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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박현희, 뜨인돌, 2011.06.30.) 

  그간 신간평가단에서 읽는 사람을 압도하는 무거운 책들을 다루게 되다보니, 독서가 즐거운 유희이거나, 혹은 삶을 깨우는 경이로 다가오기보다는 마치 숙제 같아진 점이 있었다. 물론 즐거움과 경이로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독서와 서평 쓰기를 힘겨워한 것은 순전히 나의 부족함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라는 다소 가벼운 제목의 이 책은 제목 만큼이나 발랄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익숙한 전설, 민담, 동화들을 구성하는 비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 그 의문은 동화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의문을 제기한 바로 우리들 자신을 향한다. 우리의 삶이, 사회가, 현실이 어떤 곳인가? 라는 질문.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간 동화가 비합리적이고, (해리포터 같은 최신 저작에 비해) 낡은 것으로 치부되어 온 경향이 없지 않은데, 이제 전래동화라고 하는 고전 중의 고전이 새롭게, 비판적으로 독해되면서 진정 공통적인 것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탐색되고 있다. 

 

아렌트 읽기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서유경 옮김, 산책자, 2011.06.03.)

  아렌트가 현대 사유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들 한다. 우리 나라에도 아렌트에 대한 연구가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렌트에 대한 해석이 다양해서 초보자로서는 전념하여 읽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렌트의 뛰어난 제자인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의 아렌트 해설서가 번역 소개된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확신의 함정 (금태섭, 한겨레출판사, 2011.06.28.)

  이번달 신간평가단 도서로 꼭 선정되었으면 하는 책 중 하나이다. 지금은 그 동안 근대 민주주의 정체를 떠받쳐왔던 삼권분립의 이상이 흔들리는 시대이다. 과거 신자유주의 개혁 몇년간 행정부의 팽창과 의회의 과소화 등이 이야기되며 민주주의의 원칙이 근본부터 의심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민주주의의 원칙이 흔들리면서 사소한 문제부터 결정적인 쟁점까지 정치권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법적 판단에 의지해 왔다. 미네르바 사건 같은 경우에도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 세력 간의 논쟁과 시민 사회에서의 합의를 통해 결론을 냈어야 할 문제였다. 언론법 개정 역시도 정치권은 스스로 정치의 논리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최종 판단을 헌재에 맡겼다.  

  그런데 문제는 법정 역시도 그리 확실한 진리의 담지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각종 현안 재판에서 정치권력의 입김이 작용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더 나아가 법정은 과학도 인격도 양심도 모든 걸 다룬다. 그것도 확실성이란 범주로. 최근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백혈병 피해보상 재판을 보면 사법부는 불확실한 것에 대해 확실성을 요구하는 근대적 지평에 머물러 있다. 현실은 근대성을 초과하는데 정작 첨예한 사안을 다루어야 하는 법정은 현실을 못따라잡고 있다. 당시 그 재판에도 관여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이 부분은 확실하진 않습니다) 금태섭 변호사의 이번 책이 무척 기대된다. 

 

휴버먼의 자본론 (리오 휴버먼, 김영배 옮김, 어바웃어북, 2011.06.24.)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 비판은 하나의 유행이 된 것 같다. 보수적인 정치세력 역시 자본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보스 포럼에 모인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지도자들과 거대 초민족적 기업의 CEO들 역시도 지속 가능한 발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런 비판은 크게 두 흐름으로 분류된다. 경제학 내에서의 비판이다. 스티글리츠 등 주류 내에서 자본의 비윤리성, 파괴성, 난폭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한 흐름은 경제학 자체에 대한 비판, 즉 맑스의 경제학 비판을 잇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흐름에 따라 맑스의 이론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많은 해설서들이 나왔다.  

  그 와중에 약간 뒷북으로도 보이는 <휴버먼의 자본론>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저자가 바로 리오 휴버먼이기 때문이다. 앞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를 대학생 새내기 시절에 읽은 적이 있는데, 이해하기 쉽고 재밌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그 책을 다시 읽으면서 치밀한 구성과 다양한 사례를 구성하는 성실성에 새삼 놀랐고, 후배 등에게 선물할 일이 생겼는데 마땅한 선물을 못 고르면 그 책을 선물하곤 했다.  

  이번엔 아예 제목에 '자본론'이 들어가 있다. 지난 저작에 비추어 봤을 때 단순히 <자본론>을 쉽게 해설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현실의 다양한 사례를 접목시키고, 더 나아가 현실을 재구성하는 그의 장점이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 

 

현대자본주의와 생명 (맑스코뮤날레 조직위원회, 그린비, 2011.06.02) 

  맑스코뮤날레는 한국 맑스주의 연구와 실천의 성과이자 치열한 현장이다. 이곳에서 무슨 논의들이 오갔는지를 기웃거리는 것만으로도 세계 정세와 한국의 현실이 어떠한지 접근할 수 있을 듯하다. 맑스코뮤날레 논의 내용이 나오는 것은 알았지만, 언제부터 이렇게 정식으로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코뮤날레 후의 결과물들을 종합해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특히 이번 코뮤날레의 핵심 키워드는 '생명'인 것 같다. 과거는 자본주의에서 '생태'의 문제에 많이 관심을 기울였었는데, 이제는 생태를 초과하여 그 근원적인 원리인 '생명'으로 논점이 진행된 듯하다. 들뢰즈에 대한 인기로 한때 생명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그 때는 너무 추상적이고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몰랐었는데, 이제는 가치, 정치, 존재, 여성주의 등 다양한 토픽들과 어우러져 '생명'의 문제를 더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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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아담의 오류-던컨 폴리의 경제학사 강의(던컨 폴리 지음, 김덕민/김민수 옮김, 후마니타스, 2011.05.02.) 

 지난 달 신간추천 페이퍼를 작성할 때부터 눈여겨봐뒀던 책인데, 이 책이 아슬아슬하게 5월 출간도서에 속하는 바람에 한달을 기다리다가 이제야 추천하게 되었다. 최근 몇년 사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쉬운 해설서들이 많이 출간되었지만, 그 이전에는(그것이 불과 몇년전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새삼 놀랍지만) 대학교 1, 2학년생들이 쉽게 이해할 만한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에 관한 해설서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던컨 폴리의 책을 누군가 번역한 파일이 손에서 손으로 돌면서 읽히곤 했었는데, 내가 봤었던 것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에 관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누가 봐도 이해할 만한 방식으로, 참으로 명쾌하게 쓰인 글을 보면서 우리나라에도 이런 책이 나왔으면 하고 바랐었다. 

 그만의 장점이 이 책에도 적용되었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경제학사 전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마르크스의 경제학에 대한 서적이 많이 출간되었고, 많이 읽혔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은 독자적인 경제학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학 비판으로 존재한다는 점이 간과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던컨 폴리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경제학사를 검토하는 것이야말로 경제에의 이데올로기인 경제학에 대한 비판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본령을 밝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데리다 평전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인간사랑, 2011.05.20.)

 흔히 '해체의 철학자'로 불리는 데리다. 하지만 그의 삶 속에는 20세기 지성사가 '종합'되어 있다. 

 

 

 

 

 

 

 

통치성과 자유 (사카이 다카시 지음, 오하나 옮김, 그린비, 2011.05.25.) 

 인지자본주의의 시대, 우리는 어떻게 통치당하고 있는가? 조정환의 <인지자본주의>와 이 <통치성과 자유>는 동일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조정환의 책이 '자본'에 대해서, 즉 생산과 재생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면, 이 책은 '통치'에 대해서, 즉 지배와 저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다. 사실 현 시대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한다면, 모든 것들은 같은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지자본주의>가 지난 달에 선정된 김에 이 책 역시 함께 선정돼서 같이 다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1492년, 타자의 은폐 (엔리케 두셀 지음, 박병규 옮김, 그린비, 2011.05.20.) 

 그린비의 트랜스 라틴 총서의 다섯 번째 책. 이 책은 "타자의 은폐"라는 제목과 달리 "타자"를 발명하는 유럽적 사고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추적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리고 그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은 타자의 관점, 즉 억압받고 수탈당했던 이의 관점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1492년은 상징적이다. 그들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타자를 발명'한 것이다. '타자를 발명'했다는 것은 '타자를 타자로서 발견'했다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동일자로 은폐'시키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이 바로 근대성이라고 한다.   

 사실 근대성에 대한 비판은 이제 지겹도록 수행됐다는 느낌이 있다. 근대성이 극복되느냐 안되느냐를 떠나서 이런 '지겨움'은 그 자체로 매우 무서운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관심이 가는 이유는 그런 근대성 비판이 서구의 최신 이론의 세례를 통해 형성된 조류이며, 그런 고답적인 논의구조 속에서 오히려 구체적인 물적 존재는, 그러니까 근대성의 최대 피해자이며 피-수탈자였던 그런 물적 존재와 삶들은 오히려 은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물적 삶과 언어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것이 이 책이 '역사'의 형식을 띄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최신 지성의 살아있는 말보다 영어 한마디 할줄 몰랐던 남미의 어느 원주민의 죽은 말이 더 생생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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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1-06-1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데리다 평전을 추천했는데.. 괜스레 막막한 기분입니다. 이번 책이 너무 어려워서... 한 달 쉬어가는 책 없나, 하는 생각도 들고...

어떻게 2011-06-12 11:4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같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 생각하면서도 추천 페이퍼 쓸 때는 욕심이 앞서 버리는 것 같아요.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이번 4월 한달 간 출간된 신간 도서 중 인문/사회/과학 분야 중에 관심이 가는 책 다섯 권을 선정해본다. 

1.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정정훈, 그린비, 2011.04.19.)

  얼마 전 좋은 입문서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 봤었다. 우리나라에 단 하나의 좋은 입문서를 고르라고 한다면, 난 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를 꼽겠다. 이 시리즈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입문서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좋은 입문서의 역할을 지금껏 해내고 있다. 

  이 시리즈는 고전을 현대적 감각으로 '다시 쓰기'를 시도한다. 맑스를, 칸트를, 니체를, 장자를 현대 철학의 다양한 면들과 접촉시킨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현대 철학에 오염된 고전이라고 보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이런 오염이 반갑다. 사실 오염(?)된 것은 고전이 아니라 이 현실이다. 역사는 흘러갔다. 그들이 그 고전을 썼을 당시의 문제틀, 이데올로기는 변형되었다. 푸코 식으로 말하면 그 책과 현대의 독자들은 다른 '에피스테메'를 딛고 있다. 그 간극을 무시하고 텍스트에 무조건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고전을 죽이는 길이다. 

  열네 번째 리라이팅 클래식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한 것이다. 저자 정정훈은 이를 맑스주의의 전통 속에서 재술한다. 이미 그람시, 알튀세르 등을 통해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위대한 유물론의 전통이라는 흐름 속에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에 대한 일반의 통념은 권모술수와 처세의 사상가로 인식되는 것이 지배적이다. 이것은 이론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마키아벨리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라는, 현대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철학보다는 처세술이 필요한 시대인가?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과 함께 그런 시대는 저물고 있다. 마키아벨리를 새로운 지적 전통과 결합시키는 것이 시대의 새로운 요구이다. 이 책의 저자 정정훈이 마키아벨리를 혁명적 맑스주의와 어떻게 마주치게 할지 사뭇 궁금하다.  

 

2. 국민과 서사 (호미 바바 엮음, 류승구 옮김, 후마니타스, 2011.04.22.)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과 더불어 탈식민주의 3대 이론가로 불린다는 호미 바바. 하지만 난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3대 기타리스트니, 4대 미드필더니 하면서 이런 식으로 클래스를 구별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호미 바바의 이론이 에드워드 사이드나 가야트리 스피박과 어떤 차별점을 보일지 기대되고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의 탈국가화 추세는 근대질서에 대한 저항이 기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 체제 자체의 한계와 모순으로 촉발된 것이고, 그러한 위기들에 대한 무능력으로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추세를 마냥 손 놓고 환영할 수만도 없는 것이, 여전히 칼자루는 '그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형성된 '네이션' 체제가 제국주의 시대가 종결되고(제3세계 식민지의 대대적인 독립) 미국 중심의 새로운 질서 이후에도 변형된 형태로 유지되었던 것처럼, 새롭게 변형된 '네이션'체제에 다시금 갇히게 될 수도 있다. 현 추세를 촉발시킨 것은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패배'에 가까운 것이지만, 이렇게 새롭게 열린 공간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적극적으로 사고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3. 상대성이란 무엇인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김영사, 2011.04.25.)

 상대성 이론 만큼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이론도 드물다. 아인슈타인을 이역만리 작은 나라의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세계적 유명인사로 만든 상대성 이론은,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감히 도전하기에는 왠지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다. 아마도 우리나라 출판물 중 자연과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출간된 입문서가 상대성 이론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상대성 이론에 대한 대중의 흥미는 상당하다는 뜻이다. 다만 이해가 안돼서 그러지..

  하지만 상대성 이론이 단지 과학계 뿐 아니라 지성사 전체에 끼친 영향력을 고려해봤을 때, 우리는 이미 저도 모르게 상대성이란 지평 위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신간평가단에서 과학 분야가 인문/사회 분야와 함께 다뤄지면서 과학 분야 책이 홀대받는 경향이 있다.(물론 출간되는 책 자체가 인문/사회에 비해 적은 탓도 있지만) 나 역시 과학에 문외한이지만 한번 읽어보고 싶다. 아인슈타인은 재밌고 명쾌한, 새로운 방식의 강의로도 유명했다. 강연집 형식을 띄는 이 책 역시 명쾌하고 재밌기를 바란다.  

 

4.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1980년대 대학의 하위문화와 대중정치(김원, 이매진, 2011.04.25.) 

  1980년대의 대학 문화와 학생운동을 더듬어 가는 이 책은 "잊혀진 것들"에 대해 기억하자고 말한다. 스스로가 386세대인 저자는 그 시대를 트라우마라는 측면에서 다시 돌아보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 세대에게 그것은 '잊혀진 것들'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단절된 것들'에 대한 기억이다. 유난히 질곡이 많은 우리 현대사 때문인지, 아주 가까운 과거조차도 우리에겐 너무 아득하게 느껴진다. 해방과 분단, 전쟁과 혁명, 독재와 민주화라는 숨가쁜 일련의 과정 아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체제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불과 2,30년이 지난 가까운 과거와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68세대의 극복이 포스트 68세대를 통해 이루어지는 서유럽과 달리 386세대에 대한 비판은 새로운 세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386 그들이 물리친 구시대의 유령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저자는 기억의 정치를 말한다. 과거를 복기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며, 앞으로 나아갈 지향점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세대는 역사와 기억에 대해 너무 무책임(무기력)해왔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기억을 해야 한다.  

 

5. 기억의 공간 -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알라이다 아스만, 그린비, 2011.04.25) 

   주목 신간도서로 선정할지 말지 무척 고민한 책이다. 단순히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책이 아니라 신간평가단 리뷰 도서의 1차적인 후보군을 고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싸고 두꺼우며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는 점은 은연중 선정을 꺼리게 만든다. 교양서보다는 학술서에 가까운 책은 가급적 제한하려고 했다. 이번 선정 목록 중에서는 앞서 추천한 호미 바바의 <국민과 서사>가 이미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이 책을 굳이 선정한 것은, 바로 위에서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을 선정하면서 발견한 고민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기억에 대해 너무 무책임해왔던 것은 아닐까? 정확히 말하면 기억에 대해 너무 무기력해왔던 것은 아닐까? 기억이라는 것이 기성 권력, 기성의 지식, 특히 미디어에 점령당하는 것은 비단 우리들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런 기억의 점령에 너무 무기력하게 방관해온 것은 아닐런지 다시금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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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다른 사람처럼 열정적인 독서가도 아니고, 성실하게 서재를 가꿔온 것도 아닌데, '이제 열심히 책 읽기로 한 것 나도 한번 신청해볼까?'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9기 신간평가단에 지원했다가 덜컥 뽑히고 말았다.  첫 번째 미션, 3월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 만한 신간도서를 선정하는 과제조차도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이러다 또 망칠라.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주목 신간도서를 선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3월이 특별히 주목할 만한 책들이 많이 발간된 달도 아니지만, 읽고 싶은 책은 언제나 넘쳐나는 법이다. 그 중에서 5권만 추려내는 것은, 유난히 우유부단한 나로서는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읽고 싶은 책의 목록에서 한 권, 한 권 지워나가려 했지만 차마 잘 지워지지 않는 책들로 목록은 쉽게 줄어들지 않고 작업은 제자리 걸음만 하다가, 과감하게 기준을 세웠다. '내가 추천한 도서가 선정될 수도 있는데 괜히 욕심에 내가 감당하지 못할 책들을 골랐다가 낭패를 볼라'하는 걱정에 내 능력으로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들만 고르기로 했다.  

  그래도 어렵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겨우 선정한 도서는 이렇다. 

 

1. 언어의 감옥에서-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서경식, 돌베개, 2011.3.28.)  

  서경식의 책들은 제목으로 사로잡는다. 무슨 책인지도 모르고 제 목에 이끌려 책을 훑어보면 그제야 서경식의 책인지 알게 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언어의 감옥에서>... 대체 무엇이 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언어를 하나의 '감옥'으로 만들며, 무엇이 그를, 그리고 우리를 언어라는 감옥의 '수인'으로 만드는가.  

  일본에서 나고 자랐으나,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여받았고, 그러나 조선어를 박탈당하고 일본어를 모어로 부여받음으로 모든  사고와 표현을 일본어로 해야 하는...  

  그는 자발적인 '경계인'이 아니라, 강제된 디아스포라, 말 그대로 '추방당한 이'다. 언어는 벽이 아니라, 감옥이며, 단절이 아니라 은폐다. 따라서 그가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낼 때, 우리는 그의 독자가 되어야만 한다. 

 

2. 문자와 국가-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8(가라타니 고진, 도서출판b, 2011.3.30.) 

  첫째 도서에 이어 공교롭게도 둘째 역시 일본어로 쓰여진 책이다. 위 책이 소수자임을 자처하는 재일조선인이 쓴 것이라면, 이 <문자와 국가>는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사상가가 쓴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원서 제목은 <전전의 사고>였으나 국내에는 전전(戰前)이란 용어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말에 저자가 직접 <문자와 국가>로 제목을 변경했다고 한다. 네이션, 국가, 문자(서경식에는 문자가 아니라 언어이지만) 등 공교롭게도 앞서 고른 서경식의 책과 상당한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함께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특히, 책 소개에 나와 있듯이 고진은 강연자로서도 명성이 자자하니 강연집이란 형식에 특히 기대가 되기도 한다. 

 

3. 꾸리찌바 에필로그(박용남, 서해문집, 2011.3.30) 

  대학 시절, 후배들과 생태주의 세미나를 해보자고 무작정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정치철학이나 경제학, 역사 같은 것은 잘 기획된 커리큘럼이 공유되고 있었지만, 생태주의 세미나는 당시 아무것도 없이 막연히 시작한 것이었다. 난 자료를 만들려고 도서관에서 책 수십권을 쌓아놓고 뒤졌다. 좋은 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가장 어려웠던 것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하며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줄 무언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태주의를 논하며 회귀적 혹은 역행적 주장에 쉽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물론 그런 자료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내가 찾지 못한 것이었지만) 

  현 세계체계가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생태적 전환이 시급히 요구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공감에도 불구하고 생태적 관점에서 수행되는 비판은 때때로 너무도 무기력해 보이곤 한다. 지금 더 필요한 것은 '비판'이 아니라 '희망'이다.  

 

4. 현대자본주의와 장기불황-새움 총서 2(김성구 엮음, 그린비, 2011.3.15) 

  <맑스주의 역사 강의>에 이은 새움 총서 두 번째 책이다.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의 충격 이후에 많은 출판사들이 지금의 경제위기를 진단하는 책들을 앞다투어 출판했었다. 물론 대중의 관심에 영합하여 성급히 내놓은 책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의 위기를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공동의 문제의식이 형성되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출판계는 학술과 언론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어떤 학술계, 언론계보다 사회적 책임의식이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 역시 그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경제위기 붐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지금, 당시의 충격, 공포, 열광 등을 포괄하여 반성적으로 고찰하는 역할도 맡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출판사와 저자에 대한 믿음 아래, 자본주의 공황론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소개받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5. 서양 고대 중세 정치사상사(전경옥, 책세상, 2011.3.20.) 

  우리나라 같은 경우 출판계에서 철학 분야 서적에 대한 편식, 내지는 편향이 유난히 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곤 한다. 인기 있는 현대철학자들에 대한 번역 및 소개는 활발한 반면, 고대, 중세 철학에 대한 국내 연구의 업적은 외면받는 경향이 있다. 출판도 사업인 만큼 시장 논리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현대 프랑스철학자들의 책이 엄청난 수익을 내는 것도 아닌 만큼 꼭 시장 논리로 설명되는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사정이 이렇다보니 서양의 고대, 중세철학에 대해서는 대중들의 관심이 사라지고 있다. 그 시기 나름의 다양한 사상사적 맥락들이 모두 '죽은 과거의 형이상학'으로 단순화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비록 엄밀한 의미의 철학은 아니라 하더라도 국내 연구자가 우리말로 쓴 고대, 중세 정치사상사가 쓰였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소식이다. 이번 신간평가 도서로 선정되지 않더라도 꼼꼼히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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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는 이제 곧 사회진출을 앞둔 친구들이 많은데, 그들을 만나다보면 걷잡을 수 없이 뿜어져 나오는 우울의 기운에 견디기 힘들 정도이다. 가끔 만나서 소소한 잡담과 일상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술이 한잔 두잔 들어가다 보면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어찌할 수 없다. 그래도 서울에 있는 명문 사립대 출신들이니 그나마 유리한 위치가 아닌가 싶어서 괜한 엄살이라고 치부해버리려 하다가도, 그들의 고민을 가만히 듣다보면 사실 문제가 좀 복잡하다는 걸 새삼 느끼곤 한다. 

  자기들도 배울 만큼 배웠고, 책도 꽤 읽었다고 스스로 위안하는데, 그렇게 알고 있는 것과 자기의 진로가 서로 모순되니 그게 또 은근히 스트레스인 것이다. 책에서, 세미나에서, 가끔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때로는 술자리에서, 그리고 어떨 때에는 거리에서, 권력을 비판하고 사회의 진보를 이야기 했건만, 이제는 그런 권력에 편입되어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괜히 술잔을 부딪치며 위로를 주고받지만, 뻔한 말들뿐이다.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스스로일 뿐이라는 걸 새삼 깨닫곤 한다. 지금 당장 자기 앞에 닥친 이 우울에 대해 대답을 내놓으며, 나도 그들도 나름대로 스스로를 위안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자기 위안에는 깊은 체념과 허무주의의 정서가 있다. 친구를 막 위로하다가도, 막상 친구 입에서 스스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을 때는 나도 모를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왜 이런 자기 위안을 거쳐야만 하는가? 왜 스스로 자기를 납득하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가? 왜 한번은 체념해야만 하는가?  

  나는 이것이 마치 하나의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한다. 이제 앞으로 닥칠 불의와 부조리에 대해서 역시 눈감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인가? 우리들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뻔한 일이다. 세상이 얼마나 불합리한 곳인지, 불의가 판치는 곳인지, 그리고 얼마나 세련되게 자신들을 포장하고 감추고 있는지. 그런 불의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의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지난날 백신을 접종했었기에 더욱 쉽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이다. 하고 더욱 쉽게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인가? 

  체념과 허무주의라는 이 정서, 그러니까 우리 사회 혹은 우리 세대를 광폭하게 휩쓸고 있는 이 정서가 불의와 부정의, 부패, 기득권, 등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과 밀착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이는 이런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대응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들이 만들어낸 구조적 재생산의 한 미시적 과정이다. 체념과 허무주의, 그리고 냉소 없이는 결코 지금의 지배적 질서가 유지될 수 없다.  

  거대 자본이 횡포를 부릴 때, 온갖 편법을 통해 지배층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할 때, 국가가 극심한 불평등과 인간 존엄성의 파괴를 외면하려고 할 때, 그들은 정교한 논리로 무장하여 대중들을 설득하거나, 혹은 언론을 통제하여 사실을 감추거나, 혹은 검찰이나 경찰 같은 강력한 물리력을 통해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려기보다는(물론 그렇게 한다) ‘뭐 어쩌겠어’, ‘원래 그런 것 아니냐’ 같은 대중들의 폭넓은 체념과 냉소, 허무주의에 의지한다.  

  따라서 우리는 허무주의에 맞서지 않고는 사회의 부정의에 대항할 수 없다. ‘뭐 어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제시해주는 정치세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허무주의에 대항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허무주의가 우리의 적이라고 선언하는 것뿐이다. 체념과 냉소, 허무의 정서가 어떻게 기존의 지배질서를 강화하고, 어떻게 사회적 불의를 용인하게 만드는지 폭로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무언가를 어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직’ 못 찾는다 하더라도 나 스스로가 허무주의적 태도를 갖는 것을 경계하게 해야 한다.  

  올해 초 나온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를 최근 다시 읽으면서, 다름 아닌 바로 이 진리를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이렇게 외친다. 
 

 

 

 

 

 “체념과 냉소를 전염시키는 일 역시 부패의 공범이다!”  

 

  김용철 변호사가 어떤 삶을 살아왔든, 과거 어떤 짓을 저질렀든, 그의 사람됨이 어떻든, 이 책은 오직 하나, 그가 삼성이라는 거대한 산 권력 앞에서도 질식하지 않고, 끝내 체념과 허무를 이겨내고, 자신의 불의한 양심으로 진실을 고백했다는 바로 그 사실 하나로, 충분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우리는 읽어야 한다. 거대한 권력 앞에 철저히 짓밟힌 사람이 어떻게 허무와 체념을 극복했는지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초인적인 용기와 의지가 아니다. 우리가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오히려 겸손해지는 것이다. 허무주의의 밑바닥에는 우리가 세상의 본질을 알고 있다는 듯한 지적 만용이 있다.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다. 안 봐도 안다. 원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눈앞에 말도 안 되는 불의가 펼쳐졌을 때 거기에 놀라고, 경악하고, 분노하지 못한다.  

  허시먼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에서 날카롭게 분석했듯이 무용 명제(뭘 해도 소용없다, 바뀌지 않는다)는 사회에 대한 과학적 법칙을 발견했다는 자만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세상을 어떻게 바꿔보려고 몸부림치지만, 그건 잘 모르고 하는 말이야. 원래 세상은 이렇게 이렇게 굴러가도록 설계되어 있어. 소용없는 일이야. 이런 지적 만용은 일반 이론의 거죽을 덮어 쓰고 말하지만 곧바로 냉소와 체념, 허무주의를 불러온다. 그러나 자신들이 발견했다고 자신했던 그 과학적 법칙이란 언제나 그 발견자를 배신하곤 했다. 세상이 어떻게 퇴보할 지, 어떻게 발전할 지에 대해선 모르는 것이다.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에 실린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의 추천사처럼 허무주의는 우리의 적이다. 허시먼이 무용 명제의 모욕적 속성에 대해 분석했듯이 사회의 불의에 대해 허무주의보다 좋은 보약은 없다. 

  그러나 허무주의는 어느 날 저절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 말을 경청함으로 손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허무주의가 바로 우리의 적이라는 것, 허무주의가 바로 내가 냉소하는 그것을 더 강화시킬 것이라는 것, 체념하고 냉소함으로써 나 역시 사회적 불의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바로 그렇게 허무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아무 희망도, 아무 가능성도 없는 암울한 현실에 놓여 있더라도, 아무 희망도 가능성도 없는 채 나 자신의 허무주의를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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