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바드기타 -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간디가 해설한
간디 해설, 이현주 옮김 / 당대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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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해설, 이현주 옮김, <바가바드기타>-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간디가 해설한.


벌써 몇 주 전에 손대었던 책이다. 방학 시작하고 무기력한 1주일을 넘긴 뒤 영혼의 고갈을 느끼며, 아니 그 보다는 예전서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기에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도 읽지 못한 상태에서 잠시 손에서 놓았었다. 갈구의 심정이 강할 때는 조금 들어오는가 싶더니 이내 고단해졌다. 아직 나의 심성이 차분히 경전을 읽을 때가 아니어서 그랬던가.
그래, 경전은 매일 꼬박꼬박 조금씩 읽고 묵상하는 거야 라는 핑계를 대며 잠시 두었었다. 그러나 뒤닦기를 하지 않고 나온 기분처럼 영 불편했다. 그래서 다시 손에 들었다.

이현주 목사가 옮긴 것이다. 그 전에 간디가 해설한 것이다. 그럼 누가 지은 것이냐고? 경전인데 뭐. 힌두 경전.
이현주는 간디를 언급하면서 "물질에 바탕한 문명이 시들고 새로이 정신(영혼)에 바탕한 문명이 피어나는 21세기를 맞이하여, 간디의 맑고 깊고 아름다운 영혼이 바야흐로 세계를 다시 부추길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여 후기에 썼다. 내가 요즘 이런 책을 즐겨 찾는 이유도 그 때문일까.

바가바드기타를 예전부터 눈여겨 놓았던 건 크리슈나의 가르침이 있는 경전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크리슈나가 아주르나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경전은 구성되어 있다. 시바, 브라만, 크리슈나가 인도의 3대 신이다.

경전을 읽고 어떻게 그것을 하나로 요약하겠는가? 그냥 내게 다가온 것만을 잠깐 메모해 둘 뿐이다. 물론 내게 전체적으로 준 가르침은 집착에서 벗어날 것. 여기서 집착이란 사실 이기심이다. 혹은 내 몫에 대한 집착이다. 이걸 버리라는 것이다. 행위의 열매을 기대하지 말고 그냥 신을 위해 일을 하라는 것이다. 신을 위해 일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웃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좋은 말이다. 실천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그래도 이런 책을 읽으면 잠시라도 내 삶을 돌이키게 된다.
어제 읽기를 끝냈던 문익환 평전의 가르침과도 유사하다. 예수도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라고 했다지 않은가. 그리고 그 구절을 문목사님도 좋아했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지금 이 가르침에 목말라 있기에 그런 구절들만이 강조되어 들어오는 것일까.

좋았던 구절들을 옮긴다.
먼저 "세상의 하인으로 살아라. 그 이상의 일은 너의 능력 밖에 있다."

마음의 고요함이 요가이니라.(2장 48절)
집착하는 일 없이 일하되 요가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라. 요가는 행위의 열매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초연한 태도를 선물로 받아 행위의 결과를 바라지 않는 현자들은 태어남이라는 사슬에서 풀려나 온갖 재난과 병고로부터 해방된 상태에 들기 때문이로다.(2장 51절)

육신을 지탱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94쪽- 이건 요번에 강화도에서 만난 성공회 신부 천용욱 신부가 "꼭 먹어야 할 게 아니라면 굳이 먹지 않습니다"라는 말과 상통한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가르침이 반복된다.

이것들을 단단히 틀어잡고서 요기는 오로지 나에게 열중해야 하느니라. 자신의 감각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만이 그 깨달음에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2장 61절)

그런 즉 그대가 해야만 하는 일을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이룰지어다. 집착하지 않고 행동함으로써 사람은 지고자에 이르니라.(3장 19)

요가를 아는 사람은 행위의 열매를 포기함으로써 영원히 계속되는 평화를 누리거니와 요가에 무지한 자는 이기욕으로 열매에 집착하여 그 사슬에 묶이는도다.(5장 12)

오, 아르주나여, 자기 자신을 남들과 같이 여기는 사람, 모든 사람의 즐거움과 아픔을 자기의 즐거움과 아픔으로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높은 요기라고 일컬어지느니라(6장 32)

마음을 신에게 모으는 것을 뜻하는 명상이 '즈나나'보다 낫다. 그러나 행위의 열매를 포기하는 것이 그 명상보다도 낫다고 말한다.

<바가바드기타>는 이 점을 거듭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 '나'라고 하는 생각을 벗어던지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446쪽

우리가 이렇게 움직이는 것은 신이 당신의 뜻에 따라서 우리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공을 조금 세웠다고 해서 우쭐거릴 터무니가 없다. 500쪽

정신적으로 카르마를 포기하면 그 사람은 '나'와 '내것'이라는 생각(감각)에서 해방된다. 그리하여 그는 야즈나의 정신으로 오직 남의 이익을 위해서만 일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남을 섬김으로써 성스런 공덕을 쌓고, 남을 괴롭힘으로써 죄를 초래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자기중심에서 자유로우면 비록 속도는 느려도 틀림없이 목적지에 도달한다....531쪽

스리 크리슈나는 카르마 요가의 탁월함을 설명한다. 누구든지 카르마를 통해 요가를 수련하려는 자는 자기의 모든 카르마를 신에게 바쳐야 한다고 말하면서 카르마에 수반되는 다른 것들을 설명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지식에 의하여 풍요로워져야 한다.
지식의 길과 카르마의 길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지식의 길만 오로지 좇는 사람은 가슴이 메말라지고 카르마의 길만을 오로지 좇는 사람은 머리가 멍청해진다.


이 일에 있어서는 늘 그렇듯이 단호한 결심에서 솟구쳐나오는 태도란 하나뿐이니라. 오, 쿠루난다여. 그러나 단호한 결심을 내리지 못한 자들의 태도는 가지각색이요, 도 끝이 없도다.(2장 41절)

어쨌거나 가장 마음에 남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세상의 하인으로 살아라. 그 이상의 일은 너의 능력 밖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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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5
김형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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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수 지음, <문익환 평전> 2004. 실천문학사


하, 벌써 10년이구나. 1994년 1월 18일.
우연이었을까, 포항에서 생활하던 내가 그 때 잠시 서울에 있었다. 충격이었고, 곧바로 한일병원을 찾아갔었다. 그 때의 그 가슴 무너짐,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이었구나.
책을 구입해놓고 읽기 전까지만해도 이 책이 왜 지금 나왔을까 의아해 했다. 그런데 벌써 10년이라. 정말 가까운 시간 같은데

책은 가계에 대한 소개부터 시작된다. 간도로 이주해간 선조들의 이야기, 그곳에서 전개되는 개척과 항일운동, 그리고 윤동주 등의 벗들 이야기. 여기까진 그냥 그랬다. 조금은 미화되고 있다는 괜한 시비와 함께, 그렇게 읽었다.

하지만 내가 살았거나 혹은 관심을 가지고 고민했던 1970년대 이후의 이야기는 달랐다. 아니 어쩌면 그 때부터가 목사님의 사회운동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의 낙천주의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신앙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신앙이다. 특히 그의 신앙은 개인이 아니라 가정 전체가 공유하는 신앙이기에 두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십자가는 치욕이요 패배요 비극이라고 모두 생각할 때 예수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에게서 십자가와 치욕은 영광으로, 패배는 승리로, 비극은 축복으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최악을 최선으로 바꾸는 일,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환원하는 일, 이것이 바로 예수가 인류에게 보여준 것이 아니겠어요?"
-극한의 폭력 앞에서 오만해지는 문익환의 이러한 태도.......시련에 부딛칠수록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도취되는 사람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가정의 분위기였다. 부모님 모두 훌륭한 신앙을 가진 시대의 지도자들이었다. 문목사 나이 72에 방북 이후 재판을 받는 자리에서 방청석에 겨우 들어올 수 있었던 90나의 그의 어머니가 외쳤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를 향해 가는 심정으로 재판을 받아라, 익환아, 그것을 기억해라"라고 말이다.
이런 신앙이 있었기에 거침이 없었던 것이다. 원효의 무애가처럼, 그에겐 거칠 것이 없었다. 이적단체 고무 찬양죄를 적용하자 오히려 그는 북한을 더욱 고무 찬양해야 통일이 된다며 거칠 것 없이 맞받아 친다. 진실에 서 있는 사람만이 드러낼 수 있는 당당함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없이 겸손하다. 그 스스로가 항상 강조했듯이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목사님이 그랬다. 한없이 겸손함.
"내가 찬양받고 싶다는 것. 그건 밀려오는 바다와 같이 무서운 시험이에요. .....하느님께 돌려야지 생각했지요."
-수도의 길로써는 프로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수도에 전문가란 있을 수 없다. 수도가 직업이어서는 안 된다. 수도자는 완성된 경지에 들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수도자는 언제나 초심자여야 한다. 수도자는 지금 자기가 도달한 경지를 언제나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어린애처럼 새로운 안목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해답을 구하는 자세가 수도자의 자세다.'

그런 겸손은 또한 운동 속에서 헛된 과욕을 부리지 않게도 했다. 아니 이건 겸손이 아니라 목숨을 건 치열한 신앙고백이다. 계속된 단식을 만류하는 지인들에게 그는 "예수님이 내 나이까지 사셨으면 일을 얼마나 많이 하셨겠어? 너무도 엄청나게 일을 많이 하셨을거야. 그러나 그는 돌아가셨거든. 죽어서 큰 일을 하신거야. ....후배들이 잘 해주겠지."
"팔십, 백 살을 살아도 할 일은 남아 있는 법이야."

이제 책을 덮는다. 내 젊은 시절, 그가 없었다면 안그래도 황폐했던 내 영혼이 얼마나 더 황폐해졌을까.
10년 만에 그를 기린다. 영원한 청춘 문익환 목사님.

오늘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구절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며....
"수도자는 언제나 초심자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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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사회 -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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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학벌사회>, 한길사. 2004.




한국사회에 교육은 없다. 다만 권력과 사회적 자본의 획득 도구만이 있었을 뿐이다. 한국사회의 교육열? 그건 거짓말이다. 출세열이다. 이 땅에서의 교육은 자기실현의 기관이 아니다. 보다 높은 서열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타인과 치열하게 생존투쟁을 벌이는 전쟁터가 되었다.
대학은 이미 학문 연구의 전당이 아니다. 권력을 보장해주는 전쟁터일 뿐이다. 교수들도 학문 연구를 하는 게 아니다. 권력과 부를 얻기 위해 매진할 뿐이다. 학문연구와 교육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팽걔쳐버리고 오직 공동체 구성원들의 복리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한다. '우리'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미쳤다. 온통 돈만이 최고의 가치다. '우리'를 돈 많은 곳으로 이끌어 주는 게 소위 지도층 인사, 그와 더불어 학문 연구자들에게도 최대의 과제이다.

그러한 까닭에 이 땅에 전인 교육은 사라졌다. 이 땅의 학생들은 자기의 자유로운 영혼을 학벌에 팔고 그 대가로 사사로운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밤을 잊고 시험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대학생들도 추구하는 건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이상이 아니다. 사사로운 욕망과 이기심 그리고 맹목적인 감정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을 어떻게 탓하랴. 그리고 그렇게 내몰고 있는 부모의 정성을 어떻게 탓하랴.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학벌 문제가 단지 의식 개혁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제도적 개혁이 없고서는 아무 것도 안된다. 아이들은 불쌍하게도 청춘을 담보잡혀 살아야하고, 또 그 과정에서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본래 참된 교육은 전인 교육이다. 전인교육은 "철학, 도덕, 예술 그리고 체육 교육이 함께 어우러져야 된다. 체육은 몸을 위한 교육이며, 예술은 희노애락의 정서적 감수성을 위한 교육이며, 도덕은 의지를 위한 교육이고 마지막으로 철학은 말과 생각을 위한 교육이다. 건전한 지성과 올바른 의지, 풍부한 정서 그리고 튼튼한 몸이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소질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생각하는 힘'을 길러줘야 한다. 참된 지식은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까닭을 아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여 사물의 이치를 자기 속에서 승인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온통 시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시험은 과정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목적이 되어있다. 완전한 가치전도다. 시험이 결정적인 보상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험이 프랑스식으로 열린 시험이 아니다. 완전히 획일적인 답을 요구하는 닫힌 시험이다. 이 경우 학생들은 더욱 노예적으로 구속될 뿐이다. 자유를 지향하는 것이 교육일진대, 거꾸로 우리의 교육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습득해야 하지만 아무것도 스스로 생각할 수 없고 그 결과 타인의 지식과 소외된 진리에 노예적으로 굴종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 때 인간은 앎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지식과 정보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런데도 공부를 잘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니? 우린 어릴 때부터 이 말을 많이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자. 현재 한국사회에서 공부 잘하면 권력과 자본을 얻는 것이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훌륭하다는 말에는 '선'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기에 이기적 욕망을 위한 성적이 곧바로 선을 확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선한 가치와 거리가 멀어지기 쉽다.

그런데도 왜 우리사회에선 그런 말이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것일까? 학벌을 가진, 즉 권력과 부를 갖춘 사람에게 너무도 주눅들어 살아오면서 그것을 스스로 정당하다고 인정해버린 결과다. 그리고 그것을 추종한다.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고 혼자, 내 자식만이라도 그 대열에 포함시켜 보려고 아둥바둥 거린다. 그러면서 그것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한다.

김상봉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러 칼럼을 통해 그의 논리의 탁월함과 정당함을 알고 있었기에 주문한 책이다. 그런데, 철학자의 글답게 딱딱하다. 칼럼과는 다르다. 학술적이면서도 대중적이다. 이 정도 써야 탄탄한 글이 될 것이다. 물론 그도 인정했듯이 한국사회의 학벌문제를 제대로 처음 조명했던 건 1996년 강준만이다. 그의 <서울대의 나라>가 정확히 이 문제를 건드리며 사회적 이슈로 떠올렸다. 솔직히 강준만의 글이 쉽고 잘 들어온다. 그러나 나 역시 학문세계를 기웃거리는 처지이기에 김상봉의 글같은 학문적인 글에도 익숙해야 한다.

우선 김상봉은 학벌이 학연이나 학력과 다름을 잘 해설한다. 학력차별은 어떤 면에서 나름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능력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벌 차별은 다르다. 이건 패거리의 힘이다. 능력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다만 기득권자들의 패거리가 뿜어내는 능력이기에 부도덕하고 정당성이 없다. 물론 한국사회에선 학력도 그것이 순수하게 학문적이지 못하다 보니 차별을 정당화하기에는 무리다. 시험성적이 학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학연과도 다르다. 학벌은 패거리 권력이기 때문이다. 이건 보이지 않게 작동하므로 자칫 학연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일과 뜻에 따라 모이지 못하고 이권에 따라 뭉치고 헤어지는 학벌은 부도덕하며 미개한 짓이다.
그래서 김상봉은 "학력은 속성이요 학연은 관계다. 그러나 학벌은 속성도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표현해, 주체이다."라고 말한다. 부도덕한 욕망의 주체라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건 그 패거리로 권력과 부를 독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학생과 학부모가 그것을 향해 올인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곳에 들어가는 건 소수다. 뻔한 게임인데도 모두 매달린다. 그 사이에 낭비되는 에너지를 국가 전체로 따진다면 어마어마한 것이다. 자아실현을 위한 에너지가 아니다. 단지 권력과 부를 획득하기 위해 '학업'이라는 외피를 둘러쓰는 것일 뿐이다.

결론 부분에서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이렇다. 우선 서울대 학부의 한정적 폐지다. 그러면 그 이후서부터라도 서울대 학벌은 약화될 기미를 보인다. 그리고서 전국의 모든 국공립 대학의 동시 전형을 통해 이들간의 우열을 없애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대는 대학원 중심으로 전환하고, 이 대학원 입학자격은 국공립대학 출신에게만으로 한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권력독점은 사라지고, 진정 학문을 하려는 자들은 국립지방대와 서울대 대학원의 과정을 밟게 된다.
더하여 모든 고시, 공직자 임용에 있어서 인구비례의 지역 할당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그래야 쏠림 현상을 방지할 수 있다. 이 쏠림이 없다면 그 미친 '교육열'도 사라질 것이다.
또 하나 이력서 안에 학력란을 폐지하는 것이다. 그래야 공정 경쟁이 된다. 학력을 접고 실제 지금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기에 이게 공정한 경쟁이다.

이런 방식들은 국가 권력이 의지만 있으면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권력 역시 서울대 출신이다. 그래서인가 망가져 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그들의 권력이 영원하기만을 꿈꾼다.
한계까지 가야만 반성할 것인가.

어쨌거나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그리고 교사로서 교육의 본질을 지켜가고 싶다. 출세의 수단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실현 도구로서의 교육, 참된 삶을 배워가는 수단으로서의 교육을 그린다. 성적에 앞서 자아실현을 항상 고민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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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자연이다 - 귀농 부부 장영란·김광화의 아이와 함께 크는 교육 이야기
장영란.김광화 지음 / 돌베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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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란, 김광화, <아이들은 자연이다>, 돌베개, 2006.



광고를 보고 주저 없이 샀다. 돌베게 출판사 책이니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부쩍이나 요즘 노작교육, 생태적 삶, 귀농 등의 단어를 고민하는 시기, 그 와중에 은근히 걱정되는 게 애들 교육이길래, 뻔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마음을 다시 다잡기 위해서 책을 샀다.
광고에서도 그랬지만, 사진이 참 좋다. 출판 기획자가 세심하게 배려한 듯 하다. 그런데 화려함 뒤의 허전함이라고나 할까. 솔직히 이 책은 사진만 좋다라고까지 혹평하고 싶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사진은 따로 또 찍은 사람이 있구나. 전문 작가가 사진에만 따로 매달려 있다. 그 만큼 의도된 책이다. 그랬기에 감동이 적은 것인지 울림이 없다. 출판을 위해 모든 게 맞춰져 있는 느낌이다.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정작 그들은 자연을 숭배하고 있건만. 하긴 기대가 컸기에 실망이 큰 것이겠지.

부제는 '귀농부부 장영란, 김광화의 아이와 함께 크는 교육 이야기'다. 그래서 좀 자연에 가까울 거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의 삶은 그랬다. 부럽다 못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울림이 작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건 이 책이 너무 작위적이라는 점 때문인 것 같다. 어색하다. 인텔리 냄새가 농민의 냄새를 압도한다. 귀농 등의 용어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여전히 인텔리적인 어색함이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구성과 편집 자체도 그렇다. 마지막 부록에 실린 큰 딸과의 대화는 더더욱 그렇다. 애들은 도사다. 이미 세상을 달관한 도사다.
물론 자연이 아이들을 키워준다는 것을 강조하느라. 애들의 훌쩍 자란 모습을 많이 드러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너무 어설퍼 보였다. 자연스럽지 못하고 인텔리의 감성만이 잔뜩 묻어나오는 느낌이다.
차리리 뻔한 책이었으면 이렇게 실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귀농이라는 게 쉽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이 책을 통해 느낀다. 그들 가족 네 사람의 삶이 너무도 훌륭함에도 그것이 책으로 엮어져 나오는 과정에선 왠지 어색하고 불편함이 진하게 느껴지는 건, 아직 그들이 숙성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냥 자연 그대로의 삶이면 족할 것 같은데, 그걸 굳이 물질 문명세계와의 비교를 애써 해 댄다. 그게 오히려 귀농적 삶의 부족과 불편을 자인하는 모습으로 읽혔다. 넉넉함이면 쉽게 이겼을 것인데, 애써 변명하는 듯한 모습, 그리고 그걸 애써 글로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본다.
미안한 말이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다. 물론 나른 저렇게 살 자신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솔직할 순 있다. 괜히 폼 잡지는 않겠다. 근데 이들 삶은 왠지 그런 폼이 많이 묻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래도 좋은 구절은 옮긴다.
"나무 한 그루가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자기 빛깔로 자라기 때문." 이건 주체성을 가지고 살라는 말이다. 이 나이에도 나는 자주 많이 흔들린다. 나의 빛깔, 이젠 좀 공고히 할 때도 되었는데 말이다. 오히려 젊을 때보다 많이 흐려진 것 같다.
"공부하다 지겨울 만하면 일하고, 일하다 지겨우면 공부하면 돼."
애들이 한 말이다. 자연 순리대로 살아가니, 걱정은 부모 몫일 뿐이라는 것이다. 애들이 도사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여기선 그런 점들만 유난히 부각시켰다. 도시 가족들을 의식한 듯 '우린 아주 행복해'라며 필요 이상의 선언을 해대는 것 같다. 과도한 강조가 오히려 어색하다는 말이다.
물론 저렇게 살면 좋긴 하겠다. 나중에 나라도 저리 살아야지.

전인(全人)과 전문가를 언급하며 전인이 되라고 한다. 물론 좋은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전문가를 외면하고 살기가 그리 쉬울까. 전인으로 살라고 말하는 저자들 역시 전문가다. 생태, 귀농, 글쓰기 부분에서 그렇다. 이건 모순이다. 아니 아직 덜 성숙한 탓이다. 그냥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전문가적 지식이나 능력도 필요하다고. 그러면서 전인을 지향해야 한다고. 이렇게 말하는 게 솔직하다.
저자들은 전문가를 '사람의 상품성'이라고 말한다. 맞다. 아주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선 이게 필요하다. 상품 가치가 없으면 단 하루도 살지 못한다. 그러나 상품 가치를 높이는 건 중요하다. 다만, 그 자체에 매몰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생존을 위해서 상품 가치는 높여두는 게 좋다.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문제다. 맹목이지 않으면 된다.

'아이들의 일' 부분은 많이 공감한다. 시간에 쫓기다 보면 애들이 거추장스럽다. 그러니 애들은 학원이나 가서 시간 보내오면 좋겠다. 이제 계속 만들 솟대 작업도 그렇다. 애 엄마는 애들과 함께 만들라고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작업 속도가 늦다. 그리고 위험하다.
그래도 다시 생각해야겠다. 위험성을 최소화할 수 있게 내가 미리 많이 깎아놓고, 애들은 조립만 하라고 해야겠다. 물론 작업 속도가 많이 느려지긴 하겠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일은 '돈벌이로서의 일'일 수도 있지만 '생명으로서의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존에 큰 지장이 없는 한은 '생명으로서의 일'에 많은 초점을 맞춰야겠다. "일이란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일하는 그 순간순간에 집중할 때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아이가 깨우쳐준 것이다."

암튼 나는 그들이 부럽다. 내가 혹독한 이야기만 썼지만 그건 그들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반증일 뿐이다. 솔직하게 접근할련다. 어려운 건 어렵다고. 내가 실천할 수 있는 한에서만 할 것다.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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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가 내아이를 천재로 만든다
이시이 이사오 지음, 신채식 옮김 / 키출판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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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井 勳, <한자가 내 아이를 천재로 만든다>, 키출판사, 2003.




책 제목이 좀 그렇다. 내 아이를 천재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별로 당기는 제목은 아니다. 천재? 그거 피곤하다. 평범함 속에서 성실하게 그리고 맑고 밝게, 이웃과 함께 하며 사는 게 좋다. 그러니 나는 굳이 내 아이를 천재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자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선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다. 아무리 한글 전용, 국어 사랑을 외쳐도 나는 그 취지엔 공감할 지언지, 한자 자체가 가지는 효용성과 그 철학적 깊이에 대해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내 아이 덕연이가 벌써 여섯 살이다. 나는 내 공부에 바빠 사실 아이들을 챙기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불쑥 커버린 내 딸 덕연이를 보며 아빠가 챙길 것은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규칙적인 만남이 우선 필요하겠다 싶었다. 아무런 매개체 없이 만나는 게 아니라 특정 매개체를 가지고 아이와 내가 대화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섯 살 아이라면 지적 욕구도 왕성할 때다. 그리고 바쁜 아빠하고 같이 하고 싶은 시간도 많을 나이이다. 더 커버리면 멀어진다. 그러기 전에 같이할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으로 만날까 생각은 한자였다. 오래 전부터 나는 한자 교육이 삶에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걸 택했다. 다만 두려웠던 건 아이에게 너무 어려운 공부를 강요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다행이 덕연이는 아빠와 한자 공부하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다. 한자공부보다 아마 아빠하고 시간을 같이 갖는다는 게 좋았으리라. 그러고 보면 내가 지금까지 참으로 못된 아빠였던 것 같다. 저렇게 아빠와의 시간을 원하고 있었음에도 그것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나 혼자 바쁨으로 시간을 다 써버렸으니........

그런 고민 속에 지난주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특별한 교육론은 없었다. 그냥 하는 것이다. 읽고 쓰고 그러면 된다. 그러나 생각보다 덕연이가 제대로 익히질 못했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점에서 찾은 책이다. 한자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게 효율적일까 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책 제목을 보면서는 아니다 싶었지만 아쉬운 대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생각 외로 얻을 게 있었다. 물론 책 분량은 20페이지면 충분히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겠다 싶었다. 여러 차례 계속되는 반복, 그리고 엄청나게 큰 활자. 장사 속이다 싶었지만 참고 읽었다. 어쨌거나 얻은 게 있었으니 참 다행이다.

핵심적인 메시지는 이렇다. 한자는 이미지다. 그러니 복잡하게 쓰려고 하지 말고 이미지 그대로 일단은 읽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추상을 나타내는 글자 말고 구체적 사물을 가리키는 글자부터 익히게 하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홉 구(九)라는 추상어보다 비둘기 구(鳩)라는 구체적 글자를 더 빨리 익힌다는 것이다. 어른들의 사고방식이라면 당연히 아홉 구가 쉬울 것 같은데 실험 결과 그렇지가 않다고 한다.

맞는 말 같다. 우선은 관심이다. 그리고 그 관심은 생활 속에서 나온다. 추상적인 게 아니라 구체적인 생활 속의 사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제 바빠지겠다. 집에 있는 각종 사물들에 한자로 명찰을 붙여놔야 한다. 일상 속에서 익힐 수 있게 말이다

바쁜 아빠, 좋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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