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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프리모 레비의 생애가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증언의 불가능성, 다시 말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의 불가능성이라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143쪽.


재일조선인인 그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투쟁이다. 이 투쟁은 이중적이다. 구식민주의 종주국 일본의 언어를 모어로 습득하고 원래 모어였어야 할 조선어를 박탈당한 채, 가해자의 언어로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은 물론 사고의 가장 내밀한 면조차 그들의 언어로 수행해야 하는 그 부조리함,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그 “위화감”과의 싸움이 투쟁의 한 면이다.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 ‘계속되는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투쟁의 또 다른 면이다. 그는 자신이 강렬하게 공감하였던 이탈리아의 문인 프리모 레비처럼 스스로에게 증언자라는 역할을 부여하고 끊임없이 발언토록 한다. 증언자의 비극성에 그 누구보다 깊게 공명하면서도 결코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진정성과 비장함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의 말에 귀 기울이게 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런 ‘귀 기울임’이 우리를 그의 말로 인도할 수 있을까? 과연 그의 증언은 가능할까?



이 책 <언어의 감옥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서경식의 두 번째 평론집이다. 이 책의 주된 의도는 저자가 밝히듯이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내셔널리즘 비판이라는 첫 번째 평론집 <난민과 국민 사이>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언어의 문제라는 고민이 내포되어 있다. 그가 짧은 한국 생활에서 느꼈던 “모어와 모국어의 강렬한 상극”의 경험은 ‘언어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으로 심화되고 있다.

식민주의, 내셔널리즘, 일본 리버럴 세력 비판, 언어의 문제 등등 서경식이 다루고 있는 쟁점들을 보면, 이 책은 다소간 학술적이고 다소간은 정치적인 텍스트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글이 지닌 가장 기본적인 성격, 즉 증언으로서의 텍스트라는 성격을 간과한다면 도대체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라는 현대 사상의 가장 주류적인 흐름은 다소간 독자들을 텍스트의 권위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그건 기존의 지식 교환체계에서 저자와 독자 간의 위계적 질서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새로운 ‘읽기’ 방식은 ‘창조적 책읽기’라는 이름으로 혹은 ‘생산적 오독’이라는 겸손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조류가 동시에 무책임함에 대한 면죄부를 수여할 가능성도 열어 주었다. 증언을 대면하는 피증언자로서의 자세를 방기하는 면죄부말이다.


“살아 돌아온 증인의 증언을 가볍게 여기고 ‘불길한 경종’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우리들이지 않을까?―” -109쪽.


증언자에게 자신의 의무(살아돌아가 증언해야 한다는)가 있듯이 증언자를 대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들만의 의무가 요구된다. 그것은 ‘귀 기울이는 것’이다. 여기서 ‘증언’이 다른 텍스트와 갖는 차별점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바로 저자가 “살아 돌아온 증인”이라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 이래로 ‘저자의 죽음’이란 것이 하나의 주도적인 이념이 되었지만, 증언의 텍스트에서 증언자는 결코 죽을 수 없는 존재이다. ‘증언해야만 한다’는 것과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핵심이다. 하나의 증언 앞에서 우리들은 저자를 살아있는 존재로 인정해야만 하는 윤리적 책임을 발견한다.

피증언자의 윤리적 책임이란 일종의 ‘타자에 대한 윤리’이기도 하다. 증언자는 타자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 너머에 있는 현실을 경험하도록 강제되었기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나 파울 첼란, 장 아메리 같은 아우슈비츠 경험자들은 그 끔찍함과 잔혹함이 도저히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경험하였다. 서경식의 경우에는 내셔널리즘이란 필터에 걸러져 은폐되어 있는 식민주의와 난민의 삶을 경험하였다. 이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 감히(혹은 미처) 상상하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들 속에서 실제로 살아 돌아온(혹은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증언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타자를 대면하는 것이다.

<장송>의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책을 읽는 방법>이란 책에서 창조적인 오독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도 그 위험성을 경계한다. 오독은 하나의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책읽기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정작 독자 자신에게는 틀에 박힌 책읽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미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독선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자신의 입맛에 의해서,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세계에 근거해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독서는 타자와의 만남임을 재차 강조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증언자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오독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자와 대면하고, 증언에 귀 기울임으로써 그 증언이 요구하는 것에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피증언자의 태도는 저자인 서경식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책의 첫 번째 글 <모어라는 폭력-윤동주를 생각한다>에서 윤동주의 서시 한 구절의 번역을 두고 벌어진 오역 논쟁에 개입한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는 시구를 역자 이부키 고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에 대한 오무라 마스오의 지적에 이부키 고는 “이 실존 응시의 사랑 고백은 군국주의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 따위와는 관계가 없다”고 반박한다. 이부키 고는 윤동주의 시 속에서 “실존 응시의 사랑 고백”을 읽은 것이다. 하지만 윤동주가 어떤 시인인가. 식민지 조국의 현실 속에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자신의 모어인 조선어로 시를 쓰고, 그 때문에 끝내 군국주의 일본에 의해 살해당한 시인이다. 윤동주는 동시대 그 누구보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예민한 감수성으로 포착하고, 그 현실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학대했다. 그의 시는 해방 후 조선 청년들의 정체성 형성의 한 축이 되었다. 윤동주의 시는 그 자체로 시대의 증언이다. 식민지의 현실 속에서 고통 받았던 당시 모든 민중들의 공통의 증언이다. 이런 윤동주의 ‘서시’를 타자인 일본인들이 읽을 때에는 타자에 대한 윤리, 증언을 듣는 피증언자의 책임이 요구된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혹은 그들은) 의도적인 오독을 통해 식민지배의 죗값을 면책하고 싶은 자신의 욕구만을 노출시켰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제의 시 구절로 표현하려 했던 윤동주 시인의 마음에 대해 오직 하나뿐인 진실을 확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시 구절을 두고 작동되는 무의식의 권력관계를 인식해보자는 것이다.” -30쪽.


다수자의 자기 중심적인 오독이 아니라 증언자(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마치 타자의 마음 속에 하나의 확정된 의미가 있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침묵하는 타자를 제치고 타자의 마음 속에 확정되어 있는 하나의 의미를 찾겠다고 설치는 것이야말로 바로 서경식이 말한 가부장적 온정주의이며 다수자의 폭력일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증언자의 증언을 ‘의미 있는 것으로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이다. 현실에 은폐된 채 작동하는 무의식의 권력 관계를 탈은폐 시키는 것 역시 그런 것이다.


“그(프리모 레비)의 메시지는 사실 그 자체를 알리기보다 그 사건이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에 관해 고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46쪽.


다수자로서 주어진 피증언자의 윤리적 책임, 증언에 귀 기울이는 것, 증인을 살아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 증언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 이것은 바로 방관자가 되지 말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이 책을 하나의 증언으로 읽는다면, 저자의 글들은 매번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 요구들이 독자를 당황스럽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독자들이 그런 요구 자체에 닿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들의 반응을 살펴보았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렇듯 오만하게 말하는 나보다 훨씬 더)저자가 제기한 문제들에 접근하고 거기서 의미를 고찰하고자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지만, 또한 적지 않은 경우 저자가 명시적으로 경계하고 있는 반응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저자 일본어로 써서 일본 독자들을 대상으로 발표한 글을 모아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국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속에 실린 글들은 일차적으로는(저자는 분명 한국의 독자들도 염두에 뒀던 것 같다) 일본의 독자를 대상으로 쓰였다. 이런 점이 이해를 어렵게 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어쩌면 부차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그가 책 속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은 이미 일본이라는 국경을 벗어나 조선과 일본, 더 나아가 아시아 전체의 맥락 속에 위치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의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지점은 우리 독자들 내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우리 역시 다수자라는 것, 우리 역시 내셔널리스트라는 것이다. 서경식이 제시한 메시지가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에 관해 뿌리깊게 고찰하기보다는 이해되는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있기 때문이다.



1. 모어와 모국어의 상극


서경식은 여기서 모어와 모국어가 다르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자신의 아포리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아포리아를 이해하기 위해 주의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이것을 서경식 개인의 비극, 혹은 재일조선인 집단의 비극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서경식 개인에게 비극일 수 있으며, 재일조선인 집단의 비극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 경험을 대인적인 차원에 가두어두지 않고 ‘계속되는 식민주의’나 ‘언어 내셔널리즘에’에 대한 좀더 깊은 비판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언어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서지 않은 채, 즉 언어 내셔널리즘에 안주한 채, 서경식과 다른 재일조선인들을 이해하고 위로하려 드는 것이야말로 다수자의 폭력에 다름 아니다. 그 폭력이란 재일조선인의 경험을 특수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경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서경식의 말대로 자신은 언어라는 감옥에 갇힌 수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대다수 재일조선인의 가혹한 현실이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그를 언어의 수인으로 만드는가? 모어와 모국어가 다르다는 현실? 구식민지 종주국에 산다는 현실? 그를 수인으로 만드는 것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식민주의이며, 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언어-내셔널리즘이다. 한국인이지만 태어날 때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에서 산다고하는 그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역시 언어의 수인이자 동시에 교도관이다. 모어-모국어-국민의 일치라는 국민화 과정에 성공하여 국민국가에 성공적으로 편입했을 뿐, 그래서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할 뿐 우리 역시 국경이란 테두리에 갇혀 있다. 동시에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언어를 기준으로 끊임없이 타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므로써 경계 밖에 있는 이들이 국민국가에 혼란을 주지 않도록 자발적으로 관리한다. 즉, 언어의 감옥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현실이며, 보편적인 문제이다.



주의해야 할 또 다른 점은, 모어-모국어의 분리라는 아포리아를 본질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무슨 언어를 쓰느냐가 그 사람의 사고와 문화,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자발적으로 일본어를 모어로 습득하게 됨으로써 비자발적으로 일본의 문화와 일본식 사고를 이식당한 꼴이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그럴 듯해 보이는 이런 주장은 사실 재일조선인을 제대로 이해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모욕에 가까운 말이 될 수 있다. 모국어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로도 수십년간 일본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해온 역사를 부정해버린 것 아닌가. ‘일본에 동화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일본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한 좋든 싫은 이미 일본인의 사고와 문화를 공유해버리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경식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이 단지 모어-비모어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자신이 일본어로 사고하고 일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때 느끼게 되는 그 “위화감”은 자신이 일본어를 모어로 습득한 사실 자체가 바로 식민주의 폭력의 결과이며, 그 자체가 계속되는 식민주의의 증거임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한국어가 아닌 말을 모어로 습득한 모든 한국인들, 다른 해외 동포들이 모두 이런 “위화감”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동시에 윤리적인 맥락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아포리아가 발생하는 것이다.

특수화와 본질주의는 모두 모어-모국어의 불일치 그 자체를 문제시하고 있다. 이럴 경우 해결책은 결국 동화 밖에는 없는 것이다. 한국에 동화되어 한국어 공동체에 성공적으로 편입되거나 혹은 일본에 동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서경식이 말하는 ‘언어의 감옥’이라는 현실은 바로 이런 경험의 특수화와 본질주의적 접근, 양 편향을 경계하며 접근할 때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보편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서경식은 해결책의 한 예로서, 유토피아일 뿐이라고 선을 긋긴 하지만 다언어․다문화 공동체를 제안한다. 언어 내셔널리즘이 붕괴된 세계, 모어와 모국어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다양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이다.



2. 유토피아의 문제


이 점에서 또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유토피아의 문제, 실현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문제이다. 서경식의 비판과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뼛속 깊이 공감한다는 듯한 반응을 보인 독자라도 서경식의 제안 내지는 대안(다언어․다문화 공동체, 통일 상 등)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 두기를 시도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그 이유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 유토피아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양한 현실적인 이유를 든다. 여기서 그들이 든 이유를 조목조목 비판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지적은 타당한 면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지적이 잘못됐다고 비판할 만한 능력이 내게는 없을 수도 있다. 그들의 지적은 현실적으로 옳을 수도 있다.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잣대 그 자체이다.

재일조선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곤란과 모순의 경험들에 대해서는 공감하던 사람들이, 일본의 기회주의적인 리버럴 지식인들의 퇴락에 대해서는 공분하던 사람들이, 모국어의 권리를 박탈당한 디아스포라에 대해 슬퍼하던 사람들이, 왜 국어 공동체 한국을 해체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왜 갑자기 현실주의자가 되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할까?

우리는 ‘실현불가능성’, ‘유토피아적’이라는 말의 허구성에 주목해야 한다. 단일민족 국가를 구성하겠다는 기획 역시 실현불가능하고 유토피아적이다. 수천 년 동안 이미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융합되며 형성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나라 민족은 다양한 지역으로 이산되고 다양한 이주민들이 유입되어 왔으며, 수십년간 전국 곳곳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융합되며 한국의 문화정체성을 형성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단일민족 국가를 지향해 왔다. 그 과정에서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차별과 배제, 강압적인 국민화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러한 단일민족 국가 지향의 허구성은 외면하면서 서경식이 주장하는 다언어․다문화 공동체 지향의 새로운 국가상에 대해서는 현실성의 잣대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단일민족국가 지향이든 다언어․다문화 공동체 지향이든 그것은 어떻게 보면 추구해야 할 이념상이다. 그 안에서는 다양한 문제점들이 발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인가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고 윤리이며 정치이다.


이런 이중 잣대 밑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대로만 이해하겠다”라는 다수자의 자기중심성이 있을 수 있다. 일본의 퇴락한 리버럴 지식인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조선 지식인들의 주장을 선별해 들었듯이, 그렇게 박유하를 자기 멋대로 상찬했듯이, 우리들에게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서경식의 글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모국어의 권리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주목하면서 모어의 권리에 대해서는 왜 별다른 언급이 없을까?

모어와 모국어가 불일치하는 고통에는 공감하고 이해하려고 하면서, 자신의 모어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고통에는 주목하지 않을까?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에는 동의하면서 왜 서경식의 유토피아에는 동의할 수 없는가?

여기에는 모두 이중적인 잣대가 작용하고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 자체를 비난할 수도 없고, 그런 현실을 인정하기도 해야하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살아돌아온 증인의 증언에 귀 기울이는 태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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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1-05-21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생각이 나서 이렇게 글들을 읽어보고 있는데.. 제 서평이 마음에 안드셨나봅니다;;ㅎ 음... 몇 몇 부분에 대해선 동감을 하기도 하고, 제가 잘못한 부분도 있구나, 하고 여깁니다만 아무래도 조금은 제가 직접 답을 해야 될 것 같아서 이렇게 댓글을 남깁니다. 글 자체에 대해서 여기서 제가 비판할 만큼의 학식을 갖추고 있지도 못하고, 또한 그러면 말꼬리잡기에 지나지 않게 되버릴 위험이 있어서 그저 제 서평을 변호하자면, 먼저 모어와 모국어의 상극 부분에 대해서는, 음.. 일본어를 모어로 체득하게 되면서 그 문화적 경험을 이식받는다는 제 주장을 그대로 고수할 수 밖에 없네요. 모어를 체득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형식으로서의 언어를 체득한다는 의미만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이는 말씀하신 '위화감' 너머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를 재단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는 몇 몇 언어학자들의 저서를 참조하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유토피아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 글 쓰신 것을 읽어보니깐 정말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대로만 이해한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그래도 저의 입장을 말씀드려보자면 저는 처음부터 현실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네요. 또한 단일민족만의 국가를 이루겠다고 서평에 쓴 적도 없고 다른 분들도 그렇게 쓰지는 않으셨으리라고 봅니다. 다만 지금 현재 상황이 단일민족의 국가에 가깝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제 서평에 쓴 말이고, 이는 앞으로도 단일민족 국가가 되어야 돼, 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이지요. 무엇보다도 모국어의 권리를 박탈당한 디아스포라의 입장을 공감하고 슬퍼하는데 굳이 비현실주의적일 필요는 없지요. 그래서 제가 서평에 쓴 것은 그의 소수자적인 시각을 존중하지만 다수로서 다수가 볼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에.. 아무래도 의견이 평행선을 달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렇게 남기지 않으면 제가 어떤 입장에서 책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기본적 토대마저도 서로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될 것 같아서 이렇게 긴 댓글 남깁니다. 이렇게 댓글 남기는 것이 익숙하지가 않아서.. 다음엔 좀 더 짧은 댓글을 남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ㅎ

어떻게 2011-06-07 03:37   좋아요 0 | URL
가연님의 리뷰를 인상적으로 읽긴 했지만, 제가 이 글을 쓸 때 특별히 가연님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가연님의 리뷰를 읽어보니 우연찮게도 제가 가연님을 비판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리뷰를 기한 안에 못써서 급한 마음에 거칠게 썼고, 완성된 것도 아니랍니다. 시간이 나면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여지껏 못하고 있었어요. 특히 위에서 언급한 언어와 정체성의 문제랑 유토피아 문제는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할 필요성이 있다고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일단 가연님의 지적에 대해 저 역시 변호를 하자면, 일단 언어와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가연님의 주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언어학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언어와 사고, 정체성의 긴밀한 관계는 상식적인 수준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고, 가연님이 리뷰에서 언급하신 새로운 연구 결과들이 그런 주장에 더 힘을 실어 주고 있는 듯 하네요. 이것을 제가 사실의 문제로서 과학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과학적인 사실이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수준에서 어떻게 문제시 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팩트가 현실에서 효력을 발생시킬 때에는 특정한 문화적, 정치적 구조와 결합된 중층적인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일한 언어학적 발견이 언어 내셔널리즘을 강화할 수도 있고, 오히려 그것에 대한 비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을 경계하고자 한 것입니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사고가 제약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결정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본질주의적 접근은 오히려 동일한 언어 공동체 내의 다양한 차이들을 은폐하거나 제거할 위험이 있습니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추상화된 집합적 한국인과 일본어를 사용하는 추상화된 집합적 일본인 사이의 사고방식의 차이와, 동일한 한국어 사용자이지만 재벌 총수인 중년 남성과 비정규 노동으로 가족의 생계를 근근히 유지하는 빈곤층 여성 사이의 차이 중 어떤 차이가 더 클까요?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이가 더 크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연히 선택된 두 한국인 사이의 차이가 추상화된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이보다 클 가능성이 높습니다. 흔히 "개체 차이가 집체 차이보다 크다"는 것이죠.
그런데 집체 차이로 한정해서보더라도 어떤 집체, 즉 어떤 집단 정체성이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느냐에 따라 다른 기준으로 그어진 차이는 무시될 수 있습니다. 근대 사회는 국가, 민족, 성별 등을 중심으로 동일성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런 동일성의 정치는 차이를 통해 차이를 소멸시키는 정치인데, 그렇게 정치적으로 사용되는 동일성 기제는 다른 기제에 비해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어가 같으니까(혹은 다르니까), 민족이 같으니까(혹은 다르니까), 성별이 같으니까(혹은 다르니까) 동일해야 한다고(혹은 달라야 한다고) 말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적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로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어떤 차이를 드러내고 어떤 차이를 은폐할 것이냐 하는 것은 권력에 의해 선택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가령 남녀간 차이에 대한 많은 과학적 증거가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발견되지만(물론 그 반대 증거도 발견되고 있지만요) 그것이 과학을 넘어서서 현실에 작용할 때에는 성별 이분법적 구조를 공고히 하는 방식으로 이용되지요. 그 과정에서 남성 간의 차이, 여성 간의 차이,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에 포함되지 않은 다양한 차이들이 제거되거나 억압됩니다. 생물학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이 현실에서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재일조선인이 일본어를 모어로 습득하면서도 일본인과 다른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 자체가 언어로 포괄되지 못하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가연님이 언급하신 최근의 발견이나 저보고 참고하시라고 권해주신 그런 언어학 책들이 (아직 안 읽어보았지만)분명 과학적 진실을 담고 있겠지요. 하지만 그 과학적 진실을 넘어서서 그것이 현실에서 서경식이 비판한 언어 내셔널리즘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토피아의 문제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건 주장의 문제에 가깝고, 가연님이 말씀하신대로 평행선을 달릴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오해를 푸시라고 몇가지 변명을 해보자면, 첫째로 아까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가연님의 글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라는 걸 다시 말씀드려요. "단일민족만의 국가를 이루겠다고 서평에 쓴 적도 없"다고 하셨는데, 알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다른 분들도 그렇게 쓰지는 않으셨으리라고" 본다고 하셨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역시 다른 분들이 그런 주장을 하셨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룬 것은 '실현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문제에 관해서였습니다. 발리바르나 월러스틴 등에 따르면 국민국가라는 것 역시 허구적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매우 제한되어 있는 국가형태라는 것입니다. 국민국가는 근대의 일반적인 국가형태라기보다는 특정한 시기에 중심부와 몇몇 반주변부 국가들에게 국한된 특수한 국가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국가형태는 주변부 국가들에 대한 착취와 배제, 내부적인 배제와 포섭 등을 통해 유지되어 왔습니다. 그 전략이 바로 내셔널리즘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점에 대해 제가 말하고자 한 것 중 하나는 "실현 불가능성"이란 잣대 자체가 매우 이데올로기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일민족국가를 현실적이라고 말할 근거는 빈약합니다. 우리나라를 단일민족국가로 만드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은 같은 민족이다'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렇게 믿으라'라는 이데올로기이죠. 그 과정에서 국외의 조선인, 국내의 이주민 등에 대한 많은 차별과 배제 억압 은폐 등이 수행됐고, 이 지점에서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라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모국어의 권리를 박탈당한 디아스포라의 입장을 공감하고 슬퍼하는데 굳이 비현실주의적일 필요는 없지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제 글을 다시 읽어봐도 오해받을 만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저 역시 가연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현실주의적이어선 안된다고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로 제 변명을 해보자면, 서경식은 모국어의 권리만을 박탈당한 것이 아니라 모어에 대한 권리 역시도 위협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경식은 자신의 책에서 모어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일본어로 말했다고 썼습니다. 그 장면이 재일조선인이 처한 위치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미 일본어를 모어로 체득한 재일조선인이 디아스포라의 상황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국어를 비모어로 사용하는 한국인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유일한 현실적 방법이죠.

정리하자면, 저는 가연님의 주장에 반대한다기보다는 가연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다른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 서평 제목에서 보이다시피 제 글은 일단 읽는 자의 '윤리'라는 관점에서 작성됐습니다 그래서 책의 내용을 누구나 동의할 수 있게 포괄적으로 아우르지 못하고, 다소 편협해진 것 같습니다. 다시 읽어봐도 너무 거치네요. 가연님 지적 덕분에 제 글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네요.

그런데, 헉, 너무 기네요. 저도 댓글 다는게 처음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