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사회 -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김상봉, <학벌사회>, 한길사. 2004.




한국사회에 교육은 없다. 다만 권력과 사회적 자본의 획득 도구만이 있었을 뿐이다. 한국사회의 교육열? 그건 거짓말이다. 출세열이다. 이 땅에서의 교육은 자기실현의 기관이 아니다. 보다 높은 서열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타인과 치열하게 생존투쟁을 벌이는 전쟁터가 되었다.
대학은 이미 학문 연구의 전당이 아니다. 권력을 보장해주는 전쟁터일 뿐이다. 교수들도 학문 연구를 하는 게 아니다. 권력과 부를 얻기 위해 매진할 뿐이다. 학문연구와 교육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팽걔쳐버리고 오직 공동체 구성원들의 복리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한다. '우리'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미쳤다. 온통 돈만이 최고의 가치다. '우리'를 돈 많은 곳으로 이끌어 주는 게 소위 지도층 인사, 그와 더불어 학문 연구자들에게도 최대의 과제이다.

그러한 까닭에 이 땅에 전인 교육은 사라졌다. 이 땅의 학생들은 자기의 자유로운 영혼을 학벌에 팔고 그 대가로 사사로운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밤을 잊고 시험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대학생들도 추구하는 건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이상이 아니다. 사사로운 욕망과 이기심 그리고 맹목적인 감정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을 어떻게 탓하랴. 그리고 그렇게 내몰고 있는 부모의 정성을 어떻게 탓하랴.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학벌 문제가 단지 의식 개혁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제도적 개혁이 없고서는 아무 것도 안된다. 아이들은 불쌍하게도 청춘을 담보잡혀 살아야하고, 또 그 과정에서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본래 참된 교육은 전인 교육이다. 전인교육은 "철학, 도덕, 예술 그리고 체육 교육이 함께 어우러져야 된다. 체육은 몸을 위한 교육이며, 예술은 희노애락의 정서적 감수성을 위한 교육이며, 도덕은 의지를 위한 교육이고 마지막으로 철학은 말과 생각을 위한 교육이다. 건전한 지성과 올바른 의지, 풍부한 정서 그리고 튼튼한 몸이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소질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생각하는 힘'을 길러줘야 한다. 참된 지식은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까닭을 아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여 사물의 이치를 자기 속에서 승인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온통 시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시험은 과정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목적이 되어있다. 완전한 가치전도다. 시험이 결정적인 보상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험이 프랑스식으로 열린 시험이 아니다. 완전히 획일적인 답을 요구하는 닫힌 시험이다. 이 경우 학생들은 더욱 노예적으로 구속될 뿐이다. 자유를 지향하는 것이 교육일진대, 거꾸로 우리의 교육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습득해야 하지만 아무것도 스스로 생각할 수 없고 그 결과 타인의 지식과 소외된 진리에 노예적으로 굴종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 때 인간은 앎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지식과 정보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런데도 공부를 잘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니? 우린 어릴 때부터 이 말을 많이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자. 현재 한국사회에서 공부 잘하면 권력과 자본을 얻는 것이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훌륭하다는 말에는 '선'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기에 이기적 욕망을 위한 성적이 곧바로 선을 확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선한 가치와 거리가 멀어지기 쉽다.

그런데도 왜 우리사회에선 그런 말이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것일까? 학벌을 가진, 즉 권력과 부를 갖춘 사람에게 너무도 주눅들어 살아오면서 그것을 스스로 정당하다고 인정해버린 결과다. 그리고 그것을 추종한다.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고 혼자, 내 자식만이라도 그 대열에 포함시켜 보려고 아둥바둥 거린다. 그러면서 그것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한다.

김상봉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러 칼럼을 통해 그의 논리의 탁월함과 정당함을 알고 있었기에 주문한 책이다. 그런데, 철학자의 글답게 딱딱하다. 칼럼과는 다르다. 학술적이면서도 대중적이다. 이 정도 써야 탄탄한 글이 될 것이다. 물론 그도 인정했듯이 한국사회의 학벌문제를 제대로 처음 조명했던 건 1996년 강준만이다. 그의 <서울대의 나라>가 정확히 이 문제를 건드리며 사회적 이슈로 떠올렸다. 솔직히 강준만의 글이 쉽고 잘 들어온다. 그러나 나 역시 학문세계를 기웃거리는 처지이기에 김상봉의 글같은 학문적인 글에도 익숙해야 한다.

우선 김상봉은 학벌이 학연이나 학력과 다름을 잘 해설한다. 학력차별은 어떤 면에서 나름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능력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벌 차별은 다르다. 이건 패거리의 힘이다. 능력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다만 기득권자들의 패거리가 뿜어내는 능력이기에 부도덕하고 정당성이 없다. 물론 한국사회에선 학력도 그것이 순수하게 학문적이지 못하다 보니 차별을 정당화하기에는 무리다. 시험성적이 학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학연과도 다르다. 학벌은 패거리 권력이기 때문이다. 이건 보이지 않게 작동하므로 자칫 학연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일과 뜻에 따라 모이지 못하고 이권에 따라 뭉치고 헤어지는 학벌은 부도덕하며 미개한 짓이다.
그래서 김상봉은 "학력은 속성이요 학연은 관계다. 그러나 학벌은 속성도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표현해, 주체이다."라고 말한다. 부도덕한 욕망의 주체라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건 그 패거리로 권력과 부를 독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학생과 학부모가 그것을 향해 올인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곳에 들어가는 건 소수다. 뻔한 게임인데도 모두 매달린다. 그 사이에 낭비되는 에너지를 국가 전체로 따진다면 어마어마한 것이다. 자아실현을 위한 에너지가 아니다. 단지 권력과 부를 획득하기 위해 '학업'이라는 외피를 둘러쓰는 것일 뿐이다.

결론 부분에서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이렇다. 우선 서울대 학부의 한정적 폐지다. 그러면 그 이후서부터라도 서울대 학벌은 약화될 기미를 보인다. 그리고서 전국의 모든 국공립 대학의 동시 전형을 통해 이들간의 우열을 없애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대는 대학원 중심으로 전환하고, 이 대학원 입학자격은 국공립대학 출신에게만으로 한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권력독점은 사라지고, 진정 학문을 하려는 자들은 국립지방대와 서울대 대학원의 과정을 밟게 된다.
더하여 모든 고시, 공직자 임용에 있어서 인구비례의 지역 할당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그래야 쏠림 현상을 방지할 수 있다. 이 쏠림이 없다면 그 미친 '교육열'도 사라질 것이다.
또 하나 이력서 안에 학력란을 폐지하는 것이다. 그래야 공정 경쟁이 된다. 학력을 접고 실제 지금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기에 이게 공정한 경쟁이다.

이런 방식들은 국가 권력이 의지만 있으면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권력 역시 서울대 출신이다. 그래서인가 망가져 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그들의 권력이 영원하기만을 꿈꾼다.
한계까지 가야만 반성할 것인가.

어쨌거나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그리고 교사로서 교육의 본질을 지켜가고 싶다. 출세의 수단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실현 도구로서의 교육, 참된 삶을 배워가는 수단으로서의 교육을 그린다. 성적에 앞서 자아실현을 항상 고민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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