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김두식, <헌법의 풍경-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교양인, 2004.

지난 주엔 몹씨 아팠다. 온 몸이 짜개지는 듯 구석구석까지 고통스러웠다. 쿤달리니 현상이라는 한주훈 선생님의 진단에 위로를 얻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처럼 분명 원인은 있을 것이다.
더위,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무래도 1학기 동안의 과로 같다. 4시간 수면으로 계속된 생활이 몸을 많이 축나게 했다.
그래서인가 지난 주에는 방학을 시작했음에도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이 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내겐 지금 이것이 절실히 필요할지도 모른다.

오늘부터 워밍업이다. 그나마 에어컨 공기가 그래도 견딜만한 제주대학교 도서관을 찾았다.
그동안 읽고 있던 <바가바드 기타>가 중반에 이르면서 조금 지겨워졌다. 왠만하면 끝까지 읽고 바꾸려고 했지만, 어차피 경전은 꾸준히 읽는 게 좋겠다 싶어 매일 읽기로 하고 책을 바꿨다.

김두식의 책 <헌법의 풍경>이다.김두식, 내가 그를 접한 건 한겨레 신문 칼럼에서다. 젊었다. 대충 내 또래, 아니면 그 밑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디서 들을 소문에 의하면 고대 법대 출신이라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연고주의를 강렬하게 비판하는 나이지만 왠지 학교 다닐 때 한 번쯤은 본 사람 같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물론 중요한 건, 김두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의 글이었다.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항상 간직하면서도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단호한 목소리를 내는 그 사람, 알고 보니 중증 기독교 환자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그의 균형잡힌 사상이 매력적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가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연히 주문해 쌓아놨고, 이제 방학을 맞아 그 책을 손에 들었다. 그리곤 단숨에 읽었다.
읽고 나서 "그래 이런 착한 사람이 있는 한, 좌절하지 말자. 사회에 대한 애정을 놓치지 밀자" 뭐 대충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검사 출신 법대 교수로서(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3류 교수'이지만), 한국사회 법조계의 문제를 아주 신랄하면서도 따스하게 지적해 놓은 책이다. 그건 그의 종교적 심성, 그리고 약자에 대한 배려, 이런 것들이 바탕에 깔려서 그랬던 것 같다.
"남을 비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남을 비판한 그 잣대로 내가 비판받으리라는 것은 꼭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매일의 일상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라는 구절에서도 그의 세심하고 착한 심성이 읽힌다.

'국가란 이름의 괴물'에서 그가 절절히 외치는 법조인들의 사명감을 보았고, '법률가의 탄생'에서는 특권화되어가는 법률가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목격햇다. 하지만 '똥개 법률가의 시대'는 그런 비감보단 희망을 이야기 한다. 그래, 확실히 젊다. 한껏 공감하고 싶다.

이런 사람이 몇 사람만 더 있어도, 우리 사회가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을 터이니데. ......... 몇몇 법조인 친구들을 생각한다. 그 놈들한테 이 책이나 선물로 보내줄까.

끝없는 자기 성찰이 아름답다. 공범이 되지 않기 위해 항상 사회의 거울에 비춰보는 그의 자세, 물론 이것이 그를 더 이상 '현직'에 머물지 못하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건 현직 검사의 직을 때려쳤을 때, 어머니와 아내가 가장 기뻐하더라는 대목이다. 정말 가족은 비슷한 심성을 가질 때 행복할 것이다. 아마도 부모나 아내 역시 훌륭한 사람들일 게다.

법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지만, '나는 왜 법대에 갔을까?'라는 사적인 이야기가 나를 잡아 끌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경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불혹의 나이에 여전히 헷갈려하는 나에게 작게나마 길잡이 구실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만 해도 그렇다. "법률가의 길이라고 하는 '생존을 위한 현실적 목표'와 읽고 싶은 책이라고 하는 '오늘의 즐거움' 사이에서 끝없는 갈등에 빠"졌다는 이야기나, "도저히 돈 되는 쪽 과목들을 수강해낼 자신이 없었으므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요. 한번 궤도를 이탈해보고 나니 '남과 다르게 사는 자유'를 알게 되었고, 그 자유에 기초한 선택은 이전보다 훨씬 수월했습니다. 마침내 좀 거칠더라도 '읽어야 할 책' 대신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길로 걷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라는 구절은 무너진 나의 정신에 기쁨을 주었다.
미세하게 진동하는 나침반의 침처럼, 그렇다 하는 생각을 한다. 끝없이 흔들거려야 한다. 그래야 망가지지 않는다. 긴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책으로나마 김두식을 만나서 기쁘다. 이런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쉬 좌절을 말해서는 안되겠다 싶다.
젊은 벗이여, 그대의 그 따스함은 그 어떤 강철보다 강해 보인다. 고마운 젊은 벗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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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산업 - 홀로코스트를 초대형 돈벌이로 만든 자들은 누구인가?
노르만 핀켈슈타인 지음, 신현승 옮김 / 한겨레출판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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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노르만 핀켈슈타인, <홀로코스트 산업>, 한겨레신문사, 2004.


조숙했었나? 내가 영화를 좋아한 건 좀 빠르다. 중학생 때 장미희 주연의 그 유명한 영화 <겨울영화>를 볼 정도였으니. 물론 미성년자 관람불가다. 허긴 그 때 이미 깬 놈들은 나보다 더 일찍 그런 심미안(?)을 갖추고 있었다.

근데, 난 지금은 거의 영화를 보질 않는다. 언제부턴가 싫어졌다. 영화가 내게 스트레스를 줬기 때문이다. 그건 영화가 삶의 진실을 보여주기 보단 오히려 왜곡하고 은폐하고 있다는 생각을 들면서부터다.

유태인 학살을 다룬 영화, 그 유명한 <쉰들러 리스트>도 보질 않았다. 정성일의 영화평을 읽어보니 안 봐도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 시끄럽게 만드는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 역시 마찬가지다. 볼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뻔할 것 같다. 사람들이 실없이 몰리는 그런 영화에서 얻을 건 상술 이외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같은 유태인 학살을 다룬 영화이면서도 <인생은 아름다워>, 그것은 달랐다. 글쎄, 어린 아이가 주요 화소가 되어서일까? 확실히 그 작품은 삶의 진지함을 보여 줬다.

그 느낌 좋았던 영화가 최근 한겨레에서 낸 책 <홀로코스트 산업>광고 카피에 잠깐 등장하기에 그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고 감동 받았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또 다른 관점에서 고민해보라는 그런 내용이었다.

사실 내가 이 책을 고른 건, 꼭 그것만은 아니다. 삶의 치열함을 다루는 소재가 흔히 연애 장난으로 분칠될 때, 역사공부하는 나로서는 화가 치밀었고, 그런만큼 우리 현대사가 장사속에 놀아날 때, 그 때 느꼈던 심정을 이 책은 비슷한 맥락으로 나를 정히해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랬다. 홀로코스트은 이미 희생 그 자체로 끝난 게 아니었다. 사실 빈곤한 생존자들은 들러리에 불과했다. 홀로코스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신화를 조작해 윤리적 자본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당성, 부를 쌓아가는 못된 인간들에 대한 고발이자 기록이었기에 울림이 컸다.

홀로코스트는 이제 신화다. 신비화되고 성역화되었다. 그걸 건드는 놈은 죽일 놈이다. 그러니 이건 무소불의의 권력이 된다. 그 중심엔 미국거주 유대인과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미국정권이 있다.

미국은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인디언 학살, 흑인 학살, 한국전쟁에서의 학살, 베트남에서의 학살에 대해선 애써 눈을 감는다. 그러면서 유대인 학살만을 문제삼는다. 그건 그것을 들이밀며 그들의 부도덕에 면죄부를 만들려 했기 때문이다.

이미 유대인은 희생자다. 이건 하늘이 내린 유일 진리다. 그러니 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다.

기억을 부 축적의 도구르 삼는 무서운 놈들, 이게 바로 홀로코스트 산업의 본질이다.

솔직히 말하자. 내가 이 책을 손에 쥔 건, 4.3의 타락 때문이다. 제주MBC와 제민일보가 일주일 간격으로 4.3평화국제 마라톤 대회를 연다. 이미 4.3은 현대사의 비극이 아니다. 그것으로 권력을 다지려는 기득권층의 도구일 뿐이다. 홀로코스트 산업과 본질상 다르지 않다.

독립운동가들은 무대에서 초라하게 퇴장하고 그 주변에서 서성거리던 놈, 혹은 그들을 잡아가던 친일파들이 주류로 등장한다. 이제 4.3도 그꼴이 되는 건가. 타락하는 4.3이 걱정된다.

홀로코스트 산업은 미국에민 있는 게 결코 아니다.
2004. 3. 4에 끄적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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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내가 있었네 (양장) - 故 김영갑 선생 2주기 추모 특별 애장판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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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갑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휴먼 앤드 북스, 2004.

삶 전체를 던져 구도자의 모습으로 사진 작업을 하던 김영갑, 그가 루게릭 병을 얻고 절망 이후의 희망을 만들어가며 내 놓은 책이다. 사진 작가의 사진책임에도 나는 사진 보다 그의 글을 읽었다. 단숨에 읽었다. 동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빰위로 내리는 그것을 쉽게 닦아내지도 못했다.
그림으로 이야기하던 그가 글로 말을 했다. 물론 사진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진이 전혀 주는 느낌에 차분히 감염되기 전에 글 그 자체가 나를 감전시켰다.

이 시대에도 진정한 예술혼을 가진 사람이 있었구나. 짝퉁만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 그의 존재가 그 자체로 신성해 보였다. 책 말미에 안성수 교수가 쓴 글에서 처럼 신은 어이하여 그에게 이런 시련을 내린 걸까.

김영갑, "모두에게 인정받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인정받는 게"라는 말을 하는 사람, 나는 어떤가? 중심이 나 자신의 단전에 가 있는가, 아니면 주변 사람의 눈 속에 가 있는가?
경지가 달리 있는 게 아니다.

제주에 김영갑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허나 제주사람들은 한 동안 그를 경계했던 모양이다.
"제주에서 몇 차례 사진전을 열 때마다 나는 뭍의 것으로 분류됐다. 간혹 신문에 실린 전시회 기사를 보면 나는 섬에 머무르며 사진을 하는 사람으로 소개가 된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사람으로 그려진다."
괜히 미얀타. 과연 누가 제주사람인가? 김영갑만치 제주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 흔한가? 혈통이 중요한 게 아니다. 어느 만큼 제주를 아끼느냐 하는 데 있다.

어쨌거나 타들어가는 육신을 생각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그의 희망대로 "사람 능력 밖의 세계"를 믿을 뿐이다. "길 끝에서 또 다른 길을 만나"길 바랄 뿐이다.
혼, 삶을 오롯이 바친 예술가, 구도자의 모습을 다시 한 번 깊이 고민케 한다.

2004. 3. 2. 학교에서 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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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충돌
새뮤얼 헌팅턴 지음, 이희재 옮김 / 김영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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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Huntington, {문명의 충돌}, 이희재 역, 김영사, 1997.

<서구 우월적 편견에 의해 과장된 문명론: 새로운 인종주의 조장을 경계한다.>

1. 문명대전(文明大戰)의 전초전?
지난 8월 7일 탄자니아와 케냐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연쇄 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하였다. 테러범 색출 작업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수단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수단과 아프가니스탄은 물론이고 이라크, 말레이시아, 시리아 등이 이 공습을 '이슬람 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의 침략'이라고 규정하고 보복을 약속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사람들은 새뮤얼 헌팅턴이 이야기하는 '문명의 충돌'을 떠올린다. 미국과 이슬람의 이 분쟁이 실제로 미래의 문명대전(文明大戰)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일까?

2.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학자이자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현실 정치인인 새뮤얼 헌팅턴은 탈냉전 시대의 세계 정치의 성격을 규명하는 시도로 이 책을 썼다. 냉전시대의 세계질서가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되었다면, 탈냉전 시대의 세계질서는 문명에 의해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 논지이다. 즉 세계를 움직이는 단위로서 1백84개의 민족국가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의미 있는 단위는 8∼9개의 문명권이라는 것이다.
문명권을 기본 개념으로 하는 문명 정치론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유고내전을 꼽을 수 있다. 이 곳에서의 복잡한 연대와 대결 구도는 다름 아닌 종교와 문명을 기준으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헌팅턴의 주장이다. 냉전 시대에는 억제되었던 문명간의 갈등 요인들이 이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주목하는 문명의 단위는 기독교, 이슬람, 유교, 힌두교, 정교, 불교, 일본,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문명으로 모두 아홉 문명권이다.
그의 패러다임은 현대가 정체성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시대이며, 동시에 문명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놓고 문명의 단층선에서 갖가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이슬람 문명과 서구 문명 사이에 '피 묻은 경계선'이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3. 우려와 비판
풍부와 자료와 현상을 꿰뚫는 통찰력은 세계 정세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분명 이 점은 그의 업적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러한 요인만이 그를 주목하게 하였을까? 현실 사회주의 붕괴로 인한 지적 공백에 감각 빠른 동작으로 문명론이 끼어들어 온 것은 아닐까?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강조나 제 3 세계의 발전을 인정한 모습 등이 주변부의 좌절한 지식인들에게 위안으로 다가온 것은 아닐까? 그리고 서구의 경우 성장하는 아시아와 이슬람에 대한 불안감이 그의 논리에 의해 과장되면서 공동의 위기감으로 다가와 그들을 결속시킨 것은 아닐까?
냉전의 종언과 함께 문화의 정치화가 전면에 등장하고 문화의 귀속의식이 분쟁의 진원지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문제 의식의 바탕에는 예전의 문화제국주의가 그랬듯이 서구문화와 근대화 그리고 보편주의의 오만한 삼위일체가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다. '호전적 이슬람주의'라는 표현이 너무 쉽게 등장하고 있으며, 아시아와 이슬람의 성장이 세계 정치에 심각한 불안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는 시각이나, 서구적 또는 기독교적 국가가 민주화를 빨리 이루어 낸다는 등의 언급은 그의 서구 중심적 편견을 잘 보여준다. 그러기에 그의 문명권 구분은 오히려 탈 식민 시대에 새로운 인종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는다.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과 관계하는 문명의 단층은 피묻은 경계선이 설정된다고 하지만,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군사 개입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 유교-이슬람 무기 커넥션을 이야기 하지만, 전 세계에서 무기 판매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또한 미국이다.
이러한 서구적 편견 이외에도 우려가 되는 부분이 있다. 비록 헌팅턴 자신이 의도하진 않았을지라도 의혹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정치, 경제적 상황과 무관하게 단순히 문명에 의한 대립을 설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는 또 하나의 서구 지배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 즉 사회주의 붕괴로 동반자를 잃은 서구의 군산복합체가 또 다른 가상의 위기를 창출하며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나섰다고 가정해 볼 수도 있다. 여기에 이용되는 것이 바로 비서구 문명 특히 이슬람 문명이다. 결국 문명충돌론은 서구세력이 십자군 전쟁 패배 이래로 형성된 이슬람에 대한 열등감을 교묘히 조작해, 이슬람을 악의 세력으로 설정하고 세계평화를 위한 개입이란 명분으로 새로운 침략, 새로운 지배에 활용할 면죄부가 될 수도 있다. 즉 이데올로기 시대에서 반서구적인 것이 소련의 공산주의였다면 이제는 반서구적인 것의 대명사로 이슬람이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문명 중심적 논리는 과장된 측면이 많다. 아직도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동력은 문명이 아니라 국가 이익이다. 물론 문명이 냉전시대에 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과장되어서는 안된다. 여전히 남한은 북한보다 혈맹(?)인 미국과 가까우며, 유고내전에서 미국은 이슬람을 후원하면서 실리를 추구했다.

4. 문명의 공존을 위하여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헌팅턴류의 담론을 비판한다. 그러나 그는 서구인들이 오리엔탈리즘을 만들었다고 해서, 우리가 역으로 옥시덴탈리즘으로 대항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피묻은 경계선에 대한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문화에 대한 상호 이해와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상호 인정이다. 헌팅턴은 이 점에서도 보수적이다. 즉 그는 미국 내에서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해서는 위험하다고 이야기하며 기득권 옹호를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야말로 '충돌'을 부르는 위험한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취한 경제적 이득만큼 히스패닉의 다양한 문화도 껴안아야 한다. 문명의 충돌을 피하고 문명의 공존을 모색하는 길은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 즉 인류애에 기초하여 동.서를 초월하는 진정한 보편주의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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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이후 당대총서 7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강문구 옮김 / 당대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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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llerstein, {자유주의 이후}, 당대, 1996.

<자유주의 이후의 과학과 실천 - '성장'의 신화를 넘어 '평등'의 유토피아로>

현대 사회의 위기를 진단하는 여러 이론들 중에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적 시각은 독특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한동안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제 3세계의 저발전을 설명하는데 유효하게 활용된 까닭에 상대적으로 월러스타인의 중심부-주변부 이론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다른 대안을 찾도록 했고, 이런 과정에서 다시 그의 이론은 관심을 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다른 이론들처럼 현실의 모순을 자본주의-사회주의의 대립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보다 더 폭이 넓은 분석 단위인 '자유주의'를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다른 저서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라는 책의 부제가 이야기하듯 그는 계속해서 19세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라는 개념도 그의 이러한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즉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는 외피만 달리 했을 뿐, 궁극적으로는 경제발전 신화에 매달린 같은 이데올로기라는 주장이다. 이제 자유주의는 위기에 몰렸고 세계체제는 이행에 접어들었다. 그 이후는 무엇일까?

세계체제론을 이야기하는 월러스타인은 프랑스 혁명을 새롭게 해석한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에서 만들어진 상황에 대한 대응으로 출발한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를 언급한다. 그리고 그는 이들이 궁극적으로는 한가지인 자유주의이며,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실질적으로 움직여온 지리문화라고 규정한다. 그는 이 자유주의의 전성기를 윌슨과 레닌으로 상징되는 1917년부터 1968년 세계혁명, 그리고 그의 연속인 1989년 사회주의 붕괴까지로 설정한다. 반제민족해방의 레닌과 민족자결주의의 윌슨의 교리는 결코 다른 것이 아니며, 이는 본질적으로 발전주의의 신화를 강제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두 축이라는 것이다. 냉전을 통해 소련과 미국은 서로 '따라잡기' 게임을 벌이게 되었고 또 이 게임을 3세계 국가에게도 강요하는 메커니즘으로 인해 모든 '국가'들은 경제성장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헤게모니와 구좌파의 혁명에 대한 배신에서 발생한 세계체제 차원의 경쟁은 전세계적으로 큰 반발을 부르게 된다. 다양한 목소리로 터져 나온 1968년 세계 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1989년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68년 혁명의 연속으로서 자유주의 몰락을 확정한 것일 뿐, 결코 자유주의의 승리가 아닌 것이다. 결국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내걸었던 영원한 진보, 개발, 발전 논리의 파산을 완벽하게 폭로한 것일 뿐이다. 현실사회주의를 세계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분석한 것은 그의 탁월한 통찰력이다. 외형적인 대립일 뿐 미.소가 서로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과 양자의 기초가 되고 있는 사상이 전혀 다르지 않음을 읽어낸 것은 기존의 해석과는 분명 다른 그의 뛰어난 분석이다. 그리고 그는 자본주의의 자체 모순 때문에 현실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이 체제는 이제 이미 위기를 맞았으며, 이행기에 들어섰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그의 이행론은 신중하다. 역사적 필연을 배제하고 우리들의 선택을 이야기한다. 기존의 불평등에서 이득을 얻는 세력은 '통제된 이행'으로 인류사회에 더욱 어두움을 던져줄 수 있다고 그는 경고한다. 그리고 냉철함과 공상력을 결합해 시급하게 미래를 준비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가 구상하는 준비는 다음과 같다.
먼저, 과부하 전략이다. 각 생산과정에서 잉여의 충분한 몫을 확보함으로써 자본축적에 타격을 가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더 많은 민주주의 요구를 내세워야 한다. 그리고 신비화된 원자로서가 아니라 무수한 집단을 토대로 한 새로운 보편주의, 새로운 사회성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는 '집단'이 중요하다. 反적자생존적이며, 非배제성을 띤 그리고 비통일적 형태의 더 높은 집단화, 反민주집중제의 그러한 집단이 필요하다. 국가의 역할도 전술적 단계에서는 필요하다. 물론 과거처럼 권력 쟁취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며 일국적 차원의 운동은 성공할 수 없다. 전세계 다양한 집단의 비통일적 . 유기적 지식인의 연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의 대안이 어느 만큼 실천적 힘을 가질 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과부하 전략은 생존의 문제가 눈앞에 있는 노동자들에게서부터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현실의 세계체제가 국가 단위로 진행되고 있는 한 그 전략의 수행은 제 3 세계 국가들 간에 하층과 최하층의 자리바꿈만을 가져올 뿐이다. 또 그의 '집단'은 뒤르켕이 말한 '직업집단'을 연상케 할 정도로 관념적이다. 그리고 그가 시종일관 비판해 온 '19세기 보편주의'와 그가 대안으로 이야기한 '새로운 보편주의'가 무엇이 다른 지도 명확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보다 '평등'을 중시하는 그의 진지한 자세와 조만간 주변부에서 중심부로의 억제하지 못할 인구 이동을 예측하는 모습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패러다임이 달라진 만큼 분석의 잣대도 달라 함부로 재단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19세기의 낡은 도구가 여전히 무용지물이 아닌 바에야 위의 비판을 제외하고도 의문은 계속된다. 그 중 제 3 세계의 입장, 아니 구체적으로 우리의 입장에서 살펴보자. '레닌주의와 윌슨주의의 본질적 동질성'은 그의 패러다임을 벗어나기만 하면 문제가 많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구체적으로 1917년이 아니라 1919년에 발표되었고 또 그 목적 자체가 패전국의 식민지를 독립시켜 패전국 독일의 힘을 약화시키고 그 식민지를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고자 한 기만책인 바, 레닌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19세기의 눈으로 21세기를 통찰하는 안목을 함부로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한다면 이런 것은 어떨까. 학문에 있어서의 패러다임의 전환만이 아니라 세계관, 가치관의 완전한 전환, 즉 궁극적으로 인간을 파멸시킬 수밖에 없는 '성장', '경쟁', '발전'의 세계관에서 反성장의 세계관으로의 전환, 다시 말해 도교적 가치나 불교적 윤회관에 입각한 생태환경적 세계관으로의 전세계적 전환 말이다. 이것 역시 관념적인 발상일지라도 발전주의에서 파생된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그 역을 상정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매 논문마다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새로운 이행을 긴장 속에서 준비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한다. 그만큼 그는 가치 중립적 지식인이라기 보다, 인류의 미래를 우려하는 실천적 지식인이다. 평자의 섣부른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월러스타인 만큼 예측하며, 준비하는 사람이 어디 그리 많은가? 포스트모던적인 무책임도 아니며, 맑시스트의 근거 없는 낙관과도 다른 그의 입장은 신중한 준비를 주문하고 있다. 그에게 더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을 타인에게 맡기는 의존성이다. 그는 어느 논문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관념적이고 무책임한 지식인을 질타한다.

나는 소용돌이 속의 삶에 관해서 본질적으로 두 가지를 얘기해왔다. 먼저 자신이 어느 해변으로 헤엄쳐갈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지금 곧 해야 할 자신의 노력이 그 방향으로 향하는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그보다 훨씬 더 정확한 것을 원한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발견할 수도 없고, 또 그것을 찾는 동안에 물에 빠져버릴 것이다.

그렇다. 물에 빠지기 전에 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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