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이후 당대총서 7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강문구 옮김 / 당대 / 1996년 8월
평점 :
품절


. Wallerstein, {자유주의 이후}, 당대, 1996.

<자유주의 이후의 과학과 실천 - '성장'의 신화를 넘어 '평등'의 유토피아로>

현대 사회의 위기를 진단하는 여러 이론들 중에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적 시각은 독특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한동안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제 3세계의 저발전을 설명하는데 유효하게 활용된 까닭에 상대적으로 월러스타인의 중심부-주변부 이론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다른 대안을 찾도록 했고, 이런 과정에서 다시 그의 이론은 관심을 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다른 이론들처럼 현실의 모순을 자본주의-사회주의의 대립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보다 더 폭이 넓은 분석 단위인 '자유주의'를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다른 저서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라는 책의 부제가 이야기하듯 그는 계속해서 19세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라는 개념도 그의 이러한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즉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는 외피만 달리 했을 뿐, 궁극적으로는 경제발전 신화에 매달린 같은 이데올로기라는 주장이다. 이제 자유주의는 위기에 몰렸고 세계체제는 이행에 접어들었다. 그 이후는 무엇일까?

세계체제론을 이야기하는 월러스타인은 프랑스 혁명을 새롭게 해석한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에서 만들어진 상황에 대한 대응으로 출발한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를 언급한다. 그리고 그는 이들이 궁극적으로는 한가지인 자유주의이며,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실질적으로 움직여온 지리문화라고 규정한다. 그는 이 자유주의의 전성기를 윌슨과 레닌으로 상징되는 1917년부터 1968년 세계혁명, 그리고 그의 연속인 1989년 사회주의 붕괴까지로 설정한다. 반제민족해방의 레닌과 민족자결주의의 윌슨의 교리는 결코 다른 것이 아니며, 이는 본질적으로 발전주의의 신화를 강제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두 축이라는 것이다. 냉전을 통해 소련과 미국은 서로 '따라잡기' 게임을 벌이게 되었고 또 이 게임을 3세계 국가에게도 강요하는 메커니즘으로 인해 모든 '국가'들은 경제성장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헤게모니와 구좌파의 혁명에 대한 배신에서 발생한 세계체제 차원의 경쟁은 전세계적으로 큰 반발을 부르게 된다. 다양한 목소리로 터져 나온 1968년 세계 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1989년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68년 혁명의 연속으로서 자유주의 몰락을 확정한 것일 뿐, 결코 자유주의의 승리가 아닌 것이다. 결국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내걸었던 영원한 진보, 개발, 발전 논리의 파산을 완벽하게 폭로한 것일 뿐이다. 현실사회주의를 세계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분석한 것은 그의 탁월한 통찰력이다. 외형적인 대립일 뿐 미.소가 서로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과 양자의 기초가 되고 있는 사상이 전혀 다르지 않음을 읽어낸 것은 기존의 해석과는 분명 다른 그의 뛰어난 분석이다. 그리고 그는 자본주의의 자체 모순 때문에 현실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이 체제는 이제 이미 위기를 맞았으며, 이행기에 들어섰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그의 이행론은 신중하다. 역사적 필연을 배제하고 우리들의 선택을 이야기한다. 기존의 불평등에서 이득을 얻는 세력은 '통제된 이행'으로 인류사회에 더욱 어두움을 던져줄 수 있다고 그는 경고한다. 그리고 냉철함과 공상력을 결합해 시급하게 미래를 준비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가 구상하는 준비는 다음과 같다.
먼저, 과부하 전략이다. 각 생산과정에서 잉여의 충분한 몫을 확보함으로써 자본축적에 타격을 가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더 많은 민주주의 요구를 내세워야 한다. 그리고 신비화된 원자로서가 아니라 무수한 집단을 토대로 한 새로운 보편주의, 새로운 사회성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는 '집단'이 중요하다. 反적자생존적이며, 非배제성을 띤 그리고 비통일적 형태의 더 높은 집단화, 反민주집중제의 그러한 집단이 필요하다. 국가의 역할도 전술적 단계에서는 필요하다. 물론 과거처럼 권력 쟁취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며 일국적 차원의 운동은 성공할 수 없다. 전세계 다양한 집단의 비통일적 . 유기적 지식인의 연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의 대안이 어느 만큼 실천적 힘을 가질 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과부하 전략은 생존의 문제가 눈앞에 있는 노동자들에게서부터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현실의 세계체제가 국가 단위로 진행되고 있는 한 그 전략의 수행은 제 3 세계 국가들 간에 하층과 최하층의 자리바꿈만을 가져올 뿐이다. 또 그의 '집단'은 뒤르켕이 말한 '직업집단'을 연상케 할 정도로 관념적이다. 그리고 그가 시종일관 비판해 온 '19세기 보편주의'와 그가 대안으로 이야기한 '새로운 보편주의'가 무엇이 다른 지도 명확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보다 '평등'을 중시하는 그의 진지한 자세와 조만간 주변부에서 중심부로의 억제하지 못할 인구 이동을 예측하는 모습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패러다임이 달라진 만큼 분석의 잣대도 달라 함부로 재단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19세기의 낡은 도구가 여전히 무용지물이 아닌 바에야 위의 비판을 제외하고도 의문은 계속된다. 그 중 제 3 세계의 입장, 아니 구체적으로 우리의 입장에서 살펴보자. '레닌주의와 윌슨주의의 본질적 동질성'은 그의 패러다임을 벗어나기만 하면 문제가 많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구체적으로 1917년이 아니라 1919년에 발표되었고 또 그 목적 자체가 패전국의 식민지를 독립시켜 패전국 독일의 힘을 약화시키고 그 식민지를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고자 한 기만책인 바, 레닌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19세기의 눈으로 21세기를 통찰하는 안목을 함부로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한다면 이런 것은 어떨까. 학문에 있어서의 패러다임의 전환만이 아니라 세계관, 가치관의 완전한 전환, 즉 궁극적으로 인간을 파멸시킬 수밖에 없는 '성장', '경쟁', '발전'의 세계관에서 反성장의 세계관으로의 전환, 다시 말해 도교적 가치나 불교적 윤회관에 입각한 생태환경적 세계관으로의 전세계적 전환 말이다. 이것 역시 관념적인 발상일지라도 발전주의에서 파생된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그 역을 상정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매 논문마다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새로운 이행을 긴장 속에서 준비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한다. 그만큼 그는 가치 중립적 지식인이라기 보다, 인류의 미래를 우려하는 실천적 지식인이다. 평자의 섣부른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월러스타인 만큼 예측하며, 준비하는 사람이 어디 그리 많은가? 포스트모던적인 무책임도 아니며, 맑시스트의 근거 없는 낙관과도 다른 그의 입장은 신중한 준비를 주문하고 있다. 그에게 더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을 타인에게 맡기는 의존성이다. 그는 어느 논문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관념적이고 무책임한 지식인을 질타한다.

나는 소용돌이 속의 삶에 관해서 본질적으로 두 가지를 얘기해왔다. 먼저 자신이 어느 해변으로 헤엄쳐갈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지금 곧 해야 할 자신의 노력이 그 방향으로 향하는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그보다 훨씬 더 정확한 것을 원한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발견할 수도 없고, 또 그것을 찾는 동안에 물에 빠져버릴 것이다.

그렇다. 물에 빠지기 전에 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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