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 대안의 상상력
콜린 워드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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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워드, <아니키즘, 대안의 상상력>, 돌베개, 2004.

2004년 10월 29일 초판 발행이라고 찍힌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책이다. 게다기 책 분량도 많지 않으면서 내용이 알차다. 어려운 이론보다 구체적 현실을 다룬 것도 장점이다.

이 책을 보고 있노라면 이제 아나키즘의 시대가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본다. 여러 보고서<에콜로지스트>에 따르면 2075년이면 자급적, 자율적 네트워크 공동체가 주류를 이룰 것이라고도 한다. 그 조짐은 이미 주변에서 감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정녕 맑스의 시대는 간 것인가? 청춘을 맑스의 가르침으로 살아 온 나로서는 이제 그렇다고 말하는 게 쉽지만은 않지만 정직하게 대답할 필요를 느낀다. 물론 맑스가 그 시대엔 최선의 대안이었음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 시대엔 분명 맑스가 옳았고 바쿠닌이 틀렸다. 하지만 이제는 바쿠닌의 뒤를 있는 아나키스트 프로토프킨 등의 주장이 옳다.

1872년 제1인터내셔널에서 맑스에게 패배하곤 역사의 무대 뒤쪽으로 밀려났던 바쿠닌이 마르크스를 비판했던 예언적인 글이 오늘에 와서야 그 빛를 발한다.

"마르크스는 권위적이고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공산주의자다.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경제적, 사회적 평등의 성취를 원한다. 그러나 그는 국가 내의 평등, 국가권력을 통한 평등, 막강한 즉 독재적인 과도정부의 독재를 통한 평등, 즉 자유의 부정을 통한 평등을 원한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경제형태는 국가가 토지와 자본을 독점하고, 국가 기술자의 지휘 아래 토지를 경작하고, 국가 자본으로 모은 산업적, 상업적 조직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국가를 해체하고 법(우리가 보기에 법이란 인권의 영구적인 부정이다)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모든 것들을 폐지함으로써 완전한 경제적, 사회적 평등을 성취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사회 재건과 인류 화합이 성취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방법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각종 권위나 사회주의 관료나 기술자나 그밖의 공인된 학자들을 통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굴레에서 해방된 모든 노동자 단체의 자유로운 연맹이라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힘이다"

이렇게 그들은 강력한 중앙통치를 거부했다. 물론 맑스라고 해서 그걸 꼭 하고 싶기야 했겠는가? 부르주아의 준동을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계급독재를 원하긴 했었다. 그러나 중앙통치는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건 역사가 이미 증명해 버렸다.

여기서 프루동의 비판도 듣고 가는 게 좋겠다.
"우리가 이룬 것이란, 겉으로는 인민 독재를 바탕으로 한 탄탄한 민주주의였지만, 그 안에서 민중은 과거 절대왕정에서 가져온 원칙들로 구성되는 노예제를 승인해주는 것 이상으로 힘을 갖지는 못했다. 공권력의 독점, 과도한 중앙집권화, 분열적이라고 간주되는 모든 개인적, 자치적, 지역적 사고의 구조적 파괴, 엄중한 치안 등 모든 절대왕정의 방식들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마찬가지의 비판이다. 행정을 넘어선 통치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서 그 정치적 과잉은 빚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아나키스들의 최고 원칙인 자발성을 완전히 갉아 먹는다.

아나키스트들이 원하는 건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조정하는 개인과 집단의 확장된 네트워크인 것이다. 아무리 인간해방, 노동해방을 부르짖었던 맑시즘도 어쩔 수 없이 범할 수밖에 없었던 피라미드 형 조직구조, 이걸 아나키스트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세우는 주장이 "피라미드에서 네트워크로"이다.

이 때 아나키스트들이 강조하는 건 직접행동, 자치, 노동자 경영권, 분권주의, 동맹주의이다. 간디의 경우도 직접행동이다. 넓게 본다면 간디 역시 아나키즘적 방식으로 살았다는 말이다.

직접행동은 참으로 많은 걸 생각하게 해 준다. 대의민주주의가 최선인 양, 나의 권리를 사실상 특정의 소수에게 위임해 버린 나의 나태를 반성케 하기도 한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너무 정치중심적이고 정부기관의 움직임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주변의 환경을 바꾸려는 직접적인 노력의 효과들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직접행동의 습관은 자유로운 사회에서 책임감 있게 살 준비가 되어 있는 자유로운 사람의 습관, 바로 그것이다."

이런 게 있어야 '자발적 질서 이론'이 자리잡을 수 있다. 아나키즘의 조직원리, 즉 리더쉽의 해체, 복잡성을 통한 조화, 우두머리 없는 동맹들도 이것이 있어야 온전하게 실현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80년 광주에서도 그 자발적 질서의 예를 보아왔다. 국가기관이 없을 때라야 오히려 그게 가능했던 경험말이다. 우두머리 없는 조직은 요듬 온라인 조직, 번개라든가, 노사모라등가 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이미 우리 사회는 아나키적 생활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근대 합리성이 이미 '철창'이라는 오명을 쓴지도 오래다. 이 철창을 깨고 나오는 건 인간의 존엄성과 책임감을 내세우는 그런 사회적 자기결정행동을 내세우는 아나키즘인 것이다.

자유는 질서의 아들이 아니라 그것의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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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 환경 공동체
구승회 외 / 모색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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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승회, 김성국 외 지음, <아나키, 환경, 공동체>, 1996, 모색

왜 다시 아나키즘인가?



아나키즘, 매력적이면서도 약간은 대책없는 친구들의 사사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국내 번역어부터가 문제였다. 무정부주의라니. 이게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모든 억압체제를 타파하기 위해 정부를 없애자는 그야말로 대책없는 친구들 같아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 아나키즘을 그리 쉽게 무정부주의로 단순화할 게 아니다. 그런 깨달음의 시작은 현기영 선생님의 <바람타는 섬>을 읽을 때부터 있었다. 그 때 나 나름대로 내린 번역어는 '자치적 조합주의', 혹은 '자치적 공동체주의' 정도였다. 그 번역이 오히려 맞다. 물론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강압을 가하는 국가를 파괴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니힐리즘적, 파괴분자인 듯한 무정부주의라는 이름을 쓸 수밖에 없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나키즘이 이제 21세기의 새로운 대안이라고 한다. 모범적 실험으로 여겨졌던 스페인의 몬드라곤 공동체도, 콜롬비아의 가비오따스도 따지고 보면 바로 이 아나키 사상을 구현한 조직인 셈이다. 그렇다면 정말 아나키즘은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가 눈길을 주어야할 사상, 조직이론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국내 아나키즘 연구자들이 처음으로 연구성과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그런만큼 진수가 녹아있기도 하면 쓸데없이 어려운 외국의 상황 속에서 헤메일 필요도 없다. 그래서 참 좋다.

"자본의 시대, 혁명의 시대, 국가의 시대가 급격하게 퇴조하는 20세기 후반기에 새로운 대안적 이념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경쟁체제 대신에 상호부조의 공동체를 지향하며, 권위주의적 계급독재 대신에 민중과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자유주의적 자치사회를 모색하며, 폭력과 억압에 기반을 두는 강권적 국가 지배 대신에 지역 단위의 소규모 연합사회를 추구하는 아나키즘은 감히 단언하건대, 21세기를 위한 분명한 시대적 좌표가 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핵심은 1) 상호부족의 공동체 2) 자유주의적 자치사회 3)지역단위의 소규모 연합사회(코뮨)이 핵심이다. 그 특징을 담은 단어들을 다시 열거해 보면 개인주의, 상호주의, 집합주의, 공산주의, 생디칼리즘, 평화주의이며, 반대의 개념은 자본주의, 거대주의, 위계서열, 도시주의, 전문화,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뒤쪽에서 바쿠닌과 맑스의 논쟁을 보여준 것도 흥미로웠다. 예전에 맑스를 공부할 때 바쿠닌의 <빈곤의 철학>을 맑스가 <철학의 빈곤>으로 통렬하게 맞받아쳤다고 읽었었는데, 그게 그 땐 무슨 내용인지 잘 몰랐었다. 이걸 이제 객관적 시선에서 다시 보게 된 건 또 하나의 소득이다. 여기서 봐도 바쿠닌이 깨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맑스가 옳았다. 최소한 그 때 그 상황에서는.
맑스가 노동해방을 위해서 국가권력의 장악을 외쳤을 때 아나키스트 바쿠닌 은 국가권력의 해체를 주장했다. 궁극적으로 국가권력은 또 다른 억압체제를 형설할 것이라는 주장에서 그랬다. 어느 것이 옳은가. 나는 여전히 맑스이 편에 서겠다.
하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꼭 그렇게만 택할 것도 아니다. 현실사회주의 권력이 인민을 옥죄었던 역사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사회 시민사회도 중앙집권화가 되면서 일부는 폐단을 드러내고 있다. 진정한 연대와 자율성이 손상입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자리에 아나키즘이 필요한 것이다.
진정한 자유와 그 자유를 바탕으로 한 연대, 물론 이것이 대책없는 낭만처럼 보일지라도 이제 현실은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맑스의 사상도 처음엔 대책없이 보이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극한으로 치달으며 맑스가 빛났듯이, 현재 사회의 여러 모순이 극에 달하면 어쩔 수 없이 소규모 공동체에 기반한 자치와 자율의 기치를 높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안교육도 마찬가지다. 획일화의 권력에 반기를 든 것이 대안교육이다. 그러므로 사실 이것은 아나키즘에 바탕을 둔 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던 슈마허의 사상도 그렇고, 녹색 평화를 부르짓는 오늘의 생태운동도 결국 따지고 보면 그 밑바탕에는 아나키즘이 깔려있다.
경쟁이 아닌 연대, 강압이 아닌 협동,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것, 그것은 결코 유토피아만이 아닐 것이다. 이때의 소비는, 자유는 사적 개인의 그것이 아니라, 사회적 개인의 그것이기에 자본주의적 탐욕이 개입되지 않는다. 그 자유는 남이 자유로와야 내가 자유롭다는 사회적 자유, 연대적 자유이기에 추하지가 않은 것이다.
이게 단순히 유토피아일까? 물론 자본주의적 삶에 찌든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 이제 이런 실험들은 시도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작은 규모로 진행되는 것이라 미친 부시의 광풍에 가려져 있지만 결국 작은 개미들의 반란은 세상을 바꿀 것이다.

이게 왜 다시 아나키즘인가에 대한 대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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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주의자 예수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 이진권 옮김 / 샨티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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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이탈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평화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평화주의자 예수>, 샨티, 2006.




출판사 이름이 샨티다. 내가 요가원에 들어가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범어 중 하나겠다. shanti, 샨스크리트어로 ‘평화’를 말한다. 그런 이름의 출판사에서 낸 책. 요즘 ‘평화’라는 단어는 “단지 티셔츠에 붙여진 문구나 자동차 범퍼 스티커에 인쇄된 또 하나의 문화 상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긴 하다. 속된 말로 개나 소나 다 평화를 말한다. 평화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기득권자도, 타락한 엔지오 단체도 모두 평화를 말한다.
다 나름의 평화다. 기득권 세력은 그 기득권 세력이 고요히 유지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걸 평화라 여긴다. 하층 사람들의 고통은 관심이 없다. 그 고통이 분노로 폭발하면 그건 평화를 깨는 소란이다. 타락한 엔지오도 모양내기를 위해서 평화라는 간판이 필요하다. 게바라의 얼굴이 극단적 소비주의에 의해 활용되는 것처럼 ‘평화’ 역시 이처럼 욕을 본다.
그렇다면 진정한 평화란 무엇인가? 어렵다. 물론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선 경쟁이 제거될 때 평화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경쟁이 있으면 다툼과 갈등은 필연적이다. 그렇게 되면 평화는 깨진다.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더 깊은 생각을 한다. 피상적 현실 너머의 영적 부분까지 다가간다. 나의 갈증을 채워줄 것 같았다. 그래서 잡았다. 작년 말에 읽기 시작했는데, 진도가 무척이도 더뎠다. 한 구절 한 구절 묵상하고 음미할 게 많아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결과로 내가 영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래도 성찰을 위해선 상당히 유익했다.
책의 목차는 우선 ‘평화를 찾아서’로부터 시작된다. 서문 격이다. 그 다음이 평화의 의미인데, 단지 전쟁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하는 게 아님을 역설했다. 익숙한 말이다. 무엇보다 나의 내면이 평화로워야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하면서 또한 실천하기는 쉽지 않음을 느낀다.
4부엔 그 평화로 다가가기 위한 징검다리들이 소개되어 있다. 단순함, 침묵, 굴복, 기도, 신뢰, 용서, 감사 등등이다. 침묵에서 생각한다. 자신을 변호하고 해명하기 위해 우리는 많은 말들을 한다. 침묵하고 있다간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평화의 신은 이걸 다 해결해 준다. 가만히 있어서 진실은 결국 들어난다. 쓸데없이 말을 하지 않는 것, 내면으로부터 우러나는 말 이외에는 하지 않는 게 평화로 가는 징검다리다. 그 침묵은 단순한 말 없음이 아니라 경청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침묵은 거륵한 영의 가장 깊이 잇는 수행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침묵은 더 이상 어떤 자기 정당화도 일어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침묵의 결실 중 하나는 하느님이 우리의 변호인이 되도록 맡기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오해를 바로잡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감사는 올해 내 삶의 화두로 삼기로 했다.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임을 느끼려고 한다. 이건 올해 초에 있었던 새해맞이 단식을 하면서 다가온 생각이다. 나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는다. 그러니 그 분의 모습처럼 살겠다. 내 안에 불성이 있음을 자각할 것이다. 그 불성 그대로 자비심으로 살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고 나니 내 주변이 모두 하느님이다. 최제우가 깨달음을 얻은 후 주변의 노비들에게도 절을 했다. 그들 모두가 곧 하늘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머리로 알고 가르쳤음에도 나는 여태껏 실천하질 못했다. 이제 실천할 때다. 내 주변 모두가 하느님이다. 공경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근데 이런 실천은 내가 평화로울 때 가능하다. “그대가 내면의 평화를 누릴 때만 이 세상의 평화를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랍비 심차 부님”
결국 평화는 내 삶의 총체적 영역 속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 “활동가들이 격분하게 되면 평화를 위한 자신의 활동을 무력화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활동을 열매 맺게 하는 내적 지혜의 뿌리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렵다. 그러기에 주변 모든 사람을 하느님으로 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물론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화가 날 때가 많다. 근데 예수님은 달랐다. 그는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자세,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개인 차원에서 평화는 완성되지 않는다. 저자는 “전쟁의 뿌리인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를 손에 쥔 채로 입으로만 떠드는 반전주의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는 경쟁의 배제, 나눔과 섬김과 연대라는 사고와 같은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평화는 단지 전쟁 같은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건 아니다. “어떤 것의 부재라기보다는 있을 수 있는 것을 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을 말한다.
궁극적으로 평화는 세속적 가치와 병존하긴 힘들다. “오직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이탈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그리고 그건 “우리 모두가 얼마나 지극한 선으로 부름 받았는지 깊이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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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세상 - 대한민국 인권의 현주소를 찾아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박영희 외 지음, 김윤섭 사진 / 우리교육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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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속도, 인권의 속도

박영희, 오수연, 전성태 글, 김윤섭 사진, <길에서 만난 세상>, 우리교육, 2006.


만남은 우연이었다. 책을 만난 것도. 책을 건넨 사람을 만난 것도. 김윤섭이라는 사람이 내게 선물로 준 것이다. 이 책의 사진을 맡은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이 책을 내게 줬다. 예전엔 국가인권위에서도 일했었다고 한다. 물론 그 때도 사진을 담당했겠지.
우연히 내가 그의 카메라 모델을 좀 했다. 세상 태어나 독사진만 그렇게 많이 찍어본 것도 처음이다. 그런 인연이었다. 그래서 그가 건넨 이 책도 처음엔 사진만 죽 훑었다. 좋았다. 느낌이. 과장하거나 기교가 없이 담담하면서도 애절하다. 사진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본래 애잔하게 다가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카메라를 통한 피사체가 그런 것인지는 구분이 되진 않았지만 암튼 아프면서도 뭔가 따뜻함을 주는 사진들이었다.

글을 읽은 것은 나중이다. 글에 주목해서 봤더니 이 원고들은 국가인원위에서 내는 책자에 정기적으로 실렸던 글을 모은 것이다. 우리사회의 주변을 찾아다닌 기록이다. 사회적 약자. 광포한 자본의 바람 앞에 그저 오돌 오돌 떨기만 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아프다. 어쩌지 못하고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욱 아프다.

글을 쓴 사람들은 문인들이다. 그래서인가 감수성이 많이 살아있다. 그리고 취재 목적으로 만났겠지만 그 대상 선정도 잘 한 것 같다.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어린 엄마들, 수험생, 코시안,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 여성, 도시 노인, 광부, 보안관찰 대상자, 무슬림, 좁은 공간에서 혼자 근무하는 사람, 어부, 농촌 청소년, 소록도의 나환자 등이다. 어쩌면 한결같이 외롭고 고통스럽다. 모두 사회적 약자다. 근데 가만히 보니 모두 경제적 무능력자들이다.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약자는 빈곤층이다. 인종, 직업, 성별 구분에 관계없이 약자들은 모두 경제 무능력자들이었다. 이런 제기랄.

쓰다 버린 소모품 정도로 다뤄지는 인생........
항상 그랬다. 자본의 속도가 인권, 복지의 속도보단 너무도 빨랐다.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인가. 돈이 사는 세상이지.

사진이 있어서 울림이 더 컸다. 김윤섭. 이 친구 덕에 다시 사진을 더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처박아 놓은 내 카메라도 한 번 꺼내 만져 보았다. 니콘 FM2. 고전이자 나의 첫 카메라다. 닦아보기도 했고, 맹수가 사냥감을 노려보듯 피사체를 향해 이리 저리 조리개도 돌려 보았다. 그리곤 철크덕. 이런 필름이 있었네. 몇 년 전에 찍다 남긴 필름이 그대로 감겨 있었구나. 그러다 맥없이 다 낡아 떨어진 카메라 가방에 그 놈을 집어 놓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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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 아나키즘의 토대를 마련한 고전! 세계를 뒤흔든 선언 6
하승우 지음 / 그린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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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를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하승우,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그린비, 2006.


삶의 근본을 묻고 그에 대한 답을 탐구해가는 대학을 온통 돈벌이 시설로 전락시키려던 총장이 교수들에 의해 불신임 당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고려대학교 총장이다. 근데 어제 옆집 아줌마의 견해를 들으니 안타깝다고 한다. 영어로 수업을 하고, 글로벌 시대에 빨리 적응시켜가려는 훌륭한 총장이 무사안일과 구태를 답습하는 교수들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현실이 몹시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근데 그 아줌마의 삶도 팍팍하다. 애들 사교육비로 걱정이 태산이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란다. 그 경쟁이 지독히도 싫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데도 그 아줌만 그 경영형 총장을 추앙한다. 그런 사람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끌림에 지쳐 헉헉대면서도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극성스럽게 사람을 내몬다. ‘경쟁’이라는 주술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단어다.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경쟁에서만 이긴다면. 왜 경쟁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경쟁을 통해 진정 얻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그저 경쟁은 선(善)일뿐이다.

그러나 그 경쟁이 인간을 행복하게 했는가. 아니다. 경쟁은 강약을 나누었고, 강자는 약자를 지배했다. 그 과정에서 폭력이 동원되고, 제도가 이용되었다. 합법적 권위든 비합법적 권위든 그 모든 권위는 그렇게, 사람들을 눌렀다.
이제 벗어날 때가 된 것이 아닐까. 맑스도 이 경쟁을 싫어했지만, 결국은 그도 경쟁 속에 해결책을 찾기도 했다. 생산력 발전이라는 경쟁. 하지만 이제 생태계의 위기가 코 앞이다. 더 이상 활용할 화석 자원이 많지도 않다. 이제 생산력은 파괴력일 뿐이다. 천규석의 말처럼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그린비에서 내는 ‘세계를 뒤흔든 선언’ 시리즈가 몇 년 전부터 선보였다. 선두는 단연 맑스의 공산당 선언이었다. 근데, 이번에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 나왔다. 나 역시 그의 책을 전부 읽진 않았다. 단편적으로 보았을 뿐이다. 이번 그린비에서 낸 책 역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다이제스트로 만든 것이다. 시대 배경과 그리고 현재적 전망까지 붙였다. 그러기에 부족한 책이면서도 전체를 조망하기엔 좋다. 물론 우리 조성윤 사부같은 이는 이런 책을 싫어하신다. 원본으로 정직하게 읽어야 진수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 말도 맞다. 나중엔 분명 그렇게 읽을 것이다.
오늘은 그냥 편하게 맛만 보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달다. 얻을 게 많다.
무정부주의라고 잘못 번역된 아나키즘, 도대체 무엇일까. 사전엔 ‘권위를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나키스트’라고 나와 있다 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정치권력을 형성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것, 대중이 스스로 결정하고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의사결정구조를 만들 것, 간단히 말해서 대중의 직접행동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 이런 것이 그들의 주장이라고 한다.
물론 그들의 스펙트럼은 대단히 넓다. 극단적 개인주의에서부터 에코 아나키, 집단적 아나키까지. 하지만 크게는 프루동 류의 상호주의, 바큐닌 류의 조합주의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물론 간디 같은 사람도 서양적 조류와는 무관하게 철저한 아나키스트이다. 톨스토이도 그렇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파리 코뮨’을 모범적 선구로 삼는다. 이는 맑스도 그렇다. 그러나 맑스는 그 코퓬이 성공하기 위해선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당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반면 아나키스트은 더 많은 인민자치를 주장한다. 혁명을 위한 당은 또 다시 권위를 가진 억압기구가 되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뭣도 모르면서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을 패러디하면서 비판한 맑스의 <철학의 빈곤>을 추앙했다. 그리고 그 시절엔 맑스가 옳기도 했다. 전두환 독재를 깨려면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인민자치보단 강력한 대항권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노무현 정권과 여러 엔지오들의 작태를 보면서는 권력은 권력일 뿐임을 절감한다. 한 개인의 타락으로 설명될 게 아닌 것 같다. 권력은 그 본질적 속성상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그게 내가 아나키스트로 전환한 근본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철저한 비폭력 노선에 공감했기에 맑스에게서 벗어나게 되기도 했다. 그래서 찾은 게 크로포트킨이다.
생존경쟁보다 상호부조를 설파한 그였기에. 제국주의가 창궐하던 19세기 말엔 그야말로 다윈의 진화론이 사회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온통 약육강식, 적자생존일 뿐이었다. 그래서 1차대전도 합리화되었고, 우리의 항일 투사들도 일본 따라 배우기의 부국강병을 꿈꿨다. 그러나 그 결과는? 환경파괴와 목 조이는 경쟁일 뿐이다. 나누고 싶어도 그런 놈은 우리 사회에서 바보취급을 당할 뿐이다. 아니면, 자기 것은 다 챙기고 제스처로만 해야 한다. 그래야 생존이 가능하다.
하지만 꼭 그러한가. 아니다. “자연선택은 지속적으로 가능한 한 경쟁을 피하는 방법을 추구한다.” 교사들도 교원평가를 거부하고 싶어 한다. 안일 때문이 아니다. 그 경쟁 속에서 교육이 죽기 때문이다. 그런 걸 보면 경쟁은 어쩔 수 없이 우리를 내모는 억압기제일 뿐, 본성은 아닐 수도 있다. 얼마든지 상호부조를 키워낼 수도 있을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그것을 주목했다.
역사책도 그렇다. “역사가들은 인간의 삶을 투쟁일변도로 과장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폄훼하는 문헌들을 연구한다.” 맞는 말이다. 왜 3국이 전쟁을 벌이는 면에만 초점을 두어 서술했을까. 왜 전쟁 영웅을 그리 조명 못해 안달이었을까. 전 역사를 따져보면 전쟁보다는 평화의 시기가 더 많지 않았던가. 우리 역사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싸움에만 눈을 고정하는 획일적 시각. 이젠 새롭게 역사를 서술할 필요도 있다. 평화의 관점에서.
예를 들면 “만일 전쟁으로 내 꿈을 실현할 기회가 온다고 해도 나는 전쟁에 반대할 것이다. 그 누구도 시체더미 위에 인간의 사회를 건설할 수는 없는 법이다”라는 말을 남긴 르쿠앵 같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역사책을 서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그렇게 해서 끊이 없이 대안적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유럽의 68혁명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고, 현재 진행되는 다양한 대안적 상상력, 생태 공동체 등에도 주목한다. 교육 분야에도 관심이 많다. “공교육이란 사회정의를 모독하는 제도”라고 한다. 근대학교의 창시자 페레라는 사람의 말이라고 한다. 즉 공교육은 과거에 확립된 사회적 편견을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율성을 억압하고 중앙정부의 감독 아래 지배이데올로기를 공급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평등한 현실의 경쟁을 감추는 기만적인 평등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이 시험, 처벌, 상장 등의 경쟁을 없애고 자율적인 수업계획을 보장하려 했던 이유는 교육체계가 인성의 자율적 성장을 보장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교사도 권위를 가진 지배자가 아니라 학생들의 자율성을 키워주는 도우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탈중심화된 네트워크형 민주주의의 가능성’, 최근 거대 엔지오들의 타락도 바로 이런 방법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신도 수가 100명을 넘어서면 바로 조직을 쪼개는 안디옥 교회처럼, 소규모 공동체들끼리의 네트워크라야 건강성이 유지되면 작은 긴장을 품게 된다.
한국 아나키스트 역사를 요약하는 과정에서 제주출신 고순흠의 이야기가 여기에 소개되어 있다. “조선노동공제회를 탈퇴한 아나키스트 중 한 명인 고순흠은 간판과 서류를 불태우면서 점차 볼세비키가 침투케 되자 고질적인 사대주의자가 발생이 되고 공산당 선전비 쟁취에 민족적 추태가 노골화케 되므로 창립책임감에 분노를 금치 못하여 부득이 파괴를 감행했다고 밝혔다.” 반갑다. 괜히.
저자는 앞으로의 아나키즘을 전망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도 소개한다. 요즘 한 참 잘나가는 ‘노마디즘’이다. 국내에선 이진경이 그 책을 썼다. 국가와 자본에 포획되지 않는 유목이 핵심이겠다. 물론 나는 아직까지 그 책을 읽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앞서는 이진경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솔직히 선진적 지식 유통상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유럽에서 뜨는 경향을 국내에서 가공해서 팔아먹는. 그래서인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라는 천규석에 더 동의한다.
어쨌든 아나키즘의 모색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사상적 편력도 계속 될 것이다. 하지만 기본만큼은 달라지지 않는다. “가지 않은 또 다른 길”이기에 두려움이 많긴 하다. “무한 경쟁에 길들여진 우리의 몸과 마음이 계속 망설이고 있을 뿐”이라는 저자의 말에 완벽히는 동의하지 않지만, 어쨌든 나 역시 주저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다. 삶이고 실천이기에 차분히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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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길 2010-08-15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내용이네요. 이념과 생각을 싫어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