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들 (마음산책X) 개봉열독 X시리즈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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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마음산책, 은행나무, 북스피어 세 출판사가 표지를 감추고 저자와 제목 등 어떠한 정보도 없이 책을 판매하는 '개봉열독'이라는 기획이 있었다. 그 중에서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복면도서'로서 판매한 소설은 로맹 가리의 <마법사들>이었다. 이러한 선택이 흥미로운 이유는 저자인 로맹 가리가 말 그대로 복면작가로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이미 작가로서의 명성을 가지고 있던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한다.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의 필명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했고, 덕분에 로맹 가리는 평생 한 번밖에 수상할 수 없는 공쿠르 상을 두 번(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 이름으로 각각 한 번씩) 수상한 인물이라는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이 사실은 로맹 가리가 1980년 권총으로 자살할 때 고백하면서 밝혀진다. 자신이 쓴 소설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소설을 발표했던 로맹 가리의 소설이야말로 아무 정보 없이 책을 판매하는 개봉열독의 취지와 부합하는 것 같다(단, <마법사들> 자체는 로맹 가리 본인 명의로 발표된 소설이다). 


<마법사들>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포스코 자가라는 작가인데, 여러 면에서 저자 로맹 가리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소설의 배경은 1770년대,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의 제정 러시아다. 포스코 자가의 아버지 주세페 자가는 베네치아에서 온 광대(사실은 마법사)로 러시아 궁정과 귀족들 사이에서 마법으로 밥벌이를 한다. 사춘기 소년인 포스코는 자신보다 몇 살 더 많은 새엄마 테레지나에게 첫사랑을 경험하고, 푸가초프의 반란이나 아버지의 몰락, 러시아 추방 등을 경험하며 성장한다는 소설이다. 포스코 또한 아버지의 혈통을 따라 마법사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마법사적 재능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형태로 발현되어, 훗날 작가가 된다. 여기서 마법사들의 '마법'은 예술을 상징하는 것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과 함께 이 소설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는 화자인 포스코 자가가 18세기부터 200년을 살았고, 20세기의 시점에서 200년 전을 회고하고 있다는 설정이다. 마법사 일족에게 주어진 불멸성 덕분이라는 것이 화자의 설명인데, 굳이 이러한 현실성 없는 설정이 필요했을지 처음에는 의문스러웠다. 사실 이러한 설정은 예술(소설에서는 마법으로 은유된다)의 불멸성을 상징하는 장치다.

또한 1770년대라는 배경은 프랑스혁명 직전의 계몽주의 시대, 즉 근대가 시작되기 직전의 시대다. 이 소설은 1770년대 당시 러시아를 뒤흔든 농민반란, 푸가초프의 반란을 중요한 사건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야만성과 폭력성을 드러낸 푸가초프의 반란은 러시아혁명 이후의 소련의 억압과 중첩된다. 화자가 20세기 시점에서 18세기의 일을 회고하는 이유는 근대에 반복되는 그러한 폭력성의 문제를 의식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저자는 1914년 제정 러시아령이었던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혁명이 있고 난 1928년에 프랑스로 망명했고, 나치스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드골의 저항군에 합류하여 공군으로 참전했다. 저자가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던 소년 시절의 기억을 예카테리나 시절에 푸가초프의 반란 때문에 서유럽으로 이주해야 했던 화자의 이야기로 풀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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