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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 ㅣ 성서와 인간 10
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송봉모, <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 바오로딸, 2001.
2008년 1월에 16쇄 한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 10편이다. 포켓북, 그런 책인데도 할 말이 너무 많다. 이곳에 인용할 대목도 너무 많다. 생각 같아서는 책 전체를 옮겨 놓고 싶다. 짧은 글인데도 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고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어쩌면 단순한 이야기다. 삶의 중심축에 예수님을 놓고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라. 그러면 쓸데 없는 근심걱정으로 인생을 고달프게 살지 않게 된다. 그런 이야기다. 그런데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삶은 쉽지 않다. 계속 걱정이고 근심이다. 기도할 때만 예수님이 내게 와 있고 그렇지 않은 때는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며 허덕거리며 바쁘게 돌아간다. 그러다가 망가진다.
나 역시 많이 망가졌었다. 구체적으로는 2년전부터 심하게 앓았다. 근심 걱정 속에,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에 대한 필요 이상의 상념 때문에 몸도 마음도 영도 망가졌다. 마귀는 '내일'이라는 것으로 유혹하여 사람을 걱정 초조 속에 빠뜨린다고 한다. 돌아보면 내가 완전히 그꼴로 마귀한테 당했다. 영적으로도 심한 병을 앓았다. 지나고 나서 이 책을 읽으니 무엇이 문제였는지가 보인다. 내 삶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없었다. 세속적 명예욕만이 가득 찼다. 그리고 그 명예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루 하루 정말 정신 없이 살았다. 그러나 꿈을 이루면 또 다른 목표가 생기고, 그러면 나는 또 전력 질주, 그러다 보니 걱정과 불안과 초조와 스트레스와 질투심만이 남았다. 마귀는 이것을 바로 활용했다. 완전히 부마 상태가 되어 한 동안 힘들게 보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내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줬고 마귀를 몰아내 주셨다. 회심한 인간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분께서 해 주신 일이다.
이 책 읽으면서 공감하는 대목들을 중심으로 옮긴다. 간단한 코멘트와 함께.
"문제는 우리가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달려갈 뿐이지, 오늘이라는 현실적 단계를 즐기며 살아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시선이 항시 내일을 향해 고정되어 있기에 무엇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즐길 시간이 없다. 인생이란 무대 위에 성취한 그 무엇을 올려놓고 진득하게 즐길 시간이 없다. 하나의 목표를 성취하고 나면 또 다른 목표를 만들어 끊임없이 달리는 것이다. 이렇게 일하는 인간, 아니 일의 노예가 되어 내일을 향해 뛰어가는 동안 우리의 인생은 어느새 황혼기에 접어들고 만다. 그리하여 삶은 마치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다 끝나버린 허망한 인생살이로 다가온다."
현재를 즐겨라. 내가 이룬 성과를 즐겨라. 나는 그렇질 못했다. 참으로 억울한 노릇이다. 그냥 달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나마 내 삶이 황혼기에 접어들기 전에 이런 깨달음을 받은 것이 다행이다. 먼 발치에서 구경만 하다가 끝나버린 삶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오늘 행복해야겠다. 각각의 단계를 즐기면서 충만하게 살아가야 겠다. "승자는 과정을 위해서 살고, 패자는 결과를 위해서 산다. 승자는 달리는 도중에 이미 행복하나, 패자는 경주가 끝나야만 행복이 결정된다." 이 또한 중요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게 쉬운가. 현실에서 예상치도 못한 고난이 다가오는데, 그걸 즐길 수가 있는가. 송신부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고통은 더 이상 하느님의 진노에서 나오는 저주나 죄에 대한 심판의 표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를 단련시키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러면서 그는 성서 구절을 인용한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견책하시고, 당신이 받아들이시는 모든 아들에게 매를 드신다."(히브 12, 6)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묵시 3, 19)
"여러분은 견책을 받거든 참아내십시오. 하느님은 여러분을 아들처럼 대하십니다. 아버지가 견책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히브 12, 7)
사실 따지고 보면 고통도 오늘 고통일 뿐이다. 내일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니 그냥 오늘 고통만 견딜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된다. 그리고 실제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늘 하루의 고통을 견딜 힘을 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삶이 힘겨운 것은 우리 앞에 놓여진 모든 걱정을 미리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견딜 수 있다. 견딜 수 없는 것은 내일이다."
"오늘 하루만 사랑으로 살고, 오늘 하루만 화내지 않고 온유하게 살겠다고 결심한다면 삶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맞다. 매일 그렇게 생각하며 살 일이다.
"하지만 오늘이 아닌 앞날을 바라보면서 '도대체 언제까지 이것을 해야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하루하루가 힘든 것은 물론이요." 중환자를 오래 간호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견디기 힘든 것은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예견 때문이다. 그런 예견은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오늘 이타적이고 순수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된다.
"정신건강과 영혼건강에 가장 해로운 것은 내일 일을 오늘 걱정하는 것이다. 정신건강과 영혼건강에 가장 이로운 것은 내일 할 일은 내일 생각하는 것이다." "내일 일을 걱정하게 하는 것은 마귀의 주전략이다. 하느님은 당신 속성상 오늘을 살게 하시지만 마귀는 내일을 살도록 이끈다."
한국의 40대들이 과로로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서도 신부님은 한 마디 하신다. "한꺼번에 생명의 진을 고갈시켰기 때문이다." 내게 딱 들어맞는 말. 깊이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얼마나 바보처럼 살았는지.
"생명을 잘 보존하려면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은 힘들여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진리는 자연의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면 즉시 알수 있다. 자연은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진을 빼지도 않고, 최소한의 노력만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 보면 인생이 너무 밋밋한 게 아닌가 하고 회의할 수도 있겠다. 내 능력은 많은데, 너무 내가 게을러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역시 어릴적 받은 성실 교육의 효과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뭔가 거창한 일을 해야만 인생에 보람이 있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하셨다. 그러니 그 일을 잘 하면 된다.
"어떤 일이나 자기 소임터인 주방에서 일을 시작할 때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은혜를 구하였다. 그리고 일하는 동안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면서 하느님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었다."(중략)"나는 프라이팬 위의 오믈렛을 뒤집을 때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했습니다. 하다못해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 일까지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 사랑하는 법을 찾고 있습니다만, 무슨 일이든 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하면 됩니다." 이건 로렌스 수사님의 말이다. 그렇게 살면 된다.
나는 어떤가. 이 부분 심히 반성되는 부분이다. 나는 항상 거창한 것만 꿈꿨다. 지금 학교 현실이 못마땅하다고, 교육이 완전 붕괴했다고, 더 이상 제도교육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한탄만 했다. 진정 그러하면 뛰쳐나와 대안교육을 해야할 터인데 그렇지도 못한다. 그러면서 불평만이다. 작은 일, 그 작을 일 마다 "하느님의 일로 여기고 정성을 다해서 할 때" 하느님은 함께 하실 터인데 말이다. 어렵지만 항상 고민할 일이다. 집에서 청소할 때도 옆사람에 대한 원망으로 할 것이 아니라, 설겆이를 할 때도, 항상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며 할 일이다. 그러면 삶이 기쁘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실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모든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1고린 10, 31)"라고 말이다. 요즘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숲 만들기, 주님께 헌정하는 마음으로 할 것이다. 이 숲이 나중에 주님의 자녀들을 기쁘게 해주길 기도하면서.
또 하나 재미있고 실용적인 고민해소법을 읽었다. 심리학자 로빈 샤르마가 한 말이라고 한다. "걱정을 위한 고정된 시간을 저녁에 잡으십시오. 매일 저녁 30분 고정된 시간을 만들어서 그 시간에 걱정거리에 골몰하십시오. 그 대신 하루 중 나머지 시간에는 그 걱정거리를 잊어버리십시오. 만일 거정거리가 생기면 그것을 메모한 뒤 저녁 걱정하는 시간으로 넘기십시오. 이렇게 하면 점차 걱정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끝내는 걱정하는 습관 자체를 아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 걱정하는 시간이 되어 보면 이미 그 고민 거리가 해결된 뒤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이 사실은 이미 끝나버린 과거, 앞으로 오지도 않을 일 등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진짜 우리가 고민해야 될 것은 10%도 되지 않는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그런데도 우리는 90% 쓸데 없는 걱정에 짓눌려 살아간다. 벗어날 일이다.
랭크라는 사업가는 앞의 로빈 샤르마 박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일주일 동안 고민을 잊고 수요일에 집중적으로 그 문제 해결을 위한 고민을 했다고 한다. 고민 거리가 생기면 즉시 메모하여 고민함에 넣어 두고 그 순간만큼은 잊어버렸다고 수요일에 그 메모지를 꺼내 읽으며 하나씩 해결했다고 한다. 수요일에 꺼내보면 많은 경우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건이 되기도 했다 한다. 이건 정말 실용적인 지혜다. 창조적으로 내게도 적용해볼 만 하다. 일단 메모하고 잊어버릴 것.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집중적으로 고민할 것.
하나 오해하지 말 것은 미래를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미래를 설계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래를 준비하고 계획하고 대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적이어야 하고 즐거워야 하는 것이지, 짓눌리며 할 일은 아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3년은 현재의 우리 삶보다 더 바빴다. 가르침 주고, 병자를 치유하고, 잠도 못 주무시면서 하신 일이다. 그러나 그분의 마음은 평화 그 자체였다. 항상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바쁘게 살 필요는 있다. 다만 그것이 세속적 욕망을 위한 것일 때는 공허감만 남는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 뜻에 맞는 일이며,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라면 영적으로 충만할 것이다. 삶의 중심축에 그분을 항상 놓고 살기만 한다면 말이다.
더 바빠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바쁨은 어제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