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바드기타 -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간디가 해설한
간디 해설, 이현주 옮김 / 당대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간디 해설, 이현주 옮김, <바가바드기타>-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간디가 해설한.


벌써 몇 주 전에 손대었던 책이다. 방학 시작하고 무기력한 1주일을 넘긴 뒤 영혼의 고갈을 느끼며, 아니 그 보다는 예전서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기에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도 읽지 못한 상태에서 잠시 손에서 놓았었다. 갈구의 심정이 강할 때는 조금 들어오는가 싶더니 이내 고단해졌다. 아직 나의 심성이 차분히 경전을 읽을 때가 아니어서 그랬던가.
그래, 경전은 매일 꼬박꼬박 조금씩 읽고 묵상하는 거야 라는 핑계를 대며 잠시 두었었다. 그러나 뒤닦기를 하지 않고 나온 기분처럼 영 불편했다. 그래서 다시 손에 들었다.

이현주 목사가 옮긴 것이다. 그 전에 간디가 해설한 것이다. 그럼 누가 지은 것이냐고? 경전인데 뭐. 힌두 경전.
이현주는 간디를 언급하면서 "물질에 바탕한 문명이 시들고 새로이 정신(영혼)에 바탕한 문명이 피어나는 21세기를 맞이하여, 간디의 맑고 깊고 아름다운 영혼이 바야흐로 세계를 다시 부추길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여 후기에 썼다. 내가 요즘 이런 책을 즐겨 찾는 이유도 그 때문일까.

바가바드기타를 예전부터 눈여겨 놓았던 건 크리슈나의 가르침이 있는 경전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크리슈나가 아주르나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경전은 구성되어 있다. 시바, 브라만, 크리슈나가 인도의 3대 신이다.

경전을 읽고 어떻게 그것을 하나로 요약하겠는가? 그냥 내게 다가온 것만을 잠깐 메모해 둘 뿐이다. 물론 내게 전체적으로 준 가르침은 집착에서 벗어날 것. 여기서 집착이란 사실 이기심이다. 혹은 내 몫에 대한 집착이다. 이걸 버리라는 것이다. 행위의 열매을 기대하지 말고 그냥 신을 위해 일을 하라는 것이다. 신을 위해 일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웃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좋은 말이다. 실천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그래도 이런 책을 읽으면 잠시라도 내 삶을 돌이키게 된다.
어제 읽기를 끝냈던 문익환 평전의 가르침과도 유사하다. 예수도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라고 했다지 않은가. 그리고 그 구절을 문목사님도 좋아했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지금 이 가르침에 목말라 있기에 그런 구절들만이 강조되어 들어오는 것일까.

좋았던 구절들을 옮긴다.
먼저 "세상의 하인으로 살아라. 그 이상의 일은 너의 능력 밖에 있다."

마음의 고요함이 요가이니라.(2장 48절)
집착하는 일 없이 일하되 요가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라. 요가는 행위의 열매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초연한 태도를 선물로 받아 행위의 결과를 바라지 않는 현자들은 태어남이라는 사슬에서 풀려나 온갖 재난과 병고로부터 해방된 상태에 들기 때문이로다.(2장 51절)

육신을 지탱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94쪽- 이건 요번에 강화도에서 만난 성공회 신부 천용욱 신부가 "꼭 먹어야 할 게 아니라면 굳이 먹지 않습니다"라는 말과 상통한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가르침이 반복된다.

이것들을 단단히 틀어잡고서 요기는 오로지 나에게 열중해야 하느니라. 자신의 감각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만이 그 깨달음에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2장 61절)

그런 즉 그대가 해야만 하는 일을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이룰지어다. 집착하지 않고 행동함으로써 사람은 지고자에 이르니라.(3장 19)

요가를 아는 사람은 행위의 열매를 포기함으로써 영원히 계속되는 평화를 누리거니와 요가에 무지한 자는 이기욕으로 열매에 집착하여 그 사슬에 묶이는도다.(5장 12)

오, 아르주나여, 자기 자신을 남들과 같이 여기는 사람, 모든 사람의 즐거움과 아픔을 자기의 즐거움과 아픔으로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높은 요기라고 일컬어지느니라(6장 32)

마음을 신에게 모으는 것을 뜻하는 명상이 '즈나나'보다 낫다. 그러나 행위의 열매를 포기하는 것이 그 명상보다도 낫다고 말한다.

<바가바드기타>는 이 점을 거듭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 '나'라고 하는 생각을 벗어던지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446쪽

우리가 이렇게 움직이는 것은 신이 당신의 뜻에 따라서 우리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공을 조금 세웠다고 해서 우쭐거릴 터무니가 없다. 500쪽

정신적으로 카르마를 포기하면 그 사람은 '나'와 '내것'이라는 생각(감각)에서 해방된다. 그리하여 그는 야즈나의 정신으로 오직 남의 이익을 위해서만 일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남을 섬김으로써 성스런 공덕을 쌓고, 남을 괴롭힘으로써 죄를 초래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자기중심에서 자유로우면 비록 속도는 느려도 틀림없이 목적지에 도달한다....531쪽

스리 크리슈나는 카르마 요가의 탁월함을 설명한다. 누구든지 카르마를 통해 요가를 수련하려는 자는 자기의 모든 카르마를 신에게 바쳐야 한다고 말하면서 카르마에 수반되는 다른 것들을 설명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지식에 의하여 풍요로워져야 한다.
지식의 길과 카르마의 길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지식의 길만 오로지 좇는 사람은 가슴이 메말라지고 카르마의 길만을 오로지 좇는 사람은 머리가 멍청해진다.


이 일에 있어서는 늘 그렇듯이 단호한 결심에서 솟구쳐나오는 태도란 하나뿐이니라. 오, 쿠루난다여. 그러나 단호한 결심을 내리지 못한 자들의 태도는 가지각색이요, 도 끝이 없도다.(2장 41절)

어쨌거나 가장 마음에 남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세상의 하인으로 살아라. 그 이상의 일은 너의 능력 밖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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