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보는 한일사 1 - 화해와 공존을 위한 첫걸음, 선사 시대~고려 시대 마주 보는 한일사 1
전국역사교사모임.일본역사교육자협의회 엮음 / 사계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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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그 탄생 배경을 알다

전국역사교사모임·역사교육자협의회, <마주보는 한일사 1>, 사계절, 2006.


우리 모임과 일본의 모임이 합심하여 만든 책이다. 전에 2권부터 읽었다. 늦게야 1권을 읽는다. 일본에 계신 분들과 우리모임이 조율하면서 낸 책이라, 조금씩 다가오는 일본을 알기 위해선 제격인 셈이다. 부제가 ‘화해와 공존을 위한 첫걸음’이다. 그런 만큼 나름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많다.
그런데도 좁히기 어려운 점들은 있어 보인다. 특히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바다 사람들’의 경우는 심하다. 이 부분은 어쩌면 우리 모임의 선생님이 가진 편견보다 한국인들의 가진 편견이 더 문제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구를 주제로 한국에선 신도봉중학교의 문주영 선생님이, 일본에선 이오야마 대학의 도리야마 다케오 선생님이 썼다.
왜구 문제, 우리는 일단 피해의식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객관적 분석보단 감성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그게 넘기 어려운 지점인 듯 하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건 주로 전기 왜구다. 14, 15세기의 왜구다. 통계를 보면 1370년대와 1380년대 즉 고려 말이 가장 극성기임을 알게 된다. 당시 일본은 무로마치 막부 이후 전개된 남북조 시대였다. 단일 권력이 일본 전체를 장악하지 못한 때다. 그래서 고려 정부의 항의에 일본은 최선을 다해 방지하려고 노력하지만 왜구의 활동을 그들로서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한다. 이건 단순한 핑계로 보이지 않는다. 일본 정부에서 말하길 “지금 우리나라 서해도 일대와 규슈에는 난신들이 할거하고 있으면서 벌써 20년이나 공납을 바치지 아니한다. 그런데 서쪽 바다 지역의 우매한 백성들이 틈을 보아 귀국을 침공하는데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는데, 그 지방에 깊이 들어가서 날마다 서로 싸우고 있다. 이제 규슈만 평정하면 해적들을 금지할 수 있음을 하늘에 맹세하고 약속하는 바이다.<고려사 열전>”
그런데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전기 왜구가 아니라 후기 왜구다. 제주 역사와도 관련이 깊은 건 바로 그 후기 왜구이기도 하다. 16세기 활동기 왜구를 말한다. 이미 고려말 그리고 조선 세종 때 쓰시마 정벌 등으로 강력하게 대응했고, 일본의 국정 역시 통일 권력이 생기면서 전기 왜구는 많이 정리되었다. 그러자 예전처럼 노략질하기 어려워진 해양세력은 교역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물론 여차하면 다시 약탈을 병행하긴 하다.
근데 문제는 이들 왜구의 주체와 성격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1960년대 이후엔 주로 ‘후기 왜구를 중국 국내 사정으로 인해 발생한 밀무역에 초점을 둔 상인’으로 규정하는 게 보편적인 연구였다. 물론 전기 왜구에 대해선 거의 대부분 학자들이 일본인 해적으로 보고 있다. 여기엔 이견이 없다. 문제는 후기 왜구다.
이들에 대해 1980년대엔 고려·조선인이 왜구의 주체라는 학설이 등장했다. 제주도 해민과 왜구가 관련이 있다는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 뒤 1990년대에는 왜구를 ‘중국·조선·일본의 경계 지역에 살던 국적과 민족을 초월한 집단으로 이해하려는 지역 이론이 일본 학계에서 제기되었다. 내가 동조하는 건 바로 이 견해다. 그래서 힘들다. 국내에선 수용되기 힘들다. 과학적 근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과도한 민족주의 때문이다. 과학이 아니라 정서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사료가 풍부한 건 아니다. 그래서 더욱 어렵다. 하지만 이 부분을 집필한 문주영 선생마저도 “지금까지의 연구가 자기 나라 역사 인식의 틀 속에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문주영 선생 역시 동감하지만 국내 정서가 두렵다는 말 같다.
일본 측 저술에 따르면 후기 왜구는 해적이면서, 쓰시마의 실력자, 상인, 조선 국왕의 관직을 받은 자 등 복잡한 국면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들의 활동 무대였던 현해탄과 동중국해 해상 교역의 역사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서 또 하나 관심을 가지게 했던 건 바로 <일본서기>라는 책이다. 한 章이 그것을 다뤘다. 덕분에 그 책이 어떤 책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 동안 국내 학자들은 전혀 믿을 수 없는 사료라며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했고, 일본 측에선 그들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가장 신뢰할 책이라 했다. 그런 평행선 때문에 난감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제주 향토사 연구에서도 필요에 따라 이 책을 인용했다. 아전인수의 해석이 필요할 때만 그랬던 것이다. 참으로 애국적(?)인 연구 자세라 하겠다.
근데 이번에 그 내용을 엿보았더니 문제가 있긴 있는 책이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사건이 그대로 나오고 있는데 <일본서기>는 그 사건을 고스란히 120년 끌어 올려 쓰고 있다. 필요한 곳에서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일본서기>가 역사적 사실을 일부 담고 있긴 하되, 필요에 따라서 연도를 올려 잡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일본 역사의 유구함을 나타낼 필요성이 있는 곳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누가 왜 이런 일을 했던 것일까. 673년 덴무 천황은 체제를 완전히 정비하려고 한다. 이 시기는 당나라에 의해 한반도가 완전히 무너진 뒤다. 특히 왜는 백제에 구원병을 파견했던 뒤라, 당나라의 보복이 두려워지기도 했다. 방법은 하나.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위기가 그들의 단결을 가져온 셈이다. 그래서 그른 율령제정, 국사 편찬, 수도 건설 등에 매진한다.
<일본서기>도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덴무천황은 681년 <일본서기>편찬을 명령한다. 그 완성은 720년의 일이다. 왜(야마토)가 아닌 ‘일본’이 처음으로 외교문서에 등장한 것은 701년의 일이다. 그런 정치적 의도에서 만들어진 책이 바로 <일본서기>다. 그러기에 그냥 내칠 사료도 아니면 전적으로 신뢰할 사료도 아니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책 <일본서기>에 실린 전설이나 신화를 통해 고대 귀족들의 사고방식을 읽어내면 되는 것이다. 또 5세기 이후의 기록을 바탕으로 고대 국가 형성 과정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비판적 검토로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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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보는 한일사 2 - 화해와 공존을 위한 첫걸음, 조선 시대~개항기 마주 보는 한일사 2
전국역사교사모임.일본역사교육자협의회 엮음 / 사계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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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멀기만 한 일본
전국역사교사모임·일본 역사교육자협의회, <마주보는 한일사 2>, 사계절, 2006.



일본어 손댄지가 벌써 몇 년인가. 그래도 까막눈이다. 한 달 공부하고 석 달 쉬고, 다시 한 달 공부하고 넉 달 쉬고. 그러니 맨 날 1장, 2장만 반복한다. 내 연구 테마는 반드시 일본 책을 보아야 할 구석이 많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모양이니.
일본어가 안 되면 안 되는대로 우선은 일본 역사와 사회라도 익숙해져야 한다. 그런데 반갑게도 우리 역사교사모임 선생님들이 일본 선생님들과 함께 한국, 일본의 역사를 마주하며 엮었다. 예를 들어 한글과 가나, 한국의 건축과 일본의 건축 등으로 세트를 이뤘다. 반가웠다. 그래서 얼른 샀다.
그리고 단숨에 읽긴 했는데, 두 달이 지난 지금 보니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 일본의 건축물, 다다미를 깔아놓은 그런 집을 ‘니혼마’라고 하는구나. 일본 정원 ‘가레산스’. 확실히 조선의 그것과는 다르다. 일본은 축소하여 어떻게든 정원 안으로 집어넣는다. 근데 조선은 아니다. 밖에 눈다. 자연을 그대로 둔 채 집 안에서 감상한다.
무엇보다 새롭게 알 게 된 것은 무사다. 흔히 사무라이라고 하는. 그들에 대해 나는 그 동안 칼만 쓰는 닌자, 조폭으로만 생각했다. 근데 사실은 그것과 많이 다르다. 에도 막부 시기엔 주로 행정 업무에 종사하는 하급 관원이 오히려 사무라이의 일반형에 가깝다는 것이다. 일본 성의 구조를 다시 보았다. 안쪽에 해자, 그 안에는 관청, 창고, 마구간 그리고 다이묘가 사는 저택이 잇다. 여기 다이묘를 모시는 가신과 상급 무사(하타 모토)가 있다. 가운데 해자 바깥 구역엔 큰 길을 따라 쵸닌(상인과 기술자)이 모여 살았다. 그 바깥에는 신사와 사원이 있고 중급 무사가 살았다. 이와 같은 성 주변 취락을 조카마치라고 한다.
식사는 하루 두 끼였다고 한다. 17세기 이후에 와서 세 끼로 늘었다. 육류를 부정한 음식으로 여겨 먹지 않았다는 것도 특징적이다. 이건 예전에 이규배의 글에서 읽은 바가 있다.
건물 안에 ‘이로리’라고 하는 취사 난방 시설도 특이했다. 제주 초가의 봉당과 유사하나 많이 다르긴 하다.
암튼 많이 멀다. 아직도 일본은 내게 낯설다. 언어부터 익숙해져야 그 세상을 본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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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배의 역사
김재근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8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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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배'에 덕판배는 없었다.

김재근, <우리 배의 역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89.

바다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당연히 '배'에도 관심이 갔다. 그래서 고른 책이다. 물론 기대한 것은 그 '우리 배'안에 제주 사람들의 포작선이나 덕판배가 등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없었다. 포작선에 대한 이야기가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건 이미 다른 책에서도 많이 보았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첫 전투(옥포 해전)를 치르면서 동원했던 배 중에 46척의 포작선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걸로 끝이다.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덕판배는 아예 언급도 없다. 그래서 기대한 것을 보진 못했다. 그러나 그건 나의 과도한 희망이었을 뿐, 치 책 나름의 완성도는 높다.
저자는1920년 생이다. 그리고 기계공업과, 조선공업과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조선왕조실록을 뒤지며 우리의 옛 배들을 소개했다. 그것만으로도 값지다.

안압지에서 발굴된 배부터 완도선, 임란 때의 판옥선, 거북선 등을 두루 다뤘다. 고대의 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 배는 일정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서 서양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과도 많이 달랐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한선의 기본 구조'라고 말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넓고 두꺼운 저판을 밑에 평탄하게 깔아 놓는다. 밑이 뾰족한 첨저선이 아니라 평평한 평저선이 우리 배의 특징이다. 그 평저의 4변에 양현 외판과 선수재, 선미재를 세워 놓고 결착한다. 그리고 그 상면에 필요한 만틈의 횡량 즉 가로 도리를 걸쳐 고정하고, 그 밑으로 내려가면서 외판재마다 가룡목을 설치한다. 무슨 말인지 어렵겠지만 나름대로 가장 간단히 설명한 것이다. 그림이 있어야 이해가 쉽다. 물론 이 책에는 그림이 풍부하다.

요즘 보는 첨저선과는 다른 평저선인 이유가 있다. "먼저 지리적 조건이다. 서해와 남해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크다. 그래서 배가 만조시에는 물에 떴다가도 간조시에는 물이 빠진 바닥에 앉앗 좌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은 동해에서도 양항이 없으므로 배를 사용치 않을 때에는 풍랑을 피해 연안 뭍에 끌어올려 두지 않을 수 없다. 이른 바 배의 비치 랜딩이다."
조선 세종 16년에 남중국식 갑조 첨저선으로 개혁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16년 뒤인 문종 원년에는 다시 전통적인 방식으로 복귀했다고 한다. 이는 무엇보다 재질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 같다. 한국은 전형적으로 육송만을 썼다. 아주 단단한 장점이 있는 반면 구부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 장점을 살렸다. 쇠못을 쓰지 않고 나무못을 쓰면서 수시로 수리를 했다. 나무못은 빼면 바로 분해 조립이 가능하다. 그러나 쇠못을 쓰면 뺄 수가 없다. 그냥 썩으면 썩는대로 방치할 수밖에 없다.
<경국대전>에는 배의 수리 연한까지 규정하고 있다. 8년, 14년에 수리하고 그 수명은 20년이라는 것이다. 정말 <경국대전>엔 별 것을 다 규정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긴 당시 배는 지금처럼 흔하지 않고 국가의 중요한 자원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일본배와 한선을 비교한 것도 재미있다. 임진왜란에서 수군의 승리도 바로 배의 차이에서 생긴 것도 있다.
우선 한선은 왜선에 비해 외판이 두껍다. 때문에 왜선에 비해 느리긴 하나 충돌전에서 강하다. 거북선은 바로 이 충돌을 주무기로 삼았다. 특히 일본배는 삼나무, 한선은 소나무였으니, 게다가 두께의 차이도 있으니 일본배가 파괴되는 것은 당연하다.
노도 왜선은 1인 1노인 반면 한선은 1노에 5명이 달라 붙는다. 여기서 주의할 것 중 하나는 복원 거북선의 노이다. 서양학자의 분석에 따르다 보니 한국식 노가 아니라 서양식 노로 복원했다고 한다. 한국식 노는 아래로 내리꽂아 젓는다. 서양식 oar가 아니다.
돛은 한국 배가 둘, 일본 배는 하나다.
특히 임란 때 주로 활약한 판옥선의 장점은 더욱 크다. 판옥선은 명종 10년(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그를 계기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본래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다. 해전도 백병전이다. 배로 접근하여 적의 배에 올라서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다. 칼싸움에 조선이 밀린다. 그러니 조선은 배를 붙이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이순신은 주로 함포 사격으로 끝을 냈다. 물론 거북선처럼 접근전을 벌일 때는 왜병이 거북선에 올라와도 소용 없게 지붕을 덮고 그 위에 송곳을 꽂아 놓는 방식을 썼다. 적의 장점을 알았기에 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북선의 기본 바탕이기도 했던 판옥선. 그 판옥선의 장점을 보자. 우선 전투원과 비전투원(격군)을 갈라 놓아 혼선이 없게 했다는 점이다. 노를 젓는 격군은 오로지 노 젓기에만 몰두 할 수 있었다. 판옥선 정원이 164-194명인데 그 중 격군이 100-120에 달했다고 한다. 그 만큼 전투선은 속도가 중요하기에 격군이 많다.
판옥선의 뛰어난 두번 째 기능은 높은 곳에서 적을 내려다 보며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층 높이가 더 높으므로 왜병이 옮겨 탈 수가 없다. 창으로 공격하려고 해도 한 참 높다.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순신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 외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있다. 우리는 왜구만을 문제 삼는데, 사실 우리 쪽에서 일본에 가서 노략질 했던 경우도 있다. 소위 '신라 해적'이 일본 기록에는 많이 등장하는 모양이다(145쪽).
몽골의 일본 정벌 때 고려 배는 중국 배와는 달리 태풍 속에서도 많이 건재했다는 점도 처음 읽는 대목이다. 튼튼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여진 해적 이야기도 특이하다. 물론 주강현의 책에서도 이 점을 보긴 했다. 고려 시대에 여진해적이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강릉,삼척, 경주까지 침입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일본 대마도, 이키, 규슈까지 침략했다는 것이다. 여진은 말만 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그 만큼 전통시대 바다는 여러 세력에게 열려 있었다는 의미겠다.

이렇게 우리 배의 역사를 대충 살폈다. 제주의 배가 등장하지 않아 아쉽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래도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긴 하다. 그것만으로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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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낭 브로델 - 지중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e시대의 절대사상 21
김응종 지음 / 살림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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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델의 ‘장기지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김응종, <페르낭 브로델>, 살림, 2006.



다이제스트 판이라고 해서 모두 다 경박한 것으로 치부할 필요는 없다. 특히 외국 이론서의 경우, 국내 학자가 이를 소화해서 나름의 견해를 가지고 다시 풀어준 책은 그 해악보다 득이 크다. 이건 내가 능력이 모자라서 나온 편애이겠지만, 그렇다고 헛 폼 잡으며 서양 고전 원서에 매달리는 무모함보다는 현명한 것일 수가 있다. 나는 솔직하고 싶다. 서양의 것을 공부하되, 좀 쉽게 말이다.
살림 출판사에서 그런 기획을 했나 보다. ‘e시대의 절대사상’이라는 시리즈를 내는데, 우리가 흔히 들어보기만 했던 고전들을 이처럼 한국의 학자가 풀어서 소개하는 기획인 모양이다. 그 중 하나가 프랑스 아날학파의 대가, 흔히 ‘역사학의 교황’으로 불린 페르낭 브로델의 경우이다.
김응종이 이 책은 맡았다. 예전에 그가 쓴 <아날학파>를 읽었다. 어려웠다. 근데 이번 책은 쉽다. 석사과정, 그리고 다시 박사과정에서 아날을 공부했으니 이젠 좀 감이 잡힐 때도 되었을 것이다.
브로델의 역사학을 한 마디로 이야기 하면 ‘장기 지속’이다. 시간이 지나도 거의 변화하지 않는, 아주 미세하게만 변하는 장기 지속의 어떤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그 경우, 우리 주변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특정 사건, 정치적 격변 등은 그 구조 위에 떠다니는 우연적인 먼지, 큰 바다의 커다란 물의 흐름 위에서 일렁이는 수면 위의 파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구조주의 역사학이다. 개인의 자유와 구조의 문제에서 그는 구조에 손을 들어 주었다.
김응종은 여기서 그가 한참 연구하던 시절에 나치의 감옥에서 5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다 보니 구조라는 ‘감옥’을 절감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많은 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막아내지 못한 2차 세계대전을 보며, 인간의 개성, 자유, 의지를 넘어서는 그 어떤 구조의 막강한 힘을 크게 의식했을 것이라는 논리다.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인간의 사고 역시 환경에 의해 많은 지배를 받기에 그의 개인적 체험이 그의 역사관을 그리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구조는 시간의 지속과 관련된 구조다. 물론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강조하는 구조는 지리적인 구조다. 대표작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에서 그 특징은 가장 잘 드러난다. 지중해라는 지리적 구조가 거의 변하지 않는 역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제주 역사에 적용할 아이디어를 얻는다. 제주도의 지리적 구조는 고려시대 때부터 군사기지로 주목받을 만 했다. 원나라가 이를 주목했다. 남송과 일본에 대한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한말에도 그랬다.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했고, 러시아는 제주도를 점령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1948년 3월에, 아직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데, 이승만은 미국의 환심을 사려고 제주도를 미국의 군사기지로 제공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1949년엔 마오쩌둥에게 쫓겨 대만으로 밀려간 장제스가 제주도를 자신들의 군사기지로 활용할 수 없을까 하고 이승만 정부에 타진했었다고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리고 1951년 미국과 일본 사이에 맺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은 한반도와 별도로 거문도, 제주도를 논의했는데, 그 두 개의 섬에 대한 권한 역시 포기하기로 조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그 만큼 제주도는 한반도와 하나로 묶어서 볼 게 아니다. 장기지속의 지리적 구조가 제주도의 역사에서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서 제주도는 항상 군사기지로서의 활용 가능성이 거론되어 왔다는 것이다. 장기지속으로 말이다.
브로델은 또 지중해 지역의 독창적인 농업을 설명했다. 불모의 석회석 지대, 소금기로 황폐해진 광활한 땅, 질산칼륨으로 덮인 땅들은 빈곤을 가중시켰기에 나름의 독특한 농업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기지속적으로 개간이 이뤄졌다고 한다.
이 역시 제주의 역사에 적용할 수 있다. 화산회토, 영양가라고는 하나도 없는 땅, 1960년대 당근이나 감귤 재배가 시작되기 전까지 아마 농경이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는 신석기 시대부터 해방 이후까지도 제주는 농업경제만으로 생존이 이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흔히 조선시대라고 말하면 농업경제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것은 도식이다. 구체적인 지역으로 내려오면 그 도식은 사실을 왜곡하는 도그마가 된다. 확실히 제주도의 농업은 장기지속적으로 생존 자체를 해결할 정도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업경제와 축산경제에 주목해야 한다.
지중해 사람들이 아메리카로 진출한 것 역시 지리적 구조에서 답을 찾았다. 생존을 위해 팽창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적인 자연환경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제주 포작인이 남해안으로 진출해야만 했던 것도 이와 비교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새뮤얼 킨저는 브로델의 이러한 역사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이 책 51쪽). “<지중해>는 정치적으로 표현된 국가보다는 생태적으로 연동된 공간에 초점을 맞추고, 상업과 농업 활동을 국가의 법보다 공간 시스템과 관련시키며(중략).” 제주 포작인들이 활동했던 바다 역시 조선이라는 국적으로 따질 게 못된다. 일본의 왜구와 연계시킬 이유가 충분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표현된 국가’가 아니라 ‘생태적으로 연동된 공간에 초점을 맞추고’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구조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순 없을 것이다. 구조는 너무 크다. 인간의 역할은 없어진다. 그래서인가 브로델은 그냥 구조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구조(장기지속)-콩종튀르(국면-중기지속)-사건, 개인(단기지속)의 3단계 역사 서술을 강조했다. 물론 주 강조점은 장기지속이다.
“사건들 가운데 장기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사건들은 구조를 구성하고, 일정한 시간 계열에 들어가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사건들은 콩종튀르를 구성한다. 나머지 사건들 가운데 구조와 콩종튀르에 포함되지 않는 사건들은 구조와 콩종튀르 위를 아무런 역사의 무게도 없이 떠다니는 먼지에 불과하다.”라고 김응종은 평했다.
콩종튀르라는 말이 생소한 사람들을 위해 브로델 스스로가 설명한 구절을 소개한다. “동일한 기호를 가진 사건들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물론 콩종튀르의 종류는 많다. 경제, 정치, 인구, 의식, 집단심성, 범죄의 증감, 예술상의 유파들, 문학 동향, 유행 등도 모두 콩종튀르의 결과다.
하지만 1968년 혁명 이후 아날 3세대들은 2세대의 학풍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복시켰다. 장기지속이 아니라, 사건사로 돌아갔다. 미시사적인 신문화사 학풍이 강해졌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사건 그 자체에 매몰되진 않았다. 사건을 통해, 콩종튀르와 구조를 바라보았다고 말해야 옳다.
사건에서 시작하든, 아니면 구조에서 시작하든 처음이 중요한 것은 아니겠다. 어느 쪽을 단서로 하건 인간의 삶을 제대로 포착한다면 문제는 없겠다. 물론 부분들을 산만하게 짜집기하는 전체사보다는 부분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미시사를 선호하겠다는 김응종의 논조에 동의는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브로델의 장기지속의 그 가치를 잃는 것은 아니겠다.
특히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시끄러운 이 제주 땅에서 나는 브로델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다만 그의 장기지속이 계급성을 결여한 게 조금 우려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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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생활사 2 조선시대 생활사 2
한국고문서학회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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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삶과 죽음의 의례

한국고문서학회, <조선시대 생활사2>, 역사비평사, 2000.



생활사에 대한 주목이 이미 오래되었다. 이 책의 1편을 읽은 지도 제법 되었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배운 것은 많았던 것 같다. 이번에 읽은 2편 역시 그러하다. 이번엔 특히 죽음과 관련된 의례를 관심 있게 읽었다. 내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다.
생활사를 연구하는 고문서로 많이 읽히는 텍스트가 무엇인지도 엿봤다. 나는 읽어본 적이 없는 책이다. 오희문의 <쇄비록>, 유희춘의 <미암일기>, 이문건의 <묵재일기>, <양아록> 등이다. 이 중에 특히 이 책엔 이문건의 <묵재일기>가 많이 활용되었다. 처음 듣는 사람인데, 최근 언론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이문건의 무모 묘소에 세워진 비갈인데, 그 비 옆에 한글로 비석의 훼손을 금하는 문구를 새겨 놓은 게 보도되었다. 가장 오래된 한글 비석이라는 것이다. 1535년 무렵이니까 그럴 만도 하다. 그런 이문건을 나만 몰랐던 것 같다. 실력과 기회가 되지 않기에.
먼저 3년 상 이야길 보자. 돌아가신 지 3년째 되는 날까지 상을 치르는 것으로 만으로 따지면 2년이다. 근데 대상 이후 다시 담제 즉 상복을 벗는 의식까지 하고 탈상하므로 실제는 만 26개월이 된다. 3년 상의 근거는 자식이 태어나서 3년이 지나야 비로소 부모에게서 떨어져 나와 생존할 수 있다는 논리에 있다.
상례 절차에서 습이라는 게 있다. 흔희 염습이라고 한꺼번에 부르는데 사실은 다르다. 습은 기존에 부모가 입었던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는 행위다. 소렴은 그 시신을 다시 싸는 행위다. 첫째 날 습하고 둘째 날 소렴한다. 물론 지금은 간소화되어 한꺼번에 한다. 이때까지 시신의 얼굴은 덮지 않고 전신을 묶지도 않는다. 혹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셋째 날에 대렴을 한다. 시신을 묶고 얼굴을 가린 이후에 입관하는 절차다. 입관 후에 빈을 설치한다. 빈소라는 말은 거기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 빈소를 차리기 전 즉 입관 전까지는 빈소가 아니라 영좌만 마련된다.
성복은 부계 8촌까지다. 매장 후 봉분을 마련하면 우제를 지낸다. 우(虞)는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초우, 재우, 삼우로 세 번 지낸다. 우제 후에는 졸곡제를 한다. 곡을 끝내는 것이다. 그 후 13개월째가 되면 소상, 25개월째가 되면 대상, 27개월째가 되면 담제를 지낸다. 담제 이후가 탈상이다.
사극에 간혹 나오는 시묘 살이, 근데 이건 <경국대전>에도 <주자가례>에도 없다. 근데도 한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6년 동안이나 공자의 묘 곁에서 여막을 짓고 그를 추모했던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몽주가 3년 여막 살이 한 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근데 시묘 살이 중에도 외출할 건 다했다. 오히려 저작과 공부의 시간이기도 했다. 다만 육식 금기 등은 있었던 모양이다.
제사도 우리는 흔히 4대 봉사를 말한다. 그러나 <경국대전>엔 3대 봉사다. 이것을 이황의 제자들이 중국 <주자가례>를 내세우며 4대 봉사로 바꿨다는 것이다. 국법 <경국대전>은 6품 이상 3대봉사, 7품 이하는 2대, 서인은 부모만 지내게 되어 있다.
근데 조선초기에는 자녀 구분 없이 윤회 봉사였다. 율곡 이이가 외가인 신씨 집안의 제사를 받들었다는 것이 잘 안 알려져 있는데, 이는 대표적인 예이겠다. 물론 조선 후기였다면 외손이 봉사하는 게 아니라 당연히 신씨 집에 양자를 들여 해결했을 것이다. 노비의 경우엔 35일 째 혹은 49일 째 무당을 부러 재를 지낸 경우가 보인다.
결혼에서도 전기와 후기가 다르다. 전기엔 양반집 여성도 3번이나 결혼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민의 경우는 성이 문란할 정도로 그런 개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18세기가 되면 열녀 문화가 강화된다. 열녀로 보고 되는 숫자가 급증하여 신중하게 심사할 필요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18세기가 그런 시대임을 알고 도내에 널려있는 열녀비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엔 ‘재가녀 자손 금고법’ 즉 재가한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어떤 관직에도 나갈 수 없는 제도가 있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의 앞길 막길 좋아했겠는가. 지독한 장치가 있어서 여성의 재혼은 통제했다.
고문서를 통해 당시 물가 동향 등 경제 문제를 보는 시도가 참신했다. 다만 나는 그 글을 읽어도 잘 들어오지가 않았다. 경제는 확실히 어렵다. 근데 양반들이 관청의 재화를 마음껏 가져다 쓰는 대목에선 많이 놀랐다. 지방관이 그 지역에 있는 양반에게 수시로 관청의 재화를 선물했던 것이다. 필요한 경우 요청하면 계속 내주는 것 같았다. 때로는 유배 온 사람에게까지 관청의 물건을 내주는 경우도 있었다. 공과 사의 구분이 없는 관행이 그 때 있었던 모양이다.
세시풍속에서 입춘 때 나무소를 만드는 풍속이 관북지방에도 있었다고 한다. 제주도의 입춘굿에 등장하는 ‘낭쉐’는 제주도만의 것은 아닌 모양이다. <동국세시기>에 나와 있다. 영등도 그렇다. 영남지방 풍속에 영등이 등장한다. 역시 <동국세시기>에 근거한다. 역시 그 책에 따르면 제주도에선 매년 8월 보름에 남녀가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좌우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날 그네도 뛰고, 닭잡기 놀이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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