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박현희, 뜨인돌, 2011.06.30.) 

  그간 신간평가단에서 읽는 사람을 압도하는 무거운 책들을 다루게 되다보니, 독서가 즐거운 유희이거나, 혹은 삶을 깨우는 경이로 다가오기보다는 마치 숙제 같아진 점이 있었다. 물론 즐거움과 경이로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독서와 서평 쓰기를 힘겨워한 것은 순전히 나의 부족함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라는 다소 가벼운 제목의 이 책은 제목 만큼이나 발랄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익숙한 전설, 민담, 동화들을 구성하는 비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 그 의문은 동화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의문을 제기한 바로 우리들 자신을 향한다. 우리의 삶이, 사회가, 현실이 어떤 곳인가? 라는 질문.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간 동화가 비합리적이고, (해리포터 같은 최신 저작에 비해) 낡은 것으로 치부되어 온 경향이 없지 않은데, 이제 전래동화라고 하는 고전 중의 고전이 새롭게, 비판적으로 독해되면서 진정 공통적인 것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탐색되고 있다. 

 

아렌트 읽기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서유경 옮김, 산책자, 2011.06.03.)

  아렌트가 현대 사유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들 한다. 우리 나라에도 아렌트에 대한 연구가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렌트에 대한 해석이 다양해서 초보자로서는 전념하여 읽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렌트의 뛰어난 제자인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의 아렌트 해설서가 번역 소개된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확신의 함정 (금태섭, 한겨레출판사, 2011.06.28.)

  이번달 신간평가단 도서로 꼭 선정되었으면 하는 책 중 하나이다. 지금은 그 동안 근대 민주주의 정체를 떠받쳐왔던 삼권분립의 이상이 흔들리는 시대이다. 과거 신자유주의 개혁 몇년간 행정부의 팽창과 의회의 과소화 등이 이야기되며 민주주의의 원칙이 근본부터 의심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민주주의의 원칙이 흔들리면서 사소한 문제부터 결정적인 쟁점까지 정치권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법적 판단에 의지해 왔다. 미네르바 사건 같은 경우에도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 세력 간의 논쟁과 시민 사회에서의 합의를 통해 결론을 냈어야 할 문제였다. 언론법 개정 역시도 정치권은 스스로 정치의 논리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최종 판단을 헌재에 맡겼다.  

  그런데 문제는 법정 역시도 그리 확실한 진리의 담지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각종 현안 재판에서 정치권력의 입김이 작용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더 나아가 법정은 과학도 인격도 양심도 모든 걸 다룬다. 그것도 확실성이란 범주로. 최근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백혈병 피해보상 재판을 보면 사법부는 불확실한 것에 대해 확실성을 요구하는 근대적 지평에 머물러 있다. 현실은 근대성을 초과하는데 정작 첨예한 사안을 다루어야 하는 법정은 현실을 못따라잡고 있다. 당시 그 재판에도 관여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이 부분은 확실하진 않습니다) 금태섭 변호사의 이번 책이 무척 기대된다. 

 

휴버먼의 자본론 (리오 휴버먼, 김영배 옮김, 어바웃어북, 2011.06.24.)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 비판은 하나의 유행이 된 것 같다. 보수적인 정치세력 역시 자본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보스 포럼에 모인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지도자들과 거대 초민족적 기업의 CEO들 역시도 지속 가능한 발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런 비판은 크게 두 흐름으로 분류된다. 경제학 내에서의 비판이다. 스티글리츠 등 주류 내에서 자본의 비윤리성, 파괴성, 난폭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한 흐름은 경제학 자체에 대한 비판, 즉 맑스의 경제학 비판을 잇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흐름에 따라 맑스의 이론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많은 해설서들이 나왔다.  

  그 와중에 약간 뒷북으로도 보이는 <휴버먼의 자본론>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저자가 바로 리오 휴버먼이기 때문이다. 앞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를 대학생 새내기 시절에 읽은 적이 있는데, 이해하기 쉽고 재밌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그 책을 다시 읽으면서 치밀한 구성과 다양한 사례를 구성하는 성실성에 새삼 놀랐고, 후배 등에게 선물할 일이 생겼는데 마땅한 선물을 못 고르면 그 책을 선물하곤 했다.  

  이번엔 아예 제목에 '자본론'이 들어가 있다. 지난 저작에 비추어 봤을 때 단순히 <자본론>을 쉽게 해설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현실의 다양한 사례를 접목시키고, 더 나아가 현실을 재구성하는 그의 장점이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 

 

현대자본주의와 생명 (맑스코뮤날레 조직위원회, 그린비, 2011.06.02) 

  맑스코뮤날레는 한국 맑스주의 연구와 실천의 성과이자 치열한 현장이다. 이곳에서 무슨 논의들이 오갔는지를 기웃거리는 것만으로도 세계 정세와 한국의 현실이 어떠한지 접근할 수 있을 듯하다. 맑스코뮤날레 논의 내용이 나오는 것은 알았지만, 언제부터 이렇게 정식으로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코뮤날레 후의 결과물들을 종합해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특히 이번 코뮤날레의 핵심 키워드는 '생명'인 것 같다. 과거는 자본주의에서 '생태'의 문제에 많이 관심을 기울였었는데, 이제는 생태를 초과하여 그 근원적인 원리인 '생명'으로 논점이 진행된 듯하다. 들뢰즈에 대한 인기로 한때 생명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그 때는 너무 추상적이고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몰랐었는데, 이제는 가치, 정치, 존재, 여성주의 등 다양한 토픽들과 어우러져 '생명'의 문제를 더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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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이번 4월 한달 간 출간된 신간 도서 중 인문/사회/과학 분야 중에 관심이 가는 책 다섯 권을 선정해본다. 

1.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정정훈, 그린비, 2011.04.19.)

  얼마 전 좋은 입문서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 봤었다. 우리나라에 단 하나의 좋은 입문서를 고르라고 한다면, 난 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를 꼽겠다. 이 시리즈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입문서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좋은 입문서의 역할을 지금껏 해내고 있다. 

  이 시리즈는 고전을 현대적 감각으로 '다시 쓰기'를 시도한다. 맑스를, 칸트를, 니체를, 장자를 현대 철학의 다양한 면들과 접촉시킨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현대 철학에 오염된 고전이라고 보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이런 오염이 반갑다. 사실 오염(?)된 것은 고전이 아니라 이 현실이다. 역사는 흘러갔다. 그들이 그 고전을 썼을 당시의 문제틀, 이데올로기는 변형되었다. 푸코 식으로 말하면 그 책과 현대의 독자들은 다른 '에피스테메'를 딛고 있다. 그 간극을 무시하고 텍스트에 무조건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고전을 죽이는 길이다. 

  열네 번째 리라이팅 클래식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한 것이다. 저자 정정훈은 이를 맑스주의의 전통 속에서 재술한다. 이미 그람시, 알튀세르 등을 통해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위대한 유물론의 전통이라는 흐름 속에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에 대한 일반의 통념은 권모술수와 처세의 사상가로 인식되는 것이 지배적이다. 이것은 이론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마키아벨리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라는, 현대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철학보다는 처세술이 필요한 시대인가?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과 함께 그런 시대는 저물고 있다. 마키아벨리를 새로운 지적 전통과 결합시키는 것이 시대의 새로운 요구이다. 이 책의 저자 정정훈이 마키아벨리를 혁명적 맑스주의와 어떻게 마주치게 할지 사뭇 궁금하다.  

 

2. 국민과 서사 (호미 바바 엮음, 류승구 옮김, 후마니타스, 2011.04.22.)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과 더불어 탈식민주의 3대 이론가로 불린다는 호미 바바. 하지만 난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3대 기타리스트니, 4대 미드필더니 하면서 이런 식으로 클래스를 구별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호미 바바의 이론이 에드워드 사이드나 가야트리 스피박과 어떤 차별점을 보일지 기대되고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의 탈국가화 추세는 근대질서에 대한 저항이 기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 체제 자체의 한계와 모순으로 촉발된 것이고, 그러한 위기들에 대한 무능력으로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추세를 마냥 손 놓고 환영할 수만도 없는 것이, 여전히 칼자루는 '그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형성된 '네이션' 체제가 제국주의 시대가 종결되고(제3세계 식민지의 대대적인 독립) 미국 중심의 새로운 질서 이후에도 변형된 형태로 유지되었던 것처럼, 새롭게 변형된 '네이션'체제에 다시금 갇히게 될 수도 있다. 현 추세를 촉발시킨 것은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패배'에 가까운 것이지만, 이렇게 새롭게 열린 공간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적극적으로 사고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3. 상대성이란 무엇인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김영사, 2011.04.25.)

 상대성 이론 만큼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이론도 드물다. 아인슈타인을 이역만리 작은 나라의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세계적 유명인사로 만든 상대성 이론은,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감히 도전하기에는 왠지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다. 아마도 우리나라 출판물 중 자연과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출간된 입문서가 상대성 이론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상대성 이론에 대한 대중의 흥미는 상당하다는 뜻이다. 다만 이해가 안돼서 그러지..

  하지만 상대성 이론이 단지 과학계 뿐 아니라 지성사 전체에 끼친 영향력을 고려해봤을 때, 우리는 이미 저도 모르게 상대성이란 지평 위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신간평가단에서 과학 분야가 인문/사회 분야와 함께 다뤄지면서 과학 분야 책이 홀대받는 경향이 있다.(물론 출간되는 책 자체가 인문/사회에 비해 적은 탓도 있지만) 나 역시 과학에 문외한이지만 한번 읽어보고 싶다. 아인슈타인은 재밌고 명쾌한, 새로운 방식의 강의로도 유명했다. 강연집 형식을 띄는 이 책 역시 명쾌하고 재밌기를 바란다.  

 

4.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1980년대 대학의 하위문화와 대중정치(김원, 이매진, 2011.04.25.) 

  1980년대의 대학 문화와 학생운동을 더듬어 가는 이 책은 "잊혀진 것들"에 대해 기억하자고 말한다. 스스로가 386세대인 저자는 그 시대를 트라우마라는 측면에서 다시 돌아보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 세대에게 그것은 '잊혀진 것들'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단절된 것들'에 대한 기억이다. 유난히 질곡이 많은 우리 현대사 때문인지, 아주 가까운 과거조차도 우리에겐 너무 아득하게 느껴진다. 해방과 분단, 전쟁과 혁명, 독재와 민주화라는 숨가쁜 일련의 과정 아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체제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불과 2,30년이 지난 가까운 과거와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68세대의 극복이 포스트 68세대를 통해 이루어지는 서유럽과 달리 386세대에 대한 비판은 새로운 세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386 그들이 물리친 구시대의 유령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저자는 기억의 정치를 말한다. 과거를 복기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며, 앞으로 나아갈 지향점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세대는 역사와 기억에 대해 너무 무책임(무기력)해왔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기억을 해야 한다.  

 

5. 기억의 공간 -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알라이다 아스만, 그린비, 2011.04.25) 

   주목 신간도서로 선정할지 말지 무척 고민한 책이다. 단순히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책이 아니라 신간평가단 리뷰 도서의 1차적인 후보군을 고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싸고 두꺼우며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는 점은 은연중 선정을 꺼리게 만든다. 교양서보다는 학술서에 가까운 책은 가급적 제한하려고 했다. 이번 선정 목록 중에서는 앞서 추천한 호미 바바의 <국민과 서사>가 이미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이 책을 굳이 선정한 것은, 바로 위에서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을 선정하면서 발견한 고민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기억에 대해 너무 무책임해왔던 것은 아닐까? 정확히 말하면 기억에 대해 너무 무기력해왔던 것은 아닐까? 기억이라는 것이 기성 권력, 기성의 지식, 특히 미디어에 점령당하는 것은 비단 우리들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런 기억의 점령에 너무 무기력하게 방관해온 것은 아닐런지 다시금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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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는 이제 곧 사회진출을 앞둔 친구들이 많은데, 그들을 만나다보면 걷잡을 수 없이 뿜어져 나오는 우울의 기운에 견디기 힘들 정도이다. 가끔 만나서 소소한 잡담과 일상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술이 한잔 두잔 들어가다 보면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어찌할 수 없다. 그래도 서울에 있는 명문 사립대 출신들이니 그나마 유리한 위치가 아닌가 싶어서 괜한 엄살이라고 치부해버리려 하다가도, 그들의 고민을 가만히 듣다보면 사실 문제가 좀 복잡하다는 걸 새삼 느끼곤 한다. 

  자기들도 배울 만큼 배웠고, 책도 꽤 읽었다고 스스로 위안하는데, 그렇게 알고 있는 것과 자기의 진로가 서로 모순되니 그게 또 은근히 스트레스인 것이다. 책에서, 세미나에서, 가끔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때로는 술자리에서, 그리고 어떨 때에는 거리에서, 권력을 비판하고 사회의 진보를 이야기 했건만, 이제는 그런 권력에 편입되어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괜히 술잔을 부딪치며 위로를 주고받지만, 뻔한 말들뿐이다.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스스로일 뿐이라는 걸 새삼 깨닫곤 한다. 지금 당장 자기 앞에 닥친 이 우울에 대해 대답을 내놓으며, 나도 그들도 나름대로 스스로를 위안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자기 위안에는 깊은 체념과 허무주의의 정서가 있다. 친구를 막 위로하다가도, 막상 친구 입에서 스스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을 때는 나도 모를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왜 이런 자기 위안을 거쳐야만 하는가? 왜 스스로 자기를 납득하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가? 왜 한번은 체념해야만 하는가?  

  나는 이것이 마치 하나의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한다. 이제 앞으로 닥칠 불의와 부조리에 대해서 역시 눈감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인가? 우리들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뻔한 일이다. 세상이 얼마나 불합리한 곳인지, 불의가 판치는 곳인지, 그리고 얼마나 세련되게 자신들을 포장하고 감추고 있는지. 그런 불의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의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지난날 백신을 접종했었기에 더욱 쉽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이다. 하고 더욱 쉽게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인가? 

  체념과 허무주의라는 이 정서, 그러니까 우리 사회 혹은 우리 세대를 광폭하게 휩쓸고 있는 이 정서가 불의와 부정의, 부패, 기득권, 등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과 밀착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이는 이런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대응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들이 만들어낸 구조적 재생산의 한 미시적 과정이다. 체념과 허무주의, 그리고 냉소 없이는 결코 지금의 지배적 질서가 유지될 수 없다.  

  거대 자본이 횡포를 부릴 때, 온갖 편법을 통해 지배층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할 때, 국가가 극심한 불평등과 인간 존엄성의 파괴를 외면하려고 할 때, 그들은 정교한 논리로 무장하여 대중들을 설득하거나, 혹은 언론을 통제하여 사실을 감추거나, 혹은 검찰이나 경찰 같은 강력한 물리력을 통해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려기보다는(물론 그렇게 한다) ‘뭐 어쩌겠어’, ‘원래 그런 것 아니냐’ 같은 대중들의 폭넓은 체념과 냉소, 허무주의에 의지한다.  

  따라서 우리는 허무주의에 맞서지 않고는 사회의 부정의에 대항할 수 없다. ‘뭐 어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제시해주는 정치세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허무주의에 대항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허무주의가 우리의 적이라고 선언하는 것뿐이다. 체념과 냉소, 허무의 정서가 어떻게 기존의 지배질서를 강화하고, 어떻게 사회적 불의를 용인하게 만드는지 폭로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무언가를 어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직’ 못 찾는다 하더라도 나 스스로가 허무주의적 태도를 갖는 것을 경계하게 해야 한다.  

  올해 초 나온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를 최근 다시 읽으면서, 다름 아닌 바로 이 진리를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이렇게 외친다. 
 

 

 

 

 

 “체념과 냉소를 전염시키는 일 역시 부패의 공범이다!”  

 

  김용철 변호사가 어떤 삶을 살아왔든, 과거 어떤 짓을 저질렀든, 그의 사람됨이 어떻든, 이 책은 오직 하나, 그가 삼성이라는 거대한 산 권력 앞에서도 질식하지 않고, 끝내 체념과 허무를 이겨내고, 자신의 불의한 양심으로 진실을 고백했다는 바로 그 사실 하나로, 충분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우리는 읽어야 한다. 거대한 권력 앞에 철저히 짓밟힌 사람이 어떻게 허무와 체념을 극복했는지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초인적인 용기와 의지가 아니다. 우리가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오히려 겸손해지는 것이다. 허무주의의 밑바닥에는 우리가 세상의 본질을 알고 있다는 듯한 지적 만용이 있다.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다. 안 봐도 안다. 원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눈앞에 말도 안 되는 불의가 펼쳐졌을 때 거기에 놀라고, 경악하고, 분노하지 못한다.  

  허시먼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에서 날카롭게 분석했듯이 무용 명제(뭘 해도 소용없다, 바뀌지 않는다)는 사회에 대한 과학적 법칙을 발견했다는 자만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세상을 어떻게 바꿔보려고 몸부림치지만, 그건 잘 모르고 하는 말이야. 원래 세상은 이렇게 이렇게 굴러가도록 설계되어 있어. 소용없는 일이야. 이런 지적 만용은 일반 이론의 거죽을 덮어 쓰고 말하지만 곧바로 냉소와 체념, 허무주의를 불러온다. 그러나 자신들이 발견했다고 자신했던 그 과학적 법칙이란 언제나 그 발견자를 배신하곤 했다. 세상이 어떻게 퇴보할 지, 어떻게 발전할 지에 대해선 모르는 것이다.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에 실린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의 추천사처럼 허무주의는 우리의 적이다. 허시먼이 무용 명제의 모욕적 속성에 대해 분석했듯이 사회의 불의에 대해 허무주의보다 좋은 보약은 없다. 

  그러나 허무주의는 어느 날 저절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 말을 경청함으로 손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허무주의가 바로 우리의 적이라는 것, 허무주의가 바로 내가 냉소하는 그것을 더 강화시킬 것이라는 것, 체념하고 냉소함으로써 나 역시 사회적 불의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바로 그렇게 허무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아무 희망도, 아무 가능성도 없는 암울한 현실에 놓여 있더라도, 아무 희망도 가능성도 없는 채 나 자신의 허무주의를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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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철학 분야에서 잘 나가는 저자 중에 강신주가 있다. 처음 강신주를 알게 된 것은 <철학, 삶을 만나다>를 통해서였는데, 루이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이나, 알랭 바디우의 ‘보편’ 같이 난해한 개념들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 이런저런 것들을 접하다보니 당시의 책에 적힌 내용들이 상당히 일면적이고, 약간은 자의적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책의 장점은 가족, 사랑, 국가 같은 일상적인, 혹은 현실적인 주제들과 철학적 개념들을 조화롭게 풀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철학, 삶을 만나다> 이후, 강신주의 전공이기도 했고 학위 주제이기도 했던 노자철학과 장자철학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담은 몇 권의 책을 훑어보면서 더 흥미를 느끼게 됐고, 대학에서 저자의 수업을 두 개 수강하고, 서로 다른 극단적인 성적을 받기도 했다. 첫 번째 수업을 들을 때만 해도 별로 알려지지 않고 인기가 없었는데, 다음 수업에서는 넓어진 강의실과 몰려든 수강생을 통해 저자의 달라진 인기와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목차가 가장 매력적인 

  동서양의 다양한 사상가를 아우르는 폭넓은 이해와 꾸준한 저술, 강단 안팎을 넘나드는 다양한 강의로 현재의 ‘인문학 붐’을 주도하고 있는 저술가 중 한 명이지만, 최근의 저작들을 볼 때는 기존의 성공을 답습하는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이름만 들어도 골치 아프지만 때로는 지적 욕구를 자극하는 철학자들과 난해한 개념들을, ‘쉽게’, ‘대중적으로’ 풀어쓰는 교양서가 저자의 주무기였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요구와 출판사의 홍보일 뿐이고,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면 철학 입문서라기보다는 철학 에세이에 가까웠고 저자가 소개하는 사상가들과 그들의 철학적 개념들은 일면적이거나 표면적으로만 다뤄지며, 독자가 요구하는 것(즉 어려운 사상가들의 이론을 쉽게 잘 이해하하는 것)을 충족시키기보다는 자신의 글에 봉사시키는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한 책들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목차(지적 욕구를 자극하는 사상가들의 이름과 개념, 저서들이 주욱 나열된)일 뿐이며, 그 점이 구매욕을 자극하고 소비로 이어지며, 그것이 표피에 불과하더라도 이름난 철학자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만족감을 독자에게 생산시키고 있다.
  

 

 


 

  

 

  사실 이런 양상은 저자가 자신의 전공인 장자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엿보인다. 난 <장자>를 읽어보지도 못했고 장자철학에 대해서는 오직 강신주를 통해서만 알고 있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 마치 서양의 최신 이론을 위해 <장자>란 텍스트를 봉사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며, 저자가 장자철학과 노자철학에 대해 강렬하고 독특한 독해를 이루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다만 최근의 저자 자신의 매너리즘이 반복된다 해도, 지금과 같은 성공이 반복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성급히 오버해보면, 오히려 철학서에 대한 일반 독자의 불신이 발생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해본다. 

 

  사실 강신주의 최근 저술에 대한 나의 불만이 성급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철학에 정통해 있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불만의 근원은 대부분 ‘느낌’에 불과하다. 그리고 또한 나 스스로가 그의 ‘진지한’ 독자가 아니기에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가며 읽지 못한 점도 있다. 하지만 이런 ‘느낌’들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 우연찮게 그러한 근거를 발견했다. 

 

<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 비판 

  강신주는 매주 수요일 동아일보에 <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라는 코너를 연재한다. 지난 2월 23일자 신문에는 ‘<14> 모임에 속해 있어야만 하는 대학생들’이란 제목으로 동아리, 학회, 서클, 스터디 그룹 등 대학생들의 모임에 대해 분석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개인은 그 나약함으로 인해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심리가 발생하고 그 안에서 불안을 해소하고 귀속감이란 무의식적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는 프로이트 집단심리에 대한 이론과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에 대한 개념들을 인용하며,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질수록 개인의 개성이 부정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비판 1 : 반전 결론, 혹은 훈훈한 마무리 

  대략 이런 내용을 갖는 이 글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일단 비약적인 마무리는 반전에 가깝다. 내용의 대부분을 집단 속에서 개인의 개성과 능력이 위축된다는 사실을 지적해놓고는 마지막 한 문단에서 ‘유아적인 욕망’을 극복하고 ‘고독감과 불안감을 견딜 의지와 용기’가 있다면 ‘마침내 자신의 개성을 집단에서도 관철시킬 수 있’다고 훈훈하게 결론 내린다. 이건 철학자의 글이라기보다는 상황을 마무리 짓는 토크쇼 진행자의 재주에 가까워 보인다. 만약 마지막 문단에 쓴 대로 “개성을 개화시킬 수 있는 집단 활동”의 가능성이 결론이라면 그 부분을 더 설득력 있게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개성이 집단에 의해 부정당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와 귀스타브 르 봉 등의 권위에 기대놓고, 정작 결론은 몇 마디 그럴듯한 말로 끝맺는 건 심한 불균형이다. 이 글을 읽으면 누구든 ‘반전결론’ 아니면 ‘MC의 마무리 멘트’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비판 2 : 강신주가 인용한 프로이트와 귀스타브 르 봉 

 2-1 : 르봉의 군중심리 이론

  더 중요한 문제점은 강신주가 인용하고 있는 르 봉의 존재이다. 사실 이 글에서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가 인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에는 약간 반가웠고, 그 다음에는 좀 의아했다. 르 봉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심리학자로 당시, 19세기 말 <군중심리>란 기념비적인 저서를 써서 사상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지금은 그다지 널리 읽히는 책은 아니다. 몇 년 전 동생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구매해서 조금 읽다 책장에 꽂아 둔걸 우연히 꺼내서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이런 글에서 그 이름을 들을 수 있게 되니 왠지 반가웠다.  

  하지만 의아했던 것은 르 봉의 <군중심리>는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쉽게쉽게 인용할 만한 저서도 아닐뿐더러, 르 봉의 이론은 프로이트와는 상당히 다른 점이 많아 나란히 인용할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르 봉의 <군중심리>를 읽어본 사람은 누구라도 눈치 채겠지만 일단 그는 엘리트주의적인 관점에서 군중을 이해하고 분석한다. 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이 저작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당시 19세기 말의 정치적 상황에서 정치적 권리가 일반 민중에게까지 확산되고,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것(대표적으로 보통선거제도)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한다. 당시 일반적으로 ‘민중의 지배’로 이해되고 있던 민주주의의 급진적 구호에 대해 공포심마저 갖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르 봉이 자신들의 지배권력을 민중들에게 빼앗길 것을 전전긍긍하는 귀족이나 정치 엘리트였던 것은 아니다. 어찌됐든 그는 뛰어난 이론가이며, 자신의 이론에 일관성을 갖춘 학자였다. <군중심리>를 읽다보면, 프랑스인답게 프랑스 혁명의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엘리트와 민중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그들의 생활양식, 직업, 성격, 지능이 유사하든 아니든 그에 상관없이 그들이 군중으로 변모했다는 사실이 그들을 하나의 집단정신에 소속시켜버린다”고 말한다. 그는 군중 안에 있을 때는 개인들을 신분이나 지능, 능력 등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다. 다만 그 개인이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군중으로 변모했을 때는 그 구성원이 누가 되든지 ‘군중’이 갖는 일반적 특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일반이론의 가죽을 뒤집어쓴다고 하더라도, 결국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군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하다. 그리고 ‘군중’이란 용어가 암시하듯, 군중을 이해하는 르 봉의 견해는 일관되게 부정적이다. (이제와 적당한 인용문을 고르려니 눈에 띄지 않고)목차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 군중의 충동성, 도덕성, 과잉반응성... 2. 군중의 피암시성과 잔인성... 3. 과장적이면서도 단순한 군중의 감정... 4. 군중의 편협성, 독재성, 보수성...” 등등 

  르 봉은 개인과 군중 사이에 위계적 질서를 설정한다. 그는 ‘군중’을 신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단적 의사 결정이란 민주적 의제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들 사이의 집단적 관계에 대해 ‘군중’이란 존재 형식 외에는, 다른 어떤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현실과 역사적 흐름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를 보인다. 이런 점들로 보아 그가 정치적 의견을 직접적으로 피력하지는 않았지만, 민주주의와 피지배계급의 정치 참여(필연적으로 집단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는)에 부정적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군중’의 대립쌍으로서 ‘개인’이 있다면 그 개인은 (정치적인 의미에서)필연적으로 엘리트, 혹은 소수의 귀족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문명들을 창조하고 지도한 자들은 오직 소수의 지식귀족들이었지 결코 군중은 아니었다. 군중은 오직 파괴력밖에 발휘하지 못한다. 군중의 규칙은 언제나 야만적인 수준에 머문다."  - <군중심리>, 32쪽

 

2-2 : 프로이트와 르 봉의 관계

  하지만 부분적이긴 하지만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이해는 이런 르 봉의 관점과 양립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일단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학은 르 봉(물론 르 봉이 개인의 합리성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다)과 달리 개인의 합리성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해 왔다. 특히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은, 한 생명체가 인간이 되는 과정과 일치하며, 따라서 한 인간으로서의 개인의 역사 자체가 관계적이며, 집단적인 과정이다. 물론 프로이트도 개인의 심리와 집단의 심리에 대해 구분하겠지만 그것이 르 봉처럼 개인심리와 집단심리의 위계적 구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순화하자면, 프로이트의 기획이 '합리성 비판'이었다면, 르 봉의 기획은 (군중의)'비합리성 비판'이었던 것이다.

  신문에 연재된 강신주의 글을 읽고는, 약간의 혼란이 느껴져 <군중심리>를 다시 펼쳐 봤는데, 거기 저자소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저서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을 <군중심리>에 대한 비판서로 기획했다고 한다.” 강신주가 <군중심리>와 나란히 인용한 프로이트의 저서가 바로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이다. 사실 프로이트에 대해서는 통상적인 이해만 있으며, <집단심리와 자아분석> 역시 읽어본 적이 없어서, 나의 의심에 확신이 들지 못했지만 이제는 확실해졌다. 프로이트의 <집단심리와 자아분석>과 르 봉의 <군중심리>는 서로 비판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19세기의 반동적 심리학자의 글과 프로이트의 글을 병렬적으로 인용한 것에 대해 의아했던 것이다. 특히 저자 스스로가 무정부주의자라 말하며, 비판적 관점을 견지해오던 사람이라 더욱 그랬다. 물론 르 봉의 글에서 유효한 지점들이 있을 것이며, 그런 부분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전취하는 것은 학자의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반동적으로 개입했던 학자에 대해 아무런 평가 없이 “탁월한 사회심리학자”라며 한 구절을 인용해오는 것은 썩 마땅치 않다. 르 봉의 <군중심리>가 단지 반동적 주장을 펼치고 있을 뿐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책이 히틀러, 무솔리니 등을 통해 파시즘에 기여했다는 뚜렷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기에 특히 더 그러하다.  

 

비판 3 : 그는 왜 르 봉과 프로이트를 인용했을까?

  그렇다면 왜 강신주는 프로이트의 <집단심리와 자아분석>과 르 봉의 <군중심리>라는 상호 비판적인 두 저작을 상호보완적인 방식으로 나란히 인용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어떤 심오한 의미가 있는지 쉽게 알기 어렵지만, 얼마 전 (이 또한)우연치 않게 그 연유를 짐작할 만한 단서를 찾게 됐다. 며칠 전 앨버트 O. 허시먼<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란 책을 흥미롭게 읽고 있는데, 거기에는 허시먼이 말하는 반동의 수사학 중 하나인 ‘역효과 명제’의 대표자 격으로서 르 봉이 언급되고 있었다. 허시먼이 이해한 르 봉은 앞서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허시먼은 르 봉이 ‘민주주의(구체적으로는 보통선거권)는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왜냐하면 군중이 지배할 것이기 때문인데, 군중은 이러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프로이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군중심리에 대한 르 봉의 이론은) “그러나 한편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진행하고 있던, 개인들도 결국 온갖 종류의 무의식적 욕구에 종속돼 있음을 곧 밝혀내게 되는 연구는 알지 못한 상태에서, 개인과 군중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데서 자신의 이론을 시작한다.”   - 위의 책, 50~51 쪽 

  여기서 허시먼도 개인과 집단에 대해 르 봉과 프로이트의 견해가 서로 대립점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강신주는 그렇게 보지 않았을까? 바로 이 질문에 대해 허시먼은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본문을 서술한 후 주석을 달아 다음과 의문을 제기한다. 

“이상한 점은, 프로이트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대중심리학의 문제로 관심을 돌렸을 때, 자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 분명했던 르 봉의 개인과 군중 사이의 구분에 대해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르 봉과 그의 저서인 <군중심리>에 대한 프로이트의 호의적 평가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전집> 제18권으로 실린 <집단심리학과 자아 분석> 72~81쪽을 보라.”  - 위의 책 51쪽 

 

 3-1 : 첫 번째 추측 - 프로이트의 실패한 기획?

  이를 통해 몇 가지 가능성을 상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군중심리>에 대한 비판이라는 애초의 기획 의도와 달리 프로이트의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은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했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허시먼도 그리고 강신주도 두 저작을 친화적 관계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 프로이트의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을 깎아내리거나 실패작으로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난 그 글을 읽어보지도 않았다. 다만 여타의 정황들을 볼 때, 최소한 <군중심리>에 대한 비판서로서의 역할은 다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해볼 뿐이다.(난 여기서 강신주의 글에 인용된 그대로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이라고 쓰지만 허시먼의 책이나 다른 검색들을 통해 볼 때 우리나라에는 <집단심리학과 자아 분석>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듯하다. 그리고 원제를 보면 집단심리학이 맞는 듯하지만 처음 썼던 대로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이라고 부르겠다.) 

 

 3-2 : 두 번째 추측 - 사라진 비판점?

  두 번째 가능성은 프로이트는 자신의 글에서 르 봉을 직접적으로 반박하기보다는 우회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고, 그것이 변화된 정치적, 사회적 조건하에서, 그러니까 변화된 지평 아래에서는 그런 대결 지점들이 무력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럴 듯해 보이긴 하지만 역시 알 수 없다.(자유의 몸이 되면 빨리 프로이트부터 읽어봐야겠다.) 읽어보지 않은 관계로 일단 <집단심리와 자아분석> 자체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는 여기서 접어야겠다. 

 

 3-3 : 세 번째 추측 - 인용이 필요했고, 거기에 르봉이 있었다?

  세 번째이자, 이 글의 본론이기도 한 가능성은, 앞서 추측했던 것들과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닌데, 프로이트의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에는 르 봉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없었고, 강신주는 <집단심리와 자아분석>만 읽고, 거기에 나온 대로 르 봉을 인용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허시먼의 지적대로 <집단심리와 자아분석>은 르 봉의 <군중심리>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시먼이 말한 대로 프로이트의 이론은 군중심리에 대한 르 봉의 이론을 반박하는 효과를 갖는다. 따라서 르 봉에 대한 진지한 이해 없이 프로이트가 인용한 대로 르 봉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런 의심은 강신주의 글을 읽을 때 반복적으로 드는 것인데, 이것이 단지 나의 의심일 뿐이면 좋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괜한 의심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복되는 것은 저자의 글쓰기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분명 저자는 인용의 힘을 알고 있다. 특히 인문학, 특히 철학 책을 즐겨 읽고, 그에 대해 이야기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권위에 민감하다. 과학처럼 관측이나 실험, 임상 등을 통해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권위 있는 권위자의 권위’에 기대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지곤 한다. 이런 현실은 비단 쓰는 사람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의미를 진지하게 사유하려 하기보다는 권위에 섣불리 신뢰를 보내곤 하는 읽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철저하고 엄격한 인용을 통해 텍스트의 권위와 신뢰를 높이는 한편, 텍스트 본래의 의미를 권위가 아니라 그 말에 의해 드러나도록 하는 1차적 책임은 쓰는 사람에게 있다. 

  강신주 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쉽고, 재미있으며, 폭넓은 흥미와 사고를 이끌어낼 수 있는 책들이 지금 필요하며, 우리 사회가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요구에 가장 효과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강신주다. 쉽고 대중적인 철학을 지향하는 그의 글쓰기는 지지받을 만하다. 문제는 내용이다. 그의 글들에 등장하는 그 수많은 사상가들, 수많은 저작들, 수많은 개념들은 저자에 의해 깊은 이해의 과정을 거치고 선정되어 나오기만 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물론 한 철학자의 사상이나, 한 저작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거은 결코 아니며, 다양한 방식으로 독해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그 사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지한 독해 이후, 그것을 새로운 조건들과 결합시키면서 충분히 의미 있는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글에서는 종종 그런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저자에 의해 선택적으로 인용되어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에 나오듯이 한 사람의 독서가가 책을 타자로서 대한다면, (창조적인 오독이 만들어내는 의미의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저자와 텍스트를 진지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을 거라면, 자의적으로 선택적으로 인용할 것이라면, 그렇다면 굳이 왜 그 텍스트, 그 학자가 인용되었겠는가? 바로 권위 때문이 아닌가?  

 

 3-4 : 네 번째 추측 - 르 봉에 대한 재해석? 

  하지만 어쨌든 지금 말하는 것은 단지 세 번째 가능성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가능성이 있다. 르 봉을 그동안의 통상적인 견해 반동적 심리학자로서 이해하지 않고,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의 친화성 속에서 르 봉을 이해한 것이다. 이럴 경우,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 어떤 실패도 아니라, 르 봉 이론에 대한 전략적 재해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문제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르 봉을 재해석하고 의미 있는 지점들을 적극적으로 전취해낸다 하더라도, 이미 르 봉이란 존재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이 있다. 저작 곳곳에 숨어 있는 엘리트주의적 언급, 비관주의 그리고 파시즘에 끼친 영향들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평가 없이 어떻게 재해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가령 지금의 니체가 있기까지 유럽에서 오랜 기간 니체를 평가하고, 비판하고, 다시 읽는 과정들을 통해서, 나치즘에 물든 니체가 아닌, 현대적인 모습으로 재해석된 것이 아닌가? 즉 네 번째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고 하더라도 르 봉을 이런 식으로 인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강신주의 책은 여전히 읽을 만하다는 것 

  사실 별거 아닐 수도 있는 짧은 에세이에 대해서 너무 장황한 비판을 늘어놓은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특히 뛰어난 한 철학자에 대한 과도한 비난이 된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도 든다. 더구나 난 프로이트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저자로서 강신주의 글들이 지닌 수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드는 의구심들이 있었는데, 마침 신문에서 글을 본 김에 정리를 해봤다. 

  이 역시 토크쇼 진행자의 마무리 같아 보일 수 있지만, 굳이 정리하자면 강신주의 책들은 분명 단점보다 강점이 많다. 그래서 꾸준히 출판될 수 있으며, 꾸준히 흥행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강신주만큼 매력적으로 철학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 역시 강신주의 책에 대한 추천 서평을 몇 번 쓴 적이 있고, 그의 강의를 여러 사람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의 책이 발간됐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고, 은근히 기대하기도 한다. 다만 그의 글에서 자꾸 부딪치게 되는 불편한 점들, 그리고 들게 되는 의구심들을 나 스스로 정리해볼 필요가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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