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자본주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름 신간평가단이지만 이미 이 책을 둘러싼 논쟁들이 한 차례 진행되었다. 프레시안에 서동진 교수의 비판적 서평이 실렸고, 책의 저자가 직접 같은 매체를 통해 반박글을 싣는 방식이었는데, 블로그 등을 통해 장외에서도 많은 논쟁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논쟁의 핵심은 결국 가치론을 둘러싼 것이었다. 책에서도 저자는 가치론의 역사적 한계와 그 변형을 이야기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했었다. 하지만 난 가치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내가 낄 수준의 것이 아니니 그 문제에 대해서는 가급적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수십 년간 공부하는 걸 업으로 삼아온 사람들도 이 책에 대한 논쟁 속에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는 사람으로 강등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감히 주제넘게 이 책에 대한 평가를 하겠다는 말은 (이 글을 누가 읽든 안 읽든) 살 떨려서 못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신간평가단의 일원으로서 내가 맡은 역할은 이들과 같이 이론적 논쟁을 벌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수많은 독자 대중의 샘플로서 조금 더 꼼꼼하게 읽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어떤 난해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책에 대해서도 이해할 권리와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제대로 잘 이루어졌느냐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내가 무수한 독자 대중의 일원으로서 표준적인 수준의 지성을 가졌느냐가 문제가 될 수 있다. 나는 거기에 미달할 수도 있다. 나는 조정환이 이 책의 가장 큰 밑거름으로 삼고 있는 네그리의 저작에 대해서는 단 한권도 읽어본 적이 없으며, 그에 대한 해설이나 소개조차도 접해본 적이 없다. 저자인 조정환의 다른 책들 역시 접해보지 못했다. 참으로 무지하고도 소박한 상태에서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인문학 독자들의 평균적인 지성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 책에 대해 평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0. ‘변한 것변하지 않은 것’ 

  조정환은 5월에 있었던 (이 때는 책을 받기 전이었는데, 기회가 돼서 참관했었던)‘인지와 자본 심포지엄의 발제문에서, 이 책 <인지 자본주의>모든 것이 변했다는 주장과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라는 주장 양자 모두에 대한 비판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변했다고 주장하는 진영은 신자유주의자들이며,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근본주의자, 산업주의자(여기에는 맑스주의자들도 포함된다)들이다. 이 책을 이런 두 주장 모두에 대한 비판으로 위치짓고자 하는 것은 아마, 출간 이후의 책에 대한 비판들을 염두에 둔 듯하다. 저자의 그런 발제문을 먼저 접한 이후 책을 읽게 되었을 때, 나는 아무래도 이 책은 모든 것은 변했다는 쪽에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세 번의 변신을 했다. 상업 자본주의와 산업 자본주의, 그리고 바로 지금 제3기의 자본주의인 인지 자본주의가 그것이다. 맑스의 <자본론>2기 자본주의 형태인 산업 자본주의 분석에서는 유용했으나 현재의 새로운 자본주의의 본질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새로운 분석틀이 필요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인지 자본주의라는 개념이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노동은 물론이고 착취와 지배, 저항과 혁명, 그리고 시간과 공간, 지성까지 인지적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기존의 노동가치론은 현 자본주의적 착취 매커니즘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가 아무리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말하더라도, 이 정도면 모든 것이 변했다는 사고방식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문제의식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인구에 가장 회자되는 애플과 삼성만 보더라도 그들의 이윤이 고용된 노동자들의 초과 노동에서 기원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삼성과 애플에게 가장 첨예한 문제는 지식과 그 지식의 사유화(특허)를 둘러싸고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가치론을 더 정밀하게 체계화하고 현대화하는 것으로 자본의 운동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자본 운동뿐만 아니라 세계의 존재 양식 자체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 책에는 세상이(자본주의가,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는 증거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말대로 모든 것이 변했다라고 본다면, 문제는 그런 변화된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느냐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에는 이것이 썩 명쾌하지가 않다. 일차적으로는 나의 무식을 탓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옹호하는 사람도 비판하는 사람도 모두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학식을 지닌 이들이며,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그들과 비슷한 수준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학식을 지닌 이들만 이 책을 읽고 논평할 발언권을 갖는 것은 저자가 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의 무지함을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인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을 이해할 능력과 거기에 대해 발언할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점을 감안할 때 이 책의 분석이 썩 명쾌하게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했다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성공적으로 자기 변신을 시도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변신한 자본주의를 잡기 위한 맞춤형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인지자본주의>는 성공적인 이론의 전화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내 능력으로 그 본질들을 찌를 수는 없을 것이며, 책을 읽는 와중에 든 몇 가지 의문점들을 중심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1. 가치론은 충분히 전화(or 해체 or 변형 or 폐기)되었는가? 

  일단은 이 책의 논리적 구조들이 상당히 느슨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논리성은 지식인의 요구사항이 아니라 비-지식인의 요구사항이다. 충분한 논리적 완결성을 지니지 못해도 상당한 지적 소양을 쌓은 사람, 전문적으로 학문을 연구한 사람들은 충분히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비전문가들은 사전 지식에 근거할 수 없으므로 내적인 논리성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소수를 상대로 쓰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애초에 출판 기획 당시에 독자층을 좁게 잡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책의 논리적 완결성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할 수도 있고, 친절하지 못하다고 할 수도 있다

  일단 가치론을 다루는 부분에서 그렇다. 가치론에 대한 설명이 미흡하다는 것이 아니다. 맑스의 가치론을 이해시키는 것은 이 책의 목적이 아니다. 여기서는 맑스의 가치론을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그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맑스의 가치론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 책을 통해 가치론에 대한 비판’, 혹은 가치론의 전화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아카데미즘을 벗어난 실천적 이론의 핵심이다. 노동자들이 의식화하기 위해 맑스주의와 경제학 비판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는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공부하기 위해 다시 스미스와 리카도의 고전 경제학을 공부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학문의 문제지 이론과 실천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기존의 노동가치론이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는 말하지만, 그렇다면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새로운 가치법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노동이 인지화되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통해 자본이 어떻게 이윤을 생산하는지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노동형태가 인지화되었다는 분석으로부터(시작해서 사회 각 부문의 전반적인 인지적 재구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인지자본주의란 결론에 이르렀다면, 그 인지화된 노동이 어떻게 착취되는지 설명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그리 속 시원하지 못하다. (미주와 부록을 포함)600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 여기저기에 흩어져 단편적으로 제시될 뿐, 뚜렷하지 못하다. ‘인지자본주의에서 자본형태의 재구성을 다루는 6장과 계급의 재구성을 다루는 9장을 살펴봐도, 거기에는 금융 자본과 비정규직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차지한다. 이래서는 금융 자본과 불안정노동에 대한 약간 새로운 분석 이상이 아니다

  노동가치론을 부정한 핵심 근거는 시간공간의 문제였지, 자본 운동에서 노동 자체를 부차화시킨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인지노동이 어떻게 가치로 생산되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다. 이런 불만에 대해 이것은 낡은 산업주의 시대의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책은 고용 형태를 초과하는 사회적 노동, 자본에 의한 실질적 포섭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남아 있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인지노동이다그는 교환가치/사용가치 쌍을 산업자본주의에 해당시키고, 명령가치/공통가치 쌍을 인지자본주의에 해당시킴으로써 가치 개념의 전화를 시도하긴 한다. 하지만 이것은 화폐를 분석하기 위한 것이지 노동을 분석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가치 개념과 노동 개념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인지노동을 가치와 연결시키지 못한다면 대체 왜 인지노동이 중요해 지는 것일까? 이래서는 비물질노동, 삶노동, 사회적노동 등의 기존 개념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2. 구체적 현실에 근거한 이론적 분석인가? 아니면 이론에 근거한 현실의 자의적 판단인가

  방대한 분량과 난해한 개념에 압도당하다보니 독해의 지연이 발생하곤 했다. 지금 뭔가 명쾌하지 않아도 내가 무식해서 잘 이해가 안 되는가 보다’, 그리고 이 다음에 상세한 설명이 나오겠지하는 두 가지 심리로 이해판단을 자꾸 지연시키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뭔가 찜찜한 채 챕터가 끝나있다. 이렇게 두꺼운 책을 한 번에 통독(通讀)한 것은 처음이라 제대로 읽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나마 가장 수월하게 읽었던 11인지자본주의에서 지성의 재구성을 보면서, 이것이 오로지 나의 무식함 때문만은 아니며, 아마 느슨한 논리성이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해봤다. 사실 저자가 지성의 문제를 다룰 때, 이것이 냉철한 분석에 근거하기보다는 약간의 선입견과 취향, 그리고 결론을 위한 자의적 해석이 영향을 미친 부분이 없지 않다고 본다

  저자는 인문학 붐’, ‘고전 붐과 같은 현상을 두 가지 대립되는 흐름으로 설명한다. 하나는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시작하는 위로부터의 흐름과 다중들의 아래로부터의 흐름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현상을 보는 시선이 상당히 단순화되어 있다. 가령 HK사업 등, “국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연명하는 인문학과(와 교수)가 국가의 권위에 종속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대학의 산업에의 종속은 이런 식으로 인문학의 국가에의 종속을 불러온다”(391)라고 말한다. 물론 그 위험성은 엄중히 경고해 마땅한 것이지만, 재정지원이 종속으로 필연화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정책과 재정운영을 둘러싼 권력 관계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국가의 재정지원으로 연명하는그 교수들이 반국가적인(혹은 정부 비판적인) 활동을 벌이는 사례는 충분히 찾고도 남는다

  이것은 구체적인 현상 분석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라기보다는 국가에 대한 기존의 거부감을 드러냈을 뿐이다. 가령 입시 논술을 다루는 데에서도 이런 태도가 드러난다. 입시제도에 기생하는 논술학원과 논술교사들이 대체로 어떤 고전들을 학생들에게 읽힐 것인지를, 그리고 국가기관에 의해 선임된 출판지원기구의 심사위원들이 어떤 성격의 책을 지원대상으로 선정하게 될지를 사고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402)고 했는데, 뭐가 충분하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충분하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도 자신의 견해를 반박하는 말을 곧이어 한다. 이런 입시 논술이 또한 아래로부터의 흐름의 한 경향이기도 한데 “2008년의 촛불봉기가 노무현 정부 하에서 논술과 고전 교육을 받고 성장한 청소년 세대들에 의해 촉발되고 주도되었다는 평가는 그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다”(403)는 것이다. 이런 모순된 평가는 입시제도 기생하는 논술학원과 논술교사들”, “국가기관에 의해 선임된 출판지원기구가 어떤 책을 선정해서 읽힐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더군다나 조정환은 스스로, 고전은 그 자체로 공통적인 것이지만, 대부분의 고전 작가는 스스로가 지배계급이거나 지배계급의 후원을 받았던 만큼,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409)고 말하고 있다. 즉 누가 어떤 책을 선정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조정환의 글에는 이런 자기모순적인 논리가 반복된다. 사실 이런 논리적 오류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약간의 기술적인 문제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인문학 붐이든 고전 붐이든, 입시논술이든 서로 상반되는 두 흐름의 경합으로 존재한다. 문제는 그런 경합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인지적 과정을 통해 전개되는지를 분석하기보다는 이미 형성된 비판적 합의점에 자신이 가진 기존의 견해, 기존의 선호를 가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논리는 어떤가

셋째 각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인문학)프로젝트는, 인간 사회 및 학문활동의 제 영역에서 국가의 필연성과 필요성을 대전제로 삼을 뿐만 아니라 국가형태에 반대하는 지성경향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집단적으로 수행한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시행되고 있는 바, 촛불집회에 참가한 단체에 대한 재정지원 제외 방침과 반성문 요구는 국가 재정지원의 정치적 성격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 392쪽 

  국가 재정지원을 받은 인문학이 국가에 대한 비판 세력에 대한 공격자, 국가의 보호자로 기능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 근거로 이명박 정부가 촛불집회에 참가한 단체에게 반성문을 강요하고 재정지원 중단으로 협박한 것을 사례로 들었다. 그런데 명제와 근거 사이에 논리적 상관관계가 뚜렷한가? 뚜렷하다. 하지만 명제에 대한 부정으로 뚜렷하다. 이명박 정부가 촛불집회에 참가한 단체에게 반성문을 강요하고 재정지원 중단으로 협박했다는 것은, 오히려 국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더라도 국가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행했다는 경험적 사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히려 특정 정부가 노골적으로 그것을 불쾌해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정한 조건(그렇게 어렵지도 않은)만 형성된다면 정부 재정지원을 통해 인문학의 비판적이고 봉기적인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위와 같은 논리구조는 재정지원을 통해 인문학이 국가화되고 자본화되었다는 구체적 분석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거부감과 국가와 관계를 갖는 인문학을 부정하고 싶은 욕망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나는 그가 말하는 대로 학진 등에 대학과 학문이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가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상당히 문제라는 것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학진 시스템이나 지금의 교육학술정책에 대해 이미 비판적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 일반 독자들은 이런 논리에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식의 허술한 논리적 구조는 책 전체 이곳저곳에서 발견된다

 

3. 촛불봉기의 긍정성을 예찬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이 책의 분석이 상당 부분 의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 전체에 감도는 낙관주의적인 태도로 인해 오히려 그가 제시하는 대안들이 그닥 현실성 있게 와 닿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그가 2008년 촛불시위를 다루는 태도가 그렇다. 그는 그것을 촛불봉기라고 말하면서 이를 과거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혁명운동과 다른, 21세기의 새로운 봉기의 전형으로 파악한다. 노조나 당 등 기존의 조직화된 전위의 지도를 받지도 않았고, 자발적이고 창의적이며, 블로그, 카페, 아고라 등을 통해 소통하고 전술을 토의하는 인지적 혁명의 속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촛불봉기가 새로운 혁명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그는 여기서 그친다. 책 전반에 걸쳐서 저자의 촛불봉기에 대한 예찬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촛불봉기는 (그가 또한 인지적 혁명의 전형으로 제시한)아랍혁명과는 달리 아무것도 이룩하지 못하고 멈추지 않았나?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촛불 봉기의 긍정성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왜 촛불봉기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생태에서 그렇게 사그라지게 되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촛불봉기를 소시민적 애국주의 운동이자 파시즘적 대중운동이라고, 혹은 산보자 운동이자 유령운동이었다고 냉소하는 것은 적절한 판단이라고 볼 수는 없다. 거기에는 분명 완벽하게 개방된 정치적 가능성이 있었다. 충분히 혁명적이고 충분히 민주적이며 충분히 지성적인 흐름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촛불봉기는 혁명도, 민주주의도, 지성화도, 모두 이루는 데 실패했다. 이것을 모든 실패로 섣불리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런 정치적 경험은 전승되고 강화될 수 있다. 촛불 세대들이 점차 대학에 입학한 현재 등록금 투쟁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급진적이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도 촛불봉기의 한 효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정치적 패배의 경험 역시 전승될 수 있다. 당시보다 더 심각하고 충격적인 쟁점이 형성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봉기가 또다시 촉발되리라고 단언할 수도 없으며, 촉발된다고 하더라도 다시 한번 그렇게 조용히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당시 촛불봉기가 어떻게 발생했는지와 함께 당시 촛불봉기가 왜 사그라졌는지, 그때 부족했던 것은 무엇이며, 지금 다중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고찰해보는 것이 더 의미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령 산업자본주의 시대에나 적합했을 노조와 당의 지도를 받는 투쟁을 부정하는 조정환의 입장과 당시 촛불봉기의 분위기는 상당히 친화적이다. 하지만 조직화된 전위를 부정하는 것이 노조와 당을 배제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당시 촛불봉기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정권과 경찰, 언론이 배후론을 워낙 들먹여서 거기에 대한 대중들의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조직화된 집단이 참가하고 그들이 배후로 지목되면 자신들의 순수함 역시 오염될 것이라는 그런 두려움 말이다. 당시 촛불봉기가 이런 순수성을 추구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일부는 조직화된 집단의 참여에 불쾌감을 드러냈었다. 내 기억으로는 대학교 학생회도 당시 그런 분위기 때문에 집회에 나갈 때 처음에는 깃발을 가져가지 못하기도 했었다. 깃발을 들고 나간 것은 촛불정세의 후기에서였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순수성은 지배이데올로기에 포섭된 담론이었고, 오히려 그것이 촛불봉기를 노동자, 농민, 빈민, 이주민, 실업자들의 운동과 결합하면서 무한하게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문제로 시작한 촛불봉기가 국가와 자본에 대한 부정과 혁명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이런 무한한 연대와 확장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동시에 당시 촛불봉기 현장에서는 비정규직이나 빈민 같은 소수자 운동, 그리고 상수도 사유화 반대와 같은 공공성 담론에 대한 친밀한 분위기 역시 존재했다는 것이다. 당시 다중들은 다양한 운동과 다양한 주체들과의 공통되기에 충분히 열려있기도 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오히려 운동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 아닌가? 소수자, 몫이 없는 자,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환대와 열림이 존재하는 곳에서, 그런 이들을 대변해온다고 자임했던 노동운동, 진보정당이 환영받지 못한 것은 운동에 대한 불신이 있었기 때문이며, 정치적으로 개방된 공간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운동의 무능력 때문이다

  다중들의 봉기란 것은 누구에 의해 조직되는 것도 아니고, 일정한 조건이 갖춰지면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생적으로 자발적으로 촉발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며, 하지 말란다고 안하는 것도 아니다. 조정환처럼 그런 다중의 봉기를 예찬하며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다중들의 예상치 못한 봉기가 발생했을 때, 다중들이 공통되기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았을 때, ‘운동이 그것과 결합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오히려 운동의 현실을 진단하고 그 문제점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4. 다중은 긍정적인 것의 추상화가 아닐까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주체성의 한 형태로 다중이란 개념 역시 이러한 낙관주의적 시선의 산물이 아닌가 싶다. 다중이란 개념을 누가 처음 만들어서 제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그리에 의해 유명해진 개념이다. 하지만 난 네그리의 책을 읽어본 적도 없고, 다중이란 개념에 대해 누가 이야기하는 것을 어깨너머로조차 들어본 적도 없다. 여기서 말해지는 다중이 네그리의 그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정환이 네그리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책 전체적으로 네그리와 완벽하게 일치되려고 하는 것을 보면 네그리가 말하는 다중과 비슷할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런데 이 다중이란 개념은 온갖 긍정적인 것의 총집합처럼 보인다. 그것이 현실에서 어떤 형식으로 존재하고 어떤 형식으로 운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조정환이 생각하는 모든 긍정적인 것들을 모으면 다중이 되지 않을까

  책 전체를 관통하는 조정환의 논리 구조는 대부분 대립항을 통해 전개된다. 이것과 저것, 위와 아래... 여기서 대립항은 두 종류의 관계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국가와 자본과 친밀한 것과 그것을 부정하는 관계, 즉 부정한 것과 정의로운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것과 인지 자본주의 시대의 것, 즉 낡은 것과 새 것이다. 이 책에서 부정한 것과 낡은 것은 부정적인 것으로, 정의로운 것과 새 것은 긍정적인 것으로 기능한다. 전자의 대표적인 것은 위로부터의 흐름과 아래로부터의 흐름의 모순적인 관계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것은 조직과 네트워크의 변모적인 관계이다. 다중은 정의롭고 새롭다.  

  이 중 새로움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 같다. 이 부분은 좀 더 알게 된 후에 다루고, 전자의 대립항에 대해서만 말하겠다. 전자의 것이든 후자의 것이든 이 대립항들은 하나의 현상형태로 현실에 드러나는데 이 자체는 여러 가지 복합적 흐름이 섞여있다. 가령 위에서도 말했던 인문학 붐이나 고전 붐과 같은 현상 역시 위로부터의 흐름과 아래로부터의 흐름이란 두 흐름이 섞여 경합하고 있는 것이다. 조정환은 이런 복합적인 현상에서 각기 다른 방향성의 흐름들을 분리해 낸다

  사람들(대중, 인민, 다중.. 뭐라고 불러야 하나)의 현실적 존재상태 역시 여러 흐름의 복합이라고 볼 수 있다. 그중 국가와 자본에 의해 추동되는 위로부터의 흐름(이것을 흐름A라고 부르자)과 거기에 저항하고 이탈하는 다중들의 자발적인 저항적 흐름, 아래로부터의 흐름(이것을 흐름B라고 부르자)이 있다. 그런데 조정환은 흐름A가 어떻게 기원하고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명확하게 지시하고 있다. 그것은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시작된다. 구체적인 정책이기도 하고 언론이나 학교와 같은 장치이기도 하고 금융 지배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그것은 단순한 강제나 폭력이 아니라 대중들의 자발적인 동의와 동참을 동반한 인지적 지배를 통해 수행된다. 즉 사람들에게는 흐름AB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어느 정도는 다 내면화되어 있고, 물리적 존재 자체와 분리되지 않는다. 위로부터의 흐름이라고 방향성을 명시했지만, 현상적으로는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결국 흐름A를 구분해내는 것은 구체적으로 드러난 현상에서부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구조와 권력관계, 생산관계로부터 추론해낸 것이다. 반면 흐름B의 경우는 기원이 없다. 단지 다중들의 자발성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다중은 다분히 신비화되어 있다

  사람들이라고 하는 존재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공간이기도 하다. 말한 대로 흐름A이든 흐름B이든 그 흐름은 현상적으로는 사람들 안에 이미 내재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흐름A의 기원이 사람들 자체가 아니라 국가와 자본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흐름A가 위력을 발휘하고 흐름B와 투쟁하는 장()인 것이다. 하지만 흐름A는 명확히 외부적인 것, 명백한 기원과 목적을 지닌 것으로 말하고, 흐름B는 다중 내부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이런 흐름A와 흐름B의 구분은 다분히 자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부정적인 것이고 무엇이 긍정적인지에 대한 자신의 이미 형성된 기준에 따라, 부정적인 것은 국가와 자본에 몰아주고 긍정적인 것은 다중에 몰아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흐름 A와 흐름 B가 최소한 공정하게 다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모두 사람들 내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촛불봉기는 다중의 혁명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촛불봉기를 시작한 것도 어느 이름 없는 네티즌의 우연한 제안이었고, 그것을 형성한 것도 다중의 네트워크에서였다. 구체적인 장을 연 것도 블로그, 카페, 아고라 등의 인터넷 공간에서였다. 하지만 송지은 아나운서를 자살로 몰고 간 것도 역시 다중의 네트워크이다. 처음 일이 알려진 것도 인터넷에서였고, 그 사건이 가십화되어 확산된 것도 카페, 블로그 등의 인터넷 공간에서였다. 다중의 네트워크가 지닌 파괴적인 폭력성을 증명하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 둘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인문학과 고전, 맑스주의를 자비를 들여가면서 다양한 경로로 스스로 공부하는 것도 다중 자신이며, 처세술과 주식투자를 공부하는 것에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 역시도 다중 자신이다. 이러한 양면성 중 어느 하나를 외부적인 것이고 어느 하나는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할 근거는 충분치 않다.  

  모두 사람들 내부에 있다는 것과 다르지만 모순되지는 않는 또 다른 주장은 모두 사람들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다중에게 발생하는 부정적인 흐름이 국가와 자본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구체적으로 정책, 법률, 언론, 학교, 금융 등을 통해 형성된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긍정적 흐름 역시 외부의 장치, 외부의 기제를 통해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진보 언론과 각종 인터넷 대안 언론, 인문학 강좌, 논술, 학생회, 노조, 진보정당, 그리고 <인지자본주의> 같은 엘리트 지식인의 출판물들이 그런 것이다. 이를 혁명적 이데올로기 장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다중 외부에 있느냐는 의구심이 들지만, 이것들이 항상 다중 내부에 있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 추상성과 모호함은 도를 지나쳐서, 저자가 비판하는 다중을 지도하려고 하는 낡은 구시대적 전위조직 역시 다중 내부의 것이 되어버리고 그것을 비판하는 것조차 다시 비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이미 어느 정도 벌어진 것 같다. 이런 다중 외부에 존재하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이데올로기 장치에 대한 사고가 없다면 당연히 모든 긍정적인 현상들이 다중의 자발성으로 환원되고, 다중의 혁명적 봉기에 대한 낙관주의로 흐르게 될 것이 뻔하다

 

5. ‘인지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만들어지는 효과는 대체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데, 조정환의 분석에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것이다. 다중이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규정하고, 주체성을 형성하는 모든 활동이 이데올로기와 관계된다. 앞서도 말했듯이 사람들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으며, 하나의 사건에 대해 이렇게 판단하고 반응할 수도 있고 저렇게 판단하고 반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다중이든 사람들이든 그것은 규정되지도 환원되지도 않는 다양성이며, 차이이며, 잠재성이며, 가능성이며, 활력이다. 하지만 이런 무규정적 에너지로서의 사람들도 분명 현실의 시간 속에서는 판단하고 선택을 한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특정한 사태를 만드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문제이다. 다중의 다양성과 가능성이 활력(생산력)의 문제라면, 그 구체적 운동은 이데올로기적 관계(생산관계)의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정환은 단지 다중의 가능성을 낙관할 뿐이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거니와 여기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길게 논의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은 인지란 개념이 생각보다 효과적이지 못한 개념이기 때문이 아닐까 의문을 던져본다. 책을 보면 가끔 인지적이란 표현 대신 이데올로기적이란 표현을 집어넣어도 될 만한 구절들을 자주 발견한다. 더 명시적으로 이데올로기의 문제라고 말해야 할 순간에 그것을 뭉뚱그려서 인지적인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식의 뭉뚱그림이 광범위하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책 자체에서 정의한 인지의 개념은 너무 광범위하다. 일상 언어에서 인지라고 할 때는 ’, ‘깨달음등 인식적인 요소와 관계가 깊다. 하지만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정의된 인지는 모든 정신적 활동과 그것과 관련된 신체적 활동 전반을 포괄한다. 이런 식의 정의라면 인지적이지 않은 것을 찾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렇게 광범위하게 모든 것들을 집어 삼켜버리는 인지개념은 오히려 기존의 맑스주의의 내부와 외부에서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오랜 기간 갈고 닦아온 이론적 성과들을 소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된다. 이데올로기, 의식-무의식, 정신, 감정, 문화, 이론, 지식, 돌봄 등등 더 구체적이고, 더 명확하며, 더 비판적인 개념들이 모두 인지적인 것으로 포괄될 때, 그 개념들 사이의 질적 차이와 그 개념들이 현실에서 기능해왔던 비판적 진리치들 역시 소멸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조정환은 인지자본주의라는 분석틀 아래에서 이 다양한 인지적인 것들을 포괄적으로 제시하기는커녕 기존의 자본주의 비판 담론과 구별되는 인지자본주의담론의 독자적인 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조차 명확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가령 6장에서 자본형태의 재구성을 분석한 내용은 금융자본 분석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 같다. 9장에서 계급의 재구성은 비정규직과 불안정노동을 분석하는 데에 치우쳐져 있고, 11장 지성의 재구성은 다중지성론과 무엇이 다른지 잘 모르겠다. 그 외에 시간과 공간의 재구성이나 대안으로 내놓는 공통되기 등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 각각의 분석들은 그 자체로는 적절할 수도 있고, 혹은 고차원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것에서 그친다면 굳이 인지자본주의를 읽지 않더라도 각각에 대해 더 명쾌하고 날카롭고 더 분석적으로 제시하는 이론과 저자들이 충분히 있다. 우리가 조정환의 인지자본주의에 기대하는 것은 단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지개념을 통해 이 각각의 분석이 그 이상의 것, 새로운 차원의 것으로 상승하고, 새로운 담론의 장, 담론의 틀을 개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점에서는 실패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3기의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의 공통점이 인지적이라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이 모든 특징들을 인지적이라고 포괄적으로 지칭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지자본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이름을 붙이기 위한 것이지 전략적인 실천 이론으로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6. 이 책은 우리의 뇌를 자극하는가

  사람들마다 좋은 책과 나쁜 책을 구분하는 저마다의 다양한 기준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은 좋은 책이다 아니다를 판가름하는 나만의 몇 가지 판단기준이 있다. 그중 하나는 이 책을 읽고 더 많은 앎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는가이다. 한 책을 읽고 너무 어려운 나머지 덮어버린다면 그것은 내가 좋은 책인지 나쁜 책인지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혹은 쓸데 없는 난해함과 현학적 표현으로 독해 자체가 어려운 것도 있다. 이 역시 좋은 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해가 힘들 정도로 어렵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어려움 속에서도 그 책 자체를 읽는 것만으로 약간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며, 그 책으로 말미암아 다른 지식과 다른 이론과 다른 책들에 대한 욕구가 극대화된다면 그 책은 분명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조정환의 <인지자본주의>는 좋은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좋은 이론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신간평가단으로서 내 역할이 아니다. 다만 인지자본주의 분석에 대한 의문점을 파악해가는 것만으로 나의 지성이 자극받고, 더 많은 앎을 원하게 된다면 그 책은 분명 추천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 때문에 다음 달 선정도서에는 리오 휴버먼의 <휴버먼의 자본론> 정도가 선정되길 바란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smeral 2011-08-31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웹진 <자율평론>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연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어떻게 님이 작성하신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서평글을 오는 9월 초 발행 예정인 <자율평론> 36호 게재할 수 있을지 문의를 드립니다.

<자율평론>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총 35호의 웹진을 발행한 계간 정치철학 웹진이며,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copyleft 웹진입니다. 그간 <자율평론>에 게재되었던 모든 원고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aam.net/xe/autonomous_review

<자율평론>은 인문학 강좌 공간인 다중지성의 정원, 독립 출판 활동을 하는 갈무리 출판사, 세미나 공간 다중지성 연구정원의 마디 단위로, 위 공간들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지적 활동들의 성과들을 모아내고, 우리들의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원고료를 드리기는 어렵지만, 게재를 허락해 주신다면 웹진이 발행되는 대로 PDF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리며,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다면 아래 연락처로 언제든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율평론> 편집위원회 김정연 드림
daziwon@waam.net / 02-325-2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