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주의자 예수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 이진권 옮김 / 샨티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이탈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평화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평화주의자 예수>, 샨티, 2006.




출판사 이름이 샨티다. 내가 요가원에 들어가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범어 중 하나겠다. shanti, 샨스크리트어로 ‘평화’를 말한다. 그런 이름의 출판사에서 낸 책. 요즘 ‘평화’라는 단어는 “단지 티셔츠에 붙여진 문구나 자동차 범퍼 스티커에 인쇄된 또 하나의 문화 상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긴 하다. 속된 말로 개나 소나 다 평화를 말한다. 평화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기득권자도, 타락한 엔지오 단체도 모두 평화를 말한다.
다 나름의 평화다. 기득권 세력은 그 기득권 세력이 고요히 유지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걸 평화라 여긴다. 하층 사람들의 고통은 관심이 없다. 그 고통이 분노로 폭발하면 그건 평화를 깨는 소란이다. 타락한 엔지오도 모양내기를 위해서 평화라는 간판이 필요하다. 게바라의 얼굴이 극단적 소비주의에 의해 활용되는 것처럼 ‘평화’ 역시 이처럼 욕을 본다.
그렇다면 진정한 평화란 무엇인가? 어렵다. 물론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선 경쟁이 제거될 때 평화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경쟁이 있으면 다툼과 갈등은 필연적이다. 그렇게 되면 평화는 깨진다.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더 깊은 생각을 한다. 피상적 현실 너머의 영적 부분까지 다가간다. 나의 갈증을 채워줄 것 같았다. 그래서 잡았다. 작년 말에 읽기 시작했는데, 진도가 무척이도 더뎠다. 한 구절 한 구절 묵상하고 음미할 게 많아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결과로 내가 영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래도 성찰을 위해선 상당히 유익했다.
책의 목차는 우선 ‘평화를 찾아서’로부터 시작된다. 서문 격이다. 그 다음이 평화의 의미인데, 단지 전쟁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하는 게 아님을 역설했다. 익숙한 말이다. 무엇보다 나의 내면이 평화로워야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하면서 또한 실천하기는 쉽지 않음을 느낀다.
4부엔 그 평화로 다가가기 위한 징검다리들이 소개되어 있다. 단순함, 침묵, 굴복, 기도, 신뢰, 용서, 감사 등등이다. 침묵에서 생각한다. 자신을 변호하고 해명하기 위해 우리는 많은 말들을 한다. 침묵하고 있다간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평화의 신은 이걸 다 해결해 준다. 가만히 있어서 진실은 결국 들어난다. 쓸데없이 말을 하지 않는 것, 내면으로부터 우러나는 말 이외에는 하지 않는 게 평화로 가는 징검다리다. 그 침묵은 단순한 말 없음이 아니라 경청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침묵은 거륵한 영의 가장 깊이 잇는 수행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침묵은 더 이상 어떤 자기 정당화도 일어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침묵의 결실 중 하나는 하느님이 우리의 변호인이 되도록 맡기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오해를 바로잡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감사는 올해 내 삶의 화두로 삼기로 했다.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임을 느끼려고 한다. 이건 올해 초에 있었던 새해맞이 단식을 하면서 다가온 생각이다. 나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는다. 그러니 그 분의 모습처럼 살겠다. 내 안에 불성이 있음을 자각할 것이다. 그 불성 그대로 자비심으로 살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고 나니 내 주변이 모두 하느님이다. 최제우가 깨달음을 얻은 후 주변의 노비들에게도 절을 했다. 그들 모두가 곧 하늘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머리로 알고 가르쳤음에도 나는 여태껏 실천하질 못했다. 이제 실천할 때다. 내 주변 모두가 하느님이다. 공경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근데 이런 실천은 내가 평화로울 때 가능하다. “그대가 내면의 평화를 누릴 때만 이 세상의 평화를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랍비 심차 부님”
결국 평화는 내 삶의 총체적 영역 속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 “활동가들이 격분하게 되면 평화를 위한 자신의 활동을 무력화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활동을 열매 맺게 하는 내적 지혜의 뿌리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렵다. 그러기에 주변 모든 사람을 하느님으로 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물론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화가 날 때가 많다. 근데 예수님은 달랐다. 그는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자세,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개인 차원에서 평화는 완성되지 않는다. 저자는 “전쟁의 뿌리인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를 손에 쥔 채로 입으로만 떠드는 반전주의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는 경쟁의 배제, 나눔과 섬김과 연대라는 사고와 같은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평화는 단지 전쟁 같은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건 아니다. “어떤 것의 부재라기보다는 있을 수 있는 것을 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을 말한다.
궁극적으로 평화는 세속적 가치와 병존하긴 힘들다. “오직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이탈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그리고 그건 “우리 모두가 얼마나 지극한 선으로 부름 받았는지 깊이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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