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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새 - 어느 의용군 군의관의 늦은 이야기
류춘도 지음, 노순택 사진 / 당대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류춘도, <벙어리 새-어느 의용군 군의관의 늦은 이야기>, 당대, 2005.

언제부터인가 허위적 집단, 조직 등의 억압성을 많이 느끼면서, 실존 그 자체에 대한 사색이 깊어져갔다. 요가, 명상, 그리고 선승들의 책을 읽으며 나름대로 새로운 삶의 의미에 접근해 본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삶은 조직 속에, 사회 속에, 역사 속에 있음을 안다. 그래서 긴장도 항시 필요함을 안다. 하지만 그 둘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다. 만해 한용운 같은 사람들이 사회와 개인의 실존, 역사와 수행을 잘 조화롭게 하며 살았던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인가 요번에 치열한 한국전쟁 속에 살아갔던 어느 인민군 군의관의 이야기가 읽고 싶었다. 류춘도, 당시 의과대학생이었던 몸으로 인민군 군의관이 되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 운이 좋아, 주변 사람덕에 지금까지 목숨을 이어왔지만 시대가 바뀌기 전까지 그의 인생 중 청춘의 시절은 금기의 영역이었다. 이제 그 금기를 풀고 말을 쏟아낸 것이다.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책을 덮으며 뭔가 허전했다. 분량이 짧아 빨리 끝내긴 했지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지 내내 허허로왔다. 내가 그에게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사들의 무용담, 패배한 인민군의 애틋함, 아니면 역사의 준엄함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
암튼 그런 많은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류춘도는 아주 담담하게 풀어간다. 물론 내가 기대했던 부분들도 계속 이야기하긴 한다. 하지만 극적이진 않다. 아마 극적이길 바라는 게 나의 심보일 것이다. 그의 삶이 극적이었기에 그 글도 그러길 바랐던 모양이다. 그래야 느슨해진 나의 긴장을 다시 팽팽하게 잡아 당길 수 있을 테니까. 이게 편견이다.
그래도 다 덮고 나서 가만히 있으면 느낌이 없는 게 아니다. 약한 것도 아니다. 상당히 강하다. 오히려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가지 않게 차분하게 풀어 준 게 고맙기도 하다.
근데 그게 유독 류춘도만의 일이었을까. 죽어간 수백만 사람들의 삶도 그러했겠지만,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근근히 생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리라. 근데 왜 그들은 지금 발언하지 않을까. 물론 많은 수가 아닐 것이기 때문에. 아니 그것보다는 삶에 완전히 지쳐버린 게 아닐까. 그 광기의 시대에 살륙과 훅훅 찔러오는 피냄새를 기억하기엔 삶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된 게 아닐까.
나는 처음엔 이 책에서 좀 더 센 자극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류춘도의 이 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하니 쓸데없이 감정이 튀지 않아서 오히려 좋은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분명히 기억한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로 떠났는지"를.
실존적 사색 속에서도 항상 역사 의식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로 떠났는지를 류춘도 만큼은 아니라 할지라도 역사를 공부하는 나는 분명코 잊지 않고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