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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프리모 레비의 생애가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증언의 불가능성, 다시 말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의 불가능성이라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143쪽.
재일조선인인 그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투쟁이다. 이 투쟁은 이중적이다. 구식민주의 종주국 일본의 언어를 모어로 습득하고 원래 모어였어야 할 조선어를 박탈당한 채, 가해자의 언어로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은 물론 사고의 가장 내밀한 면조차 그들의 언어로 수행해야 하는 그 부조리함,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그 “위화감”과의 싸움이 투쟁의 한 면이다.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 ‘계속되는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투쟁의 또 다른 면이다. 그는 자신이 강렬하게 공감하였던 이탈리아의 문인 프리모 레비처럼 스스로에게 증언자라는 역할을 부여하고 끊임없이 발언토록 한다. 증언자의 비극성에 그 누구보다 깊게 공명하면서도 결코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진정성과 비장함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의 말에 귀 기울이게 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런 ‘귀 기울임’이 우리를 그의 말로 인도할 수 있을까? 과연 그의 증언은 가능할까?
이 책 <언어의 감옥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서경식의 두 번째 평론집이다. 이 책의 주된 의도는 저자가 밝히듯이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내셔널리즘 비판이라는 첫 번째 평론집 <난민과 국민 사이>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언어의 문제라는 고민이 내포되어 있다. 그가 짧은 한국 생활에서 느꼈던 “모어와 모국어의 강렬한 상극”의 경험은 ‘언어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으로 심화되고 있다.
식민주의, 내셔널리즘, 일본 리버럴 세력 비판, 언어의 문제 등등 서경식이 다루고 있는 쟁점들을 보면, 이 책은 다소간 학술적이고 다소간은 정치적인 텍스트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글이 지닌 가장 기본적인 성격, 즉 증언으로서의 텍스트라는 성격을 간과한다면 도대체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라는 현대 사상의 가장 주류적인 흐름은 다소간 독자들을 텍스트의 권위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그건 기존의 지식 교환체계에서 저자와 독자 간의 위계적 질서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새로운 ‘읽기’ 방식은 ‘창조적 책읽기’라는 이름으로 혹은 ‘생산적 오독’이라는 겸손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조류가 동시에 무책임함에 대한 면죄부를 수여할 가능성도 열어 주었다. 증언을 대면하는 피증언자로서의 자세를 방기하는 면죄부말이다.
“살아 돌아온 증인의 증언을 가볍게 여기고 ‘불길한 경종’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우리들이지 않을까?―” -109쪽.
증언자에게 자신의 의무(살아돌아가 증언해야 한다는)가 있듯이 증언자를 대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들만의 의무가 요구된다. 그것은 ‘귀 기울이는 것’이다. 여기서 ‘증언’이 다른 텍스트와 갖는 차별점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바로 저자가 “살아 돌아온 증인”이라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 이래로 ‘저자의 죽음’이란 것이 하나의 주도적인 이념이 되었지만, 증언의 텍스트에서 증언자는 결코 죽을 수 없는 존재이다. ‘증언해야만 한다’는 것과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핵심이다. 하나의 증언 앞에서 우리들은 저자를 살아있는 존재로 인정해야만 하는 윤리적 책임을 발견한다.
피증언자의 윤리적 책임이란 일종의 ‘타자에 대한 윤리’이기도 하다. 증언자는 타자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 너머에 있는 현실을 경험하도록 강제되었기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나 파울 첼란, 장 아메리 같은 아우슈비츠 경험자들은 그 끔찍함과 잔혹함이 도저히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경험하였다. 서경식의 경우에는 내셔널리즘이란 필터에 걸러져 은폐되어 있는 식민주의와 난민의 삶을 경험하였다. 이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 감히(혹은 미처) 상상하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들 속에서 실제로 살아 돌아온(혹은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증언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타자를 대면하는 것이다.
<장송>의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책을 읽는 방법>이란 책에서 창조적인 오독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도 그 위험성을 경계한다. 오독은 하나의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책읽기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정작 독자 자신에게는 틀에 박힌 책읽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미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독선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자신의 입맛에 의해서,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세계에 근거해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독서는 타자와의 만남임을 재차 강조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증언자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오독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자와 대면하고, 증언에 귀 기울임으로써 그 증언이 요구하는 것에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피증언자의 태도는 저자인 서경식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책의 첫 번째 글 <모어라는 폭력-윤동주를 생각한다>에서 윤동주의 서시 한 구절의 번역을 두고 벌어진 오역 논쟁에 개입한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는 시구를 역자 이부키 고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에 대한 오무라 마스오의 지적에 이부키 고는 “이 실존 응시의 사랑 고백은 군국주의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 따위와는 관계가 없다”고 반박한다. 이부키 고는 윤동주의 시 속에서 “실존 응시의 사랑 고백”을 읽은 것이다. 하지만 윤동주가 어떤 시인인가. 식민지 조국의 현실 속에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자신의 모어인 조선어로 시를 쓰고, 그 때문에 끝내 군국주의 일본에 의해 살해당한 시인이다. 윤동주는 동시대 그 누구보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예민한 감수성으로 포착하고, 그 현실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학대했다. 그의 시는 해방 후 조선 청년들의 정체성 형성의 한 축이 되었다. 윤동주의 시는 그 자체로 시대의 증언이다. 식민지의 현실 속에서 고통 받았던 당시 모든 민중들의 공통의 증언이다. 이런 윤동주의 ‘서시’를 타자인 일본인들이 읽을 때에는 타자에 대한 윤리, 증언을 듣는 피증언자의 책임이 요구된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혹은 그들은) 의도적인 오독을 통해 식민지배의 죗값을 면책하고 싶은 자신의 욕구만을 노출시켰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제의 시 구절로 표현하려 했던 윤동주 시인의 마음에 대해 오직 하나뿐인 진실을 확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시 구절을 두고 작동되는 무의식의 권력관계를 인식해보자는 것이다.” -30쪽.
다수자의 자기 중심적인 오독이 아니라 증언자(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마치 타자의 마음 속에 하나의 확정된 의미가 있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침묵하는 타자를 제치고 타자의 마음 속에 확정되어 있는 하나의 의미를 찾겠다고 설치는 것이야말로 바로 서경식이 말한 가부장적 온정주의이며 다수자의 폭력일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증언자의 증언을 ‘의미 있는 것으로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이다. 현실에 은폐된 채 작동하는 무의식의 권력 관계를 탈은폐 시키는 것 역시 그런 것이다.
“그(프리모 레비)의 메시지는 사실 그 자체를 알리기보다 그 사건이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에 관해 고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46쪽.
다수자로서 주어진 피증언자의 윤리적 책임, 증언에 귀 기울이는 것, 증인을 살아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 증언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 이것은 바로 방관자가 되지 말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이 책을 하나의 증언으로 읽는다면, 저자의 글들은 매번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 요구들이 독자를 당황스럽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독자들이 그런 요구 자체에 닿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들의 반응을 살펴보았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렇듯 오만하게 말하는 나보다 훨씬 더)저자가 제기한 문제들에 접근하고 거기서 의미를 고찰하고자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지만, 또한 적지 않은 경우 저자가 명시적으로 경계하고 있는 반응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저자 일본어로 써서 일본 독자들을 대상으로 발표한 글을 모아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국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속에 실린 글들은 일차적으로는(저자는 분명 한국의 독자들도 염두에 뒀던 것 같다) 일본의 독자를 대상으로 쓰였다. 이런 점이 이해를 어렵게 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어쩌면 부차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그가 책 속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은 이미 일본이라는 국경을 벗어나 조선과 일본, 더 나아가 아시아 전체의 맥락 속에 위치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의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지점은 우리 독자들 내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우리 역시 다수자라는 것, 우리 역시 내셔널리스트라는 것이다. 서경식이 제시한 메시지가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에 관해 뿌리깊게 고찰하기보다는 이해되는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있기 때문이다.
1. 모어와 모국어의 상극
서경식은 여기서 모어와 모국어가 다르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자신의 아포리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아포리아를 이해하기 위해 주의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이것을 서경식 개인의 비극, 혹은 재일조선인 집단의 비극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서경식 개인에게 비극일 수 있으며, 재일조선인 집단의 비극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 경험을 대인적인 차원에 가두어두지 않고 ‘계속되는 식민주의’나 ‘언어 내셔널리즘에’에 대한 좀더 깊은 비판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언어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서지 않은 채, 즉 언어 내셔널리즘에 안주한 채, 서경식과 다른 재일조선인들을 이해하고 위로하려 드는 것이야말로 다수자의 폭력에 다름 아니다. 그 폭력이란 재일조선인의 경험을 특수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경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서경식의 말대로 자신은 언어라는 감옥에 갇힌 수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대다수 재일조선인의 가혹한 현실이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그를 언어의 수인으로 만드는가? 모어와 모국어가 다르다는 현실? 구식민지 종주국에 산다는 현실? 그를 수인으로 만드는 것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식민주의이며, 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언어-내셔널리즘이다. 한국인이지만 태어날 때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에서 산다고하는 그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역시 언어의 수인이자 동시에 교도관이다. 모어-모국어-국민의 일치라는 국민화 과정에 성공하여 국민국가에 성공적으로 편입했을 뿐, 그래서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할 뿐 우리 역시 국경이란 테두리에 갇혀 있다. 동시에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언어를 기준으로 끊임없이 타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므로써 경계 밖에 있는 이들이 국민국가에 혼란을 주지 않도록 자발적으로 관리한다. 즉, 언어의 감옥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현실이며, 보편적인 문제이다.
주의해야 할 또 다른 점은, 모어-모국어의 분리라는 아포리아를 본질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무슨 언어를 쓰느냐가 그 사람의 사고와 문화,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자발적으로 일본어를 모어로 습득하게 됨으로써 비자발적으로 일본의 문화와 일본식 사고를 이식당한 꼴이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그럴 듯해 보이는 이런 주장은 사실 재일조선인을 제대로 이해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모욕에 가까운 말이 될 수 있다. 모국어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로도 수십년간 일본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해온 역사를 부정해버린 것 아닌가. ‘일본에 동화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일본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한 좋든 싫은 이미 일본인의 사고와 문화를 공유해버리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경식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이 단지 모어-비모어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자신이 일본어로 사고하고 일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때 느끼게 되는 그 “위화감”은 자신이 일본어를 모어로 습득한 사실 자체가 바로 식민주의 폭력의 결과이며, 그 자체가 계속되는 식민주의의 증거임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한국어가 아닌 말을 모어로 습득한 모든 한국인들, 다른 해외 동포들이 모두 이런 “위화감”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동시에 윤리적인 맥락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아포리아가 발생하는 것이다.
특수화와 본질주의는 모두 모어-모국어의 불일치 그 자체를 문제시하고 있다. 이럴 경우 해결책은 결국 동화 밖에는 없는 것이다. 한국에 동화되어 한국어 공동체에 성공적으로 편입되거나 혹은 일본에 동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서경식이 말하는 ‘언어의 감옥’이라는 현실은 바로 이런 경험의 특수화와 본질주의적 접근, 양 편향을 경계하며 접근할 때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보편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서경식은 해결책의 한 예로서, 유토피아일 뿐이라고 선을 긋긴 하지만 다언어․다문화 공동체를 제안한다. 언어 내셔널리즘이 붕괴된 세계, 모어와 모국어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다양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이다.
2. 유토피아의 문제
이 점에서 또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유토피아의 문제, 실현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문제이다. 서경식의 비판과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뼛속 깊이 공감한다는 듯한 반응을 보인 독자라도 서경식의 제안 내지는 대안(다언어․다문화 공동체, 통일 상 등)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 두기를 시도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그 이유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 유토피아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양한 현실적인 이유를 든다. 여기서 그들이 든 이유를 조목조목 비판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지적은 타당한 면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지적이 잘못됐다고 비판할 만한 능력이 내게는 없을 수도 있다. 그들의 지적은 현실적으로 옳을 수도 있다.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잣대 그 자체이다.
재일조선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곤란과 모순의 경험들에 대해서는 공감하던 사람들이, 일본의 기회주의적인 리버럴 지식인들의 퇴락에 대해서는 공분하던 사람들이, 모국어의 권리를 박탈당한 디아스포라에 대해 슬퍼하던 사람들이, 왜 국어 공동체 한국을 해체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왜 갑자기 현실주의자가 되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할까?
우리는 ‘실현불가능성’, ‘유토피아적’이라는 말의 허구성에 주목해야 한다. 단일민족 국가를 구성하겠다는 기획 역시 실현불가능하고 유토피아적이다. 수천 년 동안 이미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융합되며 형성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나라 민족은 다양한 지역으로 이산되고 다양한 이주민들이 유입되어 왔으며, 수십년간 전국 곳곳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융합되며 한국의 문화정체성을 형성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단일민족 국가를 지향해 왔다. 그 과정에서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차별과 배제, 강압적인 국민화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러한 단일민족 국가 지향의 허구성은 외면하면서 서경식이 주장하는 다언어․다문화 공동체 지향의 새로운 국가상에 대해서는 현실성의 잣대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단일민족국가 지향이든 다언어․다문화 공동체 지향이든 그것은 어떻게 보면 추구해야 할 이념상이다. 그 안에서는 다양한 문제점들이 발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인가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고 윤리이며 정치이다.
이런 이중 잣대 밑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대로만 이해하겠다”라는 다수자의 자기중심성이 있을 수 있다. 일본의 퇴락한 리버럴 지식인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조선 지식인들의 주장을 선별해 들었듯이, 그렇게 박유하를 자기 멋대로 상찬했듯이, 우리들에게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서경식의 글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모국어의 권리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주목하면서 모어의 권리에 대해서는 왜 별다른 언급이 없을까?
모어와 모국어가 불일치하는 고통에는 공감하고 이해하려고 하면서, 자신의 모어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고통에는 주목하지 않을까?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에는 동의하면서 왜 서경식의 유토피아에는 동의할 수 없는가?
여기에는 모두 이중적인 잣대가 작용하고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 자체를 비난할 수도 없고, 그런 현실을 인정하기도 해야하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살아돌아온 증인의 증언에 귀 기울이는 태도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