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앨런 포의 '등대'는 새해 첫 날로 시작한다.

The Low Lighthouse and Beacon Hill, c.1820 - John Constable - WikiArt.org








1796년 1월 1일 오늘. 등대 근무 첫째 날. 디 그라트의 동의하에 이것을 내 일기에 기록한다. 늘 일기를 규칙적으로 써왔듯이 앞으로도 그러려고 한다. 다만 나처럼 철저히 혼자인 사람에게 특별한 일이 생길지는 의문이고, 혹여 내가 아프거나 아니면 더 나쁜 상황에 처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괜찮다!

자, 등화실로 올라가서 "내가 볼 수 있는 것"을 쭉 둘러봐야겠다……. 진짜 내가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거지! 그리 많진 않지만. 파도가 약간 누그러진 것 같다. -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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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첫 날 폴 세잔의 그림을 본다. 계획에 없던 일이다. 세잔을 좋아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좋아하게 될 수도 있겠다.  시공디스커버리총서 '세잔'으로부터 옮긴다.

Still Life with Bread and Eggs, 1865 - Paul Cezanne - WikiArt.org






"나는 내가 주위의 화가들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이런 확신은 오랜 각고 끝에 얻어진 것입니다. 나는 물론 열심히 일하지만 세련된 것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세련된 것은 바보들이나 좋아하는 것이지요. 보통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은 쟁이들의 기교의 결과물에 불과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은 예술적 가치가 부재하는 속된 것입니다. 나는 내 비전을 달성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지식과 진실을 신장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1874년 9월 26일

- 제2장 인상주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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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5-01-01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련된 것은 바보들이나 좋아하는 것‘이라는 세잔의 말에서 왠지모를 임팩트가 느껴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서곡 2025-01-01 16:17   좋아요 1 | URL
위 그림들은 1860년대 작품이고 편지는 1870년대에 쓰인 사실을 감안하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성실하게 고민하고 탐구한 끝에 어머니에게 저런 편지를 썼을 거라 짐작됩니다 ... 감사합니다 새해첫날 마저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01-01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임팩트 있는 문장이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게 아니었군요.. 덕분에 하나 배우고 갑니다. 서곡님도 남은 하루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서곡 2025-01-01 16:43   좋아요 1 | URL
편지글 첫 문장 ˝나는 내가 주위의 화가들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는 굳이 쓸 필요 있었을까 싶지만 - 불필요한 우월감으로 느껴져서요 - 본인의 솔직한 심경 토로라 하더라도 - 엄마 앞에서 자식이 부리는 만용이라는 생각도 들고 한편 날고 기는 주변 동료들에게 기죽지 않고 뒤지지 않으려면 꼭 필요한 자기확신일 수 있겠네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01-01 1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교만한 것보단 겸손한 게 낫죠. 그나마 좋게 봐준다면 세잔이 자기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한 사람이었다는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서곡 2025-01-01 16:49   좋아요 1 | URL
당시 파리에서 엄청난 재능을 가진 예술가들을 많이 보고 만났을 거에요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치열하게 작업하는 가운데 화가로서 살아 남으려고 저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01-01 1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서곡님 말씀을 들어보니 역시 큰 무대에서 실력있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도 다시금 해보게 됩니다. 좋은 교훈을 하나 배운 것 같습니다.

맥락없는데이터 2025-01-03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잔은 자신의 시대에는 비판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후대 화가들에게는 “모든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았습니다. 특히 피카소는 “세잔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와 같다”라고 말하며, 세잔의 영향력이 없었다면 현대미술이 지금의 형태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저 역시 세잔의 그림들을 찾아보고, 그와 연관된 글을 읽으며 그의 그림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올려주신 인용문을 읽으니 그에 대한 애정이 더욱 생깁니다. 세잔의 그림은 단순히 예술 작품이 아니라, 제게 있어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림을 주는 특별한 경험입니다. 그의 작품은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강렬하게 제 안에 숨겨진 감정들을 일깨우며, 삶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열어줍니다.

올려주신 글과 그림 덕분에 새해 시작부터 세잔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으받으시고, 2025년이 특별하고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서곡 2025-01-03 13:33   좋아요 1 | URL
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잔의 미술사적 중요성과 별개로 애정과 관심이 별로 없는 편이었는데 새해 첫날 그의 그림이 다가온 사실이 제게 던지는 의미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 나는 내가 주위의 화가들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이런 확신은 오랜 각고 끝에 얻어진 것입니다. --> 그의 편지글 첫 문장 뒤에 온 두번째 문장을 다시 읽었습니다 /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요!!!
 

세월호 사건 추모 산문집 '눈먼 자들의 국가'(2014)로부터 옮긴다. 계간 문학동네 2014 가을호에 발표된 글들이다.


Unsplash의World of Magic


아래 글을 쓴 배명훈은 SF작가, 홍철기는 정치철학자이다.





세상은 신의 노여움을 잠재울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하는 게 아닐 것이다. 세상은 분명 질문에 대답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질문하는 사람 자리로 슬쩍 바꿔 앉는 순간에 붕괴될 것이다.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당신 할 일이나 잘하세요." 구체적인 상황에서 맞닥뜨려보면 이 말은 꽤 충격적이어서 정말로 그래야겠다는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공동체를 위한다는 건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 배명훈

우리 자신의 무능력의 극복은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만드는" 공적 재현 행위와 그 실행과정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하겠다. – 홍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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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2014) 중 진은영 시인의 글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문학동네 2014 가을호 '특집 4·16, 세월호를 생각하다' 수록)로부터 옮긴다.

사진: Unsplash의Pascal Debrunner


오늘 무안공항에서 고인이 되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러니 사고 이후 정치인들이 내놓는 주된 수습안들이 모두 연민과 시혜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엾은 희생자의 가족들을 위해 적절한 보상금을 책정하고 생존자에게 특혜를 베풀어서 착한 정치인으로 남고 싶은 거다.

동정이나 연민은 베푸는 사람의 마음이지 받는 이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충분히 동정해줬는데도 자꾸 사실을 규명해야겠다니 이제는 피곤도 하고 화도 치밀 것이다. 정치가 있어야 할 곳에 연민과 시혜의 언설이 난무하는 사회가 어째서 뻔뻔스러운 사회인지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 진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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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12-30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구상에서 인간은 가장 위대한 종이라고 하지만 막상 나에게 닥친 현실을 대처할 때는 사실 할 수있는게 별로 없거나 전혀 없는 경우가 대부분 인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을 수록 그러한 사실에 더욱 체감하게 됩니다. 무안의 소식도 참으로 안타깝지만 결국 똑 같은 현실의 벽에 막막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곡님 기운내시고요.
올 한해 서곡님의 올려 주신 글과 사진을 통해 많이 위안 받았습니다.
늘 감사 드리고, 새해에도 건강하십시요.

서곡 2024-12-30 17:43   좋아요 1 | URL
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산 자들은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운이 꼭 필요하고요 ...... 위안 받으셨다니 저도 위안이 됩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빼고 하루밖에 안 남은 올해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The Country of the Blind https://en.wikipedia.org/wiki/The_Country_of_the_Blind


허버트 조지 웰스의 단편 '눈먼 자들의 나라'(세계문학 단편선 06 허버트 조지 웰스 / 최용준 역) 를 읽었다. 판타지라고만 부르기 어려운, 있을 수 있는 이야기 아닐까. 세월호 사건 때 출간된 책의 제목은 '눈먼 자들의 국가'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또한 떠오른다. 그런데 시각장애인들을 소외시키는 은유라는 생각이 안 들 수 없다.

Blind Orion Searching for the Rising Sun, 1658 - Nicolas Poussin - WikiArt.org


주권자가 국민을 잡아먹는 '호러국가', 대한민국 https://omn.kr/apy0





"저는 길이 보입니다."

눈먼 이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보이다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아.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하고 내 걸음 소리를 따라오라고."

눈먼 이가 말했다. "자네는 배우게 될 거야. 세상에는 배워야 할 게 아주 많아."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는 애꾸가 왕이다’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나요?"

"’눈먼’은 또 무슨 말이야?" 눈먼 이는 어깨 너머로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말했다. - 눈먼 자들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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