영의 염원이었던 정권교체를 성사시켰던 것이다. "어차피 뭘 해도 안 돼"라고 말하던 냉소주의자들이 뻘쭘해질 차례였다. 물론 그렇게 탄생하게 된 현 정권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엇갈리겠지만,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대통령마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은 희망적인 일이라 생각된다. 이제는 정치에 대한 실망->체념->냉소->혐오의 사이클로부터 벗어나 냉소주의를 극복하고 무언가 새로운 꿈을 꿔 볼 수 있는 단계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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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불편러 일기 - 세상에 무시해도 되는 불편함은 없다
위근우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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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무렵부터 인터넷에서 이른바 "프로불편러"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이라는 영어 단어와 "불편(不便)"이라는 한자 단어, 그리고 영어 접미사 "-er"을 조합한 말이다. 해석하자면 "매사에 불편해하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문제될 것이 없는 일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부정적 뉘앙스가 담겨 있다.

한국 사회의 여러 문화적, 사회적 현상에 대해 날카롭게 분석해 온 위근우의 <프로불편러 일기>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프로불편러"를 자인하는 저자는 "지금 이곳에서 프로불편러는 불합리함과 부당함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에 대한 자기긍정의 표현이다"(4)라고 말한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불편과 불합리(不合理), 부당(不當)은 각각 다른 개념이 아닌가? 불합리함에 관해서는 이 글에서 논하지 않겠지만, 불편함과 부당함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持論)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불편함은 개인의 주관적 감정의 문제고, 부당함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공유되어야 할 원칙의 문제다. 이른바 "프로불편러"의 문제는 불편함과 부당함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 같다. 즉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편하다"고 말해야 할 때에 "부당하다"고 말하고, "부당하다"고 말해야 할 때에 "불편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온 사례로 말하면, 가수 아이유의 노래 <제제>가 소아성애(pedophilia)를 연상시킨다고 느끼는 것은 불편함의 문제다. "아이유 노래는 소아성애 같아서 불편해"라는 개인의 감상에 대해서 "맞아맞아, 나도 그렇게 느꼈어"라고 공감을 살 수도 있고, "나는 안 그렇던데"라는 반론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관적 불편함을 사회적 원칙의 보편적 정의에 의거한 부당함으로 포장하여 음원 폐기까지 요구했던 사건은 자신의 주관적 감정이 사회의 보편적 원칙으로서 통용되어야 한다는 유아(幼兒/唯我)적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사회적 논의를 통해 고쳐져야 할 부당함이 단순히 개인의 불편함으로 축소되는 문제 또한 발생하고 있다. 사회에서 차별이나 억압은 정의(正義)에 어긋나는 부당함의 문제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프로불편러"라는 말이 등장한 이후에는 불편함이라는 말로 토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예로 나온 몇몇 연예인들의 예능에서의 폭언과 '막말(妄發)'은 불편할 일이 아니라, 부당하다고 시정을 요구해야 할 일이다.

물론 불편함과 부당함의 구분은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다. 부당함의 기준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다. 사람들이 부당함을 호소하는 대신에 불편함이라는 개인의 감정 문제로 후퇴하는 이유는 부당함의 근거를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작업이 그만큼 지난(至難)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함과 부당함을 같은 개념으로 퉁쳐서는 안 된다. 개인이 불편하게 느낌으로써 끝날 문제와 논쟁을 통해 부당함이라는 기준을 확립시켜야 할 문제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편함이라는 감정은 중요하다. 때로는 그것이 부당함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인식하는 시발점(始發點)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내가 불편하다'는 주관적 영역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불편함과 부당함을 구분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불편함"이라는 장막 뒤에 숨을 것이 아니라 논리를 통해 그 문제의식을 관철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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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7-30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편과 불합리(不合理), 부당(不當)은 각각 다른 개념이 아닌가? 불합리함에 관해서는 이 글에서 논하지 않겠지만, 불편함과 부당함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持論)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불편함은 개인의 주관적 감정의 문제고, 부당함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공유되어야 할 원칙의 문제다. 이른바 ˝프로불편러˝의 문제는 불편함과 부당함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 같다. 즉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편하다˝고 말해야 할 때에 ˝부당하다˝고 말하고, ˝부당하다˝고 말해야 할 때에 ˝불편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 불편함과 부당함(부당성)은 분명 서로 다른 개념이긴 합니다. 그 반대인 편함과 정당함(정당성)이 서로 다른 개념인 것처럼 말이죠. 헌데 따지고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겠습니다만, 정당함 · 부당함 혹은 정당성 · 부당성 혹은 justice · injustice 혹은 righteousness · unrighteousness는 무엇보다도 먼저 윤리학적, 법적, 인식론적, 정치(철)학적, 사회학적 기원을 지닌 개념이죠. 반면에 편함 · 불편함이라는 개념은 쾌 · 불쾌와 연관된 것으로서 감정적 · 정동적 심리 유형에 속하고 심리학적, 신경학적 기원을 지닌 개념이라 할 수 있죠. 이런 기원적 개념 분석이 있어야 혼동과 오용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정당함 · 부당함 혹은 정당성 · 부당성 혹은 justice · injustice 혹은 righteousness · unrighteousness 같은 것들이 과연 자연 세계의 본질적 요소로서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일까요? 또한 편함 · 불편함, 쾌 · 불쾌와 같은 감정적 요소들도 자연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한 요소들일까요? 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은 아직까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컨대 위 개념들이 인간이라는 의식적 존재들이 구축한 인위적/인본적 체계의 일부라면, 본질적 의미에서 위 개념들은 명확하게 분리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올 법합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서로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는 것이죠. 실제로도 쌍방의 개념들은 기원적 단계부터 상호작용적 영향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위근우의 『프로불편러 일기』에서와 같은 일상생활적, 문화적, 사회적 논의 문맥에서는 (개념적 엄밀성이 비교적 느슨하다고 볼 수 있는 논의 문맥에서는) 쌍방의 개념들이 서로 분리돼 있기는커녕 떼려야 뗄 수 없는 혼합적 일체로서 논의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윗글에서 의정부짱짱맨 님께선 《불편함이라는 감정은 중요하다. 때로는 그것이 부당함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인식하는 시발점(始發點)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는데요. 반대로 부당한 행위를 하는 자들도 윤리학적, 법적, 인식론적, 정치적 정당성을 요구하는 자들한테 굉장한 불편함을 느끼죠. 이처럼 사회적, 당위적 차원의 정당함 · 부당함은 개인적, 주관적, 감정적 차원의 편함 · 불편함 혹은 쾌 · 불쾌와 기원적인 단계에서부터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죠. 다만 의정부짱짱맨 님의 지적처럼 이런 모든 논의에서는 《단순히 ‘내가 불편하다‘는 주관적 영역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보고요. 그것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의정부짱짱맨 2017-07-30 19:04   좋아요 1 | URL
댓글 감사합니다!(몇년만에 달린 댓글인지 모르겠네요ㅠㅠ)
본문에서 깊이 다루지 못한 불편함, 부당함의 기원(자연적, 인위적)에 대해서 길고 진지한 문제의식을 제기해 주셔서 한층 더 깊이 있는 내용이 된 것 같습니다.
저는 공동체주의보다는 자유주의에 가까운 입장이라서 정의(justice)와 선(goodness)을 구분하는 전제에서 글을 쓴 겁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불편함과 부당함이 상호작용의 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주관적 감정의 문제 보편적 원칙으로 수용되어야 할 문제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시로 드신 것처럼 불편함에도 부당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 느끼는 불편함이 있는 반면에 부당한 행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불편함도 있을 수 있고, 그렇게 봤을 때 불편함은 나는 불편하다/안 불편하다는 상대적 문제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프로불편러 일기>가 엄밀한 개념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씀에도 동의하고, 책의 그런 부분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쓴 글은 아닙니다.
책 내용을 토대로 확장된 이야기를 해 보자는 의도에서 쓴 글이에요.
다시 한 번 길고 유익한 댓글 감사합니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도란스 기획 총서 1
정희진 엮음, 정희진.권김현영.루인 외 지음 / 교양인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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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원래 지향하던 가치와는 달리 한국에서 최근 페미니즘 논의는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되고 있다.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사망한 청년을 조롱하거나 전태일 열사/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모욕하고, 게이나 트랜스젠더 등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양산하고, 인터넷 마녀사냥을 조장하는 워마드 같은 사이트가 페미니즘 세력으로 오인받으면서 건전한 페미니즘 논의조차 "메갈"이나 "워마드"로 몰리는 실정이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는 기존의 페미니즘 논의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한다.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변화하고 이동하지 않는 주체, 운동, 언어는 '운동권/역'이라는 또 다른 기득권 집단과 '연줄' 집단을 만들 뿐이다. '서울, 중산층, 젊은, 이성애자, 고학력, 비장애인' 중심의 여성 운동도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며 이들은 사회가 수용 가능한 '여성다운 여성'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11)

"남녀동권주의(男女同權主義)"로 번역되는 페미니즘의 사전적 정의는 "여성이 남성과 같은 권리와 기회를 누려야 한다는 믿음과 목표, 혹은 이를 성취하기 위한 투쟁"이다. 즉,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을 전제로 하여 양성평등을 추구하는 이념이다. 이러한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은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인터섹스(LGBTI) 등을 배제한다. 양성평등을 넘어 성평등을 추구하기 위해서 페미니즘 또한 포스트페미니즘(post-feminism)으로 업그레이드 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함께 이 책은 미성년자 의제강간, 동성애와 교회, 공연음란죄와 퀴어범죄학 등의 실천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메갈리아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메갈리아로부터 파생된 워마드는 동성애자 및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발언으로 잘 알려진 시스젠더(cisgender, 지정성별) 헤테로 중심주의 사이트다. 물론 워마드의 전신인 메갈리아는 워마드와는 분리되어야 하지만, 메갈리아 시절에도 호모포비아적 혐오발언이 다수 있었다.

다섯 명의 필자들의 글을 모은 책이기 때문에 수록된 글들 사이에 논조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메갈리아에 관한 글에서는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남혐이 아닐뿐더러, 나아가 '여혐혐'에서 그치지도 않는다"(145)며 메갈리아가 이성애 중심주의 또한 극복하려 했다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 근거가 되는 것은 "2001년 청소년 유해매체 검열 대상 지정에 반대하며 '팬픽도 문학이다'라고 외쳤다"(144)는 것인데, 2001년에 있었던 일이 메갈리아의 탄생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없다. 더구나 이 글에서는 메갈리안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찬탄받던 '촛불소녀'들이기도 했다"(132)고 말한다. 단순히 세대로만 보자면 2008년 촛불시위에 참여한 촛불소녀들과 겹치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워마드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근거가 빈약하다고 느껴진다.

페미니즘이 양성평등의 패러다임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에 앞장서는 메갈리아/워마드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필요할 것이다.

책에 수록된 <왜 한국 개신교는 동성애 혐오를 필요로 하는가>는 2000년대 후반 이후, 한국 개신교의 정치세력화와 교세 유지를 위해 동성애 혐오가 이용되고 있다는 흥미로운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런데 동성애 혐오가 한국 개신교에 국한된 현상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이슬람 등의 서아시아 기원 일신교들은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 종교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동성애 혐오는 한국 개신교의 특수한 상황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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