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용옥,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 통나무, 1990.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다. 태권도 관련 글을 또 써야만 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 <왜곡과 미화를 넘어 제주역사 다시보기>시리즈로 이 관련 글을 썼던 것인데, 누군가 그걸 주의 깊게 봤던 모양이다. 더 자세히 써 달란다. 사실 더 쓸 것도 없는데. 그럼 형식을 달리 해서 써 달란다. 그러자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김용옥의 책을 다시 읽었다. 전에 그냥 대충 읽었는데, 좀 더 책임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 다시 읽은 것이다. 확실히 재미있다. 요즘이야 누구나 솔직하게 쓰지만 그 시절에 김용옥은 파격이었다. 나로서야 별로 그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의 장점까지 외면할 생각은 없다. 내가 싫어하는 건, 그 특유의 귀족성이다. 나머지는 좋다. 그이 뻥도 사실은 귀엽다. 그래서 나름대로 그의 긍정성을 인정하는 바다.

이 책에서도 얻을 게 많다. 태권도 역사 조작이야 이미 양진방의 논문에서 다 밝힌 것이라 새삼스러울 건 없다. 다만 김용옥은 자신의 경험을 책 속에 많이 넣은 것이 생동감을 더해 준다. 그가 일본 유학시절 가라데를 봤더니 이건 자기가 한국에서 배운 태권도하고 완전히 똑 같더라는 이야기, 그의 충격이 다른 논리적 설득보다 더 호소력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한다면 가라데를 일본의 무술로 말한 것이 아니라, 오키나와 아니 유구국의 무술로 정리한 점, 그것이 1922년 경에 일본화한 것, 그리고 그 오키나와 무술은 당수였는데, 그걸 공수로 바꾼 것. 그건 군국주의화가 강화되어가던 1936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재미있는 건 공수나 당수가 둘 다 일본 발음으로는 가라데라는 점이다. 그랬으니 일본 애들도 잔머리 굴린 것다. 당시 적국이던 당(중국)의 이름을 빼고 빌 공자를 쓰면서도 자연스럽게 발음은 같은 것으로 가져가서 마치 그것이 자신들의 고유무술인 것처럼 사기치는 기술.
우리도 이런 건 잘 배운다. 그래도 한국 태권도가 이젠 가라데의 틀에서 많이 벗어났다. 마징가 제트가 태권브이가 된 것처럼.

철학자 김용옥, 그의 관심 방면이 넓은 게 좋다. 학문은 깊기도 해야 하지만 넓기도 해야하지 않겠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드러운 파시즘 - 시사인물사전 11
강준만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0년 12월
평점 :
품절


강준만 외, <부드러운 파시즘>, 2000, 인물과사상사.

<인간은 왜 그렇게도 쉽게 복종하는가?>




보너스 북으로 무엇을 선택할까 고민했다. 많이, 근데 인물과사상사의 책을 대충 섭렵한 처지라 딱히 고를 게 없는 듯도 했다. 게다가 이 <부드러운 파시즘>은 2000년에 나온 책이라 이미 그 따끈한 맛도 없을 듯 했다. 그래도 그걸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 주제가 당길 것 같아서다.

한동안 임지현, 문부식 류가 주장한 '일상적 파시즘'과 유사할 게 아닌가 걱정도 되었지만, 그들과 다른 코드를 가진 강준만이라 뭔가 다른 게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보니 분명 달랐다. 임지현 류의 일상적 파시즘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그건 자칫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라고 하며 책임 소재의 본질을 흐릴 우려가 있다. 강준만의 부드러운 파시즘은 그것과 다르다. 책임 소재는 분명하다. 다만 그것이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빠져든다는 점이 다르다. 그렇기에 부드럽다고 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우선 파시즘의 원조라고 할 만한 뭇솔리니와 히틀러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들이야 워낙 많이 다뤄지는 인물들이라 특별한 것은 없었다. 물론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이 들지만, 히틀러 뭇솔리니 그 자체도 문제지만 그들을 떠받친 민중들의 심리구조, 그것이 어쩌면 더 큰 문제라는 것 말이다. 물론 이것은 일상적 파시즘과 맥이 통한다.

그런데 그런 심리적 구조를 아주 정확히 분석한 사람은 에리히 프롬이라고 한다. 솔직히 에리히 프롬에 대해 책 표지만을 봤을 뿐, 그에 대해 잘 몰랐다. 근데 이번에 강준만의 글을 통해 그를 접하자 바짝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조만간에 사서 봐야겠다. <소유냐 삶이냐>, <자유로부터의 도피>, <불복종에 대하여> 정도는 꼭 봐야겠다. 그래서 일단 이번 글은 강준만이 골라낸 프롬의 글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압도적으로 강한 권력 속에 해소시켜서 그런 힘과 영광에 참여하려는 것"

그는 대중이 지배를 당하는 데서 느끼는 만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대중이 바라는 것은 강자의 승리요, 약자의 절멸이 아니면 무조건 항복이다."
"파시즘의 공통점은 원자처럼 세분된 개개의 인간에게 새로운 피난처와 안전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이며, 이러한 체제는 소외의 궁극적 결과라고 말한다."
"항상 자신이 무력하고 무의미하다고 느끼도록 돼 있는 개인은 그가 복종하고 숭배해야 하는 지도자, 국가, 조극에 모든 힘을 바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개인은 자유로부터 새로운 우상 숭배로 도피하는 것이다."
"근대인은 아직도 모든 종류의 독재자들에게 자신의 자유를 넘겨주도록 갈망되고 있거나 유혹 당하고 있다. 아니면 기계 속의 하나의 작은 톱니바퀴로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자유를 상실하고 있으며, 잘 먹고 잘 입고있긴 하나 자유인이 아닌 자동인형이 되고 말았다."

정확한 지적이다.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고 자유인인 아니라 자동인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이들은 그러면서도 자기 스스로를 주체적 존재라고 착각하면서 산다. 세상에 대해 다 안다고 말하면서. 그걸 프롬은 이렇게 본질을 밝혀낸다.
"보통 사람은 박물관에 가서 렘브란트와 같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보면 아름답고 인상적인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판단을 분석해 보면 그는 그 그림에 대해 어떤 특별한 내적 반응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림이 일반에게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 그림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우리는 본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아라는 무거운 짐을 제거함으로써 안정감을 얻고자 한다. 어떤 강력한 집단에 소속되거나 그 집단과 동일시 되는 효과를 추구함으로써 무언가 안전하고 포근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며 그게 바로 프롬이 말하는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서 자기를 상실하는 일' 또는 '자유라는 짐에서 벗어나는 일'과 통하는 것이다-이건 강준만의 단 토.
역시 강준만이 붙인 말. "한국인의 다수가 권위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무조건 둥글게 둥글게 사는 게 좋다고 믿는 사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걸 확신하고 그걸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 자기보다 힘이 강한 사람에 대해선 무한대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복종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모두 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프롬. "왜 인간은 그다지도 쉽게 복종하는가? 그리고 불복종하는 것은 왜 그렇게도 어려운가? 스스로 국가나 교회 혹은 일반적인 여론에 복종하고 있는 동안에는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황우석 애국주의에 우르르 편승했던 것이다. 자유인이 아니라 자동인형들, 그들은 무력감과 불안감을 느낀다. 그래서 개인은 자신에게 안전감을 주고 회의로부터 자신을 구해주는 새로운 권위에 쉽게 굴복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빨간 바이러스
진중권 지음 / 아웃사이더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진중권, <빨간 바이러스>, 2004, 아웃사이더.




<부조리한 현실에 날리는 통렬한 비웃음, 그리고 그 이후>

진중권,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의 천재적 머리에는 경탄했지만, 왠지 인간미는 느낄 수 없는 사람, 그렇게 여겼다. 그를 만난 것도 벌써 5년 전인 것 같다. 사람이라는 게 그런가. 글로 만날 때와 달리 실제 직접 만나니 그 역시 피가 흐르는 인간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목사였다는 사실 역시 새로운 충격이었다. 목사 아들이 저렇게도 사람을 잘 긁어대고, 빈정대는가 하는 그런 감정 말이다.

이번 <빨간 바이러스>는 그 동안 그가 각종 매체에 기고했던 글에다 뒤에 몇 꼭지를 더 붙여 펴낸 책이다. 한 마디로 역시 진중권이다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번득이는 기지, 어디서 도대체 저런 생각을 뽑아낼 수 있었을까.

그의 특징은 비웃음이다. 부조리한 현실에, 부조리한 권력과 자본에 아주 시니컬한 비웃음을 날려 버리는 것이다. 이건 김어준식의 통쾌한 똥침과도 다르다. 상대를 아주 무기력하게 만들 정도로 비웃어 버리기 때문이다. 잔뜩 긴장하며 나름의 논리를 대며 한 판 붙을 준비를 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판 전체를 뒤집어버릴 비웃음으로 제압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적이 많다. 소위 운동 진영 안에서도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강준만과도 예전에 책 두 권 분량의 논쟁이 오갔다. 내가 보기에 결국 강준만이 졌다. 왜냐면 그는 진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중권은 진지하지가 않다. 모든 걸 희화시켜 버린다. 그러니 진지하게 폼 잡은 사람은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이번 책도 역시 그랬다. 우선 재미있는 대목을 옮긴다.

최병렬에 대한 비판부분이다. "대체 어느 나라 보수정당의 대표가 남의 국기나 불태우는 맹동주의자들의 과격시위를 거들고 앉았는가? 앞으로 철분 섭취 좀 하셔야겠다."

역시 최병렬이 단식할 때 보냈던 야유. "목숨을 건 비극적인 단식투'쟁'이 이제는 뱃살을 건 우스운 단식투'정'으로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열린우리당은 가진 국민의, 가진 국민에 의한, 가진 국민을 위한 정당"

"타오르는 몸뚱이에서 나오는 절규는 못 들어도 골프장 그린에서 오가는 보수층의 잡담에는 민감하다"

"대한민국처럼 자본주의적인 나라도 없다. 그 징그러움을 인간의 얼굴로 가리려는 최소한의 화장술마저 포기했기 때문이다. 사회가 노골적일 때, 인간들은 천박해진다......자연을 '자원'으로 보는 인간들은 나아가 다른 인간 역시 품위를 갖춘 인격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자원'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 천박한 사고방식을 우리는 정부에서 나서서 권장하고 다닌다......'교육인적자원부'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교육을 담당했다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이렇게 처참할 정도로 무식하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천박함"


"생존권보다 소유권이 더 신성한 우리나라....우리 아이가 앞으로 이런 야수들 틈에 섞여 살아야 한다.....2%정당 어쩌고 하는 비아냥거림을 들으며 내가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알량한 자선 대신에 굳건한 연대를 우리사회의 원리로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끔찍해도 나올 희망이 있다면, 아직 살 만한 곳이다. 그러나 빠져나올 희망이 없다면, 유황불이 없어도 그곳은 곧 지옥이 된다."

"햐, 하나님은 대체 뭐하시는지 모르겠다. 쌔고 쌘 게 천둥벼락인데, 그 중 하나 아껴두었다가 이런 싸가지 없는 말을 하는 종이 있으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치듯이 실시간으로 바로바로 쌔려버리시지."

"잔인함도 익숙해지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 해괴한 당연함을 비로소 잔인함으로 느끼게 해주는 우리 사회의 감수성이다."

"공론의 장을 수호하는 게 소위 지식인의 역살이다. 우리의 지식인들은 상당히 소심하거나 경우에 따라선 기회주의적이다. 이미 200년 전 쉴러는 '지식인은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이 들어야 하는 얘기를 해야 한다'라고 했다. "

"인간에게 남은 길은 두 개뿐. 진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유대의 백성이 되거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빌라도가 되거나...."
-여기선 황우석 애국주의를 외치는 우리 백성들과 방폐장 달라고 외치는 주민들이 떠오른다. 진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그 백성들, 여기도 많다.

"분노가 지나치면 허탈해지는 법. 이 대목에서 참았던 분노가 실없는 웃음이 되어 피식 새어 나온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그 동안 절필했던 내가 다시 사회적 발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끔가끔은 새어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진중권 역시 나중엔 나의 침묵을 정당화하는 글을 쓰고 있다.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보다 공론의 영역, 즉 좌와 우의 차이, 진보와 보수의 차이, 여당과 야당의 차이를 넘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성의 영역을 확보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 공론의 영역이 사라질 때, 어차피 지식인이 할 일은 없어지는 것이다. 공론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지식인이 할 일을 찾다가는 결국 어느 한 편을 들어 권력에 붙은 어용이 되거나, 권력만도 못한 수구가 되기 쉽다."
"또 하나는 매체의 변화다. ....... 인터넷에서 보는 것은 합리적 논증이나 진지한 토론이 아니라, '쪽수'의 물리량을 동원한 힘과 힘의 원초적인 부딪힘이다. "
"오늘날 지식인은 과거에 누렸던 '권위'를 잃어 버렸다. 이것은 진보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논리'의 권위도 사라졌다. 이것은 반동적이다. 오늘날 대중은 과거에 누리지 못한 '힘'을 획득했다. 이것은 진보적이다. 하지만 그 힘은 '논리'로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쪽수의 물리량과 익명성의 보호막 위에 서 있다. 이것은 반동적이다. 하여튼 재미있는 현상이다. 오늘날 인터넷이라는 초현대적인 미디어를 통해 흐르는 것은 논리의 빈곤, 열정의 과잉과 같은 전근대적인 에너지다. 발달한 기술과 미발달한 인성 사이의 간극, 그 간극의 크기만큼 사회는 우주적이다."

고로 지금 내가 이빨로, 글로 할 일은 없다. 당분간 좀 더 침묵 속에서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게 필요하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고민할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벙어리새 - 어느 의용군 군의관의 늦은 이야기
류춘도 지음, 노순택 사진 / 당대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류춘도, <벙어리 새-어느 의용군 군의관의 늦은 이야기>, 당대, 2005.




언제부터인가 허위적 집단, 조직 등의 억압성을 많이 느끼면서, 실존 그 자체에 대한 사색이 깊어져갔다. 요가, 명상, 그리고 선승들의 책을 읽으며 나름대로 새로운 삶의 의미에 접근해 본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삶은 조직 속에, 사회 속에, 역사 속에 있음을 안다. 그래서 긴장도 항시 필요함을 안다. 하지만 그 둘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다. 만해 한용운 같은 사람들이 사회와 개인의 실존, 역사와 수행을 잘 조화롭게 하며 살았던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인가 요번에 치열한 한국전쟁 속에 살아갔던 어느 인민군 군의관의 이야기가 읽고 싶었다. 류춘도, 당시 의과대학생이었던 몸으로 인민군 군의관이 되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 운이 좋아, 주변 사람덕에 지금까지 목숨을 이어왔지만 시대가 바뀌기 전까지 그의 인생 중 청춘의 시절은 금기의 영역이었다. 이제 그 금기를 풀고 말을 쏟아낸 것이다.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책을 덮으며 뭔가 허전했다. 분량이 짧아 빨리 끝내긴 했지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지 내내 허허로왔다. 내가 그에게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사들의 무용담, 패배한 인민군의 애틋함, 아니면 역사의 준엄함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
암튼 그런 많은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류춘도는 아주 담담하게 풀어간다. 물론 내가 기대했던 부분들도 계속 이야기하긴 한다. 하지만 극적이진 않다. 아마 극적이길 바라는 게 나의 심보일 것이다. 그의 삶이 극적이었기에 그 글도 그러길 바랐던 모양이다. 그래야 느슨해진 나의 긴장을 다시 팽팽하게 잡아 당길 수 있을 테니까. 이게 편견이다.

그래도 다 덮고 나서 가만히 있으면 느낌이 없는 게 아니다. 약한 것도 아니다. 상당히 강하다. 오히려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가지 않게 차분하게 풀어 준 게 고맙기도 하다.

근데 그게 유독 류춘도만의 일이었을까. 죽어간 수백만 사람들의 삶도 그러했겠지만,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근근히 생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리라. 근데 왜 그들은 지금 발언하지 않을까. 물론 많은 수가 아닐 것이기 때문에. 아니 그것보다는 삶에 완전히 지쳐버린 게 아닐까. 그 광기의 시대에 살륙과 훅훅 찔러오는 피냄새를 기억하기엔 삶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된 게 아닐까.

나는 처음엔 이 책에서 좀 더 센 자극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류춘도의 이 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하니 쓸데없이 감정이 튀지 않아서 오히려 좋은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분명히 기억한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로 떠났는지"를.

실존적 사색 속에서도 항상 역사 의식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로 떠났는지를 류춘도 만큼은 아니라 할지라도 역사를 공부하는 나는 분명코 잊지 않고 살아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성동 천자문 - 하늘의 섭리 땅의 도리
김성동 쓰고 지음 / 청년사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김성동, <김성동 천자문>, 청년사, 2004.




모든 일에 때가 있다고, 이번 책은 지금 읽을 책이 아니었다. 방학 때 좀 차분해진 시간에 읽어야 할 것을 바쁜 와중에 허겁지겁 읽었다. 그래서 아쉽다. 차분히 하나 하나 읽어야 할 것을....

하긴, 내가 이 책을 읽은 게 다른 상황 때문이다. 덕연이 한자 공부 시킨다고 , 그러러면 나도 역시 좀 참고 자료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해서 고른 책이다. 의도는 빗나갔다. 6살 딸에게 천자문 공부는 무리다. 천자문이라는 게 한자 공부의 입문서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건 옛날 이야기다. 현재의 상황과는 다르다. 지금 천자문을 한자공부 입문으로 삼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나 역시 천자문을 예전에 대충 봤었지, 이번처럼 그나마 꼼꼼히 본 적은 없다. 김성동의 해설을 보면서 읽었더니 이건 완전히 동양 고전을 참고로 만든 4자 성구집이었다. 동양 고전에 대한 기초가 없이는 글자 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할 책이라는 말이다. 논어, 맹자, 대학, 시경, 시전, 그외 사기열전 등 두루 섭렵하고 있어야 그 본 뜻을 찾을 수 있는 책이니 현재 상황에서 한자 공부의 입문서가 되긴 어렵다. 그러다 보니 6살 딸 덕연이 한자 지도 참고자료로서의 역할은 애당초 사라졌고, 그냥 나는 동양 고전의 짜투리를 챙기는 마음으로 읽었다.

우선 김성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점이 수확이다. 김성동, 영화 <만다라>를 본 게 고등학생 시절이었나, 그 때의 기억으로 대단한 작품이다 싶었는데, 그 원작이 김성동의 소설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보통 사람이 아님을 그 때 감잡았는데, 이번 책을 읽으며 그의 가족 내력을 보니 기각 막혔다.

조선시대 큰 벼슬까지 했던 집안(물론 이건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그 벼슬자리를 자랑과 자부와 자존으로 삼으며 지내온 후손들, 그랬기에 병인양요 때 그의 조상은 화약 통 위에 올라가 자결했으며, 그 뒤의 여러 조상들도 꼿꼿한 절개를 지키며 살았다. 그리고 김성동의 큰 아버지는 해방정국에서 처형되어 김성동의 할아버지가 묻었으며 정작 김성동의 아버지는 마찬 가지 그 시절에 잡혀가 사망 날짜마저 모르고 있는 처지였다. 아들 둘을 먼저 보낸 꼬장꼬장한 선비가 김성도의 할아버지다. 김성동은 그 할아버지에게서 5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그 가락이 이 책을 만든 바탕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았던 청소년 시절, 가출과 출가, 그리고 다시 문인으로서의 생활, 이런 게 대충 그의 삶의 과정이다.

이 책은 천자문의 4자 경구를 현재의 상황에 맞게, 그리고 현재의 상황과 연결지으며 나름의 해석과 감상을 적어 놓은 책이다. 앞서 이 책이 동양 고전에서 따온 내용이 많다고 했던 만큼 김성동의 해석도 동양적 냄새가 강했다. 당연히 유교적 가르침이 바탕이지만, 김성동은 그 부분에 대해서 전혀 딴 소리를 하고 있다. 가부장 우월의 이데올로기가 들어간 구절이라는 해설을 달아놓기 일쑤다. 그러나 무의자연의 도교적 사상은 많이 펼쳐 놓았다. 아마 그가 그런 사상에 치우쳐 있는 듯 하다. 하긴 현재 망가질대로 망가진 생태계를 보면서 최소한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게 오히려 문제이겠다. 그것만이 아니다. 극우 민족주의적 냄새도 있다. 환단고기류 말이다. 게다가 엉뚱하게도 주체사상에서 따온 해설도 한 곳에선 써 놓았다. 가히 사상 편력의 범위가 넓음을 알겠다.

내게 많이 다가왔던 건 도교적 사상이긴 하다. 그러나 그건 나도 평소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 공감은 했지만 큰 감동으로 오진 않았다. 그래서 그 보다는 선비의 지조, 절개, 삶의 원칙을 적어 놓은 부분이 더 다가왔다. 다음은 좋았던 구절을 옮긴 것이다.

"책이야말로 이 답답하고 힘겹기만 한 티끌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뗏목"

"자기 자신을 읽을 수 있느 사람이라야만 비로소 만물만상을 읽을 수 있다고 옛 사람은 말하였습니다. 책을 읽기는 쉽지만, 자기 자신을 읽기능 참으로 어렵다는 뜻이고, 내가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책으로 하여금 나를 보게 하여 마침내는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으로 하여금 나를 읽게 하지 못하고 눈으로만 기껏 글자나 좇아가서 무엇 하겠느냐는 채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 나의 독서는 혹 눈으로만 글자 구경하는 건 아닌지 성찰해봐야 한다.

"무릇 천지의 정기를 얻어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 사람이요, 그렇게 태어나게 된 사람의 몸을 맡아 다스리는 것이 마음이다. 그 마음이 몸 밖으로 펴나온 것이 말이요, 그 말 가운데서 가장 알차고 맑은 것이 시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바르면 시가 바르고, 마음이 간사하면 시 또한 간사해지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로 된다."

"왕조시대 사대부들이 지니고 있어야 할 기본 덕목이었던 절(節)은 대나무 마디처럼 그 경계가 뚜렷해서 변절을 받아들이지 않는 절개를 말한다"
-절개를 보기 힘든 요즘같은 세상에 다시 '절'을 생각하낟.

그리고 그의 표현 중 재미있던 것, 복지뇌동, 컴본주의 시대, 씁쓸하지만 현실이다.

계속해서 마음에 남는 구절들

"사람이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밥한테 사람이 먹히고"
-이건 아주 현재의 세태에 적실한 말이다. 밥한테 사람이 먹히는 세태, 진정 중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지도 못하고, 밥만 좇아 삶을 다 써버리는 사람들, 소위 자본주의 시대는 그런 삶이 기본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의 삶이라는 게 그건가? 이건 앞의 '내가 책을 보는가, 책이 나를 보는가' 보다 더 뼈 아픈 지적이다.

"지금은 이른바 민주주의 세상입니다. 아직 말 그대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바른말을 했다고 해서 이내 자리를 빼앗기거나 징역을 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벼슬아치, 구실아치들은 바른말을 하지 않습니다. 눈치만 봅니다. 그래서 복지뇌동이라는 말이 생겨나는 것이겠지요.

좀 더 정신적 여유가 있었을 때 읽었더라면 더 많은 명상으로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인데, 허겁지겁 읽게 된 게 못내 아쉽다. 그래서 내가 책을 읽은 게 아니라, 책이 나를 읽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아, 이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