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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과 젠더 ㅣ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3
권김현영 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며칠 전 친구에게 이 책을 선물 받았다. 선물, 그것도 책 선물이니 크게 기뻐할 법도 한데 <남성성과 젠더>라는 제목의 다소 딱딱해 보이는 이 책을 받아든 내 표정은 그리 기쁘지 않았었나 보다. 실망한 기색으로 맘에 안 드냐고? 예전엔 이런 거에 관심이 있었던 것 아니냐고 물어보는 친구의 말에 당황하여 크게 기쁜 척을 했다.
그 친구가 말한 '이런 거'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책은 어떤 책이기에 ‘이런 거’에 포함될까? 이 책은 남성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니 ‘남성학’일까? 하지만 다루는 대상에 따라 그 분야가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 말하면 분과학문과 장르에 대해 고민해봐야 하겠지만, 지금 그럴 이유는 없다. 사실 이 책을 포함하여 이번에 소개된 하이브리드 총서의 슬로건 자체가 “경계 간 글쓰기, 분과 간 학문하기”아닌가? 이 책은 따라서 어떤 영역이나 분과 안에 귀속되지 않고, 그 경계들 사이에 위치하며 그 영토들을 넘나들고자 한다.
하지만 이 책은 분명 특정한 무언가에 대해 다루며,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다루기에, 내 친구로부터 ‘이런 거’로 분류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런 거’는 페미니즘이다. 이 책은 페미니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젠더 질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해체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목소리이다. 나는 아카데믹한 느낌을 풍기는 여성학이란 말보다는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페미니즘이란 말을 선호한다(여성학과 페미니즘이 상호 대체가능한 용어는 아니지만, 그렇게 부를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경제학자가 쓴 경제학 책이더라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썼다면 마르크스주의 책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은가?). 일상적으로는 페미니즘이 여성(권익 혹은 억압)에 대한 것만으로 축소되고 있지만 말이다.
그 친구는 지극히 평범한 남성인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보였던 것이 퍽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기뻐할 내 모습을 상상하며 이 책을 선물해 준 것 같다. 물론 이 책을 받고 기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약간 당황했을 뿐이다. 긍정적인 시선으로든 부정적인 시선으로든, 페미니즘을 통해(여기엔 피상적이라는 수식이 붙어야겠지만) ‘남성성’에 대한 담론을 경험한 평범한 남자들에게 ‘남성성’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친구는 몰랐을 수 있다.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그런 부분과 관계를 맺었던 경험은 일반적인 경우에 비춰 봤을 때 특수한 경험일 수 있지만, 그것이 ‘남성성’의 문제와 관련될 때는 묘하게도 대다수 남성들의 일반적인 경험과 구조적 유사성을 갖게 된다. 그 유사성이란 ‘남성성-부정적’의 도식화다. “남성성은 부정적이다”란 자기부정이거나, “페미니스트들은 남자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라는 타자혐오이다. 사실 이것은 페미니즘이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지와 별개의 문제이다. 페미니즘이 무엇을 말하든 이런 식의 결론으로 흘러가게끔 하는 경향성이 조건 지어져 있다. 그리고 그런 경향성이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이 책 <남성성과 젠더>를 통해, 그런 경향성의 조건을 고찰하고, 남성 독자로서 남성성에 접근하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 책을 ‘통한다’는 것은 이 책의 내용에 의존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이 책을 읽기 위해서, 이 책을 읽음으로써 등등 안과 밖, 원인과 결과가 없는 접근이다. 이 책 역시 기존의 통념을 여전히 재생산할 수도 있고, 혹은 그것을 해체할 수도 있다. 즉, 기존의 오해 내지는 통념이라고 말한 것은 이 책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와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 책을 읽는 것 없이는 불가능하다.
남성성=폭력?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대략 2000년대), 나는 특정한 분위기에서 페미니즘이란 걸 수박 겉핥기식으로나마 접할 수 있었다. 그 분위기란 당시 대학 안에서 페미니즘이 지닌 독특한 위상에 기인한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은 당시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진보의 표상 내지는 최전선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대학 안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수용이 자신들의 진보적 성향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기능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페미니즘이 다소 권력화된 형태로(얼마간은 왜곡된 형태로) 작동했다는 걸 의미한다. 페미니즘 운동의 실질적인 지향점과는 별개로 그것은 대학이란 공간 안에서 한 조직, 한 개인에 대해 그 진보성은 물론 그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 법관 역할을 수행했다. 한 조직의 입장이 어떤 것이든 충분히 페미니즘적이지 못하면 비판을 받았고, 한 개인의 주장이 어떤 것이든 충분히 남성적이라면 비판을 받았다.
학내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운동을 오랜 기간 헌신적으로 지원했던 학생들은 그들이 여성노동자를 “어머니”라고 부른단 이유로(즉,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충분히 페미니즘적이지 못하다고 비판을 받아야 했다. 반대로 여성주의 단체가 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적절한지, 부적절한지, 예산 낭비가 심하지는 않은지, 혹은 그것이 과연 페미니즘적인지 등에 대해 공적인 자리에서 충분히 논의될 수 없었다. 거기에 태클을 거는 것은 왠지 페미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수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페미니즘이 제한된 영역 안에서나마 권력으로 기능했던 것은, 역으로 그것이 권력에 대한 가장 단호하고 섬세한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정희진의 말(18쪽)처럼 우리에게 페미니즘은 일종의 새로운 인식론이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보이지도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부분들이 정치적이고,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기호와 메시지들로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금강 중류에 불규칙하게 흩어져있는 조약돌들처럼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신체와 습관과 언어와 관념의 배치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조직된 것이며, 권력을 재생산하고, 타자에 대한 억압을 수행하며, 폭력을 은폐하는지, 페미니즘에는 그 모든 비밀이 담겨 있는 듯 했고, 페미니스트는 이 모든 진실의 담지자와 같았다.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권력’이란 딱지를 붙일 수 있는 ‘권력’, 즉 지식-권력이 된 것이다.(당연히도 푸코의 말처럼 페미니즘의 ‘권력 효과‘를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이런 분위기에서 페미니즘은 말 그대로 ‘기본’이 되었고, 누구나 한번쯤은 ‘배워야’ 하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남성이 페미니즘 담론을 수용하는 과정은 특수한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페미니즘이 ‘새로운’ 인식론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 과연 무엇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가?
여기 명문대에 갓 입학한, 어리디어린 엘리트 남성과 엘리트 여성이 있다. 그 둘은 모두 기존의 젠더 규범에 잘 적응해왔고 그로 인해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 페미니즘이란 새로운 인식틀이 생겼다. 엘리트 여성들에게 그것이, 그동안 미분화된 채 느끼긴 했으나 인식할 수 없었던 어떤 감정, 현상, 모순에 대해 비로소 인식하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와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이라면, 남성들은 반대로 자신들이 무심코 했던 행동들, 당연하게 여겨왔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참해왔던 문화적 규칙들이 실제로는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그 외의 타자들에 대한 폭력이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혹은 자백)했을 때 은연중 ‘남성성-폭력’이란 도식이 자리 잡고, 모든 부정적인 것들과 함께 남성성 역시 거부되고 극복되어야 하는 무엇으로 남는다. 남성들에게 이는 일정 정도 자신을 ‘가해자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성이 자신 안에 내재된 어떤 성질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가령 이 책에서 “이들의 ‘여장’은 당시 라이베리아 내전의 전시 집단 성폭력mass rape과 같은 남성성 수행과 전혀 모순을 일으키지 않았다.”(28쪽, 정희진)라는 문장이 쓰이고 읽혔을 때(왜 이렇게 쓰이고 읽혔는지는 아래에서 논하기로 하고), “집단 성폭력”은 단지 폭력이나 범죄가 아니라 “남성성 수행”이다. 그리고 남성성은 자신 역시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건 “라이베리아 반군이 저지른 일이지 나랑은 관계없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남성들은 자신이 얼마나 남성적이지 않은지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된다. 앞서 말했듯 당시 특정한 분위기에서는, 이 사람의 말투는 어떤지, 걸음걸이는 어떤지, 술버릇은 어떤지, 어떤 어휘를 사용하며, 어떤 주제에 대해 대화를 하는지 등으로 한 개인의 모든 것들이 판단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던 사람들은 종종 “넌 너무 남성적이야.”라는 말 대신에 “넌 너무 폭력적이야.”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종종이 아니라 그것이 일반적이었다. ‘남성적’이란 말과 ‘폭력적’이란 말은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폭력’이란 어휘를 채택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반대로 폭력적인 무엇에 대해 완곡하게 말하고자 할 때는 ‘남성적’이란 어휘가 사용되었다.
나는 좋은 남성이 될 수 있을까?
이렇듯 남성성이 폭력, 혹은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페미니즘에 동참하고자 하는 남성들은 자신이 타인에게 ‘남성’으로 인식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비-남성성’을 전시해야만 했다. 그것은 ‘다른 남성들과 난 다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남성들이 ‘나쁜 남성’인 것과 달리 나는 ‘좋은 남성’이라고 선전하는 것이며, 일종의 자기 PR이다.(이는 ‘폭력’이란 개념에 바탕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이다. 규범적 남성성이 사회적으로 선택되고 만들어진 것이라면 ‘다른 남성들’은 기존의 가치체계에 종속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미숙한 남성’인 것에 반해 자신은 그렇지 않은 ‘성숙한 남성’이라고 선전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하에서 내게, 페미니즘을 수용한다는 것은 일종의 ‘좋은 남성’이 되는 기획이었다.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어휘를 거르고, 말투를 가다듬고,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대화주제를 검열하는 것 등을 통해 좋은 남성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불행히도, 기존 질서의 해체와 새로운 질서를 모색한다는 적극성보다는 비판 받지 않아야 한다는 수동성이었지만, 기존의 남성 중심적 질서, 그리고 그것의 신체화된 형태인 남성성이 그랬던 것과는 달리 자신은 폭력적이지 않은 남성이 될 수 있다는 환상에 가려져 있었다.
자신의 비-남성성을 전시하기 위해 어휘를 거르고, 말투를 가다듬고,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대화주제를 검열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사실상)강요받았다는 것이 그 자체로 문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이것은 타인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기본적인 노력이다.(‘배려’란 것도 사실 이와 다르지 않다) 다만 몇몇 남성들은 그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려왔던 것이며, 또 다른 몇몇 남성들은 더 남성적으로 보이기 위해 이런 노력을 해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니까 이런 노력들은 결코 특별한 것도,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며, 불합리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문제는 이런 노력을 통해 자신이 정말로 규범적 남성성을 제어하고 있으며, 보통의 다른 남성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믿음을 쉽게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페미니즘과는 관계없이 많은 남성들은 자신이 다른 남성들과는 다르며 그런 일반적인 남성들(마초적 속물성에 물든)과의 관계를 불편해 한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그리고 이를 자신의 우월성(성 평등을 추구하는 자신의 속성, 폭력/부정적인 것과 대비되는 ‘좋은’ 남성)을 강화시키는 논거로 삼는다.
그러나 사실 이는 여러 남성 집단들, 남성성‘들’ 사이의 차이일 뿐이다.(114쪽, 119쪽, 나영정) 음담패설을 하는 남자 무리들 사이에서 불편함을 느낀다거나, 거친 욕설, 강한 스킨십이 친밀감의 표시가 되고, 동물적 힘으로 남성 간 우열을 가리는 기호 체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통념적인 미적 기준에 사로잡혀 쭉쭉빵빵한 연예인들에 눈길이 간다거나,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여성들을 여전히 포르노그라피적인 시선으로 본다거나, 전혀 다른 어휘와 어투를 이용해 (자신과 타인은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지만)여전히 음담패설을 하는 자신, 그리고 전혀 다른 기호들을 이용해 남성 간에 배타적인 친밀감을 강화하거나 때로는 남성 사이에 우위를 판가름하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지배적 남성성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종류의 지배적 남성성에 속해 있을 뿐이다. 즉, 좀 더 점잖을 뿐이다.
마찬가지다. 나 역시 나의 비-남성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해왔으며, 더 나아가 남성성을 노골적으로 목격했을 때 불편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것은 임시적인 행위 전략일 뿐이다. 이것이 본질적으로 내가 ‘새로운’ 남성이 되었다거나, 규범적 남성성을 제거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규범적인 남성성에 지배되고 있으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어렵다는(혹은 거부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된다. 왜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젠더 질서에 종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될까.
“따뜻하고 친절한 전문가 남성 이미지로 대체하자거나 21세기형 새로운 남성이 되자는 슬로건…… 등 소위 새로운 남성 유의 등장은 …… 일견 ‘진보’한 것인 양 굴지만, 실상은 젠더 위계와 이원화된 젠더 구분이 희미해지거나 흩어지는 것에 대한 강박적 불안이 만들어낸 담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0쪽, 서론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자신의 시도가 여전히 기존의 젠더 질서에 갇혀 있으며, 남성성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느껴질 때, 결국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노력은 실패한다. 이 실패가 거듭될수록 그들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것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좋은 남성이 될 수 있다’라는 가능성 자체를 포기하거나. 만약 그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정확히 인정할 수 없다면), 끊임없이 질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체 나는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하지만 이 질문은 제대로 된 질문인가? 이 질문은 뭔가와 유사하다.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대표적 논리 중 하나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이 두 질문은 약간의 시차가 있을 뿐 상당히 유사하다. 후자의 질문이 현재 시점이라면, 전자의 질문은 미래 시점이다. 문법적으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가 “내가 폭력적인 남성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내가 폭력적이지 않은 남성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르면서도 비슷한 이 두 질문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토대 위에 있다. 하나는 페미니즘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고 있다는 믿음이며,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어떤 특정한 행동 내지는 태도를(하거나 혹은 안하거나를) 통해서 좋은 남성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두 가지 믿음이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물론 이 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보다 앞서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인터넷에 올린 한 남성의 서평에서 한 부분을 인용해본다.
"책을 읽어보니 확실히 <남성성>이 문제라는 것은 알겠다. …… 좋다. 다 좋다. 그런데 ‘어쩌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zizi0908), <내게 남은 남성성을 뿌리 뽑아주오> 中
이와 같은 불평(?)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이해할 때 처하게 되는 난점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하나는 ‘남성성’이 문제라는 것, 또 하나는 ‘어쩌란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
무엇이 남성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나 - 남성의 언어로 쓰인 페미니즘
많은 남성들과 여성들이 페미니즘 담론에 거부감(혹은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이것이 남성을 부당하게 착취자나 범죄자 취급을 하거나 남성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이다.(이것은 우리 사회가 남성 중심적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평등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페미니즘의 한계이자 과제이기도 한데, 바로 이 책에서도 그런 식의 진술들이 종종 눈에 띈다.
“이러한 대립항들은 …… 남성이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남성의 입장에서 자신 외의 것들을 배타적으로 구성한 ‘이데올로기’다.” -21쪽, 정희진
이와 같은 문장들에서는 마치 남성이 세상을 지배하고 조정하는 권력자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 문장을 읽는 남성들은 (자신이 남성이라고 확신하기에)문장 안의 “남성”이란 표현이 자신을 지칭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런 문장을 읽을 때 나 또한 매번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정희진이 저 문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남성”이란 말은 당연히 ‘나’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다수의 남성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남성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그런 의미로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남성 권력은 현실을 진단하고 정의 내리며 경계를 만드는 힘을 의미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남성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25쪽, 정희진
바로 몇 페이지 뒤의 설명을 진지하게 읽었다면, 다시 앞 페이지로 소급하여 그것이 일부 남성을 비판하는 것도, 혹은 남성 일반을 비판하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이런 식으로 ‘남성’이란 개념이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현실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힘, 제도, 규범을 구체화시킨 것이지 남성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말해진 것이 아니다. 이 서평의 소제목 “남성의 언어로 쓰인 페미니즘”의 “남성”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그걸 알고 있음에도 읽을 때마다 불편한 감정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표현의 문제는 페미니즘이 극복하고 발전시켜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런 불편함의 핵심은 우리가 속해 있는 언어 체계가 남성/여성의 이분법이라는 젠더 규범적 구조에 종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규범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수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젠더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발언조차 그것이 기존 사회의 언어 체계 안에서 수행될 때에는 오히려 그 반대의 기능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무언가를 해체하기 위해, 바로 그 해체되어야 할 대상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이 책을 제대로 독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 남성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나 - 유물론으로서의 페미니즘
이런 한계 안에서는 외과 의학, 생물학, 해부학, 심리학이 과학의 이름으로 젠더 규범을 강화해온 것과 마찬가지로(74쪽, 루인) 여성학 역시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여성은 어떻고, 남성은 어떻고라는 식으로 젠더 이분법을 강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근대적 주체의 위치는 차이화된 존재로 남았던 여성이 아니라 차이를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남성들에게 한정되었다.” -55쪽, 권김현영
“남자가 외양을 더 꾸미지 않았다고 해서 여자로 오해받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여성은 외양적으로 꾸미지 않을 경우 남자로 오해받기 쉽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성은 남성성을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제거해야 여성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남성은 남성성의 충만으로 증명되며, 굳이 빈자리를 만들지 않아도 여성성을 덧붙임으로 활용하면 꽃미남, 패셔니스타 등의 칭호를 얻을 수도 있다. 또 없어도 좋다. 없으면 없는 대로 호걸, 마초 등의 늠름함을 획득할 수 있다.” -136쪽, 한채윤
이런 진술도 마찬가지로 소외되고 억압된 여성과 특권을 지닌 남성이란 이분법적 구도로 이미지화될 수 있다. 이 역시 언어적 한계로 그 진의가 충분히 전달되기 힘들었다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렇기만 한가? 언어적 한계로 인해서 그 의미가 우리에게 잘못 전달되고 있는가? 언어적 한계를 감안하고 보더라도 저 말은 분명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왜 이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남성성/여성성을 대비시키며, 여성을 부당하게 소외된 이들로, 남성을 부당하게 특권을 지닌 이들로 판단할까? 이런 질문은 앞서 말했듯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과 혐오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많은 페미니즘 담론들은 남성을, 그리고 남성성을 권력, 폭력, 특권과 관련시키고 있다. 이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과거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이 인간의 노동을 수치화된 노동력으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을 수량화된 노동력으로 도구화시키는 것은 자신의 이론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라고. 우리는 이런 마르크스의 대꾸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남성을 부당한 특권계급으로, 폭력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라 바로 남성 중심 사회이다. 사람들을 여성/남성의 이분법적인 젠더 질서에 강제로 편입시키고, 그런 젠더 질서에서 그 사람이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권리를 불균등하게 배분하는 것, 그리고 이런 현실을 은폐하고 재생산하는 구체적 기관으로 우리의 몸을 부당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사회 구조이다.
페미니즘은 그런 은폐된 현실을 언어를 통해 불완전하게 드러내며, 더 나아가 그런 지배 구조에 균열을 내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의식과 이데올로기와 개념과 언어를 문제 삼고 있지만, 그 시작과 끝은 언제나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현실적인 것들이다. 그런 한에서 페미니즘은 유물론적이다. 다만 그것이 어떤 유물론이 될 것인지는 각각의 페미니즘적 실천이 수행하는 역할이 결정할 것이다.(가령 이 책에서 정희진은 메타 젠더적인 접근을 통해 자신의 글이 수행할 역할을 설정한다. “메타 젠더는 남녀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기존에 구축된 젠더화된 담론 체계를 상대화하고 그 장 밖의 사고를 모색하는 것을 의미한다.” -18쪽, 정희진)
페미니즘은 처세술이 아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통해서 좋은 남성이 될 수도 있고, 나쁜 남성이 될 수도 있다는 믿음 역시 폐기돼야 하는 전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좋은 남성이 되게 하는 일련의 행위 준칙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런 행위 준칙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준칙의 목록표를 작성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역할이 아닐뿐더러 바로 페미니즘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에 어떤 입장을 취하든 종종 “남성성을 혹은 남성을 그렇게 비판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말해봐라.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것은 페미니즘을 일종의 처세술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포지티브하게 말하면 ‘좋은 남성’이 되는 방법에 대한 것이고, 네거티브하게 말하면 비판받지 않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이 책이 남성성 혹은 어떤 남성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판받아야 하는 남성성의 목록을 작성한 것도 아니며, 비판받을 만한 남성들의 유형을 제시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남성의 입장에서는 ‘날 욕하는 건 아니니까’하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모든 비판적 담론이 그렇듯이 페미니즘 역시 기존의 진리관과 가치 체계를 근본적으로 공격한다. 진리관과 가치 체계라는 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물리적 실체가 아닌 이상, 즉 그 진리관과 가치 체계라는 것이 각 개인의 신체에 체화된 형태로 존재하는 한, 그 사회적 질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 비판에 동의하든 안하든 말이다.
하지만 난 그 불편함이 시급히 해소되어야 할 불편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존 사회 질서의 모순이 해결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공유되어야 하는 불편함이다. 신체에 통증을 느낀다면 어딘가에 문제가 발생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 통증이 일시적인 충격에 의한 것이라면 상관없지만 만약 중병이 난 것이라면? 지금 당장의 불쾌함을 해소할 수 있도록(욕 안 먹도록)하는 행동 준칙을 요구하는 것, 여성학이 처세술화되었을 때 비로소 실용적이며 효용이 있는 것이지 그런 걸 못한다면 비판을 위한 비판일 뿐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암 환자에게 진통제만 처방해주는 것과 같다.
좋은 남성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혹은 비판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어휘를 거르고, 말투를 가다듬고,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대화주제를 검열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할 뿐 아니라 중요한 일이다. 다만 그것은 이 책과는 관계가 없다.
이론이자 실천으로서의 남성성 연구
이 책이 어떤 점에서 우리 같은 평범한 남성에게 의미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페미니즘이 이론이자 실천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과 관련지어 생각해봐야 한다. 이 점은 앞서 인용했던 한 블로거가 자신의 서평에서 언급한 내용과 일치한다. “책을 읽어보니 확실히 <남성성>이 문제라는 것은 알겠다. …… 좋다. 다 좋다. 그런데 ‘어쩌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기서 문제시 되는 것은 ‘남성성’이 문제라는 것과 ‘어쩌란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일단 이 책은 ‘남성성’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남성의 언어로 쓰였다는 한계, 현실과 개념의 관계를 도치시키는 관념론적 경향, 그리고 즉각적인 실용성(불쾌감의 해소)을 요구하는 태도를 치우면, 이 책이 시도하는 남성성 연구의 본모습이 나타난다.
“젠더 연구로서의 남성 연구는 보편으로서의 남성의 특권적 지위에 대해 다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왜 어떻게 보편자의 자리를 배정받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협상과 수용, 혹은 일탈과 저항을 누가 어떻게 해왔는지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57쪽, 권김현영
권김현영은 남성성을 연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읽는 것에서 “보편적이고도 고유한 실재가 되려는 남성성의 욕망만을 비판하게 되고, 보편화의 욕망과 남성적 보편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함정”에 빠져버려 “폭력, 전쟁, 권력과 같은 모든 지배체제의 구성 요소들을 곧 남성성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56~57쪽) 되는 것을 경고한다.
이 책은 남성성을 비판한다. 그러나 이것은 남성성을 문제 있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 자체를 문제 삼겠다는 것이며 남성성을 “해체”한다는 것이다. 남성성을 해체한다는 것은 남성성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남성성은 ‘없다’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존재하지 않음이 아니라 남성이 남성성과 연결되는 것은 당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17쪽, 정희진
‘남성=남성성’으로 이해된 당위를 해체하는 것은 남성성을 ‘역사화’하고 ‘다양화’하는 한편, 그 근거를 ‘불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이 책의 전략은 “분과 간, 경계 간”이라는 총서의 모토만큼이나, 남성성이라는 영토 안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특수하고, 비정상적이고, 애매모호한, 그런 시간과 공간(역사와 신체)에 주목함으로써 남성성의 핵심에 질문을 던진다.
정희진이 서구의 지배적 남성성의 역사를 추적하고, 권김현영이 식민지 근대 전환기와 식민지 시대의 남성성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며, 루인이 외과 의학이 내과 의학을 대신해 지배적 의학이 되는 과정을 남성성을 통해 설명할 때, 남성성이란 게 사회적 변동에 따라 얼마든지 손상되거나 변형되기 쉬운 것이란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나영정이 쓴 성전환 남성에 관한 글과 한채윤이 쓴 레즈비언 부치에 관한 글 역시 주목할 만한데, 남성성이 젠더 규범적인 남성의 신체와는 다른 신체와 결합하는 모습들을 통해, 남성성이 그 자체로 특정한 성에 귀속된 것도 고정된 것도 아니며,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변형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남성성은 그것이 어떤 시대와 관계하느냐, 어떤 사회와 관계하느냐, 어떤 신체와 결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남성성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남성성의 불확실성이야 말로 이 책의 핵심이다.
심지어 ‘어떤 신체와 결합하느냐’를 넘어서 ‘어떤 신체’라는 것조차 불투명한 것이다. 우리는 어째서 “피부 표면을 힐끔 보는 것만으로 상대의 젠더를 알 수 있다”(66쪽, 루인)고 믿을까? 어떤 신체가 남성이며 어떤 신체가 비-남성인지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의사들은 성별이 모호한 신생아에게 자신들의 의료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성별을 부여하지만, 결국 “의학적 처방은 늘 문화적 처방”(81쪽, 루인)이다. 즉, 그 의사가 속한 사회의 문화적 규범이 한 인간의 성을 결정한다. 이것은 성별이 모호한 “비정상적인”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무시할 수 없다. “의료 기술 기획을 통과하지 않는 섹스-젠더는 없으며, 외과 기술 기획이 가공하지 않은 인간은 없다.”(82쪽, 루인)
따라서 이 책의 이론적 성과는 남성성을 다양하고 복수적인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그것이 뿌리 없고, 불확실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남성을 비판하기 위한 목록표도 없고, 그런 비판을 피하기 위한 적절한 행동의 목록도 없다. 다만 우리가 당연시해온 것들을 그 뿌리부터 흔들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
그렇다면 이것은 아슬아슬한 지적 유희인가? 아니다. 페미니즘의 실천적 면모는 책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 책이 정치 팜플렛이나 정당의 행동강령 같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다만 이 책에서는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란 질문을 외면한 것도 아니다. 그것이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처세술적인 방식이 아닐 뿐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남성성은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좋은 남성은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실제로 좋은 남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젠더 문제, 모든 젠더 불평등을 외면한 채 부정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특정한 남성성을 허물 벗듯 벗어버리고 홀로 좋은 남성이 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은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이 책이 그에 대해 뭔가 단서를 제시한다면 그것은, ‘처세’가 아니라 ‘실천’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실천이란 말이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정의감이나 양심에 호소하는 것, 도덕적 책무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처세이든 실천이든 그 출발점은 비슷하다. 불안한 것이다. 그 불안은 남성성 해체의 불안이다. 남성성을 해체하는 것은 이 책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며,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남성성을 위협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라 남성성이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현실 그 자체이다. 그것은 의료 과학이기도 하고,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체들이기도 하며, 신자유주의 같은 사회 변동이기도 하다.
"남성성이 특정하게 구성되고 유지되는 측면은 비성전환남성에게도 남성 되기를 불확실한 것으로 만든다.” -100쪽, 나영정
남성들(혹은 비-비남성)이 비남성을 남성의 영역에서 배제해왔던 바로 그 전략으로 인해, 남성들 스스로에게도 남성성이란 것이 불투명해진다. 엄기호는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만들어낸 불안정한 현실이 남성성을 변모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현재의 남성성이 특정한 방식으로 유지될 수 있는 조건들로부터 일부 남성들이 차례차례 추방당하고 있다. 노동시장으로부터의 소외, 노동 형태 및 착취 형태의 변형, 소비 자본주의의 확산, 그리고 시민권의 박탈 등을 통해 남성성의 근거는 취약해졌으며, 뿐만 아니라 남성 간의 차이-차별도 확대되고 있다. 이렇게 남성성을 위협받는 자들이 취한 각기 다른 생존 전략(찌질이-속물 되기, 초식남-동물 되기, 마초-괴물 되기)이 바로 처세에 가까운 것이다. 이보다는 좀 더 아름다운 새로운 생존전략을 원하는가? 그래서 찌질이, 초식남, 마초의 옆에 좋은 남성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가?
엄기호는 전혀 다른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남성‘들’ 간의 불평등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깨어져버린 남성들 간의 공동체를 대신하여 불평등하게 취급받고 있는 사람들 ‘간’의 새로운 연대로 옮겨가는 것”(164쪽, 엄기호)이다. 남성성이라는 것이 이미 복수적으로 존재하고, 남성들 간의 차이와 다양성이 실재하는 것이지만, 그런 복수성, 차이, 다양성을 무마하여 남성간의 보편성, 평등을 보장해주는 사회적 역능이 바로 젠더 관계에서 남성 지배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지금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거치며 그 사회적 역능이 소멸되었다. 이것은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이다(“‘국민’을 넘어 연대하고 이 시대의 배제와 추방, 그리고 양극화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 -164쪽, 엄기호) 이것은 새로운 연대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대이다.
좋은 남성은 없다!
결론적으로 내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인식하게 된 것은 좋은 남성은 없다는 것이다. 좋은 남성이 되고자 하는 나의 기획, 혹은 남성들의 욕망은, 또 다른 "보편화의 욕망"일 뿐이다. "보편화의 욕망"의 체제 안에서는 남성성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비판도, 남성성의 다양한 면모도, 불확실성도, 모두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이해될 뿐이며, 자기 존재의 불안을 심화시킬 뿐이다.
그러나 이런 "욕망을 버려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건 애초에 자기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욕망은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와 감각이 외부, 타자, 질서 등과 만나며 발생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편화의 욕망"과 거리를 둔다는 것은, 자신의 신체와 감각이 다양한 외부들에 대해서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새로운 것을 발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출발점이 바로 남성성 연구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남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 그 자체를 상대화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성성을 혹은 자신의 남성을 나의 것이든 나의 것이 아니든, 무수한 시선과 관점으로, 자기 영토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향에서, 다양한 방향을 향해, 경계를 넘나들며, 목격하는 것이다. 남성성이란 것이 특정한 신체에 속한 것도 아니며, 특정한 의미를 지니는 것도 아닐 때, 자신이 명명한 남성성은 불확실한 것이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이 남성이라는 것조차 불확실한 것이 된다. 내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 내가 남자라는 것, 내가 "정말 남자인지 확정할 근거가 불확실"해질 때의 당황스러움. 나는 단지 테스토스테론이 좀 더 많이 분비되는 신체이며, 비율상 좀 더 남자에 가까운 것인가? 이것이 정말 일상적인 생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책을 읽는 순간의 경험(카타르시스)이다. 이 짧은 순간을 통해 단단했던 모든 근거와 전제들이 흔들리는 경험은, 자신이 위협받는다는 불안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이다. 자신이 다른 무엇이었을 수도 있다. 자신이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신의 처세가 아니라, 자기와 타자의 관계를 새롭게 변형시킴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평등 자체를 다시 사고하는 것", "시민권을 사유하는 방식의 대전환"(164쪽, 엄기호), 즉, 새로운 연대의 모색이다.
마치며
읽고 나서 다시 읽으면 또 새로워지는 이 책 때문에,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엄청난 분량의 서평이 되고 말았다. 이 서평을 쓴 이유는 나 스스로가, 이 책에 대해,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해 일정한 거리감과 부담이 있었기 때문에, 책을 읽는 과정에서 약간의 자기 분석이 필요함을 느껴서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책에 대한 다른 독자들(남성이든 여성이든)의 반응을 보고, 이 책을 그리고 페미니즘을 약간은 변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건방졌던 것 같다. 이 책을 진지하게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이 아니면 두 번, 혹은 세 번. 이 책은 스스로 오해를 생산해내기도 하지만, 스스로 그 본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이브리드 총서라는 이름답게 매우 다양한 영역, 관점, 스타일이 교차하여 만들어진 이 책은 마치 매우 꾸깃꾸깃 구겨진 종이처럼 펼치면 펼칠수록 더 많은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난생처음 써본 이렇게 긴 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내용을 반의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 같아 여전히 아쉽기만 하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해봐도 좋을 법한 부분들조차 내 스스로가 쳐놓은 울타리에 갇혀 제대로 다룰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서평은 이 책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책을 읽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저, 하나의 독서의 흔적일 뿐. 욕심은 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