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충돌
새뮤얼 헌팅턴 지음, 이희재 옮김 / 김영사 / 199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S. Huntington, {문명의 충돌}, 이희재 역, 김영사, 1997.

<서구 우월적 편견에 의해 과장된 문명론: 새로운 인종주의 조장을 경계한다.>

1. 문명대전(文明大戰)의 전초전?
지난 8월 7일 탄자니아와 케냐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연쇄 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하였다. 테러범 색출 작업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수단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수단과 아프가니스탄은 물론이고 이라크, 말레이시아, 시리아 등이 이 공습을 '이슬람 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의 침략'이라고 규정하고 보복을 약속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사람들은 새뮤얼 헌팅턴이 이야기하는 '문명의 충돌'을 떠올린다. 미국과 이슬람의 이 분쟁이 실제로 미래의 문명대전(文明大戰)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일까?

2.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학자이자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현실 정치인인 새뮤얼 헌팅턴은 탈냉전 시대의 세계 정치의 성격을 규명하는 시도로 이 책을 썼다. 냉전시대의 세계질서가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되었다면, 탈냉전 시대의 세계질서는 문명에 의해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 논지이다. 즉 세계를 움직이는 단위로서 1백84개의 민족국가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의미 있는 단위는 8∼9개의 문명권이라는 것이다.
문명권을 기본 개념으로 하는 문명 정치론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유고내전을 꼽을 수 있다. 이 곳에서의 복잡한 연대와 대결 구도는 다름 아닌 종교와 문명을 기준으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헌팅턴의 주장이다. 냉전 시대에는 억제되었던 문명간의 갈등 요인들이 이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주목하는 문명의 단위는 기독교, 이슬람, 유교, 힌두교, 정교, 불교, 일본,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문명으로 모두 아홉 문명권이다.
그의 패러다임은 현대가 정체성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시대이며, 동시에 문명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놓고 문명의 단층선에서 갖가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이슬람 문명과 서구 문명 사이에 '피 묻은 경계선'이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3. 우려와 비판
풍부와 자료와 현상을 꿰뚫는 통찰력은 세계 정세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분명 이 점은 그의 업적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러한 요인만이 그를 주목하게 하였을까? 현실 사회주의 붕괴로 인한 지적 공백에 감각 빠른 동작으로 문명론이 끼어들어 온 것은 아닐까?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강조나 제 3 세계의 발전을 인정한 모습 등이 주변부의 좌절한 지식인들에게 위안으로 다가온 것은 아닐까? 그리고 서구의 경우 성장하는 아시아와 이슬람에 대한 불안감이 그의 논리에 의해 과장되면서 공동의 위기감으로 다가와 그들을 결속시킨 것은 아닐까?
냉전의 종언과 함께 문화의 정치화가 전면에 등장하고 문화의 귀속의식이 분쟁의 진원지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문제 의식의 바탕에는 예전의 문화제국주의가 그랬듯이 서구문화와 근대화 그리고 보편주의의 오만한 삼위일체가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다. '호전적 이슬람주의'라는 표현이 너무 쉽게 등장하고 있으며, 아시아와 이슬람의 성장이 세계 정치에 심각한 불안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는 시각이나, 서구적 또는 기독교적 국가가 민주화를 빨리 이루어 낸다는 등의 언급은 그의 서구 중심적 편견을 잘 보여준다. 그러기에 그의 문명권 구분은 오히려 탈 식민 시대에 새로운 인종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는다.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과 관계하는 문명의 단층은 피묻은 경계선이 설정된다고 하지만,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군사 개입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 유교-이슬람 무기 커넥션을 이야기 하지만, 전 세계에서 무기 판매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또한 미국이다.
이러한 서구적 편견 이외에도 우려가 되는 부분이 있다. 비록 헌팅턴 자신이 의도하진 않았을지라도 의혹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정치, 경제적 상황과 무관하게 단순히 문명에 의한 대립을 설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는 또 하나의 서구 지배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 즉 사회주의 붕괴로 동반자를 잃은 서구의 군산복합체가 또 다른 가상의 위기를 창출하며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나섰다고 가정해 볼 수도 있다. 여기에 이용되는 것이 바로 비서구 문명 특히 이슬람 문명이다. 결국 문명충돌론은 서구세력이 십자군 전쟁 패배 이래로 형성된 이슬람에 대한 열등감을 교묘히 조작해, 이슬람을 악의 세력으로 설정하고 세계평화를 위한 개입이란 명분으로 새로운 침략, 새로운 지배에 활용할 면죄부가 될 수도 있다. 즉 이데올로기 시대에서 반서구적인 것이 소련의 공산주의였다면 이제는 반서구적인 것의 대명사로 이슬람이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문명 중심적 논리는 과장된 측면이 많다. 아직도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동력은 문명이 아니라 국가 이익이다. 물론 문명이 냉전시대에 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과장되어서는 안된다. 여전히 남한은 북한보다 혈맹(?)인 미국과 가까우며, 유고내전에서 미국은 이슬람을 후원하면서 실리를 추구했다.

4. 문명의 공존을 위하여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헌팅턴류의 담론을 비판한다. 그러나 그는 서구인들이 오리엔탈리즘을 만들었다고 해서, 우리가 역으로 옥시덴탈리즘으로 대항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피묻은 경계선에 대한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문화에 대한 상호 이해와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상호 인정이다. 헌팅턴은 이 점에서도 보수적이다. 즉 그는 미국 내에서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해서는 위험하다고 이야기하며 기득권 옹호를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야말로 '충돌'을 부르는 위험한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취한 경제적 이득만큼 히스패닉의 다양한 문화도 껴안아야 한다. 문명의 충돌을 피하고 문명의 공존을 모색하는 길은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 즉 인류애에 기초하여 동.서를 초월하는 진정한 보편주의가 되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