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배의 역사
김재근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89년 1월
평점 :
품절


'우리 배'에 덕판배는 없었다.

김재근, <우리 배의 역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89.

바다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당연히 '배'에도 관심이 갔다. 그래서 고른 책이다. 물론 기대한 것은 그 '우리 배'안에 제주 사람들의 포작선이나 덕판배가 등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없었다. 포작선에 대한 이야기가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건 이미 다른 책에서도 많이 보았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첫 전투(옥포 해전)를 치르면서 동원했던 배 중에 46척의 포작선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걸로 끝이다.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덕판배는 아예 언급도 없다. 그래서 기대한 것을 보진 못했다. 그러나 그건 나의 과도한 희망이었을 뿐, 치 책 나름의 완성도는 높다.
저자는1920년 생이다. 그리고 기계공업과, 조선공업과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조선왕조실록을 뒤지며 우리의 옛 배들을 소개했다. 그것만으로도 값지다.

안압지에서 발굴된 배부터 완도선, 임란 때의 판옥선, 거북선 등을 두루 다뤘다. 고대의 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 배는 일정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서 서양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과도 많이 달랐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한선의 기본 구조'라고 말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넓고 두꺼운 저판을 밑에 평탄하게 깔아 놓는다. 밑이 뾰족한 첨저선이 아니라 평평한 평저선이 우리 배의 특징이다. 그 평저의 4변에 양현 외판과 선수재, 선미재를 세워 놓고 결착한다. 그리고 그 상면에 필요한 만틈의 횡량 즉 가로 도리를 걸쳐 고정하고, 그 밑으로 내려가면서 외판재마다 가룡목을 설치한다. 무슨 말인지 어렵겠지만 나름대로 가장 간단히 설명한 것이다. 그림이 있어야 이해가 쉽다. 물론 이 책에는 그림이 풍부하다.

요즘 보는 첨저선과는 다른 평저선인 이유가 있다. "먼저 지리적 조건이다. 서해와 남해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크다. 그래서 배가 만조시에는 물에 떴다가도 간조시에는 물이 빠진 바닥에 앉앗 좌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은 동해에서도 양항이 없으므로 배를 사용치 않을 때에는 풍랑을 피해 연안 뭍에 끌어올려 두지 않을 수 없다. 이른 바 배의 비치 랜딩이다."
조선 세종 16년에 남중국식 갑조 첨저선으로 개혁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16년 뒤인 문종 원년에는 다시 전통적인 방식으로 복귀했다고 한다. 이는 무엇보다 재질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 같다. 한국은 전형적으로 육송만을 썼다. 아주 단단한 장점이 있는 반면 구부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 장점을 살렸다. 쇠못을 쓰지 않고 나무못을 쓰면서 수시로 수리를 했다. 나무못은 빼면 바로 분해 조립이 가능하다. 그러나 쇠못을 쓰면 뺄 수가 없다. 그냥 썩으면 썩는대로 방치할 수밖에 없다.
<경국대전>에는 배의 수리 연한까지 규정하고 있다. 8년, 14년에 수리하고 그 수명은 20년이라는 것이다. 정말 <경국대전>엔 별 것을 다 규정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긴 당시 배는 지금처럼 흔하지 않고 국가의 중요한 자원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일본배와 한선을 비교한 것도 재미있다. 임진왜란에서 수군의 승리도 바로 배의 차이에서 생긴 것도 있다.
우선 한선은 왜선에 비해 외판이 두껍다. 때문에 왜선에 비해 느리긴 하나 충돌전에서 강하다. 거북선은 바로 이 충돌을 주무기로 삼았다. 특히 일본배는 삼나무, 한선은 소나무였으니, 게다가 두께의 차이도 있으니 일본배가 파괴되는 것은 당연하다.
노도 왜선은 1인 1노인 반면 한선은 1노에 5명이 달라 붙는다. 여기서 주의할 것 중 하나는 복원 거북선의 노이다. 서양학자의 분석에 따르다 보니 한국식 노가 아니라 서양식 노로 복원했다고 한다. 한국식 노는 아래로 내리꽂아 젓는다. 서양식 oar가 아니다.
돛은 한국 배가 둘, 일본 배는 하나다.
특히 임란 때 주로 활약한 판옥선의 장점은 더욱 크다. 판옥선은 명종 10년(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그를 계기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본래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다. 해전도 백병전이다. 배로 접근하여 적의 배에 올라서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다. 칼싸움에 조선이 밀린다. 그러니 조선은 배를 붙이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이순신은 주로 함포 사격으로 끝을 냈다. 물론 거북선처럼 접근전을 벌일 때는 왜병이 거북선에 올라와도 소용 없게 지붕을 덮고 그 위에 송곳을 꽂아 놓는 방식을 썼다. 적의 장점을 알았기에 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북선의 기본 바탕이기도 했던 판옥선. 그 판옥선의 장점을 보자. 우선 전투원과 비전투원(격군)을 갈라 놓아 혼선이 없게 했다는 점이다. 노를 젓는 격군은 오로지 노 젓기에만 몰두 할 수 있었다. 판옥선 정원이 164-194명인데 그 중 격군이 100-120에 달했다고 한다. 그 만큼 전투선은 속도가 중요하기에 격군이 많다.
판옥선의 뛰어난 두번 째 기능은 높은 곳에서 적을 내려다 보며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층 높이가 더 높으므로 왜병이 옮겨 탈 수가 없다. 창으로 공격하려고 해도 한 참 높다.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순신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 외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있다. 우리는 왜구만을 문제 삼는데, 사실 우리 쪽에서 일본에 가서 노략질 했던 경우도 있다. 소위 '신라 해적'이 일본 기록에는 많이 등장하는 모양이다(145쪽).
몽골의 일본 정벌 때 고려 배는 중국 배와는 달리 태풍 속에서도 많이 건재했다는 점도 처음 읽는 대목이다. 튼튼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여진 해적 이야기도 특이하다. 물론 주강현의 책에서도 이 점을 보긴 했다. 고려 시대에 여진해적이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강릉,삼척, 경주까지 침입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일본 대마도, 이키, 규슈까지 침략했다는 것이다. 여진은 말만 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그 만큼 전통시대 바다는 여러 세력에게 열려 있었다는 의미겠다.

이렇게 우리 배의 역사를 대충 살폈다. 제주의 배가 등장하지 않아 아쉽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래도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긴 하다. 그것만으로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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