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이제 곧 사회진출을 앞둔 친구들이 많은데, 그들을 만나다보면 걷잡을 수 없이 뿜어져 나오는 우울의 기운에 견디기 힘들 정도이다. 가끔 만나서 소소한 잡담과 일상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술이 한잔 두잔 들어가다 보면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어찌할 수 없다. 그래도 서울에 있는 명문 사립대 출신들이니 그나마 유리한 위치가 아닌가 싶어서 괜한 엄살이라고 치부해버리려 하다가도, 그들의 고민을 가만히 듣다보면 사실 문제가 좀 복잡하다는 걸 새삼 느끼곤 한다.
자기들도 배울 만큼 배웠고, 책도 꽤 읽었다고 스스로 위안하는데, 그렇게 알고 있는 것과 자기의 진로가 서로 모순되니 그게 또 은근히 스트레스인 것이다. 책에서, 세미나에서, 가끔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때로는 술자리에서, 그리고 어떨 때에는 거리에서, 권력을 비판하고 사회의 진보를 이야기 했건만, 이제는 그런 권력에 편입되어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괜히 술잔을 부딪치며 위로를 주고받지만, 뻔한 말들뿐이다.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스스로일 뿐이라는 걸 새삼 깨닫곤 한다. 지금 당장 자기 앞에 닥친 이 우울에 대해 대답을 내놓으며, 나도 그들도 나름대로 스스로를 위안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자기 위안에는 깊은 체념과 허무주의의 정서가 있다. 친구를 막 위로하다가도, 막상 친구 입에서 스스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을 때는 나도 모를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왜 이런 자기 위안을 거쳐야만 하는가? 왜 스스로 자기를 납득하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가? 왜 한번은 체념해야만 하는가?
나는 이것이 마치 하나의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한다. 이제 앞으로 닥칠 불의와 부조리에 대해서 역시 눈감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인가? 우리들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뻔한 일이다. 세상이 얼마나 불합리한 곳인지, 불의가 판치는 곳인지, 그리고 얼마나 세련되게 자신들을 포장하고 감추고 있는지. 그런 불의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의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지난날 백신을 접종했었기에 더욱 쉽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이다. 하고 더욱 쉽게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인가?
체념과 허무주의라는 이 정서, 그러니까 우리 사회 혹은 우리 세대를 광폭하게 휩쓸고 있는 이 정서가 불의와 부정의, 부패, 기득권, 등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과 밀착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이는 이런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대응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들이 만들어낸 구조적 재생산의 한 미시적 과정이다. 체념과 허무주의, 그리고 냉소 없이는 결코 지금의 지배적 질서가 유지될 수 없다.
거대 자본이 횡포를 부릴 때, 온갖 편법을 통해 지배층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할 때, 국가가 극심한 불평등과 인간 존엄성의 파괴를 외면하려고 할 때, 그들은 정교한 논리로 무장하여 대중들을 설득하거나, 혹은 언론을 통제하여 사실을 감추거나, 혹은 검찰이나 경찰 같은 강력한 물리력을 통해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려기보다는(물론 그렇게 한다) ‘뭐 어쩌겠어’, ‘원래 그런 것 아니냐’ 같은 대중들의 폭넓은 체념과 냉소, 허무주의에 의지한다.
따라서 우리는 허무주의에 맞서지 않고는 사회의 부정의에 대항할 수 없다. ‘뭐 어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제시해주는 정치세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허무주의에 대항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허무주의가 우리의 적이라고 선언하는 것뿐이다. 체념과 냉소, 허무의 정서가 어떻게 기존의 지배질서를 강화하고, 어떻게 사회적 불의를 용인하게 만드는지 폭로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무언가를 어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직’ 못 찾는다 하더라도 나 스스로가 허무주의적 태도를 갖는 것을 경계하게 해야 한다.
올해 초 나온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를 최근 다시 읽으면서, 다름 아닌 바로 이 진리를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이렇게 외친다.
“체념과 냉소를 전염시키는 일 역시 부패의 공범이다!”
김용철 변호사가 어떤 삶을 살아왔든, 과거 어떤 짓을 저질렀든, 그의 사람됨이 어떻든, 이 책은 오직 하나, 그가 삼성이라는 거대한 산 권력 앞에서도 질식하지 않고, 끝내 체념과 허무를 이겨내고, 자신의 불의한 양심으로 진실을 고백했다는 바로 그 사실 하나로, 충분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우리는 읽어야 한다. 거대한 권력 앞에 철저히 짓밟힌 사람이 어떻게 허무와 체념을 극복했는지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초인적인 용기와 의지가 아니다. 우리가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오히려 겸손해지는 것이다. 허무주의의 밑바닥에는 우리가 세상의 본질을 알고 있다는 듯한 지적 만용이 있다.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다. 안 봐도 안다. 원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눈앞에 말도 안 되는 불의가 펼쳐졌을 때 거기에 놀라고, 경악하고, 분노하지 못한다.
허시먼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에서 날카롭게 분석했듯이 무용 명제(뭘 해도 소용없다, 바뀌지 않는다)는 사회에 대한 과학적 법칙을 발견했다는 자만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세상을 어떻게 바꿔보려고 몸부림치지만, 그건 잘 모르고 하는 말이야. 원래 세상은 이렇게 이렇게 굴러가도록 설계되어 있어. 소용없는 일이야. 이런 지적 만용은 일반 이론의 거죽을 덮어 쓰고 말하지만 곧바로 냉소와 체념, 허무주의를 불러온다. 그러나 자신들이 발견했다고 자신했던 그 과학적 법칙이란 언제나 그 발견자를 배신하곤 했다. 세상이 어떻게 퇴보할 지, 어떻게 발전할 지에 대해선 모르는 것이다.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에 실린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의 추천사처럼 허무주의는 우리의 적이다. 허시먼이 무용 명제의 모욕적 속성에 대해 분석했듯이 사회의 불의에 대해 허무주의보다 좋은 보약은 없다.
그러나 허무주의는 어느 날 저절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 말을 경청함으로 손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허무주의가 바로 우리의 적이라는 것, 허무주의가 바로 내가 냉소하는 그것을 더 강화시킬 것이라는 것, 체념하고 냉소함으로써 나 역시 사회적 불의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바로 그렇게 허무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아무 희망도, 아무 가능성도 없는 암울한 현실에 놓여 있더라도, 아무 희망도 가능성도 없는 채 나 자신의 허무주의를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