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포스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톰 행크스 외 출연 / SM LDG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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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누군가가 '언론의 주된 역할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질문을 받는 사람마다 다른 답을 할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이 '권력에 대한 견제·비판' 아닐까? 실제로 이는 언론의 사명이기도 하며, 전 세계의 수많은 언론인이 이를 위해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분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언론의 본령과 이를 위해 땀 흘리는 언론인을 너무나도 잘 표현한 영화가 한 편 있다.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더 포스트'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6년 미국. 당시 미국 국방장관의 수하로 베트남에 파견된 적이 있는 댄 엘스버그(매튜 리즈)는 베트남에서 미군이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과 전쟁에 관한 미국 정부의 발표가 모두 거짓임을 알게 된다. 이에 댄은 베트남전쟁에 관한 미국 정부의 문서, 이른바 '펜타곤 페이퍼'를 복사한 후 이를 갖고 떠난다. 5년 후인 1971년 워싱턴. 캐서린 그레이엄(매릴 스트립)은 사주였던 아버지와 남편의 사망으로 <워싱턴 포스트>의 신임 사주가 된다. 부임 이후, 캐서린은 회사의 주식 상장을 맡게 된다. 큰 임무를 맡게 된 그녀는 남성들의 세계인 언론계에서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살아간다. 한편 포스트지의 경쟁사인 <뉴욕 타임스>는 댄의 보고서를 토대로 베트남전에 관한 진실을 기사화한다. 이 기사는 미국 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이에 자극받은 포스트지 기자들이 보고서를 찾아 동분서주하지만 특종 경쟁에서 뉴욕 타임스에게 번번이 패배한다. 그런데 당시 법무부 장관이 뉴욕 타임스의 보도를 두고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며 추가보도금지명령을 내린다. 정부의 훼방으로 뉴욕 타임스의 보도가 주춤해지자, 댄은 포스트의 기자인 벤 백디키언(밥 오덴커크)에게 연락해 보고서를 넘겨준다. 벤은 보고서를 입수하자마자 편집장인 벤 브랜들리(톰 행크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다음 날, 벤 브랜들리의 집으로 기자들이 모여들고, 그들은 4천 장에 달하는 보고서를 하나하나 검증하며 기사 작성을 준비한다. 이 소식은 회사의 이사진과 캐서린에게까지 전달된다. 이사진은 기사를 발행할 시 막 주식 상장에 성공한 회사가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벤 브랜들리는 언론의 사명을 언급하며 이사진에 맞선다. 이들의 설전이 고조되면서 결국 선택은 사주인 캐서린의 몫이 된다. 무거운 짐을 지게 된 캐서린, 과연 그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2018년 국내에서 개봉한 '더 포스트'는 '2018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메릴 스트립) 부문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영화는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 중 하나인 베트남전의 진실과 이를 보도하려는 언론인 및 언론사 사주, 이들에게 재갈을 물리려는 권력의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다루며 언론의 본령을 정확히 짚는다.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과 잘 구현한 시대상, 긴장감 넘치는 전개 덕분에 116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고 느낄 정도로 흡인력 있는 이 영화에서 크게 두 가지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첫 번째 장면은 기사화 직전에 생긴 문제로 캐서린의 집을 찾아간 벤 브랜들리에게 캐서린이 던진 질문이다. 캐서린은 벤에게 "기사를 내보내도 미군 병사들에게 해가 안 된다고 장담할 수 있겠어요?"라고 묻는다. 이에 벤은 "100% 확신합니다."라고 답한다. 두 번째 장면은 대법원 판결에서 승리해 모두가 기뻐하는 와중에 포스트의 한 여 기자가 읊은 대법원 판결문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언론은 통치자가 아닌 국민을 섬겨야 한다."였다. 이 두 장면을 보면서 영화가 한 사회와 사회 구성원을 위해 진실을 토대로 권력을 비판 및 견제해야 하는 동시에 이 과정에서 특정 사회 구성원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언론의 본령을 정확히 짚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이 명장면들이 언론의 본령을 넘어 존재 이유까지 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의 수많은 언론인들이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들에게 감사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어찌보면 이들은 '더 포스트'가 보여준 언론의 본령과 존재 이유를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힘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때때로 그들을 찾아오는 생명의 위협까지 무릅쓰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더 포스트'를 언론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 그리고 이미 언론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 모두 한 번쯤은 봐야 하는 영화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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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이야기를 원한다 - 하버드 스토리텔링 강의
가오펑 지음, 전왕록 옮김 / 라이스메이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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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분야를 막론하고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가 '스토리텔링'인 것 같다. 이 때문일까? 최근 여러 분야에 속한 개인과 기업들이 다양한 플랫폼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분야를 떠나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이것을 매력적으로 구성해 전달하는 개인과 기업은 각자의 영역에서 강한 팬덤을 형성하는 듯하다. 이는 대중이 그들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고 매료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에 빠진 대중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개인과 기업이 생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흐름을 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스토리텔링'의 시대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다면 왜 이 시점에 스토리텔링이 급부상하게 됐으며, 우리는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어떻게 스토리텔링을 구현해야 할까? 그 답이 책 <<모두가 이야기를 원한다>>에 담겨 있다.

 지금은 자신의 강점을 적극 어필해야 하는 '자기 PR'의 시대다. 이는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에도 적용되며, 물건도 예외일 수 없다. 이제는 제품만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제품과 브랜드 그리고 기업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걸까? 답은 '이야기'에 있다. 기존에는 성공의 밑천이 '자본'과 '기술'이었지만, 지금은 바야흐로 이야기가 성공의 밑천인 '이야기 자본'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원천인 스토리텔링은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그 영향력을 발휘하며, 지금처럼 정보가 만연하고 자신을 어필해야 하는 시대에 필수 덕목이 됐다. 브랜드 스토리가 있었기에 '코카콜라Coca-Cola'는 시럽을 팔던 작은 공장에서 대기업으로 변모할 수 있었고, '도브Dove 초콜릿'은 '사랑의 대명사'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도 하나의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브랜드를 돋보이게 하려면 이야기가 필요하다. 브랜드에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입히느냐에 따라 브랜드의 성패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좋은 이야기'란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 책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 상상의 여지를 주는 것이 좋은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좋은 이야기라고 해서 반드시 길 필요는 없다. 짧지만 핵심을 파고드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잡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야기를 자본으로 만들려면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좋은 이야기 소재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이야기 소재가 아예 없는 기업과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야기 소재 개발에 공을 들여야만 한다. 영국 런던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존 루이스(John Lewis)' 백화점은 이야기 소재 개발의 귀재였다. 2012년, 존 루이스 백화점의 크리스마스 광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애정을 선사했다. 광고의 주요 내용은 사랑에 눈 먼 눈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온갖 역경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선물을 찾아낸다는 이야기였다. 줄거리는 단순해 보이지만, 이 이야기는 존 루이스 백화점의 핵심 경영 이념이 가족에 있음을 보여준다. 소비자는 자신이 구매한 물건이 사랑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가치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존 루이스 백화점이 2012년에 펼친 마케팅 전략이 맞아 떨어졌다. 불과 일주일 만에 약 1억 3,600만 달러의 수익을 냈기 때문이다.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좋은 이야기의 영향력은 강력하다. 이야기를 구성해 전달하는 데에는 인물도 중요하다. 여기서 날카로운 관찰력과 정확한 예측 능력이 요구된다. 이야기의 영향력이 그 속에 있는 인물의 사회적 영향력과 비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이야기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진솔한 이야기다. 둘째, 선의의 거짓말이다. 그리고 셋째, 공감이다. 나머지 요소는 각각 미완성의 아름다움, 상대의 이야기, 우회다. 스토리텔링 시에 이 요소들을 적절히 적용한다면 흡인력 있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다.

 한 기업이 성공을 거두려면 핵심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스토리텔링을 제대로 전파하려면, 고객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만약 시작 전에 고객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다면, 기업은 실패라는 쓰디 쓴 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말보로(Marlboro) 담배'가 이런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다. 말보로 담배가 성립한 이야기는 소비자 층이 적었던 데다가 시장 수요 확대의 가능성도 적었다. 게다가 주요 타깃인 여성 흡연자에게도 강인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어느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효과를 보려면 스토리텔링의 매력 외에도 적합한 '수요층'을 찾아 공략해야만 한다.

 미국의 한 생물학자는 새끼 새와 뱀의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새와 뱀 사이에는 분명한 힘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종종 우리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새와 뱀 간에 극명한 힘의 격차가 존재함에도 새가 승리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새들은 오랫동안 뱀의 공격을 받아왔다. 그리고 그동안 싸움을 하면서 뱀 머리의 한 부분만을 공격하는 방법을 터득해냈다. 이는 우리에게 훌륭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확실한 목표가 있다면 하나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브랜드 이야기의 목표가 지나치게 많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 브랜드 스토리를 제대로 설파하려면, 브랜드 스토리의 주제를 하나에 집중시켜야만 한다. 또 스토리텔링을 할 때는 네 가지 조건에 신경을 써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은 '관심을 붙잡아라'이고, 두 번째 조건은 '흥미를 유발하라', 세 번째 조건은 '공감대를 형성하라', 네 번째 조건은 '행동으로 옮기게 하라'다.

 지금까지 왜 스토리텔링이 중요한지와 성공적인 스토리텔링을 위해 알아야 할 것 등에 관해 살펴봤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 시대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매력적으로 풀어내는 자만이 생존과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비전문가인 일반인들은 어떻게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을까? 방법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다양한 방법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바로 이야기의 소재를 멀리서 찾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것 아닐까? 자신의 인생, 즉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아이템을 발굴해 이를 매력적인 이야기로 만들어보는 것이다.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건 영광스러운 일이건 상관없다. 일단 시작해 봐야 한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우여곡절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제시한 스토리텔링의 기본 등을 상기하면서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어필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면, 어느덧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신만의 이야기라는 무기를 갖춘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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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 하루키 지음, 남기정 옮김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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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 어떤 행동을 주로 할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그 사람이 살아온 길, 즉 그 사람의 역사를 살피는 것 아닐까? 이렇게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의 총합이 현재의 그를 만들었고, 현재 그가 지니고 있는 행동양식이 그의 미래를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은 한 사람을 분석할 때만 유용한 것이 아니다. 역사로 무언가를 분석하는 방식은 한 국가를 알아가는 데도 도움이 된다. 위의 문단에서 밝힌 것처럼, 한 국가가 과거에 내린 결정이 현재를 만들었고, 현재 선택한 것들의 합이 그 국가의 미래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지난 역사를 토대로 한 국가를 들여다보는 방법은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로 알려진 '북한'을 살펴보는 데도 적합하다.

 남과 북은 해방 이후 분단돼 지금까지 휴전선을 맞대고 살아왔다. 반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갈라져 있던 탓에 서로가 지금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북한의 역사를 알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먼저 북한 체제의 상징인 '김일성'을 알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김일성의 '만주항일무장투쟁'에 관해 알아야 한다.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에 평양의 교외 대동군 남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1년 9월에 일본의 만주 침공이 본격화되자, 1932년 봄에 '안투(安圖)'에서 조선인 유격대를 조직한다. 김일성이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계기는 1937년 6월 4일에 있었던 '보천보(普天堡) 공격'이었다. 김일성의 부대는 관공서와 그 밖의 건물들을 불태우고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일반인이 희생됐는데, 김일성의 부대는 추격 부대와 교전하면서 무사히 퇴각했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김일성은 전국구 스타가 됐다.

 1942년, 보로실로프 근처 남야영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이 아이가 바로 김정일이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백두산 근처 밀영에서 1942년 2월 16일에 출생했다면서 밀영을 성역화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꿈에도 그리던 해방이 찾아왔다. 김일성 그룹은 9월 5일에 하바롭스크를 출발해 9월 19일에 원산에 도착했다. 해방 후 소련이 한반도 북쪽으로 들어왔지만, 제대로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소련은 북쪽을 통치하는 데 적합한 인물을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 김일성이 낙점됐다. 김일성이 대중에게 자신을 알리게 된 계기는 10월 4일에 열린 '평양시민대회'였다. 여기서 김일성은 연설을 해 대중에게 자신을 각인시킨다.

 1946년 3월 5일, '토지개혁령'이 발표된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은 토지 국유화, 소작제 폐지, 토지무상분배를 준비해 실시한다는 방침을 발표하기도 했다. 6월 24일에는 '노동법령'이 발표돼 8시간 노동제가 도입된다. 7월 30일에는 '남녀평등권법'이 공표됐고, 8월 10일에는 '산업국유화령'이 발표됐다.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건이 발표됐다. 9월 9일에는 한반도 북쪽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수상에는 '김일성'이, 제1부수상 겸 외상에는 남한 공산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박헌영'이 선출됐다.

 1950년 6월 23일과 24일에 남한에 대한 공격 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인민군의 군사 행동이 25일 새벽 38도선 전역에서 이뤄졌다. 6월 28일에는 서울이 함락됐고, 7월 7일에는 유엔에서 '유엔군 통일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인민군의 공세는 계속됐다. 한국군과 미군은 8월에 낙동강변까지 밀려났다. 9월 15일, 반전의 계기가 만들어졌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해 성공한 것이다. 이 작전으로 인민군은 총체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10월에는 한국군과 미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월 20일에는 평양을 점령한다. 이렇게 지속되던 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조인된 '정전협정'으로 일단락됐다.

 전쟁은 남과 북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다지는 데 성공했다. 1953년 3월, 박일우가 내상에서 해임된 뒤 소련계인 방학세가 후임이 돼 숙청을 추진한다. 부수상으로 강등당한 허가이는 정전협정 성립 직전인 7월 2일에 자살을 한다. 그는 박헌영 숙청에 소극적이라며 비판을 받던 인물이었다. 8월 3일, 이승엽 등 남로당계 12명이 미국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이 중 10명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당과 정부의 2인자 박헌영은 8월 5일부터 열린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다른 국내계 간부와 함께 당에서 제명된다. 남로당계, 연안계, 소련계의 우두머리들이 퇴출된 동시에 2인자들마저 사라지면서 김일성의 권위가 더욱 강화됐다.

 전쟁이 끝난 후,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북한의 재건을 도왔다. 평양 부흥은 소련이, 함흥은 동독이 담당했다. 또 다른 사회주의 국가 중국도 원조에 참여했다.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공업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고, 농업에서는 초보적인 협동화 방안이 시도되기 시작한다.

 1953년 8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중공업을 다시 일으키기로 했으나 농업협동화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이 방침은 김일성이 9월에 소련을 방문한 뒤 바뀌게 된다. 당시 소련의 수상이었던 말렌코프가 대중소비물자 생산과 경공업의 우선적 발전을 제창한 직후였다.

 1954년 3월에 열린 중앙위 전원회의에서는 경제 각료를 일신했으며, 4월에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는 '경제 부흥 3개년 계획'을 채택한다.

 1955년 12월부터 1956년 8월까지 김일성을 향한 반대파의 공격이 있었으나 실패한다. 그 결과, 1957년 7월부터 본격적인 숙청이 시작된다.

 1957년 말에는 농업협동화율이 거의 100퍼센트에 도달했고, 수공업을 포함한 공업 부문의 개인 경영도 완전히 협동화된다. 1958년 6월의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김일성은 '천리마'와 사회주의를 언급한다. 이 말이 계기가 돼 1959년부터 '천리마 운동'이 시작된다.

 1960년, 김일성은 조용히 '주체'를 선언한다. 1961년 7월 6일, 김일성은 흐루쇼프와 '북소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모두 6개 조항으로 구성됐다. 7월 11일에는 마오쩌둥과 조약을 체결한다. 이번 조약은 7개의 조항으로 이뤄졌는데, 소련과 맺은 것과 거의 같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기간이 '무기한'이라는 점이었다. 이처럼 북한이 소련 및 중국과 같은 조약을 동시에 체결해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김일성이 보여준 중소 등거리 외교와 자주 외교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1965년 4월, 김일성은 인도네시아를 방문한다. 4월 14일, 김일성은 강연에서 "주체의 사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김일성은 주체사상에 관해 연설한다. 이는 1960년에 발표된 '주체' 연설을 '주체사상' 형성의 역사 속에 위치시킨 최초의 언급이었다. 그리고 김일성 주변에서는 이미 1955년부터 주체의 입장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됐다고 간주해 '주체사상'을 전면에 내세워 역사를 쓰는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1967년 3월 17일부터 24일까지 열린 '도··군 및 공장 당 책임서기협의회'에서 김일성이 연설을 하는데, 이 연설에서 김일성은 '당의 유일사상체계'와 항일유격대의 경험을 반복해 언급하면서 이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리고 주체사상에 공적 위치를 부여했다. 12월 16일, 새롭게 구성된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유일사상체계의 확립과 항일유격대원의 모범화에 이어 주체사상이 확립된다. 이로써 새로운 국가 체제가 등장하게 됐다. 김일성이 유격대 사령관이며 전 인민이 유격대 대원인 국가인데, 이를 가리켜 '유격대국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베트남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던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미국은 패배를 회피하는 동시에 중국과 비기는 선에서 화해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1971년 7월,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했고, 이듬해 2월에는 닉슨 대통령이 방중했다. 북한은 중국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남북 대화에 나선다. 1972년 5월 2일, 한국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극비리에 방문했다. 그리고 7월 4일에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다. 성명의 주요 내용은 '외부 세력에 의존하지 않은 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과 '사상과 제도를 초월한 민족대단결의 도모'였다.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체제를 수립한다. 이에 북한도 체제 강화를 시도한다.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는 헌법 개정안을 채택한다. 이 결과, 유격대국가에 제도적 형식이 부여됐고, 수령직이 국가 주석으로 규정된다. 국가 주석의 임기는 4년이며, 최고인민회의에서 선출한다. 국가 주석은 최고집행기관을 지도하는 동시에 조선인민군의 최고사령관이자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이라는 직위를 맡게 된다.

 클리퍼드 기어츠(Clifford Geertz)에 따르면, 유격대국가는 '극장국가'다. 그는 권력이 의례를 통해 과시되면서 연극화하는 국가를 극장국가라고 칭했다. 그리고 북한의 유격대국가는 현대에 유래를 찾기 어려운 극장국가로 변했다. 유격대국가는 극장국가로서 설계사와 연출가가 필요했고, 그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수령의 아들 '김정일'이었다.

 1972년, 김일성은 환갑을 맞았다. 김일성의 주변에서는 후계자를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이 몇 년 전부터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김정일이 이에 부합하는 존재로 떠올랐다.

 1973년 9월, 김정일은 조직선전담당 당 비서가 돼 조직지도부장과 선전선동부장을 겸하게 됐다. 1974년 2월의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은 당 정치위원으로 선출됐다. 사실상의 후계자로 정식 승인받는 순간이었다. 이후 김정일은 "당 중앙"이라고 불리기 시작한다.

 1980년 10월 10일에서 14일까지 조선로동당 제6회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김정일이 정식 데뷔해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 김일성에 버금가는 지위를 부여받았고, 호칭도 "당 중앙"에서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로 바뀌었다.

 한편 이 시기 국가디자인 측면에서 '가족국가론'이 제창되기 시작했다. 이 중심에 "어머니 당"이라는 새로운 말이 위치하게 된다. 지금까지 수령을 '어버이 수령'이라 불러왔지만, 이즈음 와서는 그 의미가 '아버지인 수령'으로 변했다. 결국 수령이 아버지이고 당이 어머니라면 대중은 그 자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로써 가족에 비유한 국가디자인이 완성된다. 이는 수령과 당이 부모로서 자식인 대중에게 사랑과 온정을 베풀기 때문에 자식 또한 사랑과 충실함으로 보답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6년, 김정일은 '사회적·정치적 생명체'론을 제기한다. 이는 국가를 인체에 비유해 파악하는 방식으로, 수령이 뇌수라면 당은 심장이나 신경 중추이고, 대중은 수족이라는 의미다.

 1987년 11월 29일, 아부다비발 서울행 대한항공기가 실종된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 바레인에서 체포된 남녀가 음독을 시도한다. 이 중 살아남은 여성이 자신을 북한 공작원 '김현희'라고 밝히고 대한항공기를 폭파했다고 자백한다. 이 일로 한반도에서 긴장이 고조된다.

 긴장이 지속되는 가운데, 북한은 북일 교섭을 상황 타개를 위한 카드로 던진다. 1990년 9월 24일 '가네마루(金九), 다나베(田邊)'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한다. 9월 26일, 김일성과 가네마루, 다나베의 3자 회담이 개최됐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북일국교교섭 개시를 제안한다. 그 결과, 3당 공동성명이 9월 28일에 조인·발표된다.

 북일 교섭이 시작되자, 예비 회담 단계에서부터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 문제를 의제로 다룰 것을 요구한다. 1991년 1월 30일, 평양에서 북일 간의 제1차 교섭이 이뤄졌다. 2차 회담은 3월 11일부터 13일까지 도쿄에서 열렸다. 그러나 두 번의 교섭에서 북한과 일본은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후 미국이 핵개발 문제에 본격 개입하기 시작한다. 1991년 5월 20~22일에 베이징에서 열린 제3차 북일 회담에서 일본 측은 북한에 IAEA 사찰을 "국교정상화의 전제 조건"으로 요구했고,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을 압박했다. 북한 측은 이것이 3당 선언 위반이라며 반발했다. 추가적으로 일본 측은 김현희가 진술한, 일본어 교육 담당으로 납치된 일본 여성 '리은혜' 문제의 조사를 요구한다. 북한은 강력히 반발했다. 결국 북일 회담은 미국이 요구한 핵문제와 일본이 제기한 '리은혜' 문제로 난항에 빠진다. 이 회담 직후인 5월 28일, 북한은 갑자기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제4차 회담이 8월 30일에 평양에서 개최됐다.

 외부에서 이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때, 북한 내부에서는 1991년부터 1993년까지 김정일의 후계 구도가 완성되고 있었다.

 1993년 2월 25일, IAEA 이사회가 북한에 두 곳에 관한 특별 감사를 받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거부한다. 3월 8일에는 김정일이 준전시체제를 선언했고, 3월 12일에는 북한 중앙인민위원회가 NPT 탈퇴의 뜻을 표명했다. 그리고 5월 29일, 북한은 중거리 미사일 '로동'을 발사 실험한다. 이 일로 한반도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런데 6월 2일, 북미 고위급회담이 열린다. 미국이 양보하면서 6월 11일에 북미 공동성명이 발표됐고, 북한은 NPT로부터의 탈퇴 발효를 임시 정지한다고 선언했다. 북미 간의 대화는 계속 진행돼 7월 14일, 제네바에서 제2차 북미 고위급회담이 열린다.

 이 시기 김정일은 세 번째 국가디자인으로 '전통적국가론'을 제시한다. 이때 반복돼 나타난 기본 단어가 바로 '일심단결'이었다. 이와 관련해 '충효'를 강조했는데, 일심단결과 충효의 결합이 표현하는 것이 바로 '전통적국가관'이다.

 1993년 2월, 한국에서는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대북 정책이 강경해지기 시작했다.

 1994년 4월 19일, 북한은 영변 원자로의 연료봉 교환 작업 시 IAEA 사찰관이 입회하도록 요청하는 서한을 전송한다. 그런데 IAEA 관계자가 북한에 도착했을 때 이미 교환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6월 2일, IAEA는 사찰이 불가능해졌다고 선언했고, 10일에는 IAEA 이사회가 제재 결의를 채택했다. 6월 13일, 북한은 IAEA 즉시 탈퇴를 표명하고 제재를 선전 포고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6월 초, 당시 미국의 국방장관이었던 페리가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전쟁을 향해 치닫는 분위기 속에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다. 6월 16일, 김일성과 카터가 회담을 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은 카터로부터 전화를 받고, 북한의 핵개발 동결이 확인되면 북미 간에 제3차 회담을 열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김일성은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이로써 위기가 해소됐다. 제3차 북미 회담을 7월 8일 제네바에서 열기로 합의했지만, 7월 8일에 김일성이 심장 발작으로 사망하고 만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심장 발작으로 급사했는데, 그가 남기고 간 과제인 대미 교섭이 8월 5일에 시작돼 10월 21일 경수로 문제를 두고 합의에 이르게 된다. 북한이 모든 흑연 감속형 원자로를 동결·해제하는 대신, 미국은 2003년까지 1,000킬로와트의 경수로 2기를 제공하며, 1기를 완성할 때까지 중유를 연간 50만 톤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김정일의 계승은 정해진 일이었지만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는 곤란에 빠지고 만다. 수령이라는 직책을 계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김정일은 "위대한 령도자"라는 직함을 채용한다.

 1997년 10월 8일, 김정일이 조선로동당 총비서에 추대됐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로써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총비서가 됐는데, 이는 군이 당을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유격대국가를 대체한 이 체제를 '정규군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김정일의 후계 체제인 동시에 당시 북한이 직면했던 경제 붕괴와 식량 위기에 대응하는 체제이기도 했다.

 1998년 7월 26일, 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실시됐다. 그리고 9월 5일에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 회의가 소집됐다. 첫 번째 의제는 헌법의 수정과 보충이었다. 두 번째 의제는 국방위원회 위원장 추대였는데, 김정일이 추대됐다. 이 결과,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주석'직을, 국방위원회가 '중앙인민위원회'를 대체하게 됐다. 기타 회의에서는 총리 '홍성남' 이하 각료들을 임명했다. 이렇게 '정규군국가'가 법제화됐는데, 정규군국가는 군국가 체제이기도 했다.

 한편 한국에서는 1997년 말에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돼 이듬해 2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직후 북한에 대한 '햇볕 정책'과 '포용 정책'을 시행했다. 이 정책 하에서 현대의 정주영 회장이 북한 측과 협의를 해 금강산 관광 개발권을 따냈다. 1998년 11월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현대아산은 1999년 1월부터 6년 3개월 동안 9억 2,400만 달러를 북측에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고 3개월 동안 참가자는 2만 명을 넘었다.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 내외가 평양에 도착했다. 곧이어 남북의 두 정상은 합의에 도달했다. 이 결과,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다. 이 선언에는 남과 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담겼다. 이 해 10월, 당시 북한의 2인자였던 국방위원회 제1 부위원장 조명록이 미국으로 파견됐다. 조명록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의 회담 이후 백악관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조명록은 클린턴에게 김정일의 친서를 전했고, 그를 평양으로 초대했다. 10월 23일, 올브라이트가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과 회담을 했다. 올브라이트는 김정일이 미국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원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올브라이트는 클린턴의 방북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대통령에게 이를 제안했다. 클린턴은 올브라이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해 연말에 열린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의 조지 부시 후보가 당선되면서, 클린턴의 방북이 무산되고 만다.

 2002년, 부시 대통령은 새해 첫 일반교서 연설에서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이라고 규정했다. 또 미국은 같은 해에 켈리 국무차관보를 보내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이에 북한은 2003년 1월에 NPT 탈퇴를 선언했다. 이런 와중에 중국이 분주히 움직여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6자 회담'이 열렸다. 첫 6자 회담은 2003년 8월 27일 베이징에서 열렸고, 이듬해에는 2차 6자 회담이 열렸으나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2004년 말, 부시가 재선에 성공했다. 2005년 2월, 북한의 외무성은 부시 정권의 정책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면서 6자 회담의 무기한 중단과 핵무기 제조를 선언했다. 이로 인해 긴장이 고조되던 중, 9월에 제4차 6자 회담이 열려 '9·19 공동선언'이 발표됐다. 좋은 분위기가 무르익는 듯했으나 암초가 등장한다. 미국 재무성이 북한의 위조 달러 지폐 사용 의혹을 제기하며 마카오에 위치한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북한 계좌 폐지를 요구한 것이다.

 2006년 5월,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준비한다. 그리고 7월 5일, 북한은 장거리탄도미사일인 '대포동 2호'로 추정되는 미사일과 단거리 미사일 6발을 발사했다. 7월 15일, 유엔안보리가 제재 결의안을 채택했고, 북한은 이에 반발해 10월 9일에 핵실험을 진행한다.

 이 같은 일련의 사건을 거친 후, 2007년 10월 2일에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 회담을 했다. 그리고 그 해 연말에는 영변 핵시설 폐쇄의 상징으로 냉각탑 폭파가 이뤄졌다.

 2008년 9월 9일, 건국 60주년을 맞아 성대한 군사 퍼레이드가 거행됐다. 그런데 단상에 김정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8월 말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정보가 정확했다.

 2009년 1월 20일에는 미국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김정일은 오바마의 취임으로 북미 관계가 개선되리라 생각했다. 4월 9일, 최고인민회의가 열렸다. 이번 회의에서는 헌법 개정이 이뤄졌는데, 이는 선군체제, 즉 정규군국가에 헌법적인 틀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5월 25일, 북한은 또 다시 핵실험을 강행했다.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클린턴 전 대통령이 나섰다. 클린턴은 당시 북한에 억류 중이던 2명의 여성 저널리스트를 구하고자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났다. 두 사람의 회담은 8월 4일에 이뤄졌다. 이 일로 김정일은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되리라 생각했지만, 오바마의 태도는 냉정했다.

 2010년 3월 26일, 당시 백령도를 순찰 중이던 초계함 '천안함'이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5월 4일, 국제합동조사단은 북한군의 어뢰 공격이 원인이라고 밝혔다.

 김정일은 당시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은을 공식 데뷔시키기 위해 당대표자회를 소집했다. 이에 따라 2010년 9월 28일에 열린 로동당 대표자회에서 당시 27세였던 김정은이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등장했다.

 2010년 11월 23일, 북한군이 연평도에 포격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남북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12월 28일, 김정일의 국장이 열렸는데, 그의 시신을 실은 검은색 차량 양옆으로 김정은·리영호·장성택 등 8명이 위치했다. 12월 30일에는 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서 회의를 열어 김정은을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높이 모시었다"라고 선포했음을 발표했다.

 김정일의 사망 이후 약 4개월 동안 김정은을 중심으로 한 거당적 집단 체제가 북한을 이끌었다. 2012년 4월 11일에 열린 제4차 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을 당 제1비서,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이틀 뒤에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는 김정은을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새로운 지도자 김정은에게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런데 젊은 지도자는 정치 영역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12년 2월 29일에 이뤄진 미국과의 합의였다. 북한은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의 중지, 영변에 있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일시 정지, IAEA 사찰 허용, 정전협정 준수 등을, 미국은 적대시 정책 수정과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 영양식품 24만 톤 지원을 약속했다. 그런데 3월 16일,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 계획을 발표했다. 북한은 인공위성 발사는 미국과의 합의 내용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4월 13일에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미국은 인공위성 발사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간주하고 영양식품 지원 약속을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유엔안보리는 의장 성명을 통해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를 비판하면서 국제 사회에 제재 확대를 요구했다. 이에 북한은 2월 29일에 맺은 미국과의 합의를 파기하겠다고 밝혔다.

 대외적으로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 내부에서는 정권이 안정되는 듯 보였다. 그러던 중 7월 15일에 이르러 군부 실세였던 리영호가 군과 당에서 가지고 있던 지위를 모두 박탈당하고 만다. 리영호는 김정은이 후계자로 떠오르던 시절에 김정일이 김정은의 보좌를 위해 군 최고위직과 당 서열 2위에 앉힌 인물이다. 리영호에 대한 숙청은 김정은이 주도했는데, 이를 통해 김정은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2012년 12월 12일, 북한은 봄에 실패한 인공위성 발사를 다시 한 번 시도해 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에 유엔안보리는 이듬해 1월 22일에 만장일치로 제재강화결의를 채택했다. 북한은 이에 반발해 2월 12일에 3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핵실험 이후 3월 31일, 북한에서는 핵무장과 경제 건설을 동시에 추진한다는 '병진 노선'을 채택했다.

 김정은의 지위는 날로 공고해졌다. 유일영도체계가 가속화되면서, 내부의 긴장이 외부로 표출될 가능성이 제기됐다. 당과 정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실세로 자리매김한 장성택과 김정은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김정은은 11월 30일에 백두산 기슭에 있는 삼지연 전적지를 시찰한다. 아마 여기에서 김정은은 장성택을 숙청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그리고 12월 8일, 장성택이 강제 연행돼 당과 정부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는 동시에 당에서 제명되고 만다. 12월 12일,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에서 장성택에 대한 사형 판결이 선고돼 곧바로 집행됐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 정변은 2인자 제거를 위한 조치로, 결국 김정은은 처음에는 리영호를, 나중에는 장성택을 숙청하면서 유일영도체제를 굳히고 북한을 이끄는 공식적인 지도자가 된다.

 현재 남북미 관계가 기로에 서 있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3국의 선택이 모두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3국의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항상 갈등과 평화가 교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가운데 한반도 비핵화라는 과제의 주요 주체 중 하나인 북한이 역사 속 주요 국면에서 어떠한 선택을 해 왔는지 아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고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향후 북한이 할 선택과 이로 인해 조성될 상황을 예측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문제 해결에 필요한 힌트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역사를 가리켜 북한을 분석·예측할 수 있는 하나의 강력한 도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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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스포트라이트 : 렌티큘러 스틸북 넘버링 한정판 - 아웃케이스+보호홀더+부클릿(36p)+접지포스터+포토카드(5EA)+한정카드
톰 맥카시 감독, 마이클 키튼 외 출연 / 더블루(The Blu)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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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보스턴의 유력 일간지인 보스턴 글로브의 새로운 편집국장으로 마티 배런(리브 슈라이버)’이 부임한다. 부임 후 열린 첫 회의에서 마티는 한 제보를 언급한다. 그 제보는 게오건 신부가 30년간 6개 교구에서 아이들을 성추행했고, 로 추기경이 이를 알고도 묵인했다는 내용을 담은 문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 사건은 이미 보스턴 글로브가 기사화했던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마티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보스턴 글로브의 집중탐사보도팀인 스포트라이트에 이 사건에 대한 심층 취재를 요청한다. 이렇게 스포트라이트 팀은 팀장인 월터 로빈슨(마이클 키튼)’의 지휘 하에 본격적인 취재에 돌입하고, 취재를 거듭할수록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거대하고 추악한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 스포트라이트20021월에 보스턴 글로브의 스포트라이트 팀이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기사화하기까지 거쳤던 과정을 담고 있다. 2015년에 개봉한 이후 ‘2016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각본상등을 수상한 이 작품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진실을 찾아가는 기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참된 언론인의 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기자를 정의의 사도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기자로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로 표현한다. 화려한 기교나 심리 묘사도 없었다. 이 덕분에 기자들이 진실을 찾아가는 하나하나의 과정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은 기사 게재 직전 열린 마지막 편집회의에서 나온 월터의 모습이었다. 월터는 회의에서 이미 몇 년 전에 성추행 피해자들과 그들의 변호인이 관련 자료를 보스턴 글로브에 넘겼음에도 자신들이 이를 덮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덮었던 사람이 자신이라고 고백한다. 이 장면에서 언론인으로서 월터가 느끼는 자기반성부끄러움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모든 언론인이 가져야 할 덕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기자도 사람이기에 실수를 할 수 있다. 월터 역시 사람이기에 잘못된 판단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쓴 기사가 잘못 됐거나 좀 더 비중 있게 실어 공동체의 주의를 환기시켜야 할 내용을 제대로 다루지 않은 것에 월터처럼 진심으로 반성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기자가 몇이나 될까? 이는 대중으로부터 '기레기'라는 말까지 듣고 있는 현재의 한국 기자들에게 시시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기자를 자성 능력이 없는 일종의 기레기로 몰아가서는 안 되며, 대중의 언론 혐오에 지나친 면이 존재할 수 있다는 데도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에 왜 기레기라는 말이 생겼으며, 왜 많은 사람이 언론에 불신을 표하는지를 언론인들이 먼저 살펴보는 것이 순리이지 않을까?

 지난 11일에 방송된 JTBC 뉴스룸 신년 토론의 주제는 한국 언론, 어디에 서 있나였다. 이 토론에서 자주 언급된 문제가 바로 기성 언론을 향한 대중의 불신이었고, 이와 관련해 4명의 패널이 불꽃 튀는 논쟁을 주고받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것이 생긴다. 대중으로부터 불신의 대상이 돼 버린 언론이 신뢰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는 구조적인 측면과 언론인 개인적인 측면이 있을 것이다. 이 중 언론인 개인에 한정해서 보자면 자신의 기사에 책임을 지려는 자세, 즉 자신의 판단과 기사가 잘못 됐을 시 월터처럼 반성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보면서 영화에 담긴 핵심 메시지 중 하나가 바로 이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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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김보라 쓰고 엮음, 김원영, 남다은, 정희진, 최은영, 앨리슨 벡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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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는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기에 관심이 많은 여중생이다친구를 사귀는 데도 서툰 은희에게는 같은 한문학원에 다니는 지숙과 남자친구 지완, 이 두 명만이 친구다부모님과 언니 수희오빠 대훈으로 이뤄진 집안에서 은희는 관심 밖 대상이다이 중 대훈은 아버지에 이어 집안 서열 2위로은희에게 폭력을 일삼는다이러한 오빠의 폭력은 은희에게 무력감을 준다그러던 어느 날은희가 다니는 한문학원에 김영지라는 새로운 선생님이 부임한다수업을 들을수록 은희는 영지에게 호감을 느끼고영지 또한 은희를 좋아하면서 한 인격체로 존중해준다둘은 점차 가까워지고은희가 영지에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민을 토로하면 영지는 그에 맞는 자신만의 답을 해준다. 영지의 조언을 들으면서 은희는 점차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을 허물어 간다그리고 1994년 그 날은희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해가 하나쯤은 있을 것 같다. 이와 관련해 김보라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 시나리오로 구성된 소설 <<벌새>>는 주인공 은희의 입장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해인 1994년을 표현했다1994년은 김일성이 사망한 해였던 동시에 성수대교가 붕괴돼 한국 사회 전체에 충격과 슬픔을 안겨준 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외에도 여러 일들이 1994년 한 해 동안 벌어졌다. 여중생 은희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처럼 다사다난했던 1994년을 살아냈다.

 한편 은희에게 1994년은 자신의 무기력했던 세계관을 깨뜨리고 성장하기 위해 발버둥친 시간이기도 했다. 마치 날기 위해 1초에 아흔 번 날갯짓을 하는 벌새처럼. 은희의 힘없는 세계관은 오빠의 폭력, 부모의 무관심, 학벌 지상주의에 점철된 학교 등으로 인해 생겨났는데, 이를 깰 수 있도록 추동한 존재가 바로 영지였다. 영지는 은희의 고민을 들을 때마다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등의 말을 하며 은희의 벗이 됐다. 영지의 여러 멘트 중에서 은희를 가장 크게 뒤흔든 말은 단연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마!”였을 것이다. 이는 자신을 향한 갖가지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라는 의미로, 이 말을 들은 은희는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는 오빠 대훈에게 처음으로 큰소리를 내며 반항한다. 이로써 은희는 그간 오빠의 폭력 앞에 무력했던 자신의 모습을 집어 던질 수 있었다.

 은희가 기존의 세계관이라는 알을 뚫고 나오는 동안 성수대교가 무너진다. 그리고 이 참사는 은희가 믿고 의지했던 인물의 상실을 불러온다. 이제 더 이상 은희는 그에게 질문을 할 수도 없거니와 답을 얻을 수도 없다. 이 때문에 1994년은 은희에게 그동안의 무기력했던 세계관을 허물고 성장하기 위해 벌새처럼 날갯짓을 한 해이면서 자신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을 잃은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은희가 무너진 성수대교를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부분에서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은희에게 1994년은 알을 깨고 나온 시기였을까 아니면 소중했던 한 사람을 잃었던 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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