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 환경 공동체
구승회 외 / 모색 / 1998년 12월
평점 :
품절


구승회, 김성국 외 지음, <아나키, 환경, 공동체>, 1996, 모색

왜 다시 아나키즘인가?



아나키즘, 매력적이면서도 약간은 대책없는 친구들의 사사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국내 번역어부터가 문제였다. 무정부주의라니. 이게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모든 억압체제를 타파하기 위해 정부를 없애자는 그야말로 대책없는 친구들 같아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 아나키즘을 그리 쉽게 무정부주의로 단순화할 게 아니다. 그런 깨달음의 시작은 현기영 선생님의 <바람타는 섬>을 읽을 때부터 있었다. 그 때 나 나름대로 내린 번역어는 '자치적 조합주의', 혹은 '자치적 공동체주의' 정도였다. 그 번역이 오히려 맞다. 물론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강압을 가하는 국가를 파괴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니힐리즘적, 파괴분자인 듯한 무정부주의라는 이름을 쓸 수밖에 없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나키즘이 이제 21세기의 새로운 대안이라고 한다. 모범적 실험으로 여겨졌던 스페인의 몬드라곤 공동체도, 콜롬비아의 가비오따스도 따지고 보면 바로 이 아나키 사상을 구현한 조직인 셈이다. 그렇다면 정말 아나키즘은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가 눈길을 주어야할 사상, 조직이론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국내 아나키즘 연구자들이 처음으로 연구성과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그런만큼 진수가 녹아있기도 하면 쓸데없이 어려운 외국의 상황 속에서 헤메일 필요도 없다. 그래서 참 좋다.

"자본의 시대, 혁명의 시대, 국가의 시대가 급격하게 퇴조하는 20세기 후반기에 새로운 대안적 이념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경쟁체제 대신에 상호부조의 공동체를 지향하며, 권위주의적 계급독재 대신에 민중과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자유주의적 자치사회를 모색하며, 폭력과 억압에 기반을 두는 강권적 국가 지배 대신에 지역 단위의 소규모 연합사회를 추구하는 아나키즘은 감히 단언하건대, 21세기를 위한 분명한 시대적 좌표가 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핵심은 1) 상호부족의 공동체 2) 자유주의적 자치사회 3)지역단위의 소규모 연합사회(코뮨)이 핵심이다. 그 특징을 담은 단어들을 다시 열거해 보면 개인주의, 상호주의, 집합주의, 공산주의, 생디칼리즘, 평화주의이며, 반대의 개념은 자본주의, 거대주의, 위계서열, 도시주의, 전문화,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뒤쪽에서 바쿠닌과 맑스의 논쟁을 보여준 것도 흥미로웠다. 예전에 맑스를 공부할 때 바쿠닌의 <빈곤의 철학>을 맑스가 <철학의 빈곤>으로 통렬하게 맞받아쳤다고 읽었었는데, 그게 그 땐 무슨 내용인지 잘 몰랐었다. 이걸 이제 객관적 시선에서 다시 보게 된 건 또 하나의 소득이다. 여기서 봐도 바쿠닌이 깨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맑스가 옳았다. 최소한 그 때 그 상황에서는.
맑스가 노동해방을 위해서 국가권력의 장악을 외쳤을 때 아나키스트 바쿠닌 은 국가권력의 해체를 주장했다. 궁극적으로 국가권력은 또 다른 억압체제를 형설할 것이라는 주장에서 그랬다. 어느 것이 옳은가. 나는 여전히 맑스이 편에 서겠다.
하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꼭 그렇게만 택할 것도 아니다. 현실사회주의 권력이 인민을 옥죄었던 역사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사회 시민사회도 중앙집권화가 되면서 일부는 폐단을 드러내고 있다. 진정한 연대와 자율성이 손상입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자리에 아나키즘이 필요한 것이다.
진정한 자유와 그 자유를 바탕으로 한 연대, 물론 이것이 대책없는 낭만처럼 보일지라도 이제 현실은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맑스의 사상도 처음엔 대책없이 보이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극한으로 치달으며 맑스가 빛났듯이, 현재 사회의 여러 모순이 극에 달하면 어쩔 수 없이 소규모 공동체에 기반한 자치와 자율의 기치를 높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안교육도 마찬가지다. 획일화의 권력에 반기를 든 것이 대안교육이다. 그러므로 사실 이것은 아나키즘에 바탕을 둔 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던 슈마허의 사상도 그렇고, 녹색 평화를 부르짓는 오늘의 생태운동도 결국 따지고 보면 그 밑바탕에는 아나키즘이 깔려있다.
경쟁이 아닌 연대, 강압이 아닌 협동,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것, 그것은 결코 유토피아만이 아닐 것이다. 이때의 소비는, 자유는 사적 개인의 그것이 아니라, 사회적 개인의 그것이기에 자본주의적 탐욕이 개입되지 않는다. 그 자유는 남이 자유로와야 내가 자유롭다는 사회적 자유, 연대적 자유이기에 추하지가 않은 것이다.
이게 단순히 유토피아일까? 물론 자본주의적 삶에 찌든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 이제 이런 실험들은 시도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작은 규모로 진행되는 것이라 미친 부시의 광풍에 가려져 있지만 결국 작은 개미들의 반란은 세상을 바꿀 것이다.

이게 왜 다시 아나키즘인가에 대한 대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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