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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선언
차동엽 지음 / 동이(위즈앤비즈) / 2009년 11월
평점 :
언젠가 포럼 모임의 주제가 자기 PR법에 관하여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본인이 되고픈 모습을 상상하며 본인을 가장 잘 PR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드는 거였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종의 목표는 다소 추상적이지만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흔히 말하듯이 모든걸 다 가지고도 가진것에 감사할 줄 몰라 불평만을 말하는 이가 있고, 모든걸 다 잃고도 불평을 모르는 행복한 이가 있다. 이걸 두고 차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유지향의 삶을 살면 샹들리에가 걸려 있는 천장만 보며 살지만, 존재지향의 삶을 살면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며 살수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진정한 부는 소유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누리는 자의 것인것이다.
저자는 행복한 여덟가지의 경우를 말하고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온유한 자,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자비로운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평하를 이루는 자,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
마음이 가난한 자가 행복할 것이라는 것은 위의 소유지향보다는 존재지향의 삶을 살면 행복하다고 말하였고, 슬퍼하는 자의 행복 선언은 롱펠로우의 시를 인용하여 말하고 있는데, 나또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흔들림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한 모습입니다. 적당한 소리를 내며 살아야 사람다운 사람이 아닐까요?'
슬픔은 모든 한계인식에서 나온다. 이 한계인식이 인간으로 하여금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게 만들고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게 한다. 적당한 흔들림과 적당한 소리가 어우러져야만이 행복하지 않을까.
'온유'와 '자비'라는 말은 비단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도 거론되며, 모든 인간관계의 밑바탕이 아닐까 생각한다. 온유라 함은 자신의 뜻 곧 자유의지를 접고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여 사양하는 마음을 가리키며, 자비는 서로의 고충과 입장과 생각을 공감해 주는 것이다. 측은히 여기는 것이다. 동감과 공감은 다르다. 타인이 울면 나도 슬픈것이 동감이지만, 같이 울어줄 수 있는 것이 공감이다. 동감을 넘어서서 공감을 함께 해주는 것이 진정한 자비이며 행복할 자격이 있다.
또, 온유와 자비는 왠지 나약할것이라 생각한다. 부드러움을 통해서 강함을 드러내는 것. 가장 부드럽운 것이 가장 힘이 있으며, 가장 위대한 자이다. 이것은 바로 21세기가 요구하는 리더십 - 섬기는 리더십,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아닐까?
온유와 자비를 통해서 강함이 흐르게 하는 것. 스스로 강해지기 보다는 자신을 통해 힘이 흐르도록 유연해지는 것이 진짜 강한것임을. 마치 유년시절 읽었던 햇님과 바람처럼~
나에겐 참으로 못된 버릇이 있다. 나의 인바운더리를 너무 강하게 지키는 것이다. 아웃바운더리에는 너무나 냉정하고 관심밖이다. 나와 '다름'은 곧 '틀림'이다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나와 다름은 잘못된 것이 아닌데. 그렇게 나와 다른 이들을 미워하고 용서못한다 하여 아프고 병드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인데도.
2009년도 얼마남지 않았는데...그동안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미워했던 이들을 이제는 내 맘에서 비워내는 작업을 해보려한다. 비록 상대방이 퉁명스럽게 나온다 할지라도. 오늘의 내 기분을 상대방 때문에 엉망으로 만들지 말아야 하는 어떤 심리학자의 가르침대로.
서커스 공연을 보면 최고의 서커스는 응당 공중그네이다. 우리의 키를 몇배나 훌쩍 뛰어넘는 공중에서 이쪽 그네에서 저쪽 그네로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하는 이들을 보면, 파트너의 손에 모든것을 믿고 맡긴다.
이쪽 그네에서 저쪽 그네로 건너기 위해서 내가 의지하고 있던 이쪽 그네를 놓아야만이 가능하다. 내가 붙들고 있는 그네줄을 놓아야만이 가능하다. 날기 위해 잡고 있던 그네 줄을 놓아야만이 가능하다. 움켜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맡김으로써 비상을 해보자. 그러면 내가 선언하지 않아도 행복은 내 그림자가 되어서 따라 오리라.
마지막으로 서양 속담 중에 "행복은 언제나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서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는 말이 있다.
조심하라 . 불평의 문으로 행복이 새어나간다. 기억하라. 감사의 문으로 행복이 들어온다. 지금 문 밖에 내가 찾던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