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민족의식이 만날 때
황종렬 지음 / 분도출판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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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렬, <신앙과 민족의식이 만날 때>, 분도출판사, 2000.

 

지식인의 관심 경향도 하나의 흐름이 있는 것인가. 내 삶의 중심 테마는 역사였다. 현직 역사교사이기도 하고. 그리고 심장 고동치던 그 80년대를 지탱하게 한 힘도 그 역사였다.

 

그러나 3년전부터 심하게 앓았고 그러면서 내 삶을 돌이켜 보는 시간이 있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이젠 생태적 가치관을 앞에 내세우고 살아야겠다고 생각도 했다. 그 과정에 이 책의 저자 황종렬이라는 분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아마 <평화신문>에서였지 싶다. 그 분의 이름과 또 한 분, 잘 기억나진 않는데 이동훈 신부님인가 하시는 분께서 생태 영성에 대한 책을 냈다는 기사였던 것 같다. 책 제목을 가지고 여러 인터넷 서점을 돌아다녀도 구할 수가 없었다. 아마 영세한 출판사에서 찍어 중앙 무대에까지는 가지 않은 것 같았다. 아쉬웠지만 훗날을 기약했다.

 

근데 그 인터넷 서점에서 황종렬이라는 분이 쓴 책이 몇 권 있음을 알게 되고서 일단 생태영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책을 쓰신 분의 다른 책도 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2권 주문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책이다. 한 동안 책꽂이에 장식물로 있었다. 그러다가 순서대로 꺼낸다고 꺼낸 것이 이 책이다. 표지에 안중근의사의 손도장, 그리고 마지막 쓰신 글이 실려 있다. 려순 감옥에서 쓰신 글이다. 책의 부제가 -안중근 토마스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관한 신학적 응답-이다.

 

내가 어쩌면 살짝 멀리 놓아둔 역사를 신앙과 접목시킨 책이겠다 싶었다. 저자 소개를 보니 해방신학에 대한 연구도 많이 하신 분  같다. 나 역시 대학시절 해방신학에서 희망을 보고자 했다. 그러다가 아예 신앙을 놔버리기도 했었다.

 

그래서인가 더 친연성이 느껴지는 분이라 생각하며 읽었다. 서문에서 그 분이 밝히기를 "역사와 사회와 신학을 통합시켜 갈 신학 방법론이 나의 주전공 분야이다." 라고 하셨는데, 나는 대학을 역사 전공, 석박사 과정을 사회학, 그리고 40대 중반에 들어 다시 신앙을 고민하는 모습이라 그분의 입장이 괜히 반갑게 다가왔다. 물론 요즘 세태에서 이런 책이 환영받을 것 같지는 않지만 정직하게 한 시대를 증언하는 책이라 생각한다.

 

과거 일제 강점기 가톨릭이 정치적으로 상당히 타협적이었다는, 아니 어쩌면 진정한 신앙에서 벗어나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동조했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안중근의 의거를 둘러싼 교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이 책에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실망이 컸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이렇게 역사와 함께 나중에 드러나기도 하는가 보다 싶었다. 저자의 말처럼 현재 정의구현사제단의 모습이 그런 계승이 아니겠나 싶었다.

 

책의 시작은 전래 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로부터다. 이렇게 글을 끌어가는 솜씨도 탁월하고 또 그런 동화 속에 역사와 신학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개고개의 지루함이라고 느껴졌던 것도 그 만큼 당시 민중들의 고달픈 삶이 반영되어 있음이라고 한 것도 탁월한 분석이었다.

 

안중근 관련 인용 기사를 다른 곳에서 잠깐 보긴 했지만 이 책에서 더 많이 확인한 것도 소득이다. 안중근이 빌렘 신부와의 마지막 접견에서 "인생이 있는 이상 죽음 도한 이르든 늦든 면치 못하는 바이다. 믿는 이인 나는 그 하루를 앞서 성단에 오르니 교우의 힘에 의해 한국 독립의 길보를 가져다 주기를 기다릴 뿐이다."라며 신앙인과 역사 속의 시대적 책무를 다한 지성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안중근은 도덕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다. 그가 적의 포로를 사로잡은 후에 처형을 주장하는 동료와 부하들을 만류하며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라는 법은 없다. ...적들이 그렇게 폭행을 자행하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을 다함께 분노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마저 저들과 같은 야만적인 행동을 해야만 하겠는가? 또 그대들은 일본의 4천만 인구를 모두 죽인 다음에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는가?"라며 어쩌면 비현실적인 포로 석방 조치를 취한다. 그로 인해 독립군이 오히려 곤경에 빠지고 안중근이 독립군 내에서의 위치도 불편해지긴 했지만 그는 확고한 평화의 원칙, 하느님 공법의 원칙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당시 한국 지식층과 교회는 살인자의 죄목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잘못을 뉘우치기 전까지는 성사를 집행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인지 뮈텔 주교의 성사 거부를 어기고 빌렘 신부는 안중근에게 찾아간다. 물론 빌렘 신부도 안중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갔다고 한다. 그러나 안중근의 자신의 뜻을 바꾸지는 않았고 그럼에도 빌렘신부로부터 고해성사를 받는다.

 

이해하기 힘든 것은 뮈텔 주교 등의 입장이다. 저자는 이것을 신앙보다는 서구 중심의 근대화론에 뿌리를 둔 제국주의적 식민주의 패러다임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인 당시 서구 지식인의 보편성에서 찾고 있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시대를 뛰어 넘어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됨의 모습이기에 아쉬움은 남는다.

그게 없었기에 가톨릭에서 신사참배를 허용한 것이다. 1933년 1월 교황대사 에드워드 무니 대주교를 통해 신사참배를 인정했다고 한다.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의 원고이기는 하나, 상당히 무거운 원고이다. 생태영성을 공부하려다가 다시 나의 옛 테마인 역사로 돌아갔다 왔다. 하지만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신앙과 함께 한 역사 공부라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예전부터 이런 책읽기를 했더라면 내가 영적으로 헤매는 기간이 짧았을 것을...

지금이라도 새롭게 만나게 되는 신앙과 역사, 종종 이런 책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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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 성서와 인간 10
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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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모, <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 바오로딸, 2001.

 

2008년 1월에 16쇄 한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 10편이다. 포켓북, 그런 책인데도 할 말이 너무 많다. 이곳에 인용할 대목도 너무 많다. 생각 같아서는 책 전체를 옮겨 놓고 싶다. 짧은 글인데도 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고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어쩌면 단순한 이야기다. 삶의 중심축에 예수님을 놓고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라. 그러면 쓸데 없는 근심걱정으로 인생을 고달프게 살지 않게 된다. 그런 이야기다. 그런데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삶은 쉽지 않다. 계속 걱정이고 근심이다. 기도할 때만 예수님이 내게 와 있고 그렇지 않은 때는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며 허덕거리며 바쁘게 돌아간다. 그러다가 망가진다.

 

나 역시 많이 망가졌었다. 구체적으로는 2년전부터 심하게 앓았다. 근심 걱정 속에,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에 대한 필요 이상의 상념 때문에 몸도 마음도 영도 망가졌다. 마귀는 '내일'이라는 것으로 유혹하여 사람을 걱정 초조 속에 빠뜨린다고 한다. 돌아보면 내가 완전히 그꼴로 마귀한테 당했다. 영적으로도 심한 병을 앓았다. 지나고 나서 이 책을 읽으니 무엇이 문제였는지가 보인다. 내 삶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없었다. 세속적 명예욕만이 가득 찼다. 그리고 그 명예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루 하루 정말 정신 없이 살았다. 그러나 꿈을 이루면 또 다른 목표가 생기고, 그러면 나는 또 전력 질주, 그러다 보니 걱정과 불안과 초조와 스트레스와 질투심만이 남았다. 마귀는 이것을 바로 활용했다. 완전히 부마 상태가 되어 한 동안 힘들게 보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내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줬고 마귀를 몰아내 주셨다. 회심한 인간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분께서 해 주신 일이다.

 

이 책 읽으면서 공감하는 대목들을 중심으로 옮긴다. 간단한 코멘트와 함께.

 

"문제는 우리가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달려갈 뿐이지, 오늘이라는 현실적 단계를 즐기며 살아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시선이 항시 내일을 향해 고정되어 있기에 무엇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즐길 시간이 없다. 인생이란 무대 위에 성취한 그 무엇을 올려놓고 진득하게 즐길 시간이 없다. 하나의 목표를 성취하고 나면 또 다른 목표를 만들어 끊임없이 달리는 것이다. 이렇게 일하는 인간, 아니 일의 노예가 되어 내일을 향해 뛰어가는 동안 우리의 인생은 어느새 황혼기에 접어들고 만다. 그리하여 삶은 마치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다 끝나버린 허망한 인생살이로 다가온다."

현재를 즐겨라. 내가 이룬 성과를 즐겨라. 나는 그렇질 못했다. 참으로 억울한 노릇이다. 그냥 달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나마 내 삶이 황혼기에 접어들기 전에 이런 깨달음을 받은 것이 다행이다. 먼 발치에서 구경만 하다가 끝나버린 삶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오늘 행복해야겠다. 각각의 단계를 즐기면서 충만하게 살아가야 겠다. "승자는 과정을 위해서 살고, 패자는 결과를 위해서 산다. 승자는 달리는 도중에 이미 행복하나, 패자는 경주가 끝나야만 행복이 결정된다." 이 또한 중요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게 쉬운가. 현실에서 예상치도 못한 고난이 다가오는데, 그걸 즐길 수가 있는가. 송신부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고통은 더 이상 하느님의 진노에서 나오는 저주나 죄에 대한 심판의 표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를 단련시키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러면서 그는 성서 구절을 인용한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견책하시고, 당신이 받아들이시는 모든 아들에게 매를 드신다."(히브 12, 6)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묵시 3, 19)

"여러분은 견책을 받거든 참아내십시오. 하느님은 여러분을 아들처럼 대하십니다. 아버지가 견책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히브 12, 7)

 

사실 따지고 보면 고통도 오늘 고통일 뿐이다. 내일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니 그냥 오늘 고통만 견딜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된다. 그리고 실제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늘 하루의 고통을 견딜 힘을 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삶이 힘겨운 것은 우리 앞에 놓여진 모든 걱정을 미리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견딜 수 있다. 견딜 수 없는 것은 내일이다."

"오늘 하루만 사랑으로 살고, 오늘 하루만 화내지 않고 온유하게 살겠다고 결심한다면 삶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맞다. 매일 그렇게 생각하며 살 일이다.

"하지만 오늘이 아닌 앞날을 바라보면서 '도대체 언제까지 이것을 해야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하루하루가 힘든 것은 물론이요." 중환자를 오래 간호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견디기 힘든 것은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예견 때문이다. 그런 예견은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오늘 이타적이고 순수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된다.

"정신건강과 영혼건강에 가장 해로운 것은 내일 일을 오늘 걱정하는 것이다. 정신건강과 영혼건강에 가장 이로운 것은 내일 할 일은 내일 생각하는 것이다." "내일 일을 걱정하게 하는 것은 마귀의 주전략이다. 하느님은 당신 속성상 오늘을 살게 하시지만 마귀는 내일을 살도록 이끈다."

한국의 40대들이 과로로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서도 신부님은 한 마디 하신다. "한꺼번에 생명의 진을 고갈시켰기 때문이다." 내게 딱 들어맞는 말. 깊이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얼마나 바보처럼 살았는지.

"생명을 잘 보존하려면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은 힘들여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진리는 자연의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면 즉시 알수 있다. 자연은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진을 빼지도 않고, 최소한의 노력만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 보면 인생이 너무 밋밋한 게 아닌가 하고 회의할 수도 있겠다. 내 능력은 많은데, 너무 내가 게을러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역시 어릴적 받은 성실 교육의 효과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뭔가 거창한 일을 해야만 인생에 보람이 있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하셨다. 그러니 그 일을 잘 하면 된다.

"어떤 일이나 자기 소임터인 주방에서 일을 시작할 때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은혜를 구하였다. 그리고 일하는 동안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면서 하느님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었다."(중략)"나는 프라이팬 위의 오믈렛을 뒤집을 때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했습니다. 하다못해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 일까지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 사랑하는 법을 찾고 있습니다만, 무슨 일이든 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하면 됩니다." 이건 로렌스 수사님의 말이다. 그렇게 살면 된다.

나는 어떤가. 이 부분 심히 반성되는 부분이다. 나는 항상 거창한 것만 꿈꿨다. 지금 학교 현실이 못마땅하다고, 교육이 완전 붕괴했다고, 더 이상 제도교육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한탄만 했다. 진정 그러하면 뛰쳐나와 대안교육을 해야할 터인데 그렇지도 못한다. 그러면서 불평만이다. 작은 일, 그 작을 일 마다 "하느님의 일로 여기고 정성을 다해서 할 때" 하느님은 함께 하실 터인데 말이다. 어렵지만 항상 고민할 일이다. 집에서 청소할 때도 옆사람에 대한 원망으로 할 것이 아니라, 설겆이를 할 때도, 항상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며 할 일이다. 그러면 삶이 기쁘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실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모든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1고린 10, 31)"라고 말이다. 요즘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숲 만들기, 주님께 헌정하는 마음으로 할 것이다. 이 숲이 나중에 주님의 자녀들을 기쁘게 해주길 기도하면서.

 

또 하나 재미있고 실용적인 고민해소법을 읽었다. 심리학자 로빈 샤르마가 한 말이라고 한다. "걱정을 위한 고정된 시간을 저녁에 잡으십시오. 매일 저녁 30분 고정된 시간을 만들어서 그 시간에 걱정거리에 골몰하십시오. 그 대신 하루 중 나머지 시간에는 그 걱정거리를 잊어버리십시오. 만일 거정거리가 생기면 그것을 메모한 뒤 저녁 걱정하는 시간으로 넘기십시오. 이렇게 하면 점차 걱정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끝내는 걱정하는 습관 자체를 아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 걱정하는 시간이 되어 보면 이미 그 고민 거리가 해결된 뒤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이 사실은 이미 끝나버린 과거, 앞으로 오지도 않을 일 등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진짜 우리가 고민해야 될 것은 10%도 되지 않는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그런데도 우리는 90% 쓸데 없는 걱정에 짓눌려 살아간다. 벗어날 일이다.

랭크라는 사업가는 앞의 로빈 샤르마 박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일주일 동안 고민을 잊고 수요일에 집중적으로 그 문제 해결을 위한 고민을 했다고 한다. 고민 거리가 생기면 즉시 메모하여 고민함에 넣어 두고 그 순간만큼은 잊어버렸다고 수요일에 그 메모지를 꺼내 읽으며 하나씩 해결했다고 한다. 수요일에 꺼내보면 많은 경우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건이 되기도 했다 한다. 이건 정말 실용적인 지혜다. 창조적으로 내게도 적용해볼 만 하다. 일단 메모하고 잊어버릴 것.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집중적으로 고민할 것.

 

하나 오해하지 말 것은 미래를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미래를 설계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래를 준비하고 계획하고 대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적이어야 하고 즐거워야 하는 것이지, 짓눌리며 할 일은 아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3년은 현재의 우리 삶보다 더 바빴다. 가르침 주고, 병자를 치유하고, 잠도 못 주무시면서 하신 일이다. 그러나 그분의 마음은 평화 그 자체였다. 항상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바쁘게 살 필요는 있다. 다만 그것이 세속적 욕망을 위한 것일 때는 공허감만 남는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 뜻에 맞는 일이며,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라면 영적으로 충만할 것이다.  삶의 중심축에 그분을 항상 놓고 살기만 한다면 말이다.

더 바빠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바쁨은 어제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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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 신개정판 생각나무 ART 7
손철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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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손철주,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생각의 나무, 2006.

 

아마 인터넷 서점에서 반값으로 할인하니까 샀던 것 같다. 근데 사고 놓고 보니 예전에 이 책을 사서 책장에 모셔두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한심한.... 나의 책 사치 때문에 바보짓 한 것이다. 그저 싼 책 있으면 질러대는.

허영심이다. 이 책 저 책 읽으려 하고. 전공도 아니고, 마음을 맑게 하는 책도 아닌 것 같은데, 그저 교양 쌓는다는 명분으로 미술 영역까지 도발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참담하다. 글쓴 사람 손철주의 글이야 워낙 미문이고 멋스럽지만 내가 도저히 따라가질 못한다. 그러니 참담할 수밖에. 나의 허영심이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손철주. 학고재 서적 주인이다. 이름은 들어봤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한겨레>에 칼럼을 쓴다. 글을 보니, 정말 글쟁이다. 맛이 듬뿍 들어간 글을 쓴다. 절박하게 사회운동하는 사람들 보면, 놀고 있다고 하겠지만, 삶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라면 손철주의 글에 금새 반할 것이다.

내 경우는 솔직히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약간의 거리감은 있다. 그러나 내가 갖지 못한 그 멋스럼 때문에 괜히 주눅들기도 하고 콤플렉스를 느끼기도 하는 처지라 즐겨 본다. 편치 않은 마음에서. 못난 사람이 잘난 사람 바라볼 때의 그 심정 말이다.

 

그러다가 칼럼 말고 한 권의 저서로 본 게 이 책이다. 서문이 마음에 들었다. '미술을 데리고 놀아볼 사람들을 위한 기록'이란다. 그러니 전공자가 아니라도 좋겠다는 말이라 마음이 놓였다. 게다가 "입다문 그림을 입 떼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한다. 표현 좋다. 이걸 그대로 내 전공에 갖다 붙이면 '과거는 말이 없다. 다만 역사가가 그 과거로 하여금 입을 떼게 한다'라는 표현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서문 말미에 '대설이 갈짓자로 내리는 날'이라는 표현도 멋있다. 이런 한심하게도 비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이렇게 좋아한다.

 

근데, 문제는 본문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이 양반 글이 고전에서 현대미술까지, 동양에서 서양까지 종횡무진이다. 그러면서 본격적 미술 비평도 아님에도 나를 현란하게 만든다. 어렵다. 그저 그런 내용이 있겠구나 하고 대충 이해하면서도 사실 뭔 말인지 모르는 게 너무나 많다. 남의 영역에 들어오니 그렇다. 그렇다고 내가 뭐 평소에 미술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애당초 무리였다.

그래도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는 써 먹기 좋은 지식이기도 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는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 20여 명의 이름이 올라 있는데, 본시 그 의도가 안견과 안평대군과의 도타운 관계에 힘입어 한 몫 끼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황이 반전되어 세조가 권력을 잡음으로 해서 이 그림에 이름이 올랐던 이들은 모두 작살났다고 한다. 그 명단이 오히려 살생부가 된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재미 있었으나 그 나머지는 잘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옛 말 틀린 것 하나 없다.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를 던져주지 마라" 난 돼지다. 최소한 이 영역에서는. 그리고 이 책은 진주다. 그러니 난 애당초 이 책을 잡지 말았어야 한다. 괜히 이 좋은 책을 욕보게만 했다.

그래도 마음에 들었던 표현 몇 개만 옮기고 글을 마치련다.

 

"손끝의 재주가 아니라 정신의 깊이에서 탄생된다. 장인의 현란한 기교가 행세하는 세상, 정신의 고매함이 밴 수묵화가 그늘진 외지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상상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내가 이런 표현에 공감하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정말이지 현란한 기교도 못되는 돈 주고 산 어설픈 '쯩' 하나 가지고 행세하는 세상이라 더더욱 본질적 가치가 그립기만 하다.

 

"전업화가들이 일요화가를 미워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아마추어의 여유를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하루 그리고 늘 물감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꼴, 그것이 못마땅할 따름이다." 돌아본다. 나를. 나 역시 하루 그리고 늘 물감 냄새 풍기고 다니고 있지는 않은지. 이런 성찰의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이 책을 반 값에 산 보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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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김선우 지음 / 새움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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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선우, 이 사람의 글을 처음 접한 건 <한겨레>신문 별지에서다. 이제는 나오지 않지만 몇 년 전에는 그 별지가 있었다. 책 소개와 좋은 칼럼이 있던 별지다. '책과 지성'이었던가. 

암튼 거기서 김선우라는 사람을 처음 봤다. 시인이라고 한다. 근데 그의 시는 지금까지 보질 못했다. 내가 문학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서 김선우를 좋아하는 만큼 그의 시도 보아야 마땅하겠지만 지금까지는 그러질 못했다.  

그럼 시인인데 시가 아니고 무엇으로 만났는가. 칼럼이다. 시사적이면서도 생태에 관심이 많은 글이었다. 딱 마음에 들었다. 그 감수성과 그리고 그 감수성을 표현해내는 문학적 능력, 그렇다고 누구의 지적처럼 '나희덕과도 최영미와도 전혀 다른' 그런 '여류(?)' 시인이었다. 단순히 말랑말랑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구조를 사회과학적으로 정확히 짚어 내면서도 그걸 다시 딱딱한 과학으로만이 아니라 과학적 바탕 위에 문학적으로 풀었다고나 할까. 암튼 글 몇 편 보고 반했다.  

그래서 구입한 책이다. 실망시키지 않는다. 일부 글은 예전에 <한겨레>에서 봤던 글이다. 더 반갑다. 여러 부분 공감하지만, 특히 세금 내고 싶지 않다는 말에 적극 공감이다. 그의 말대로 세금을 내더라도 세금 내는 사람이 희망하는 곳에 그 세금이 쓰여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지금보다 더 세금 많이 낼 의향도 있다. 근데 현실은 전혀 아니다. 그게 화난다. "좀 엉뚱한 고백이지만, 나는 정말이지 더 이상 세금을 내고 싶지 않다. 거의 모든 물건들에 간접세의 형태로 지불하는 세금 중 단 한푼이라도 이라크 파병을 위한 예산으로 사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나라 도처에서 불필요하게 파헤쳐지는 산하와 그 무수한 도로 공사의 소음들과 살아있는 개펄을 강제로 메워 죽이는 새만금 공사 같은 끔찍한 재앙에 내게서 걷어간 세금이 포함되어 있을지 몰라 불안하다. 당면한 민생 현안에 수수방관인 채 정치적 계산으로 속내 복잡한 국회의원들에게는 내가 낸 세금이 한푼이라도 월급으로 줄 생각이 전혀 없다. 공동선의 가치에 기여하기는 커녕 눈먼 뭉치돈으로 전락하기 일쑤인 세금들 속에 내가 낸 돈이 있을까봐 겁난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내는 세금, 내가 정하는 곳으로. 하긴 세상이 망조를 보이니까 이런 걱정도 나오겠지. 그 망조를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 소위 덕담이라고 하는 말이 "부우자 되세요오-" 이런, 이런. 그도 역시 이에 분개한다.  "덕담으로 자주 인용될 때마다 뒷자리가 슬펐다"고 한다.  

많이 슬프다. 별로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가 그도 "결국 실패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기지 못할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운명이 있다. 시는 어쩌면 응답을 기대하지 않고 드리는 기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모르는 나이지만 이 말 참 좋다. '응답을 기대하지 않고 드리는 기도'. 사실 이 말 속엔 그의 비관주의가 드러난다. 안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몸으로 느낀다. 우리 사회, 정말이지, 안 된다. 갈 데까지 간 것 같다. 그래도 그는 따뜻하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우리끼리라도 따뜻하게 체온을 나워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보인다. 그래서 그의 글이 더욱 좋다.  

그 비관, "커다란 빈 통에 콘크리트를 붓다가 중단한 것을 재개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까지 콘크리트가 부어진 채 딱딱하게 굳어가는 중에도 아이만을 양팔로 들어올려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얼굴 위로 콘크리트를 쏟아붓는 일이며, 살겠다고 우는 아이와 어머니를 산 채로 콘크리트 속에 매장하는 일에 가깝다는 것이다. 공사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손해가 얼마라는 얄팍한 수치에 휘둘릴 일이 아니다. 한번 죽여버리면 다시 살릴 방도가 아득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새만금 공사를 두고 한 말이다. 비유가 너무도 처절하다. 그러나 그 처절함이 사실은 현실인 것이다.  

그래도 어떠겠는가. 살아있는 동안은 살아야지. 따뜻하게. 그람시가 그랬나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고. 어려운 말이다. 그래도 김선우 같은 따뜻함이 있기에 그 비관마저도 내 삶에는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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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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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걷기 여행이 시작된다는 소리를 몇 년전부터 들었다. 서명숙 님이 시도하기 전에도 몇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하고 있었다. 반가운 소리. 근데 본격적으로 서명숙 님이 이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더더욱 반가운 소리. 맨날 삽질 경제와 카지노 경제로 제주도를 다 팔아먹겠다고 하는 마당에 신선한 대안 프로그램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상만 해도 좋았다. 제주의 그 아름다운 길을 느긋하게, 하늘과 땅과 바다와 함께 그리고 지인들과 함께 느릿느릿 걷는다는 게. 면벽 수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것 없다는 교만과 함께 반가운 마음 금할 길 없었다. 어딜 다녀봐도 제주도만 한 곳이 없다는 맹목적 애향심이 조금 가미된 자부심 때문인가. 암튼 그래도 영국의 그 누굴 인도하고도 안 바꾸겠다고 했다던데, 나 역시 그렇다. 제주도를 그 무엇과도 바꿀 마음이 없다. 그 만큼 좋은 곳이다.

근데 나는 그때 몹시도 아팠다. 이 세상에서 삶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은 처지까지 내려갔다. 그런 상태라서 모든 일에 관심이 없었고 오직 삶과 죽음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이도 나는 요즘 많이 좋아졌다.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신께 다시금 감사드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려고 한다.  

몸이 회복되면서 예전에 들었던 그 느린 길 걷기, 바로 제주 올레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가보고 싶었다. 사실 '올레'라고 칭하며 개장행사를 하기 전에 제주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보았던 길들이기도 했다. 물론 서명숙 님이 마련해준 것처럼 하나하나 깔끔하게 마무리된 길을 다닌 것은 아니었다. 제주 역사 연구를 위해 주섬주섬 다니다 쉬던 길이긴 했다.  하지만 그때는 걸어서 다닌 적이 별로 없다. 자가용으로 접근해서 일부 비경 지역만을 걸었을 뿐이다. 그런 마당이라 서명숙 님이 준비해주신 길을 걷고 싶었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물어 봤다. 근데 요즘엔 워낙 유명해져서 한꺼번에 몇 백명씩 몰린다고 한다. 

본시 성향이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다니는 곳에 가길 싫어 하는 체질이라, 아쉬움을 남기고 접었다. 그래도 예의가 아니다 싶어 작년(2008년) 마지막 행사 때는 참여를 했다. 참 좋았다. 길을 걷는다는 게. 근데 주변의 지적처럼 바글거리는 인파가 꼭 좋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올레'라는 그 소박한 이름과 의미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라 아쉬움이 남았다. 

그렇게 한 번 다녀오고 나서는 개장 행사 때는 피한다. 그냥 지인들과 개장 행사가 끝난 곳을 더듬어 다닌다. 길 안내 표식이 잘 되어 있어서 아주 편리하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에게 권하노니, 개장 행사 때는 가급적 가지 않길 바란다. 이건 내 취향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면 망가진다. 특히 안타까웠던 것은 송악산 굼부리를 그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올라가 돌았다는 이야기를 읽을 때였다. 이건 아닌데. 이러면 망가지는데, 그 연약한 화산체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밟아버리면 그 답압  때문에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인데,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책은 참 재미 있었다. 내가 책 읽는 속도는 한참 느린 사람이다. 근데 이 책은 단숨에 읽었다. 첫장을 잡고 끝장을 닫는 때까지 딴짓을 안 했다. 그 만큼 나를 잡아 끌었던 책이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 진솔함 때문인 것 같다. 사실 공개하기 싫었을 가족 이야기, 특히 동생과 아들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나 역시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진솔하게 쓸 수 있는 서명숙 님의 모습 역시 아름답게 느껴졌다.  

또 하나 관심이 갔던 대목은 역시 산티아고이다. 내가 제주 사람이라 제주 이야기는 그럭저럭 별 감흥 없이 읽었는데, 산티아고 이야기는 달랐다.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아니 산티아고가 아니라고 해도, 암튼 낯선 곳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만큼 그의 글이 사람을 잡아 끄는 매력이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겠다.  

근데 아쉬움도 있었다. 일부 오타 예를 들면 채제공을 체제공이라고 쓴 점이나, 일부 오류 즉 할망당은 있어도 하르방당은 없다고 한 점 등은 작은 흠결이다. 사실 할망당이 많기는 하다. 전체 당 중 여신당이 약 70%에 이른다. 그러나 하르방당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문하르방당, 김씨 하르방당 등 여럿이 있다. 제주의 여성성을 강조하다보니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결함은 작은 것이다. 내가 진정 아쉬워한 대목은 다른 곳에 있다. 강정 마을을 지날 때의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 마을엔 해군기지가 들어선다고 난리다. 연일 제주도내 사회운동단체와 주민, 그리고 천주교 제구교구에서는 이 해군기지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반대운동을 하고 있다.  

평화의 관점에서도, 생태의 관점에서도, 그리고 서명숙 님이 주도하고 있는 이 '올레'적 가치에서도 이곳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안 된다. 그 아름다운 바당올레가 한 순간에 망가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서명숙님은 서귀포 서복 기념관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 아름다운 바다를 이렇게 망쳐놓을 수 있냐며 분개한다. 그러나 서복 기념관은 헐어버리면 된다.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금방 자연도 복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강정의 경우는 다르다. 일단 규모가 서복기념관과는 비교할 게 못된다. 엄청 넓은 지역이다. 그리고 군사기지의 특성상 한 번 들어서면 철거가 어렵다. 100년은 갈 것이다. 그 만큼 심각한 사안이다. 

그런데도 서명숙님의 책에서는, 서명숙님의 그 바당올레에서는 이 강정해군기지 문제를 언급하지 않으셨다. 너무도 안타깝다. 강정바다를 지나면서 이곳에서 평화의 행사를 한 번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책을 보면 서명숙님의 인간관계가 아주 넓음을 알게 된다. 손석희, 국민 가수 양희은, 한겨레 신문의 김선주, 건축가 김진애, 바람의 딸 한비야, 여성학자 오한숙희 등등, 이런 지인들과 함께 이곳에서 한판의 반전반군사기지 이벤트를 벌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양희은님께 부탁하여 강정 바닷가를 지나면서 평화 콘서트라도 열었으면, 그 유명한 지인들과 함께 강정바닷에서 평화선언을 하고 말이다. 이런 일이 있어야 그 올레가 진정 평화의 올레이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해군 해병의 도움을 얻어 닦았다는 그 '해병대 길', 그 길은 굳이 그렇게 평탄작업을 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 같다. 예전에 다닐 때 길이 좀 험하긴 했지만 굳이 해군의 힘을 빌면서까지 그런 길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갔다. 평탄작업 하지 않아도 거친대로 맛이 있는 길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 미묘한 시점에서......  그보다는 오히려 해군에서 올레를 위해 도와줄 일이 없겠냐고 물어 왔을 때, 그 평탄작업을 부탁하기 보다는 강정 바닷가를 해군에서 손대지 말고 보존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비현실적인 이야길까. 그러나 아무리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 이 책에 소개되는 것처럼 유신 말기에 징역살이까지 했던 사람의 가치관이라면 더욱 그게 어울리겠다 싶다.

물론 이런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아마 제주 역사상 이런 시도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올레 길에 대해 거는 기대는 크다. 삽질 경제가 아닌 생태 경제, 빠름이 아니라 느림. 이런 가치관을 실현하는 평화의 길을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나 역시 마음 다해 지지, 지원할 것이다. 이 올레가 성공해야 제주에는 대안적 가치의 세상이 열릴 것이라 생각한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일단 이것만은 고쳤으면 하는 점. 물론 기술실무적으로 어렵긴 하겠지만 개장행사 때 사전 예약을 받아 인원을 제한했으면 좋겠다.  송악산 굼부리가 포함된 올레 개장 행사 끝난 뒤, 내가 우연히 송악산엘 갔다가 한숨을 쉬었다. 제발이지 한꺼번에 사람 많이 몰고 다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검은오름 트레킹의 경우엔 하루 탐방 인원이 제한되어 있다. 사전 예약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올레길은 개장행사 때가 아니여도 얼마든지 갈 수 있다. 화살표시가 잘 되어 있다. 그러니 한국사람 특유의 그 쏠림과 몰림을 좀 자제했으면 좋겠다. 그게 아마 올레의 생명을 오래 유지시키는 방법일 것이다. 안 그러고 지금처럼 외형적 규모 키우기를 방치하면 (사)제주올레는 아마 '제주비경걷기국민운동본부'로, 그 아름다운 올레는 '신작로'로 변질될 지도 모른다.  올레는 본래 소박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 소박한 심성이 그립다. 

 글 마치기 전에 또 하나, 이 책에 실린 사진들, 글 못지 않게 정말 쥑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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