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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불만과 문제점들은 이미 다른 서평단분들에 의해 훨씬 더 구체적이고 날카롭게 비판되고 있으니, 굳이 여기서 동일한 비판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나는 이 책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제시할 수 있는지를 다소 억지스럽더라도 찾아보고자 한다

  나는 책을 볼 때(읽을 때든, 그냥 살펴볼 때든) 가장 먼저 목차부터 살펴본다. 보통은 목차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책의 방향이나 논조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78년 이후 세계사를 크게 전환의 시대(1978~1991), 낙관의 시대(1991~2008), 불안의 시대(2008~현재)라는 세 시기로 구분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차적으로는 78년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다룬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목차를 보면서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78년 덩샤오핑의 반혁명에서 시작하여 걸프전으로 종결되는 전환의 시대(1978~1991)는 어떤 전환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환의 시대였다는 것에 대해 납득할 수는 있다. 그런데 91년 냉전체제의 종식에서 시작하여 2008년 까지 지속되는 시기를 낙관의 시대(1991~2008)라고 규정하는 것에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1991~2008을 낙관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일까? 2008년 금융 위기 이후를 불안의 시대(2008~)라고 말하는 것 역시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촉발된 세계 경제 위기가 불안의 시작인가?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저자 기디언 래치먼이 이러한 시기 구분을 했다는 것, 그러니까 세계사의 흐름을 이런 식으로 인식했다는 것은 그가 어떤 입장과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단적인 지표가 될 수 있다. 래치먼은 <이코노미스트>를 거쳐 <파이낸셜 타임즈>에서 일한 언론인이다.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언론에서 일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지닌 입장과 견해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보수적인 관점에서 본 신자유주의의 역사이자, 기디언 래치먼 스스로가 신자유주의자라는 점에서 보면 신자유주의의 자서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 미국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던 세계 경제는 순식간에 끔찍한 타격을 받았고, 세계는 현 위기를 극복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켰다. 우리나라에서도 각계각층에서 금융 위기를 진단하고 그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는 지속적인 크고 작은 경제난들이 이어져 왔지만 이번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우리나라에서 갖는 독특성은, 대중들에게 경제적인 문제, 생존의 문제인 동시에 지성적인 문제로 다가왔다는 점에 있다. 97년 외환위기를 안전망 없는 무분별하고 성급한 시장개방 같은 졸속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찾든, 유연성(내지는 유동성) 부족과 전투적인 노동조합의 이기주의에서 찾든, 그것은 학계와 정치인들의 논쟁일 뿐이고 그런 지적, 정치적 엘리트를 제외한 다수 대중들에게는 먹고 살기 어려운 시대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 위기에 대해서는 먹고 사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그것을 엘리트들에게만 맡기지 않고 대중들이 그 문제에 대해 스스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관련 도서들이 대거 출간되고 각종 서점에서 판매 순위 상위권에 랭크되었다. 그 이후 우석훈, 장하준, 선대인, 김광수 같은 비판적인 경제학자들이 큰 인기를 누렸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2008년 금융 위기는 이런 특수성을 지니는 것일까? 세계 곳곳에서 발생했던 다른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위기들과는 다른,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지닌 특수성이 바로 이 책 <불안의 시대>가 쓰인 배경이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태생적으로 위기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독자적인 발전모델이라기보다는 이미 한계를 드러낸 경제 체제에서 파생된 위기를 지연시키는, 위기관리 전략으로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포디즘, 케인즈주의, 브레튼우즈 체제라는 삼각대가 20세기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 전략의 핵심적 축이었다. 역사적으로는 포디즘, 그리고 케인즈주의, 마지막으로 브레튼우즈 체제가 성립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세계적으로 환산시키고, 전후 세계경제의 호황을 주도한다. 하지만 이 삼각대는 하나씩 하나씩 붕괴된다. 좌파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이윤율의 저하경향으로 설명한다. 어떻게 설명되든 간에 이런 경제 시스템은 더 이상 이윤축적에 한계를 드러내고, 베트남전쟁, 중동 석유 파동 등으로 인해 발생한 결정적 타격을 경제적으로 극복할 원동력을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존의 발전전략을 대폭 수정하여 금융화, 민영화, 규제 완화, 관세 철폐 등을 기조로 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된다. 이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핵심 목표는 위기의 전가에 있다. 즉 미국에서 발생할 위기를 주변부, 3세계 국가로 떠넘기고, 기업에게 발생할 위기를 노동자, 서민에게 떠넘기는 방식이다. 이런 위기 전가 시스템은 계층 간, 국가 간 이동을 넘어서 부문간 이동으로도 이어진다. 경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기를 환경에 떠넘기고, 생산에서 발생하는 위기를 소비에 떠넘기고, 경제활동의 위기를 정치활동에 떠넘기는 식(세계 곳곳에서, 특히 한국에서 발견되는 민주주의의 위기 같은 것)이다.  

  이런 위기 전가 시스템에 바로 이 책의 전제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기디언 래치먼은 대체 왜 91년부터 2008년 까지를 낙관의 시대라고 보았을까? 대체 왜 2008년 금융 위기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불안의 시대가 되었다고 보는 것일까? (래치먼은 이것을 다소간 세계 정치적인 문제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 역시 자본의 문제를 정치 영역에 떠넘기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본격적으로 제3세계에 보급하기 시작한 70년대, 80년대, 그런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이식한 결과 아프리카와 남미의 경제는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IMFGATT, WTO 등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세계화된 시기(래치먼이 낙관의 시대라고 명명한 바로 그 시대이다.)에는 그런 신자유주의 위기가 거의 전지구화되었다. 일본의 잃어버린 10으로 명명된 장기불황의 시대도 그때이고, 한국과 대만을 비롯해 세계적인 충격이기도 했던 동아시아의 외환위기가 발생한 시기도 바로 그때이다. 동일한 시대 중남미에서도 외채위기와 외환위기가 결합된 엄청난 경제 위기가 들이닥쳤고,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 자본주의를 도입한(자본주의 중에서도 바로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동유럽에 빈곤화, 양극화, 실업률 증대 등 다양한 경제위기가 발생한 것도 그 시기이다. 2000년대 중반에는 환경위기와 금융위기가 결합하여 전 세계적인 식량 위기가 발생했다. 식량부족으로 전세계 곡물가격이 폭등하였고, 식량수출국들은 수출을 제한하면서 식량의 절대적인 부족현상이 발생했다. 북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그래도 먹고는 살던 나라들에서 식량이 부족해서 폭동이 발생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심지어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같은 선진국에서조차(양상은 좀 다르지만) 식량 부족으로 인해 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기 세계 어느 곳을 들여다보아도 래치먼이 말하는 것과 같은 윈-윈의 시대, 낙관의 흐름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오히려 증폭하는 불안과 고통,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위기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위기가 바로 신자유주의 정책의 직접적인 결과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성공적인 신자유주의의 시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 전략의 본질이 위기 전가 시스템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잘 작동해왔기 때문이다. 위기는 끊임없이 제3세계 국가, 주변부 국가, 반주변부 국가 등으로 전가되었고, 고통은 노동자, 서민, 실업자, 여성, 이주민들에게 전가되었다. 전세계적인 불황에도 불구하고 각종 재벌, 초국적 자본이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동안 그 대가는 지구 생태계가 치르고 있다. 자본주의의 무능력함이 증명되는 와중에도 자본가 집단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대신 대다수 국가들에서는 정치 지도자들이 지도력의 위기를 드러내고, 정치 시스템은 의심을 받고,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덕분에 여지껏 미국과 미국의 백만장자들은 여전히 무사하다기디언 래치먼 말대로 1991~2008년까지는 낙관의 시대였다. 자본주의에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미국과 미국의 백만장자들은 그 문제를 다른 집단들에게 떠넘기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에 다름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위기전가 시스템이 잘 돌아가리라는 낙관인 것이다

  그러나 2008년 금융 위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위기의 진앙지가 바로 미국이며, 최대 피해자도 바로 미국이다. 그것은 역사상 최초로 나타난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위기이다. 9.11이 미국 본토가 물리적인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알린 충격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면, 2008년 금융 위기는 미국 본토가 금융적인 붕괴를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알린 충격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것이 바로 2008 금융 위기의 특수성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비슷하다. 97년 외환위기는 우리나라의 위기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발전해야 하고, 선진국에 도달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발전주의적 전략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했던 것이다. 발전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패러다임이 넘어간 결과 발생한 위기인데, 오히려 발전주의적으로 그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미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더 발전하고, 더 강해지고, 더 선진국에 가까워진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그 동안 의존해왔던 논리구조로는 이 문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바로 공백이 발생한 것이다. 그 점에서 2008년 금융 위기는 먹고 사는 문제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서 지적인 문제, 인식적인 문제의 대상이 된 것이다

  래치먼은 2008년 금융 위기를 기점으로 세계가 윈-윈 게임에서 제로섬 게임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전에도 세계 정치와 세계 경제는 윈-윈보다는 제로섬에 가까웠다. 초국적 자본과 미국 행정부, IMFWTO 등은 끊임없이 제로섬 게임을 제안해왔다. 그것은 자본의 안정성과 노동의 안정성(일반화 시키자면 민중의 생활세계의 안정성)을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금융시장을 개방함으로써 금융 자본은 위기에 발빠르게 대처하고, 각종 위험을 예방하면서 수익의 안정성을 도모할 수 있지만, 덕분에 민중들의 생활세계는 변덕스러운 금융 투기자본의 일거수일투족에 휘둘리는 불안정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97년 외환위기 등으로 이어졌고, 그 이후에도 그런 불안정성은 주기적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2008년 금융 위기의 문제는 그런 안정성의 교환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불안의 문제를 래치먼을 비롯한 신자유주의자들은 이제 비로소 실감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편협한 견해인가

  하지만 이 책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독자는 이 책을 읽자마자 이 책이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시야는 매우 편협하고 견해는 일관되지 못하며, 해결책은 있으나마나한 말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미국의 엘리트인 저자가 알지 못하는 것을 미국의 외부에서 우리들은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살아왔다. 그에게는 2008년 금융 위기만이 인지되고 있지만, 우리는 97년의 위기도 2006년의 위기도 2008년의 위기도 모두 신자유주의로 인한 위기라는 것을 인지해가고 있다. 래치먼이 2008년 이후의 신자유주의의 참된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아무리 외쳐도 우리가 돌아가고 싶은 모습은 그가 가리킨 방향이 아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결코 미국의 전략에 우리의 대안과 미래가 없음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2008년의 금융 위기가 기존의 습관적인 이데올로기적 과정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공백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것을 극복하는 상상력 역시도 공백일 수밖에 없다. 97년에 희극적으로 반복되었던 잘 살아보세의 구호(비극적인 원형은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운동이다)는 이제 다시 반복되기 힘들다. 우리나라가 더 강해져서, 더 부유해져서, 더 선진국에 가까워져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의 해결책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앞으로의 역사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스스로 탐구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대의 전환기에는 언제나 전 대중적이고 광범위한 지적 탐구가 동반되었다. 이제는 과거보다 더 광범위한 지적 탐구가 발생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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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박현희, 뜨인돌, 2011.06.30.) 

  그간 신간평가단에서 읽는 사람을 압도하는 무거운 책들을 다루게 되다보니, 독서가 즐거운 유희이거나, 혹은 삶을 깨우는 경이로 다가오기보다는 마치 숙제 같아진 점이 있었다. 물론 즐거움과 경이로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독서와 서평 쓰기를 힘겨워한 것은 순전히 나의 부족함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라는 다소 가벼운 제목의 이 책은 제목 만큼이나 발랄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익숙한 전설, 민담, 동화들을 구성하는 비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 그 의문은 동화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의문을 제기한 바로 우리들 자신을 향한다. 우리의 삶이, 사회가, 현실이 어떤 곳인가? 라는 질문.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간 동화가 비합리적이고, (해리포터 같은 최신 저작에 비해) 낡은 것으로 치부되어 온 경향이 없지 않은데, 이제 전래동화라고 하는 고전 중의 고전이 새롭게, 비판적으로 독해되면서 진정 공통적인 것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탐색되고 있다. 

 

아렌트 읽기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서유경 옮김, 산책자, 2011.06.03.)

  아렌트가 현대 사유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들 한다. 우리 나라에도 아렌트에 대한 연구가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렌트에 대한 해석이 다양해서 초보자로서는 전념하여 읽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렌트의 뛰어난 제자인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의 아렌트 해설서가 번역 소개된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확신의 함정 (금태섭, 한겨레출판사, 2011.06.28.)

  이번달 신간평가단 도서로 꼭 선정되었으면 하는 책 중 하나이다. 지금은 그 동안 근대 민주주의 정체를 떠받쳐왔던 삼권분립의 이상이 흔들리는 시대이다. 과거 신자유주의 개혁 몇년간 행정부의 팽창과 의회의 과소화 등이 이야기되며 민주주의의 원칙이 근본부터 의심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민주주의의 원칙이 흔들리면서 사소한 문제부터 결정적인 쟁점까지 정치권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법적 판단에 의지해 왔다. 미네르바 사건 같은 경우에도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 세력 간의 논쟁과 시민 사회에서의 합의를 통해 결론을 냈어야 할 문제였다. 언론법 개정 역시도 정치권은 스스로 정치의 논리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최종 판단을 헌재에 맡겼다.  

  그런데 문제는 법정 역시도 그리 확실한 진리의 담지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각종 현안 재판에서 정치권력의 입김이 작용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더 나아가 법정은 과학도 인격도 양심도 모든 걸 다룬다. 그것도 확실성이란 범주로. 최근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백혈병 피해보상 재판을 보면 사법부는 불확실한 것에 대해 확실성을 요구하는 근대적 지평에 머물러 있다. 현실은 근대성을 초과하는데 정작 첨예한 사안을 다루어야 하는 법정은 현실을 못따라잡고 있다. 당시 그 재판에도 관여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이 부분은 확실하진 않습니다) 금태섭 변호사의 이번 책이 무척 기대된다. 

 

휴버먼의 자본론 (리오 휴버먼, 김영배 옮김, 어바웃어북, 2011.06.24.)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 비판은 하나의 유행이 된 것 같다. 보수적인 정치세력 역시 자본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보스 포럼에 모인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지도자들과 거대 초민족적 기업의 CEO들 역시도 지속 가능한 발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런 비판은 크게 두 흐름으로 분류된다. 경제학 내에서의 비판이다. 스티글리츠 등 주류 내에서 자본의 비윤리성, 파괴성, 난폭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한 흐름은 경제학 자체에 대한 비판, 즉 맑스의 경제학 비판을 잇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흐름에 따라 맑스의 이론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많은 해설서들이 나왔다.  

  그 와중에 약간 뒷북으로도 보이는 <휴버먼의 자본론>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저자가 바로 리오 휴버먼이기 때문이다. 앞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를 대학생 새내기 시절에 읽은 적이 있는데, 이해하기 쉽고 재밌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그 책을 다시 읽으면서 치밀한 구성과 다양한 사례를 구성하는 성실성에 새삼 놀랐고, 후배 등에게 선물할 일이 생겼는데 마땅한 선물을 못 고르면 그 책을 선물하곤 했다.  

  이번엔 아예 제목에 '자본론'이 들어가 있다. 지난 저작에 비추어 봤을 때 단순히 <자본론>을 쉽게 해설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현실의 다양한 사례를 접목시키고, 더 나아가 현실을 재구성하는 그의 장점이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 

 

현대자본주의와 생명 (맑스코뮤날레 조직위원회, 그린비, 2011.06.02) 

  맑스코뮤날레는 한국 맑스주의 연구와 실천의 성과이자 치열한 현장이다. 이곳에서 무슨 논의들이 오갔는지를 기웃거리는 것만으로도 세계 정세와 한국의 현실이 어떠한지 접근할 수 있을 듯하다. 맑스코뮤날레 논의 내용이 나오는 것은 알았지만, 언제부터 이렇게 정식으로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코뮤날레 후의 결과물들을 종합해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특히 이번 코뮤날레의 핵심 키워드는 '생명'인 것 같다. 과거는 자본주의에서 '생태'의 문제에 많이 관심을 기울였었는데, 이제는 생태를 초과하여 그 근원적인 원리인 '생명'으로 논점이 진행된 듯하다. 들뢰즈에 대한 인기로 한때 생명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그 때는 너무 추상적이고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몰랐었는데, 이제는 가치, 정치, 존재, 여성주의 등 다양한 토픽들과 어우러져 '생명'의 문제를 더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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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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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름 신간평가단이지만 이미 이 책을 둘러싼 논쟁들이 한 차례 진행되었다. 프레시안에 서동진 교수의 비판적 서평이 실렸고, 책의 저자가 직접 같은 매체를 통해 반박글을 싣는 방식이었는데, 블로그 등을 통해 장외에서도 많은 논쟁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논쟁의 핵심은 결국 가치론을 둘러싼 것이었다. 책에서도 저자는 가치론의 역사적 한계와 그 변형을 이야기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했었다. 하지만 난 가치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내가 낄 수준의 것이 아니니 그 문제에 대해서는 가급적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수십 년간 공부하는 걸 업으로 삼아온 사람들도 이 책에 대한 논쟁 속에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는 사람으로 강등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감히 주제넘게 이 책에 대한 평가를 하겠다는 말은 (이 글을 누가 읽든 안 읽든) 살 떨려서 못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신간평가단의 일원으로서 내가 맡은 역할은 이들과 같이 이론적 논쟁을 벌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수많은 독자 대중의 샘플로서 조금 더 꼼꼼하게 읽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어떤 난해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책에 대해서도 이해할 권리와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제대로 잘 이루어졌느냐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내가 무수한 독자 대중의 일원으로서 표준적인 수준의 지성을 가졌느냐가 문제가 될 수 있다. 나는 거기에 미달할 수도 있다. 나는 조정환이 이 책의 가장 큰 밑거름으로 삼고 있는 네그리의 저작에 대해서는 단 한권도 읽어본 적이 없으며, 그에 대한 해설이나 소개조차도 접해본 적이 없다. 저자인 조정환의 다른 책들 역시 접해보지 못했다. 참으로 무지하고도 소박한 상태에서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인문학 독자들의 평균적인 지성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 책에 대해 평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0. ‘변한 것변하지 않은 것’ 

  조정환은 5월에 있었던 (이 때는 책을 받기 전이었는데, 기회가 돼서 참관했었던)‘인지와 자본 심포지엄의 발제문에서, 이 책 <인지 자본주의>모든 것이 변했다는 주장과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라는 주장 양자 모두에 대한 비판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변했다고 주장하는 진영은 신자유주의자들이며,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근본주의자, 산업주의자(여기에는 맑스주의자들도 포함된다)들이다. 이 책을 이런 두 주장 모두에 대한 비판으로 위치짓고자 하는 것은 아마, 출간 이후의 책에 대한 비판들을 염두에 둔 듯하다. 저자의 그런 발제문을 먼저 접한 이후 책을 읽게 되었을 때, 나는 아무래도 이 책은 모든 것은 변했다는 쪽에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세 번의 변신을 했다. 상업 자본주의와 산업 자본주의, 그리고 바로 지금 제3기의 자본주의인 인지 자본주의가 그것이다. 맑스의 <자본론>2기 자본주의 형태인 산업 자본주의 분석에서는 유용했으나 현재의 새로운 자본주의의 본질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새로운 분석틀이 필요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인지 자본주의라는 개념이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노동은 물론이고 착취와 지배, 저항과 혁명, 그리고 시간과 공간, 지성까지 인지적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기존의 노동가치론은 현 자본주의적 착취 매커니즘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가 아무리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말하더라도, 이 정도면 모든 것이 변했다는 사고방식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문제의식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인구에 가장 회자되는 애플과 삼성만 보더라도 그들의 이윤이 고용된 노동자들의 초과 노동에서 기원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삼성과 애플에게 가장 첨예한 문제는 지식과 그 지식의 사유화(특허)를 둘러싸고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가치론을 더 정밀하게 체계화하고 현대화하는 것으로 자본의 운동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자본 운동뿐만 아니라 세계의 존재 양식 자체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 책에는 세상이(자본주의가,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는 증거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말대로 모든 것이 변했다라고 본다면, 문제는 그런 변화된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느냐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에는 이것이 썩 명쾌하지가 않다. 일차적으로는 나의 무식을 탓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옹호하는 사람도 비판하는 사람도 모두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학식을 지닌 이들이며,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그들과 비슷한 수준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학식을 지닌 이들만 이 책을 읽고 논평할 발언권을 갖는 것은 저자가 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의 무지함을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인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을 이해할 능력과 거기에 대해 발언할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점을 감안할 때 이 책의 분석이 썩 명쾌하게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했다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성공적으로 자기 변신을 시도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변신한 자본주의를 잡기 위한 맞춤형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인지자본주의>는 성공적인 이론의 전화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내 능력으로 그 본질들을 찌를 수는 없을 것이며, 책을 읽는 와중에 든 몇 가지 의문점들을 중심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1. 가치론은 충분히 전화(or 해체 or 변형 or 폐기)되었는가? 

  일단은 이 책의 논리적 구조들이 상당히 느슨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논리성은 지식인의 요구사항이 아니라 비-지식인의 요구사항이다. 충분한 논리적 완결성을 지니지 못해도 상당한 지적 소양을 쌓은 사람, 전문적으로 학문을 연구한 사람들은 충분히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비전문가들은 사전 지식에 근거할 수 없으므로 내적인 논리성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소수를 상대로 쓰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애초에 출판 기획 당시에 독자층을 좁게 잡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책의 논리적 완결성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할 수도 있고, 친절하지 못하다고 할 수도 있다

  일단 가치론을 다루는 부분에서 그렇다. 가치론에 대한 설명이 미흡하다는 것이 아니다. 맑스의 가치론을 이해시키는 것은 이 책의 목적이 아니다. 여기서는 맑스의 가치론을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그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맑스의 가치론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 책을 통해 가치론에 대한 비판’, 혹은 가치론의 전화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아카데미즘을 벗어난 실천적 이론의 핵심이다. 노동자들이 의식화하기 위해 맑스주의와 경제학 비판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는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공부하기 위해 다시 스미스와 리카도의 고전 경제학을 공부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학문의 문제지 이론과 실천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기존의 노동가치론이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는 말하지만, 그렇다면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새로운 가치법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노동이 인지화되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통해 자본이 어떻게 이윤을 생산하는지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노동형태가 인지화되었다는 분석으로부터(시작해서 사회 각 부문의 전반적인 인지적 재구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인지자본주의란 결론에 이르렀다면, 그 인지화된 노동이 어떻게 착취되는지 설명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그리 속 시원하지 못하다. (미주와 부록을 포함)600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 여기저기에 흩어져 단편적으로 제시될 뿐, 뚜렷하지 못하다. ‘인지자본주의에서 자본형태의 재구성을 다루는 6장과 계급의 재구성을 다루는 9장을 살펴봐도, 거기에는 금융 자본과 비정규직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차지한다. 이래서는 금융 자본과 불안정노동에 대한 약간 새로운 분석 이상이 아니다

  노동가치론을 부정한 핵심 근거는 시간공간의 문제였지, 자본 운동에서 노동 자체를 부차화시킨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인지노동이 어떻게 가치로 생산되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다. 이런 불만에 대해 이것은 낡은 산업주의 시대의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책은 고용 형태를 초과하는 사회적 노동, 자본에 의한 실질적 포섭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남아 있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인지노동이다그는 교환가치/사용가치 쌍을 산업자본주의에 해당시키고, 명령가치/공통가치 쌍을 인지자본주의에 해당시킴으로써 가치 개념의 전화를 시도하긴 한다. 하지만 이것은 화폐를 분석하기 위한 것이지 노동을 분석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가치 개념과 노동 개념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인지노동을 가치와 연결시키지 못한다면 대체 왜 인지노동이 중요해 지는 것일까? 이래서는 비물질노동, 삶노동, 사회적노동 등의 기존 개념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2. 구체적 현실에 근거한 이론적 분석인가? 아니면 이론에 근거한 현실의 자의적 판단인가

  방대한 분량과 난해한 개념에 압도당하다보니 독해의 지연이 발생하곤 했다. 지금 뭔가 명쾌하지 않아도 내가 무식해서 잘 이해가 안 되는가 보다’, 그리고 이 다음에 상세한 설명이 나오겠지하는 두 가지 심리로 이해판단을 자꾸 지연시키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뭔가 찜찜한 채 챕터가 끝나있다. 이렇게 두꺼운 책을 한 번에 통독(通讀)한 것은 처음이라 제대로 읽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나마 가장 수월하게 읽었던 11인지자본주의에서 지성의 재구성을 보면서, 이것이 오로지 나의 무식함 때문만은 아니며, 아마 느슨한 논리성이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해봤다. 사실 저자가 지성의 문제를 다룰 때, 이것이 냉철한 분석에 근거하기보다는 약간의 선입견과 취향, 그리고 결론을 위한 자의적 해석이 영향을 미친 부분이 없지 않다고 본다

  저자는 인문학 붐’, ‘고전 붐과 같은 현상을 두 가지 대립되는 흐름으로 설명한다. 하나는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시작하는 위로부터의 흐름과 다중들의 아래로부터의 흐름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현상을 보는 시선이 상당히 단순화되어 있다. 가령 HK사업 등, “국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연명하는 인문학과(와 교수)가 국가의 권위에 종속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대학의 산업에의 종속은 이런 식으로 인문학의 국가에의 종속을 불러온다”(391)라고 말한다. 물론 그 위험성은 엄중히 경고해 마땅한 것이지만, 재정지원이 종속으로 필연화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정책과 재정운영을 둘러싼 권력 관계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국가의 재정지원으로 연명하는그 교수들이 반국가적인(혹은 정부 비판적인) 활동을 벌이는 사례는 충분히 찾고도 남는다

  이것은 구체적인 현상 분석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라기보다는 국가에 대한 기존의 거부감을 드러냈을 뿐이다. 가령 입시 논술을 다루는 데에서도 이런 태도가 드러난다. 입시제도에 기생하는 논술학원과 논술교사들이 대체로 어떤 고전들을 학생들에게 읽힐 것인지를, 그리고 국가기관에 의해 선임된 출판지원기구의 심사위원들이 어떤 성격의 책을 지원대상으로 선정하게 될지를 사고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402)고 했는데, 뭐가 충분하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충분하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도 자신의 견해를 반박하는 말을 곧이어 한다. 이런 입시 논술이 또한 아래로부터의 흐름의 한 경향이기도 한데 “2008년의 촛불봉기가 노무현 정부 하에서 논술과 고전 교육을 받고 성장한 청소년 세대들에 의해 촉발되고 주도되었다는 평가는 그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다”(403)는 것이다. 이런 모순된 평가는 입시제도 기생하는 논술학원과 논술교사들”, “국가기관에 의해 선임된 출판지원기구가 어떤 책을 선정해서 읽힐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더군다나 조정환은 스스로, 고전은 그 자체로 공통적인 것이지만, 대부분의 고전 작가는 스스로가 지배계급이거나 지배계급의 후원을 받았던 만큼,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409)고 말하고 있다. 즉 누가 어떤 책을 선정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조정환의 글에는 이런 자기모순적인 논리가 반복된다. 사실 이런 논리적 오류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약간의 기술적인 문제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인문학 붐이든 고전 붐이든, 입시논술이든 서로 상반되는 두 흐름의 경합으로 존재한다. 문제는 그런 경합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인지적 과정을 통해 전개되는지를 분석하기보다는 이미 형성된 비판적 합의점에 자신이 가진 기존의 견해, 기존의 선호를 가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논리는 어떤가

셋째 각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인문학)프로젝트는, 인간 사회 및 학문활동의 제 영역에서 국가의 필연성과 필요성을 대전제로 삼을 뿐만 아니라 국가형태에 반대하는 지성경향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집단적으로 수행한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시행되고 있는 바, 촛불집회에 참가한 단체에 대한 재정지원 제외 방침과 반성문 요구는 국가 재정지원의 정치적 성격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 392쪽 

  국가 재정지원을 받은 인문학이 국가에 대한 비판 세력에 대한 공격자, 국가의 보호자로 기능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 근거로 이명박 정부가 촛불집회에 참가한 단체에게 반성문을 강요하고 재정지원 중단으로 협박한 것을 사례로 들었다. 그런데 명제와 근거 사이에 논리적 상관관계가 뚜렷한가? 뚜렷하다. 하지만 명제에 대한 부정으로 뚜렷하다. 이명박 정부가 촛불집회에 참가한 단체에게 반성문을 강요하고 재정지원 중단으로 협박했다는 것은, 오히려 국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더라도 국가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행했다는 경험적 사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히려 특정 정부가 노골적으로 그것을 불쾌해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정한 조건(그렇게 어렵지도 않은)만 형성된다면 정부 재정지원을 통해 인문학의 비판적이고 봉기적인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위와 같은 논리구조는 재정지원을 통해 인문학이 국가화되고 자본화되었다는 구체적 분석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거부감과 국가와 관계를 갖는 인문학을 부정하고 싶은 욕망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나는 그가 말하는 대로 학진 등에 대학과 학문이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가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상당히 문제라는 것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학진 시스템이나 지금의 교육학술정책에 대해 이미 비판적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 일반 독자들은 이런 논리에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식의 허술한 논리적 구조는 책 전체 이곳저곳에서 발견된다

 

3. 촛불봉기의 긍정성을 예찬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이 책의 분석이 상당 부분 의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 전체에 감도는 낙관주의적인 태도로 인해 오히려 그가 제시하는 대안들이 그닥 현실성 있게 와 닿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그가 2008년 촛불시위를 다루는 태도가 그렇다. 그는 그것을 촛불봉기라고 말하면서 이를 과거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혁명운동과 다른, 21세기의 새로운 봉기의 전형으로 파악한다. 노조나 당 등 기존의 조직화된 전위의 지도를 받지도 않았고, 자발적이고 창의적이며, 블로그, 카페, 아고라 등을 통해 소통하고 전술을 토의하는 인지적 혁명의 속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촛불봉기가 새로운 혁명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그는 여기서 그친다. 책 전반에 걸쳐서 저자의 촛불봉기에 대한 예찬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촛불봉기는 (그가 또한 인지적 혁명의 전형으로 제시한)아랍혁명과는 달리 아무것도 이룩하지 못하고 멈추지 않았나?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촛불 봉기의 긍정성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왜 촛불봉기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생태에서 그렇게 사그라지게 되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촛불봉기를 소시민적 애국주의 운동이자 파시즘적 대중운동이라고, 혹은 산보자 운동이자 유령운동이었다고 냉소하는 것은 적절한 판단이라고 볼 수는 없다. 거기에는 분명 완벽하게 개방된 정치적 가능성이 있었다. 충분히 혁명적이고 충분히 민주적이며 충분히 지성적인 흐름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촛불봉기는 혁명도, 민주주의도, 지성화도, 모두 이루는 데 실패했다. 이것을 모든 실패로 섣불리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런 정치적 경험은 전승되고 강화될 수 있다. 촛불 세대들이 점차 대학에 입학한 현재 등록금 투쟁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급진적이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도 촛불봉기의 한 효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정치적 패배의 경험 역시 전승될 수 있다. 당시보다 더 심각하고 충격적인 쟁점이 형성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봉기가 또다시 촉발되리라고 단언할 수도 없으며, 촉발된다고 하더라도 다시 한번 그렇게 조용히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당시 촛불봉기가 어떻게 발생했는지와 함께 당시 촛불봉기가 왜 사그라졌는지, 그때 부족했던 것은 무엇이며, 지금 다중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고찰해보는 것이 더 의미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령 산업자본주의 시대에나 적합했을 노조와 당의 지도를 받는 투쟁을 부정하는 조정환의 입장과 당시 촛불봉기의 분위기는 상당히 친화적이다. 하지만 조직화된 전위를 부정하는 것이 노조와 당을 배제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당시 촛불봉기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정권과 경찰, 언론이 배후론을 워낙 들먹여서 거기에 대한 대중들의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조직화된 집단이 참가하고 그들이 배후로 지목되면 자신들의 순수함 역시 오염될 것이라는 그런 두려움 말이다. 당시 촛불봉기가 이런 순수성을 추구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일부는 조직화된 집단의 참여에 불쾌감을 드러냈었다. 내 기억으로는 대학교 학생회도 당시 그런 분위기 때문에 집회에 나갈 때 처음에는 깃발을 가져가지 못하기도 했었다. 깃발을 들고 나간 것은 촛불정세의 후기에서였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순수성은 지배이데올로기에 포섭된 담론이었고, 오히려 그것이 촛불봉기를 노동자, 농민, 빈민, 이주민, 실업자들의 운동과 결합하면서 무한하게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문제로 시작한 촛불봉기가 국가와 자본에 대한 부정과 혁명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이런 무한한 연대와 확장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동시에 당시 촛불봉기 현장에서는 비정규직이나 빈민 같은 소수자 운동, 그리고 상수도 사유화 반대와 같은 공공성 담론에 대한 친밀한 분위기 역시 존재했다는 것이다. 당시 다중들은 다양한 운동과 다양한 주체들과의 공통되기에 충분히 열려있기도 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오히려 운동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 아닌가? 소수자, 몫이 없는 자,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환대와 열림이 존재하는 곳에서, 그런 이들을 대변해온다고 자임했던 노동운동, 진보정당이 환영받지 못한 것은 운동에 대한 불신이 있었기 때문이며, 정치적으로 개방된 공간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운동의 무능력 때문이다

  다중들의 봉기란 것은 누구에 의해 조직되는 것도 아니고, 일정한 조건이 갖춰지면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생적으로 자발적으로 촉발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며, 하지 말란다고 안하는 것도 아니다. 조정환처럼 그런 다중의 봉기를 예찬하며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다중들의 예상치 못한 봉기가 발생했을 때, 다중들이 공통되기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았을 때, ‘운동이 그것과 결합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오히려 운동의 현실을 진단하고 그 문제점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4. 다중은 긍정적인 것의 추상화가 아닐까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주체성의 한 형태로 다중이란 개념 역시 이러한 낙관주의적 시선의 산물이 아닌가 싶다. 다중이란 개념을 누가 처음 만들어서 제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그리에 의해 유명해진 개념이다. 하지만 난 네그리의 책을 읽어본 적도 없고, 다중이란 개념에 대해 누가 이야기하는 것을 어깨너머로조차 들어본 적도 없다. 여기서 말해지는 다중이 네그리의 그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정환이 네그리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책 전체적으로 네그리와 완벽하게 일치되려고 하는 것을 보면 네그리가 말하는 다중과 비슷할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런데 이 다중이란 개념은 온갖 긍정적인 것의 총집합처럼 보인다. 그것이 현실에서 어떤 형식으로 존재하고 어떤 형식으로 운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조정환이 생각하는 모든 긍정적인 것들을 모으면 다중이 되지 않을까

  책 전체를 관통하는 조정환의 논리 구조는 대부분 대립항을 통해 전개된다. 이것과 저것, 위와 아래... 여기서 대립항은 두 종류의 관계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국가와 자본과 친밀한 것과 그것을 부정하는 관계, 즉 부정한 것과 정의로운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것과 인지 자본주의 시대의 것, 즉 낡은 것과 새 것이다. 이 책에서 부정한 것과 낡은 것은 부정적인 것으로, 정의로운 것과 새 것은 긍정적인 것으로 기능한다. 전자의 대표적인 것은 위로부터의 흐름과 아래로부터의 흐름의 모순적인 관계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것은 조직과 네트워크의 변모적인 관계이다. 다중은 정의롭고 새롭다.  

  이 중 새로움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 같다. 이 부분은 좀 더 알게 된 후에 다루고, 전자의 대립항에 대해서만 말하겠다. 전자의 것이든 후자의 것이든 이 대립항들은 하나의 현상형태로 현실에 드러나는데 이 자체는 여러 가지 복합적 흐름이 섞여있다. 가령 위에서도 말했던 인문학 붐이나 고전 붐과 같은 현상 역시 위로부터의 흐름과 아래로부터의 흐름이란 두 흐름이 섞여 경합하고 있는 것이다. 조정환은 이런 복합적인 현상에서 각기 다른 방향성의 흐름들을 분리해 낸다

  사람들(대중, 인민, 다중.. 뭐라고 불러야 하나)의 현실적 존재상태 역시 여러 흐름의 복합이라고 볼 수 있다. 그중 국가와 자본에 의해 추동되는 위로부터의 흐름(이것을 흐름A라고 부르자)과 거기에 저항하고 이탈하는 다중들의 자발적인 저항적 흐름, 아래로부터의 흐름(이것을 흐름B라고 부르자)이 있다. 그런데 조정환은 흐름A가 어떻게 기원하고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명확하게 지시하고 있다. 그것은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시작된다. 구체적인 정책이기도 하고 언론이나 학교와 같은 장치이기도 하고 금융 지배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그것은 단순한 강제나 폭력이 아니라 대중들의 자발적인 동의와 동참을 동반한 인지적 지배를 통해 수행된다. 즉 사람들에게는 흐름AB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어느 정도는 다 내면화되어 있고, 물리적 존재 자체와 분리되지 않는다. 위로부터의 흐름이라고 방향성을 명시했지만, 현상적으로는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결국 흐름A를 구분해내는 것은 구체적으로 드러난 현상에서부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구조와 권력관계, 생산관계로부터 추론해낸 것이다. 반면 흐름B의 경우는 기원이 없다. 단지 다중들의 자발성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다중은 다분히 신비화되어 있다

  사람들이라고 하는 존재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공간이기도 하다. 말한 대로 흐름A이든 흐름B이든 그 흐름은 현상적으로는 사람들 안에 이미 내재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흐름A의 기원이 사람들 자체가 아니라 국가와 자본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흐름A가 위력을 발휘하고 흐름B와 투쟁하는 장()인 것이다. 하지만 흐름A는 명확히 외부적인 것, 명백한 기원과 목적을 지닌 것으로 말하고, 흐름B는 다중 내부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이런 흐름A와 흐름B의 구분은 다분히 자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부정적인 것이고 무엇이 긍정적인지에 대한 자신의 이미 형성된 기준에 따라, 부정적인 것은 국가와 자본에 몰아주고 긍정적인 것은 다중에 몰아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흐름 A와 흐름 B가 최소한 공정하게 다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모두 사람들 내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촛불봉기는 다중의 혁명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촛불봉기를 시작한 것도 어느 이름 없는 네티즌의 우연한 제안이었고, 그것을 형성한 것도 다중의 네트워크에서였다. 구체적인 장을 연 것도 블로그, 카페, 아고라 등의 인터넷 공간에서였다. 하지만 송지은 아나운서를 자살로 몰고 간 것도 역시 다중의 네트워크이다. 처음 일이 알려진 것도 인터넷에서였고, 그 사건이 가십화되어 확산된 것도 카페, 블로그 등의 인터넷 공간에서였다. 다중의 네트워크가 지닌 파괴적인 폭력성을 증명하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 둘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인문학과 고전, 맑스주의를 자비를 들여가면서 다양한 경로로 스스로 공부하는 것도 다중 자신이며, 처세술과 주식투자를 공부하는 것에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 역시도 다중 자신이다. 이러한 양면성 중 어느 하나를 외부적인 것이고 어느 하나는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할 근거는 충분치 않다.  

  모두 사람들 내부에 있다는 것과 다르지만 모순되지는 않는 또 다른 주장은 모두 사람들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다중에게 발생하는 부정적인 흐름이 국가와 자본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구체적으로 정책, 법률, 언론, 학교, 금융 등을 통해 형성된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긍정적 흐름 역시 외부의 장치, 외부의 기제를 통해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진보 언론과 각종 인터넷 대안 언론, 인문학 강좌, 논술, 학생회, 노조, 진보정당, 그리고 <인지자본주의> 같은 엘리트 지식인의 출판물들이 그런 것이다. 이를 혁명적 이데올로기 장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다중 외부에 있느냐는 의구심이 들지만, 이것들이 항상 다중 내부에 있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 추상성과 모호함은 도를 지나쳐서, 저자가 비판하는 다중을 지도하려고 하는 낡은 구시대적 전위조직 역시 다중 내부의 것이 되어버리고 그것을 비판하는 것조차 다시 비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이미 어느 정도 벌어진 것 같다. 이런 다중 외부에 존재하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이데올로기 장치에 대한 사고가 없다면 당연히 모든 긍정적인 현상들이 다중의 자발성으로 환원되고, 다중의 혁명적 봉기에 대한 낙관주의로 흐르게 될 것이 뻔하다

 

5. ‘인지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만들어지는 효과는 대체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데, 조정환의 분석에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것이다. 다중이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규정하고, 주체성을 형성하는 모든 활동이 이데올로기와 관계된다. 앞서도 말했듯이 사람들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으며, 하나의 사건에 대해 이렇게 판단하고 반응할 수도 있고 저렇게 판단하고 반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다중이든 사람들이든 그것은 규정되지도 환원되지도 않는 다양성이며, 차이이며, 잠재성이며, 가능성이며, 활력이다. 하지만 이런 무규정적 에너지로서의 사람들도 분명 현실의 시간 속에서는 판단하고 선택을 한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특정한 사태를 만드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문제이다. 다중의 다양성과 가능성이 활력(생산력)의 문제라면, 그 구체적 운동은 이데올로기적 관계(생산관계)의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정환은 단지 다중의 가능성을 낙관할 뿐이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거니와 여기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길게 논의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은 인지란 개념이 생각보다 효과적이지 못한 개념이기 때문이 아닐까 의문을 던져본다. 책을 보면 가끔 인지적이란 표현 대신 이데올로기적이란 표현을 집어넣어도 될 만한 구절들을 자주 발견한다. 더 명시적으로 이데올로기의 문제라고 말해야 할 순간에 그것을 뭉뚱그려서 인지적인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식의 뭉뚱그림이 광범위하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책 자체에서 정의한 인지의 개념은 너무 광범위하다. 일상 언어에서 인지라고 할 때는 ’, ‘깨달음등 인식적인 요소와 관계가 깊다. 하지만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정의된 인지는 모든 정신적 활동과 그것과 관련된 신체적 활동 전반을 포괄한다. 이런 식의 정의라면 인지적이지 않은 것을 찾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렇게 광범위하게 모든 것들을 집어 삼켜버리는 인지개념은 오히려 기존의 맑스주의의 내부와 외부에서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오랜 기간 갈고 닦아온 이론적 성과들을 소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된다. 이데올로기, 의식-무의식, 정신, 감정, 문화, 이론, 지식, 돌봄 등등 더 구체적이고, 더 명확하며, 더 비판적인 개념들이 모두 인지적인 것으로 포괄될 때, 그 개념들 사이의 질적 차이와 그 개념들이 현실에서 기능해왔던 비판적 진리치들 역시 소멸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조정환은 인지자본주의라는 분석틀 아래에서 이 다양한 인지적인 것들을 포괄적으로 제시하기는커녕 기존의 자본주의 비판 담론과 구별되는 인지자본주의담론의 독자적인 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조차 명확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가령 6장에서 자본형태의 재구성을 분석한 내용은 금융자본 분석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 같다. 9장에서 계급의 재구성은 비정규직과 불안정노동을 분석하는 데에 치우쳐져 있고, 11장 지성의 재구성은 다중지성론과 무엇이 다른지 잘 모르겠다. 그 외에 시간과 공간의 재구성이나 대안으로 내놓는 공통되기 등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 각각의 분석들은 그 자체로는 적절할 수도 있고, 혹은 고차원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것에서 그친다면 굳이 인지자본주의를 읽지 않더라도 각각에 대해 더 명쾌하고 날카롭고 더 분석적으로 제시하는 이론과 저자들이 충분히 있다. 우리가 조정환의 인지자본주의에 기대하는 것은 단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지개념을 통해 이 각각의 분석이 그 이상의 것, 새로운 차원의 것으로 상승하고, 새로운 담론의 장, 담론의 틀을 개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점에서는 실패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3기의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의 공통점이 인지적이라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이 모든 특징들을 인지적이라고 포괄적으로 지칭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지자본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이름을 붙이기 위한 것이지 전략적인 실천 이론으로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6. 이 책은 우리의 뇌를 자극하는가

  사람들마다 좋은 책과 나쁜 책을 구분하는 저마다의 다양한 기준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은 좋은 책이다 아니다를 판가름하는 나만의 몇 가지 판단기준이 있다. 그중 하나는 이 책을 읽고 더 많은 앎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는가이다. 한 책을 읽고 너무 어려운 나머지 덮어버린다면 그것은 내가 좋은 책인지 나쁜 책인지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혹은 쓸데 없는 난해함과 현학적 표현으로 독해 자체가 어려운 것도 있다. 이 역시 좋은 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해가 힘들 정도로 어렵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어려움 속에서도 그 책 자체를 읽는 것만으로 약간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며, 그 책으로 말미암아 다른 지식과 다른 이론과 다른 책들에 대한 욕구가 극대화된다면 그 책은 분명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조정환의 <인지자본주의>는 좋은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좋은 이론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신간평가단으로서 내 역할이 아니다. 다만 인지자본주의 분석에 대한 의문점을 파악해가는 것만으로 나의 지성이 자극받고, 더 많은 앎을 원하게 된다면 그 책은 분명 추천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 때문에 다음 달 선정도서에는 리오 휴버먼의 <휴버먼의 자본론> 정도가 선정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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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meral 2011-08-31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웹진 <자율평론>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연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어떻게 님이 작성하신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서평글을 오는 9월 초 발행 예정인 <자율평론> 36호 게재할 수 있을지 문의를 드립니다.

<자율평론>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총 35호의 웹진을 발행한 계간 정치철학 웹진이며,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copyleft 웹진입니다. 그간 <자율평론>에 게재되었던 모든 원고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aam.net/xe/autonomous_review

<자율평론>은 인문학 강좌 공간인 다중지성의 정원, 독립 출판 활동을 하는 갈무리 출판사, 세미나 공간 다중지성 연구정원의 마디 단위로, 위 공간들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지적 활동들의 성과들을 모아내고, 우리들의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원고료를 드리기는 어렵지만, 게재를 허락해 주신다면 웹진이 발행되는 대로 PDF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리며,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다면 아래 연락처로 언제든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율평론> 편집위원회 김정연 드림
daziwon@waam.net / 02-325-2102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막상 내가 읽으려고 하니 읽기도 전에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왜 지금 ‘국가’를 이야기할까? 왜 그에게 지금 ‘국가’가 문제시 된다는 것일까?

  이 책은 유시민이 정치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 논객으로서 한국 사회에 개입하려고 내놓았던 몇 권의 책과는 달리, 다시금 현실 정치 한복판에 들어와 캐스팅보드를 쥐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상황에서 출간되었다. 그러니 ‘논객 유시민’이나 ‘지식소매상 유시민’이 아닌 ‘정치인 유시민’의 현실 정치에 대한 지적 개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정치인 유시민은 지금 ‘국가’에 대한 담론을 중심으로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밝히는 동시에, 그런 ‘국가’에 대한 담론을 통해 현실 정치에 쟁점을 형성하고 의미 있는 논쟁점을 던지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국가를 지향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현 상황에서 의미 있는 쟁점을 형성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지금 우리에게 허용된 선택의 폭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좀 더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국가에 대한 합의는 굉장히 폭넓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가 국가주의적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미 “국가주의”란 말에는 가치 판단이 담겨있다. 그게 우리의 언어체계이다. 어느 누가 국가를 소멸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혹은 지금의 국가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 정치에선 불가능한 주장이다. 그런 주장들에 대한 발언권은 실질적으로 차단당한 상태이다.

  수십 년간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그런 독재 정치에 대한 반감과 동시에 독재 정권이 수행한 반공교육의 효과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굳이 부정적인 효과로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은 ‘국가’에 대해 대략적인 정치적 합의를 형성하고 있다. 그 이면은 ‘국가’에 대한 본질적 접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란 ‘개념’이 소극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의 ‘존재’가 소극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 아니다. 국가는 얼마든지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국가 형태냐 혹은 어떤 국가론이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와 정세들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어떤 국가를 지향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의미 있는 쟁점을 형성하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국가의 형태, 역할을 결정짓는 것은 국가론이 아니라, 그 국가를 둘러싼 다양한 정세들이다. 경제, 정치, 사회적 분위기 등등에 따라서 국가에 대한 관념은 요동친다. 이걸 요구했다가 저걸 요구하기도 한다. 거기에는 유시민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국가론을 가진 세력이 집권하느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그 영향은 생각보다 클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건 현실을 상당히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 ‘세력’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그것도 결정적인 영향력 행사하는 것이 국가론뿐일까? 그건 어떤 경제 이념을 가졌느냐, 어떤 정치철학을 가졌느냐, 무엇보다도 어떤 이해관계를 가졌느냐에 비하면 매우 부차적인 요소이다.

  나는 오히려 현재의 정치 현실에서 의미 있는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쟁점은 ‘정치’나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국가’에 대한 담론이 생명력을 잃은 지금의 현실에서 국가론은 ‘정치’나 ‘민주주의’ 담론 속에 포괄될 것이라 여겼다. 전체주의적 주장을 당당하게 발언할 수 있던 과거로 회귀하거나(물론 공공연히 그런 발언을 하는 정치인과 보수 논객들이 있지만 시동이 꺼진 기차가 서서히 멈추듯 대중적인 영향력은 점점 감소하는 추세이다) 혹은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넘어 새로운 국가에 대한 상상력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이 도래하지 않는 이상(물론 그런 담론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뿐 현실적인 정치적 세력으로 형성되지는 못하고 있다) 국가론은 힘을 발휘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국가’라니? 유시민은 지금 다시 정치적 담론의 한 가운데에 국가의 문제를 끓어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자기만족적인 글쟁이가 아닌 이상 현실 정치에 개입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을 리는 없다. 그는 지금의 정치적 현실을 넘어 과감하게 대담한 제안을 하고자 한 것인가? 뭔가 기대감을 갖고 책을 봤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그는 대체 왜 ‘국가’에 대해 말한 것일까? 그의 이면에 감춰진 진심이야 알 수 없다. 다만, 내 나름으로 제멋대로 해석해보건대 거기에는 정치적인(정확하게는 정치공학적인) 의도와 유시민 자신의 한계가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 정치인의 진정성, 유시민의 진정성

  일전에 한 일간지에서(한겨레신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가 진정성의 정치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한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진심으로 공감할 만한 내용이었다. 그 의미도 모호한 진정성이라는 가치가 정치를 지배하면 정치는 유아적이 된다. 박상훈 대표가 염두에 뒀던 것은 베버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였던 것 같다. 그 개념은 이 책에서도 소개된다. 아마도 유시민 역시 베버의 이론에 큰 영향을 받은 듯하다. 하지만 그에게 책임윤리란 말이 현실의 한계에 대한 변명거리, 혹은 권모술수에 대한 정당화 정도로 이해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진정성이란 가치가 과잉되는 것은 진정으로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성이 다른 가치관이나 현실적 고려를 무시할 만큼 절대적인 척도가 아니라는 의미이지 진정성이란 것이 무용하다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진정성이란 것은 사태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척도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수용자의 느낌 혹은 감상이 추상화된 것에 불과하다. 진정성은 주관적 척도이며 역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소통과 신뢰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정치에서 진정성이 내면적 떳떳함의 기준이 된다면 그것은 별 쓸모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과 정치인 사이의 공감, 소통가능성, 신뢰는 진정성을 보이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하다. 점점 더 정치는 ‘쇼’ 혹은 ‘게임’과 유사해지고 있고, 대중들은 오락프로를 보면서 리얼과 각본을 구별해내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판에서도 가짜와 진짜를 가려내고자 한다. 너무 많은 정치인, 너무 많은 말들, 너무 많은 사안들... 쏟아지는 정보의 과잉 속에서 자신이 믿고 신뢰할 만한 것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래서 진정성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 유시민에게서는 그런 진정성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감춰진 진심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성공적으로 진정성을 보여준 적이 드물다. 이것은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력한 대선후보가 되기 힘든 이유이자 약점이다. 유능한 정치인은 자신의 본심이 무엇이든간에 자신의 말과 행동에서 대중들이 쉽게 진실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그의 정치적 능력과 자질을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의 진정성을 묻고 싶다.  

“나는 대한민국이 더 훌륭한 국가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애썼으며, 앞으로도 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이든 하고 싶다.” - 9쪽. 

  그가 말하는 훌륭한 국가는 무엇일까? 일단 그는 훌륭하지 않은 국가가 무엇인지를 이야기 해줬다. 

“선량한 시민 하나라도 버리는 국가는 결코 훌륭한 국가라고 할 수 없다.” -8쪽.

  유시민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언론을 통해서든 인터넷을 통해서든 접할 수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유시민을 생각하면 항소이유서를 떠올리듯, 나는 유시민의 이름만 들어도 김선일이 떠오른다. 아직 어린 나에게 김선일 씨 살해 사건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다. 2004년 이라크에서 무장 테러단체에게 김선일 씨가 납치되었을 당시, 참여정부 핵심 인사였던 유시민의 태도는 참으로 의연했다. “국민 하나 납치되었다고 군대를 철수하는 나라가 어디있냐?”고 말했다(기억에 의존하고 있으니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직접 들은 것도 아니니 사실을 왜곡되어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와 다른 진실을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제게도 알려주세요.). 끝내 김선일 씨가 살해당한 날에도 유시민은 파병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그런 유시민의 태도는 당시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었다. 물론 당시 사람들의 분노의 방향은 대부분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을 향하고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그런 분위기의 저변에 유시민에 대한 증오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로부터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파병을 반대했던 유시민이기에 의아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가 파병에 대한 찬성과 반대를 오가며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에게 신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주장하는 책임윤리와도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런 그가 용산 참사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 내며 “선량한 시민 하나라도 버리는 국가”를 비판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바라는 훌륭한 국가를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애썼으며, 앞으로도 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이든 하고 싶다”고 말한다. 도대체 믿을 수 있을까? 자신이 권력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일은 잊고, 현 정권의 악행만 기억하는 것일까? 혹은 “훌륭한 국가”에 대한 신념 역시도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닐까? 2004년 당시에는 국민이 죽을 위기에 처해도 더 큰 대의를 위해 국가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이 훌륭한 국가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신념을 번복하고 다른 국가상을 취한 것일까? 얼마 후면 이 책에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번복하고 새로운 국가상을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국제 정치의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이해해주고자도 했다. 하지만 그런 현실정치의 무거움에서 벗어났던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 이렇게 “훌륭한 국가”를 소망한다고 가슴 절절히 말하는 이 순간에도 그는 반성도 후회도 없다. 일일이 말할 수는 없겠지만 국회의원으로,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보여줬던 그 수많은 反 훌륭한 국가적 행보들에 대한 반성 없이 어떻게 훌륭한 국가를 말할 수 있는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 나는 이렇게 서문에서부터 마음이 상했다. 

 

2. 과연 이 책의 의미는? 

  사소한 비판일 수도 있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내 해소되지 않았던 궁금증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 책의 목적은 무엇일까? 정치공학적으로 복잡하게 계산된 그런 정치적 의도를 묻는 것이 아니다. 인문사회 서적으로서 이 책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책을 다 읽을 때까지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저자는 용산참사를 계기로 국가의 역할을 고민하게 됐고, 훌륭한 국가란 무엇인지 독자들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애초의 기획 의도는 ‘국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고찰해보는 것이다. 제목 그대로 “국가란 무엇인가”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정말 저자의 의도대로 국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었을까? 

  출판사(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출판사이지만;;)와 저자는 어떤 책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대학 새내기를 위한 정치철학(중에서도 국가론) 입문서? 고전을 읽기 힘든 청소년을 위한 교양서? 한마디로 거칠게 말하면 “국가란 무엇인가”처럼 거창한 제목을 붙이기엔 부끄러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염두에 둔 것 같은 제목과 구성을 지녔지만 샌델이 정의론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포괄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보아도 이 책의 내용은 빈약하다. 샌델의 정의론은 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적 담론을 형성하기엔 너무 낡고 고리타분하다. 하지만 그런 다양한 이론들을 검토해볼 수 있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국가론은 그런 기능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샌델은 도덕철학의 대가이지만, 유시민은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가 정치철학과 다양한 사회이론에 일가견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가 학자들처럼 거기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연구를 하여 나온 결과물은 아니다. 이 사실은 이 책을 옹호할 수도 있고, 비판할 수도 있는 근거이다.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데 이런 거창한 제목(다소 거만해 보일 수조차 있는)을 붙이고 여기서 국가에 대해 무언가 진지한 이야기를 할 듯이 시작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옹졸해 보일 수도 있다. 말그대로 그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애초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가 쓴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이 책을 읽는다면 그것은 순전히 저자가 바로 진보정치를 표방하는 정치인 유시민이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직업적 정치인으로서 무언가 대중들에게 새로운 정치적 비전을 제시할 것이라는 기대. 하지만 이런 기대마저도 어이 없이 무너지고 만다. 대체 이 책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이 책이 국가론에 대한 이론서로서의 기능도, 그렇다고 현실 정치에 대한 의미 있는 개입도 될 수 없다고 판단내린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봐야겠다. 

 

3. 국가론이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혀진 한국 정치

  유시민은 이 책에서 국가론을 크게 세 개로 구분한다. 국가주의 국가론, 자유주의 국가론, 맑스주의 국가론이 그것이다.(목적론적 국가론도 있지만, 그것이 다른 국가론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국가론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여기에 병렬적으로 언급하기는 힘들다. 위의 세 국가론은 근대 정치에서 각각 독립적인 정치사상적 조류를 형성한 것과 달리 목적론적 국가론은 고대 사상에서 태동한 것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반박과 재생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근대적 사상과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는 이 세 가지 국가론을 중심으로 국가에 대한 담론을 구성하고 거기에 한국 정치를 적용해본다. 하지만 그가 구성한 국가론의 얼개는 너무 엉성하다. 그가 책에 소개된 정치사상들을 다룰 때 나타난 사소한 오류들은 굳이 일일이 따지지 않더라도 그의 구분이 너무 거칠게 자의적으로 해석되어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대해 ‘공산당 선언’을 중심으로 원형(prototype)을 살펴보며, 후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국가기구와 상부구조,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에 대해 논의한 바는 생략했다. 각각의 국가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근본적 관점을 비교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자유주의 국가론과 국가주의 국가론도 역시 원형을 중심으로 비교했다.” - 291 쪽. 

  그는 원형을 중심으로 비교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원형’이란 것이 무엇일까? 원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원시적 형태라고 하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는 “각각의 국가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근본적 관점”에 대해 말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재단된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 자유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국가에 대한 관점이 달라서 반목하고 갈등하며 심지어 서로를 학살하는 일까지 발생해온 것이 근대사이다. 그들이 모두 동의하는 ‘원형(prototype)' 혹은 “근본적 관점이란 것이 대체 뭘까? 그들도 모르는 것을 유시민은 어떻게 알고 원형을 중심으로 비교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서로 자신이 진정한 맑스주의자임을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는 그런 근본적 관점이 있을까? 그렇다면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에는 사소한 차이만이 있다는 것일까? 사르트르와 알튀세르와 네그리에게 국가에 대한 근본적 관점이 무엇일까?  

  이것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다. 다른 모든 정치 주체들에게는 본질적이기도 하고 사소하기도 한 다양한 차이들을 소거하고 자신이 말하는 “원형”, “근본적 관점”에 몰아넣고 자신만 (내가 볼 때는 별것도 아닌)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저술의 기본적인 예의가 안 갖춰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단순히 국가론에 대한 고전을 정리하는 가벼운 교양서적이라면 이런 비판이 과도한 것이겠지만 그는 끊임 없이 현실 정치의 문제를 자신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 속에 적용시키려고 한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을 눕혀보고 있는 것이다. 왜 이것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될까? 일반적으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란 자신의 일방적인 잣대로 남을 평가하고 재단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도 정확하게 사용한다면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도 있다. 그는 최소한 세 개의 선택지를 주었으니까. 하지만 실질적으로 침대는 하나밖에 없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는데 한국 정치 현실에서 국가에 대한 담론은 논쟁의 기능을 상실했다. 국가주의 국가론도 맑스주의 국가론도 현실적으론 사망선고를 받은 상태이다. 물론 나는 맑스주의 국가론이 현실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대의 수많은 맑스주의자들은 좀 더 나은 세계를 위해 국가에 대한 담론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국가’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거기에 새로운 변화와 상상력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은 맑스주의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자신의 이론이 기존의 낡은 맑스주의와 다르다는 것을, 혹은 진정한 맑스주의는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제도권 정치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제도권 정치 안으로 들어가자면 어느 누구도 감히 맑스주의를 주장할 수 없다. 국가주의도 당연한 것이다. 현재로서는 대중에게 승인받을 수 없는 국가관이다. 그런데 유시민은 자의적인 기준으로 누구는 국가주의 국가관을 주장하고 누구는 맑스주의 국가관을 주장한다고 평한다. 

“앞서 살펴본 김상봉과 비슷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국가를 계급지배의 도구로 보는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동조한다. 그런데 이 이론은 현실적인 대안을 제공하지 못한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받아들일 경우 유일하게 옳은 길은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운동뿐이다. 그런데 이 혁명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 한때 성공한 사회혁명의 결과였던 소련과 중동부 유럽 사회주의 체제는 다 무너져버리고 없다.” - 200 쪽. 

  이 얼마나 대단한 논리인가.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들은 이런 유시민의 논리를 납득할 수 있었을까? 한순간에 김상봉은 얼간이가 되어버렸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논리적 연결이 모두 논리를 벗어나있다. “김상봉과 비슷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동조”하는 무리라고 말하는 것부터가 무리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자체가 그리 실체가 있는 개념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에게는 국가론 자체가 없었다. 마르크스주의가 분화되고 다양화되는 것만큼 다양한 국가론이 생산되고 폐기되어 왔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 “현실적인 대안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도 무리다. 현실성을 단숨에 기각시킬 만큼의 논의를 하지도 않았다. 그것을 받아들일 경우 “유일하게 옳은 길은 ...... 혁명운동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비약이다. 그들은 그런 혁명운동을 주장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김상봉과 비슷한 견해”란 무엇일까? 유시민이 소개한 김상봉의 진보관은 내가 당장 접근할 수 없는 자료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 내가 정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김상봉의 “근본적인” 정치적 견해가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김상봉의 정치적 개입은 작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 출간을 계기로 삼성에 대한 불매운동을 제안한 것 정도이다. 그리고 유시민이 본문에 소개한 김상봉의 견해 역시 이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현재 국가가 자본가 계급의 대변인인 것을 넘어서서 일부 재벌들의 대변인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국가 자체의 소멸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한국의 기형적인 경제 구조, 즉 재벌 카르텔을 해체할 궁리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국가가 재벌의 친위대로 전락하고, 더 나아가 하나의 기업처럼 변질된 것은 국가의 본질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재벌 기업 체제 때문이라고 한다. 유시민이 직접 옮겨준 부분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그가 말하는 것처럼 김상봉에게 혁명운동이 유일한 선택지로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김상봉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유시민에 의해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자라는 침대에 눕혀져서 자유주의의 잣대로 처형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는 이외에도 비슷한 상황과 논리가 수차례 등장한다. 이것은 유시민에게는 다양한 국가론의 스펙트럼에 포괄적으로 균형있게 접근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동시에 현실 정치의 다양하고 복잡한 쟁점들을 다룰 만한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유주의 국가론에서도 비슷하다. 자유주의 역시 다양한 이단점을 형성하며 분화되고 다양화되어 왔다. 그렇게 자유주의 이론은 발전해왔다. 하지만 그에게 그런 고려는 별로 없어 보인다. ‘정의’에 대해 끝없이 말하면서도 롤즈 같은 대표적인 자유주의자에 대해서조차 다루지 않고 있다. 오랜만에 고전을 공부하고 정리할 필요라도 있었던 것일까? 

 

4. ‘정치’란 무엇인가? 

  나는 글을 시작하면서 왜 하필이면 ‘국가’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아마도 유시민에게는 ‘정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유시민은 이 책에서 베버의 관점에 따라 정치를 정의한다. 베버에 따르면 정치란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이다. 유시민은 이런 “베버의 견해를 가장 좋은 답변으로 채택한다”고 말한다. 그는 베버의 이런 견해가 정치에 대해 “폭넓게 규정”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유시민이 베버를 따라서 정치를 이해할 때에는 별다른 의문이 들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정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것을 “폭넓은 규정”이라고 했을 때에는 의아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를 국가 운영자에게 독점적으로 허용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야 폭넓은 규정일 수는 있지만, 점점 정치의 스펙트럼이 확대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규정은 오히려 국가를 중심으로 정치를 제한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협소한 규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유시민이 이것을 정치에 대한 폭넓은 규정이라고 받아들인 것은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이라는 약간은 모호한 표현 때문일 것이다. 이런 규정에 따르면 야당 정치인이나 재야 정치인의 활동 역시 정치에 포함되며, 각종 사회단체, 시민단체, NGO 활동 역시 정치에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정치란 언제나 ‘국가운영’의 문제로 제한된다. 이것은 그가 정치를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확대해서 말한다면 그에게 ‘정치’의 독자적인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국가에 포섭되지 않는 정치의 영역이란 없다. 그런 것은 정치로 인정할 수 없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는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겠지만, 고려대 당국에 성추행 의대생의 출교를 요구하는 일인시위는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없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는 투쟁은 정치적이지만, 한진중공업에서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그들에게 연대하는 시민들의 투쟁은 비정치적이다. 하지만 정작 그 주체들은 두 행위 사이에서 큰 의미 차이를 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동일한 문제의식에 서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무엇을 요구하느냐의 차이가 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유시민에게는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은 바로 그의 정치에 대한 철학 때문이다. 그가 베버의 정의를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진보 정치를 추구하고, 스스로가 진보 정치인으로 인정받길 원하지만, 정작 그가 추구하는 정치는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 자신의 정치에 무슨 요구를 담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형식 자체가 문제일 수 있다. 유시민에게 위에서 말한 두 행위의 근본적 차이는 시민 정치의 독립성이다.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은 그것이 시민들의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정치행위라고 하더라도 야당 정치인으로서 자신이 제도권 정치 안에서 취할 수 있는 정치적 행보의 운용 폭을 넓혀줄 수 있다. 즉, 집권, 혹은 정부 여당에 대한 견제라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과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만 이것은 진정으로 정치적인 행위가 된다.
  유시민의 이런 견해는 그가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정국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던 촛불시민들은 대통령이 국민의 요구를 경청하고 국정운영에 반영해주기를 원했다. 대통령을 퇴진시키거나 정부를 전복할 의사는 조금도 없었다. 그들의 끈질긴 대중행동에 대한 대통령의 응답은 거짓 사과와 물대포였다. 대통령이 국민의 요구를 경청하고 대화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촛불시민들은 더 이상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 그들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선거에 참여하여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정치참여의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불의를 저지르는 정부를 교체하는 것이다.” - 111쪽.

  이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유시민의 소망에 가깝다. 촛불시민들에게 “대통령을 퇴진시키거나 정부를 전복할 의사는 조금도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유시민에게 촛불시민들이 의미가 있었던 것은 그들이 민주주의를 구현할 직접행동의 주체로 형성되었다거나, 혹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치적 주체로 성장하였다거나, 선거(그리고 선거의 결과)로 포괄될 수 없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촛불시민이 의미가 있는 것은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적 여론으로서,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 야당에 표를 던질 유권자로서이다.  

  그에게는 시민들의 독자적인 정치적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들이 국가와 선거라는 제도에 포섭되는 한에서 그들은 정치적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것은 진보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수적인 견해이다. 그가 아무리 자신이 진보 정치인으로 분류되길 원한다고 하여도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에서 합의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그는 어쩌면 국가로 포섭되지 않는 시민들의 독자적인 정치적 영역을 인정하는 것은 곧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동조하는 것이며, 그들에게는 국가를 소멸시키는 길밖에 없다고 ‘논리적으로(!)’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농담이고, 정치에 대한 유시민의 견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진보적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정치질서에서 국가로 포괄되지 않는 영역이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과거에도 이런 영역은 언제나 존재해왔었다. 다만 과거에는 그런 영역이 국가로 포괄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정치적인 문제로 배제되어 왔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현대 시민사회의 등장은 사적인 영역과 공적 영역의 관계가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점점 더 많은 사적 영역이 공적화되고 정치적 쟁점이 되어왔다. 김상봉과 다른 많은 네티즌들이 주장하는 재벌에 대한 불매운동 같은 경우는 현재의 제도적인 시스템 안에 머물면서도 국가에 포괄되지 않는 정치적 활동이다. 국가가 재벌에 대해 무력할 때 소비자-시민은 무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노동자투쟁은 어떤가? 국가는 회사 내 분규에 대해서 개입하지 않으려 할 뿐 아니라 개입하더라도 대부분 사측 편일텐데 무능력하고 부도덕한 국가는 그냥 그렇다치더라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폭력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의 정치는 제도나 법을 바꾸는 활동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현재의 세계화된 정세에서 더욱 주요한 정치적 활동이 된다. 점점 더 많은 권력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세계 각지의 “인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권력은 대부분 자본화된 형태이다. 그리고 그 자본은 대부분 금융화된 형태이다. 국가는 금융화된 자본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이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이런 금융 자본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금융 자본에 대한 방어와 통제는 전세계 시민들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그것을 누가 하겠는가? 구체화된 형태로서는 국가를 경유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대안세계화운동이라는 시민들의 정치적 연대를 통해서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유시민에게는 이런 고려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유시민이 대통령은 물론이고 국가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한 권력을 획득하면 안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는 현재의 변모한 세계 질서에 대한 관점과 비전이 없다. 가령 그가 이 책에서 소말리아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을 통해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소말리아의 근본문제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공동의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소말리아의 상황은 국가 없이는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와 같이 경쟁하는 자연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홉스의 이론에 힘을 실어 주기에 충분한 증거가 된다.” - 32쪽.

  그가 이것을 단지 홉스 이론에 대한 예로 선택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왜 홉스 이론의 예로 소말리아를 선택했을까?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을테니까 선택했을 것이다. 적어도 소말리아의 근본문제가 ‘국가권력’이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판단만은 고유하게 유시민의 견해일 것이다. 하지만 소말리아의 근본문제를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유시민에게 현재의 세계화된 국제 질서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증거이다. 소말리아의 상황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과거 서구 제국주의의 유산과 초국적 자본의 침투, 아프리카를 휩쓸고 파멸로 몰고 갔던 신자유주의의 광풍이야말로 핵심적인 문제다.

  유시민의 견해가 이래서인지 그는 참여정부 시절에도 신자유주의 정책에 거리낌이 없었고, 현재에 와서도 뭐가 잘못이었고 문제였는지 모르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라면 유시민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전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정부를 운영하던 시절에는 둘이 잘 맞았는지는 몰라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적어도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던 듯하며, 퇴임 후에는 인터뷰나 저서를 통해 후회와 반성을 표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유시민에게는 ‘정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에겐 ‘국가 운영’과 ‘그것과 관련된 활동’과 ‘선거’만이 있을 뿐이다. 그에게 ‘정치’가 없다는 것은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력과 비전이 없다는 것이며, 지금의 몰락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대한 대응 전략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대체 진보 정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우리가 바라는 진보정치는 단지 이명박 정권을 말려 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진보가 되고 싶어 하지만 그가 드러낸 것은 낡은 정치인의 모습일 뿐이다.

5. 그럼에도 나는 진보이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시민은 자신의 진보적, 개혁적 성향에 대한 인정욕구가 있는 것 같다. 그는 책에서 ‘진보’의 의미를 규정하려고 하고, ‘진보 정치’를 정의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진정한 ‘진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가 진보라는 가치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의 내면에 숨겨진 마음이야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명확하게 확인되는 것은 이 책을 통해 드러낸 자신의 정치적 의도이다. 어떤 서평에서는 그가 “자유주의적 지평 하에서 보수세력과 자유개혁세력을 연합하려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통합’”을 의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보면서 그는 진보와의 통합, 혹은 진보세력의 흡수를 의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평을 더 빨리 썼으면 좋았겠지만)이제와 그의 행보를 보면 나의 그런 짐작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는 국민참여당이 대중적 진보정당을 표방하겠다고 공언했으며 민노당과의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대중들의 시선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제도권 정치 내에서 그의 영향력과 지분을 고려했을 때, 쉽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교란을 할 정도의 힘은 있을 것이다. 유시민을 배제하고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진보대통합을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유시민의 정치 철학을 고려한다면 그가 진보의 프레임을 획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폭넓은 야권통합이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진보세력에 편입되는 진보세력을 흡수하든 진보정치의 표상을 획득한다면 한국 진보정치의 발전은 한동안 지체될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견해야 그렇다치고, 이 책에는 그런 유시민의 의도가 듬뿍 반영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시민의 정치적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는 왜 국가주의, 자유주의, 맑스주의 국가론이란 엉성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만들었는가? 맑스주의와 진보정당에 호감을 가진 대중들을 포섭하기 위함이다. 김상봉 같은 이들, 그러니까 맑스주의의 냄새가 나는 이들, 유시민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인정해주지 않는 이들이 근본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관점을 주장하며, 그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진보적이라면 고를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나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너무 거칠게 말한 것 같지만, 이 책에는 그의 그런 의도가 너무 쉽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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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아담의 오류-던컨 폴리의 경제학사 강의(던컨 폴리 지음, 김덕민/김민수 옮김, 후마니타스, 2011.05.02.) 

 지난 달 신간추천 페이퍼를 작성할 때부터 눈여겨봐뒀던 책인데, 이 책이 아슬아슬하게 5월 출간도서에 속하는 바람에 한달을 기다리다가 이제야 추천하게 되었다. 최근 몇년 사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쉬운 해설서들이 많이 출간되었지만, 그 이전에는(그것이 불과 몇년전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새삼 놀랍지만) 대학교 1, 2학년생들이 쉽게 이해할 만한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에 관한 해설서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던컨 폴리의 책을 누군가 번역한 파일이 손에서 손으로 돌면서 읽히곤 했었는데, 내가 봤었던 것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에 관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누가 봐도 이해할 만한 방식으로, 참으로 명쾌하게 쓰인 글을 보면서 우리나라에도 이런 책이 나왔으면 하고 바랐었다. 

 그만의 장점이 이 책에도 적용되었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경제학사 전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마르크스의 경제학에 대한 서적이 많이 출간되었고, 많이 읽혔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은 독자적인 경제학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학 비판으로 존재한다는 점이 간과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던컨 폴리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경제학사를 검토하는 것이야말로 경제에의 이데올로기인 경제학에 대한 비판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본령을 밝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데리다 평전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인간사랑, 2011.05.20.)

 흔히 '해체의 철학자'로 불리는 데리다. 하지만 그의 삶 속에는 20세기 지성사가 '종합'되어 있다. 

 

 

 

 

 

 

 

통치성과 자유 (사카이 다카시 지음, 오하나 옮김, 그린비, 2011.05.25.) 

 인지자본주의의 시대, 우리는 어떻게 통치당하고 있는가? 조정환의 <인지자본주의>와 이 <통치성과 자유>는 동일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조정환의 책이 '자본'에 대해서, 즉 생산과 재생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면, 이 책은 '통치'에 대해서, 즉 지배와 저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다. 사실 현 시대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한다면, 모든 것들은 같은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지자본주의>가 지난 달에 선정된 김에 이 책 역시 함께 선정돼서 같이 다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1492년, 타자의 은폐 (엔리케 두셀 지음, 박병규 옮김, 그린비, 2011.05.20.) 

 그린비의 트랜스 라틴 총서의 다섯 번째 책. 이 책은 "타자의 은폐"라는 제목과 달리 "타자"를 발명하는 유럽적 사고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추적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리고 그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은 타자의 관점, 즉 억압받고 수탈당했던 이의 관점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1492년은 상징적이다. 그들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타자를 발명'한 것이다. '타자를 발명'했다는 것은 '타자를 타자로서 발견'했다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동일자로 은폐'시키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이 바로 근대성이라고 한다.   

 사실 근대성에 대한 비판은 이제 지겹도록 수행됐다는 느낌이 있다. 근대성이 극복되느냐 안되느냐를 떠나서 이런 '지겨움'은 그 자체로 매우 무서운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관심이 가는 이유는 그런 근대성 비판이 서구의 최신 이론의 세례를 통해 형성된 조류이며, 그런 고답적인 논의구조 속에서 오히려 구체적인 물적 존재는, 그러니까 근대성의 최대 피해자이며 피-수탈자였던 그런 물적 존재와 삶들은 오히려 은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물적 삶과 언어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것이 이 책이 '역사'의 형식을 띄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최신 지성의 살아있는 말보다 영어 한마디 할줄 몰랐던 남미의 어느 원주민의 죽은 말이 더 생생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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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1-06-1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데리다 평전을 추천했는데.. 괜스레 막막한 기분입니다. 이번 책이 너무 어려워서... 한 달 쉬어가는 책 없나, 하는 생각도 들고...

어떻게 2011-06-12 11:4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같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 생각하면서도 추천 페이퍼 쓸 때는 욕심이 앞서 버리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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