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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철학 분야에서 잘 나가는 저자 중에 강신주가 있다. 처음 강신주를 알게 된 것은 <철학, 삶을 만나다>를 통해서였는데, 루이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이나, 알랭 바디우의 ‘보편’ 같이 난해한 개념들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 이런저런 것들을 접하다보니 당시의 책에 적힌 내용들이 상당히 일면적이고, 약간은 자의적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책의 장점은 가족, 사랑, 국가 같은 일상적인, 혹은 현실적인 주제들과 철학적 개념들을 조화롭게 풀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철학, 삶을 만나다> 이후, 강신주의 전공이기도 했고 학위 주제이기도 했던 노자철학과 장자철학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담은 몇 권의 책을 훑어보면서 더 흥미를 느끼게 됐고, 대학에서 저자의 수업을 두 개 수강하고, 서로 다른 극단적인 성적을 받기도 했다. 첫 번째 수업을 들을 때만 해도 별로 알려지지 않고 인기가 없었는데, 다음 수업에서는 넓어진 강의실과 몰려든 수강생을 통해 저자의 달라진 인기와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목차가 가장 매력적인 

  동서양의 다양한 사상가를 아우르는 폭넓은 이해와 꾸준한 저술, 강단 안팎을 넘나드는 다양한 강의로 현재의 ‘인문학 붐’을 주도하고 있는 저술가 중 한 명이지만, 최근의 저작들을 볼 때는 기존의 성공을 답습하는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이름만 들어도 골치 아프지만 때로는 지적 욕구를 자극하는 철학자들과 난해한 개념들을, ‘쉽게’, ‘대중적으로’ 풀어쓰는 교양서가 저자의 주무기였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요구와 출판사의 홍보일 뿐이고,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면 철학 입문서라기보다는 철학 에세이에 가까웠고 저자가 소개하는 사상가들과 그들의 철학적 개념들은 일면적이거나 표면적으로만 다뤄지며, 독자가 요구하는 것(즉 어려운 사상가들의 이론을 쉽게 잘 이해하하는 것)을 충족시키기보다는 자신의 글에 봉사시키는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한 책들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목차(지적 욕구를 자극하는 사상가들의 이름과 개념, 저서들이 주욱 나열된)일 뿐이며, 그 점이 구매욕을 자극하고 소비로 이어지며, 그것이 표피에 불과하더라도 이름난 철학자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만족감을 독자에게 생산시키고 있다.
  

 

 


 

  

 

  사실 이런 양상은 저자가 자신의 전공인 장자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엿보인다. 난 <장자>를 읽어보지도 못했고 장자철학에 대해서는 오직 강신주를 통해서만 알고 있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 마치 서양의 최신 이론을 위해 <장자>란 텍스트를 봉사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며, 저자가 장자철학과 노자철학에 대해 강렬하고 독특한 독해를 이루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다만 최근의 저자 자신의 매너리즘이 반복된다 해도, 지금과 같은 성공이 반복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성급히 오버해보면, 오히려 철학서에 대한 일반 독자의 불신이 발생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해본다. 

 

  사실 강신주의 최근 저술에 대한 나의 불만이 성급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철학에 정통해 있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불만의 근원은 대부분 ‘느낌’에 불과하다. 그리고 또한 나 스스로가 그의 ‘진지한’ 독자가 아니기에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가며 읽지 못한 점도 있다. 하지만 이런 ‘느낌’들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 우연찮게 그러한 근거를 발견했다. 

 

<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 비판 

  강신주는 매주 수요일 동아일보에 <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라는 코너를 연재한다. 지난 2월 23일자 신문에는 ‘<14> 모임에 속해 있어야만 하는 대학생들’이란 제목으로 동아리, 학회, 서클, 스터디 그룹 등 대학생들의 모임에 대해 분석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개인은 그 나약함으로 인해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심리가 발생하고 그 안에서 불안을 해소하고 귀속감이란 무의식적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는 프로이트 집단심리에 대한 이론과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에 대한 개념들을 인용하며,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질수록 개인의 개성이 부정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비판 1 : 반전 결론, 혹은 훈훈한 마무리 

  대략 이런 내용을 갖는 이 글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일단 비약적인 마무리는 반전에 가깝다. 내용의 대부분을 집단 속에서 개인의 개성과 능력이 위축된다는 사실을 지적해놓고는 마지막 한 문단에서 ‘유아적인 욕망’을 극복하고 ‘고독감과 불안감을 견딜 의지와 용기’가 있다면 ‘마침내 자신의 개성을 집단에서도 관철시킬 수 있’다고 훈훈하게 결론 내린다. 이건 철학자의 글이라기보다는 상황을 마무리 짓는 토크쇼 진행자의 재주에 가까워 보인다. 만약 마지막 문단에 쓴 대로 “개성을 개화시킬 수 있는 집단 활동”의 가능성이 결론이라면 그 부분을 더 설득력 있게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개성이 집단에 의해 부정당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와 귀스타브 르 봉 등의 권위에 기대놓고, 정작 결론은 몇 마디 그럴듯한 말로 끝맺는 건 심한 불균형이다. 이 글을 읽으면 누구든 ‘반전결론’ 아니면 ‘MC의 마무리 멘트’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비판 2 : 강신주가 인용한 프로이트와 귀스타브 르 봉 

 2-1 : 르봉의 군중심리 이론

  더 중요한 문제점은 강신주가 인용하고 있는 르 봉의 존재이다. 사실 이 글에서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가 인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에는 약간 반가웠고, 그 다음에는 좀 의아했다. 르 봉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심리학자로 당시, 19세기 말 <군중심리>란 기념비적인 저서를 써서 사상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지금은 그다지 널리 읽히는 책은 아니다. 몇 년 전 동생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구매해서 조금 읽다 책장에 꽂아 둔걸 우연히 꺼내서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이런 글에서 그 이름을 들을 수 있게 되니 왠지 반가웠다.  

  하지만 의아했던 것은 르 봉의 <군중심리>는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쉽게쉽게 인용할 만한 저서도 아닐뿐더러, 르 봉의 이론은 프로이트와는 상당히 다른 점이 많아 나란히 인용할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르 봉의 <군중심리>를 읽어본 사람은 누구라도 눈치 채겠지만 일단 그는 엘리트주의적인 관점에서 군중을 이해하고 분석한다. 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이 저작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당시 19세기 말의 정치적 상황에서 정치적 권리가 일반 민중에게까지 확산되고,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것(대표적으로 보통선거제도)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한다. 당시 일반적으로 ‘민중의 지배’로 이해되고 있던 민주주의의 급진적 구호에 대해 공포심마저 갖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르 봉이 자신들의 지배권력을 민중들에게 빼앗길 것을 전전긍긍하는 귀족이나 정치 엘리트였던 것은 아니다. 어찌됐든 그는 뛰어난 이론가이며, 자신의 이론에 일관성을 갖춘 학자였다. <군중심리>를 읽다보면, 프랑스인답게 프랑스 혁명의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엘리트와 민중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그들의 생활양식, 직업, 성격, 지능이 유사하든 아니든 그에 상관없이 그들이 군중으로 변모했다는 사실이 그들을 하나의 집단정신에 소속시켜버린다”고 말한다. 그는 군중 안에 있을 때는 개인들을 신분이나 지능, 능력 등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다. 다만 그 개인이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군중으로 변모했을 때는 그 구성원이 누가 되든지 ‘군중’이 갖는 일반적 특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일반이론의 가죽을 뒤집어쓴다고 하더라도, 결국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군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하다. 그리고 ‘군중’이란 용어가 암시하듯, 군중을 이해하는 르 봉의 견해는 일관되게 부정적이다. (이제와 적당한 인용문을 고르려니 눈에 띄지 않고)목차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 군중의 충동성, 도덕성, 과잉반응성... 2. 군중의 피암시성과 잔인성... 3. 과장적이면서도 단순한 군중의 감정... 4. 군중의 편협성, 독재성, 보수성...” 등등 

  르 봉은 개인과 군중 사이에 위계적 질서를 설정한다. 그는 ‘군중’을 신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단적 의사 결정이란 민주적 의제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들 사이의 집단적 관계에 대해 ‘군중’이란 존재 형식 외에는, 다른 어떤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현실과 역사적 흐름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를 보인다. 이런 점들로 보아 그가 정치적 의견을 직접적으로 피력하지는 않았지만, 민주주의와 피지배계급의 정치 참여(필연적으로 집단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는)에 부정적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군중’의 대립쌍으로서 ‘개인’이 있다면 그 개인은 (정치적인 의미에서)필연적으로 엘리트, 혹은 소수의 귀족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문명들을 창조하고 지도한 자들은 오직 소수의 지식귀족들이었지 결코 군중은 아니었다. 군중은 오직 파괴력밖에 발휘하지 못한다. 군중의 규칙은 언제나 야만적인 수준에 머문다."  - <군중심리>, 32쪽

 

2-2 : 프로이트와 르 봉의 관계

  하지만 부분적이긴 하지만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이해는 이런 르 봉의 관점과 양립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일단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학은 르 봉(물론 르 봉이 개인의 합리성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다)과 달리 개인의 합리성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해 왔다. 특히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은, 한 생명체가 인간이 되는 과정과 일치하며, 따라서 한 인간으로서의 개인의 역사 자체가 관계적이며, 집단적인 과정이다. 물론 프로이트도 개인의 심리와 집단의 심리에 대해 구분하겠지만 그것이 르 봉처럼 개인심리와 집단심리의 위계적 구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순화하자면, 프로이트의 기획이 '합리성 비판'이었다면, 르 봉의 기획은 (군중의)'비합리성 비판'이었던 것이다.

  신문에 연재된 강신주의 글을 읽고는, 약간의 혼란이 느껴져 <군중심리>를 다시 펼쳐 봤는데, 거기 저자소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저서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을 <군중심리>에 대한 비판서로 기획했다고 한다.” 강신주가 <군중심리>와 나란히 인용한 프로이트의 저서가 바로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이다. 사실 프로이트에 대해서는 통상적인 이해만 있으며, <집단심리와 자아분석> 역시 읽어본 적이 없어서, 나의 의심에 확신이 들지 못했지만 이제는 확실해졌다. 프로이트의 <집단심리와 자아분석>과 르 봉의 <군중심리>는 서로 비판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19세기의 반동적 심리학자의 글과 프로이트의 글을 병렬적으로 인용한 것에 대해 의아했던 것이다. 특히 저자 스스로가 무정부주의자라 말하며, 비판적 관점을 견지해오던 사람이라 더욱 그랬다. 물론 르 봉의 글에서 유효한 지점들이 있을 것이며, 그런 부분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전취하는 것은 학자의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반동적으로 개입했던 학자에 대해 아무런 평가 없이 “탁월한 사회심리학자”라며 한 구절을 인용해오는 것은 썩 마땅치 않다. 르 봉의 <군중심리>가 단지 반동적 주장을 펼치고 있을 뿐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책이 히틀러, 무솔리니 등을 통해 파시즘에 기여했다는 뚜렷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기에 특히 더 그러하다.  

 

비판 3 : 그는 왜 르 봉과 프로이트를 인용했을까?

  그렇다면 왜 강신주는 프로이트의 <집단심리와 자아분석>과 르 봉의 <군중심리>라는 상호 비판적인 두 저작을 상호보완적인 방식으로 나란히 인용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어떤 심오한 의미가 있는지 쉽게 알기 어렵지만, 얼마 전 (이 또한)우연치 않게 그 연유를 짐작할 만한 단서를 찾게 됐다. 며칠 전 앨버트 O. 허시먼<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란 책을 흥미롭게 읽고 있는데, 거기에는 허시먼이 말하는 반동의 수사학 중 하나인 ‘역효과 명제’의 대표자 격으로서 르 봉이 언급되고 있었다. 허시먼이 이해한 르 봉은 앞서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허시먼은 르 봉이 ‘민주주의(구체적으로는 보통선거권)는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왜냐하면 군중이 지배할 것이기 때문인데, 군중은 이러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프로이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군중심리에 대한 르 봉의 이론은) “그러나 한편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진행하고 있던, 개인들도 결국 온갖 종류의 무의식적 욕구에 종속돼 있음을 곧 밝혀내게 되는 연구는 알지 못한 상태에서, 개인과 군중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데서 자신의 이론을 시작한다.”   - 위의 책, 50~51 쪽 

  여기서 허시먼도 개인과 집단에 대해 르 봉과 프로이트의 견해가 서로 대립점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강신주는 그렇게 보지 않았을까? 바로 이 질문에 대해 허시먼은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본문을 서술한 후 주석을 달아 다음과 의문을 제기한다. 

“이상한 점은, 프로이트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대중심리학의 문제로 관심을 돌렸을 때, 자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 분명했던 르 봉의 개인과 군중 사이의 구분에 대해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르 봉과 그의 저서인 <군중심리>에 대한 프로이트의 호의적 평가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전집> 제18권으로 실린 <집단심리학과 자아 분석> 72~81쪽을 보라.”  - 위의 책 51쪽 

 

 3-1 : 첫 번째 추측 - 프로이트의 실패한 기획?

  이를 통해 몇 가지 가능성을 상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군중심리>에 대한 비판이라는 애초의 기획 의도와 달리 프로이트의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은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했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허시먼도 그리고 강신주도 두 저작을 친화적 관계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 프로이트의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을 깎아내리거나 실패작으로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난 그 글을 읽어보지도 않았다. 다만 여타의 정황들을 볼 때, 최소한 <군중심리>에 대한 비판서로서의 역할은 다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해볼 뿐이다.(난 여기서 강신주의 글에 인용된 그대로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이라고 쓰지만 허시먼의 책이나 다른 검색들을 통해 볼 때 우리나라에는 <집단심리학과 자아 분석>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듯하다. 그리고 원제를 보면 집단심리학이 맞는 듯하지만 처음 썼던 대로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이라고 부르겠다.) 

 

 3-2 : 두 번째 추측 - 사라진 비판점?

  두 번째 가능성은 프로이트는 자신의 글에서 르 봉을 직접적으로 반박하기보다는 우회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고, 그것이 변화된 정치적, 사회적 조건하에서, 그러니까 변화된 지평 아래에서는 그런 대결 지점들이 무력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럴 듯해 보이긴 하지만 역시 알 수 없다.(자유의 몸이 되면 빨리 프로이트부터 읽어봐야겠다.) 읽어보지 않은 관계로 일단 <집단심리와 자아분석> 자체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는 여기서 접어야겠다. 

 

 3-3 : 세 번째 추측 - 인용이 필요했고, 거기에 르봉이 있었다?

  세 번째이자, 이 글의 본론이기도 한 가능성은, 앞서 추측했던 것들과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닌데, 프로이트의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에는 르 봉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없었고, 강신주는 <집단심리와 자아분석>만 읽고, 거기에 나온 대로 르 봉을 인용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허시먼의 지적대로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은 르 봉의 <군중심리>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시먼이 말한 대로 프로이트의 이론은 군중심리에 대한 르 봉의 이론을 반박하는 효과를 갖는다. 따라서 르 봉에 대한 진지한 이해 없이 프로이트가 인용한 대로 르 봉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런 의심은 강신주의 글을 읽을 때 반복적으로 드는 것인데, 이것이 단지 나의 의심일 뿐이면 좋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괜한 의심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복되는 것은 저자의 글쓰기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분명 저자는 인용의 힘을 알고 있다. 특히 인문학, 특히 철학 책을 즐겨 읽고, 그에 대해 이야기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권위에 민감하다. 과학처럼 관측이나 실험, 임상 등을 통해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권위 있는 권위자의 권위’에 기대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지곤 한다. 이런 현실은 비단 쓰는 사람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의미를 진지하게 사유하려 하기보다는 권위에 섣불리 신뢰를 보내곤 하는 읽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철저하고 엄격한 인용을 통해 텍스트의 권위와 신뢰를 높이는 한편, 텍스트 본래의 의미를 권위가 아니라 그 말에 의해 드러나도록 하는 1차적 책임은 쓰는 사람에게 있다. 

  강신주 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쉽고, 재미있으며, 폭넓은 흥미와 사고를 이끌어낼 수 있는 책들이 지금 필요하며, 우리 사회가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요구에 가장 효과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강신주다. 쉽고 대중적인 철학을 지향하는 그의 글쓰기는 지지받을 만하다. 문제는 내용이다. 그의 글들에 등장하는 그 수많은 사상가들, 수많은 저작들, 수많은 개념들은 저자에 의해 깊은 이해의 과정을 거치고 선정되어 나오기만 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물론 한 철학자의 사상이나, 한 저작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거은 결코 아니며, 다양한 방식으로 독해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그 사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지한 독해 이후, 그것을 새로운 조건들과 결합시키면서 충분히 의미 있는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글에서는 종종 그런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저자에 의해 선택적으로 인용되어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에 나오듯이 한 사람의 독서가가 책을 타자로서 대한다면, (창조적인 오독이 만들어내는 의미의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저자와 텍스트를 진지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을 거라면, 자의적으로 선택적으로 인용할 것이라면, 그렇다면 굳이 왜 그 텍스트, 그 학자가 인용되었겠는가? 바로 권위 때문이 아닌가?  

 

 3-4 : 네 번째 추측 - 르 봉에 대한 재해석? 

  하지만 어쨌든 지금 말하는 것은 단지 세 번째 가능성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가능성이 있다. 르 봉을 그동안의 통상적인 견해 반동적 심리학자로서 이해하지 않고,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의 친화성 속에서 르 봉을 이해한 것이다. 이럴 경우,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 어떤 실패도 아니라, 르 봉 이론에 대한 전략적 재해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문제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르 봉을 재해석하고 의미 있는 지점들을 적극적으로 전취해낸다 하더라도, 이미 르 봉이란 존재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이 있다. 저작 곳곳에 숨어 있는 엘리트주의적 언급, 비관주의 그리고 파시즘에 끼친 영향들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평가 없이 어떻게 재해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가령 지금의 니체가 있기까지 유럽에서 오랜 기간 니체를 평가하고, 비판하고, 다시 읽는 과정들을 통해서, 나치즘에 물든 니체가 아닌, 현대적인 모습으로 재해석된 것이 아닌가? 즉 네 번째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고 하더라도 르 봉을 이런 식으로 인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강신주의 책은 여전히 읽을 만하다는 것 

  사실 별거 아닐 수도 있는 짧은 에세이에 대해서 너무 장황한 비판을 늘어놓은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특히 뛰어난 한 철학자에 대한 과도한 비난이 된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도 든다. 더구나 난 프로이트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저자로서 강신주의 글들이 지닌 수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드는 의구심들이 있었는데, 마침 신문에서 글을 본 김에 정리를 해봤다. 

  이 역시 토크쇼 진행자의 마무리 같아 보일 수 있지만, 굳이 정리하자면 강신주의 책들은 분명 단점보다 강점이 많다. 그래서 꾸준히 출판될 수 있으며, 꾸준히 흥행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강신주만큼 매력적으로 철학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 역시 강신주의 책에 대한 추천 서평을 몇 번 쓴 적이 있고, 그의 강의를 여러 사람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의 책이 발간됐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고, 은근히 기대하기도 한다. 다만 그의 글에서 자꾸 부딪치게 되는 불편한 점들, 그리고 들게 되는 의구심들을 나 스스로 정리해볼 필요가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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