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지테리안, 세상을 들다
쯔루다 시즈카 지음, 손성애 옮김 / 모색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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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쯔루다 시즈카, <베지테리안, 세상을 들다>, 모색, 2004.



방학이 확실히 좋다. 그 동안 허겁지겁 달리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많이 쉬고, 잘 먹고 그래서인가 건강도 많이 회복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회복한 건강 이상으로 내 삶이 많이 방만해져 있음을 느낀다.
세상이 온통 마몬(물신)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나 역시 그 물결에 쓸리고 말 것이다. 며칠 전 <한겨레>에 실린 도법 스님 인터뷰 기사가 인상에 남는다. 오랫 동안의 탁발 순례를 하고 나서 우리 사회를 보니, 온통 '전도미망'에 빠져 있더라는 말을 하셨다. 앞과 뒤과 거꾸로 선 채,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도 모르고 살고 있는 미망, 스님은 이 현상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질타하셨다. 그러면서도 연기론에 입각해 그 미망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다고 자책하셨다. 우리시대의 큰 스님이시다.

그래도 스님 같은 분이 계시기에 나 역시 다시 추스린다. 요즘 부쩍 비채식을 하는 경우가 늘었다. 건강을 이유로, 상황을 이유로, 생선류에 손을 많이 댔다. 물론 육식이야 여전히 멀리 했지만, 바닷고기는 상황을 핑계로 많이도 먹었다. 확실히 탁해졌다. 맑은 기운이 줄어들었다. 삶 자체가 흐릿해졌다. 다시 정돈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잡은 책이 <베지테리안, 세상을 들다>다. 그렇게라도 해서 나을 정돈하고 싶었다.

베지테리안은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 혹은 채식주의자와는 다르다. "1842년 베지테리안이라는 말은 라틴어 uesere(-에 생명을 주다)를 어원으로 해서 그것이 vegetus(활발한, 힘센)이 되고, vegetalis-vegetal(성장하다)로 변해서 만들어졌다. 베지테리안에 담긴 본 뜻은 인간의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우리들 마음의 건강과 동.식물에 대한 사랑과 공존으로, 나아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지구 차원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식생활에서 육식-차별과 불평등을 조장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굶주리게 하는 식문화-을 거부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베지테리안이다."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차별과 불평등과 굶주림을 조장하는 식문화에 반대하는 사람들' 바로 이런 사람이 베지테리안이다.

이 책에 의하면 베지테리안과 페미니스트, 아나키스트, 생태주의자 들간에는 상호 관련성이 많다고 한다. 느낌만으로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게 중에는 전혀 다른 성향을 보인 사람도 적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이 들 중 하나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다른 이념에도 친숙해질 것 같다. 나 역시 위의 네가지 사상을 공유하려고 한다.

반면 육식은 필연적으로 폭력, 전쟁, 탐욕으로 연결된다. 원시시대 사냥을 위주로 하던 남성이 이후 가부장 폭력으로 권력화한 것부터가 그렇다. 실제 육식을 즐겨하는 사람들의 성격이 훨씬 거칠다. 미국 애들 보면 그대로 보인다.
물론 서구사회가 요즘은 베지테리안이 생활하기에 더 좋긴 하다. 다양성을 충분히 인정하는 사회라 그렇다. 그리고 서구인들의 채식이 반드시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 때문에 나온 게 아니다. 그들도 나름의 전통이 있었다.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부터 아주 길게 그 맥이 이어져 있다. 실제 영국만 해도 전체 인구의 10% 가량이 베지테리안이라고 한다.

일본이나 한국은 근대 사회에 이르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어쩔 수 없는 베지테리안이었다. 그러나 서구화의 영향으로 강한 것은 서구, 서구는 육식, 이런 논리에 따라 열심히 고기를 섬겼다. 이제 돌아갈 때도 되었다.

책에는 유명한 베지테리안들의 일화가 많다. 톨스토이, 그는 고기를 '시체'라고 불렀다. 동생들이 고기를 좋아하자 하루는 식탁 다리에 살아있는 가금류를 묶어 놓고, 식탁 위에는 칼을 놓아 두었다고 한다. 직접 잡아서 먹으라는 의도였다. 이 방법은 아주 직접적인 것이다.

실제 우리는 '고기'와 '시체'를 너무도 다르게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한 가지다. "예전에 이 고기에 생명이 머물렀지라고 생각하는 일은 없다. 우리들 눈 앞에서 팔리고 있는 고기는 이미 조리된 제품에 불과할 뿐, 동물의 육체를 보여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목장이 아닌 공장 한구석에는 사육장에 수용할 수 있는 최대수의 동물을 넣어 기른다. 단기간에 살을 찌우는 약품을 첨가한 인공 사료를 먹이고 컨베이어벨트에 태워 눈깜짝할 사이에 대량의 진공팩으로 상품 포장이 완성된다."

일본의 어느 학교에서 학생들이 직접 닭을 잡아 요리를 하고 먹는 방식의 교육을 했다고 한다. 교육 후 학생들의 소감문 중에는 "왜 사람을 죽이면 형무소에 가고, 닭을 죽이면 왜 형무소에 가지 않는 것일까"라는 내용도 있었다. 왜 그럴까? 나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당연한 이치를 왜 어른들은 못깨닫는 것일까? 직접 닭을 죽여 보면 훤히 들어오는 이치인데.

그건 자신이 직접 도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도축하는 것을 보았거나(이것만으로도 베지테리안이 되어야 할 계기는 충분하지만), 혹은 그것마저 가려진 채, 시체가 아닌 고기라는 음식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불살생. 이건 직접 내 손으로 죽이지 않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간접 살상에 동참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한다. '자기 손으로 다른 생명을 빼앗는 것과 타인이 하는 것을 보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지만 베지테리안이라고 해서 무조건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경우에 따라서 먹긴 한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먹지는 않는다. 생명을 존중하고 때문에 기도를 하고 꼭 필요한 만큼만 먹는다. 그들이 평소 육식을 금하는 것은 고기가 불결하기 때문이 아니다. 고기는 신성하다. 생명이기 때문이다. 즉 연민 때문에 먹지 않는 것이지, 고기가 더럽다는 생각, 불결하다 등의 생각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즉 내가 고기를 먹은 만큼 그 고기의 생명은 내 안에서 살아 숨쉬게 되고 나 역시 죽어 또 다른 생물의 식량이 된다. 그러면서 나 역시 죽지 않고 살아있게 되는 것이다. 생명을 존중하며, 내가 다른 생물의 에너지로 전환되면서, 그렇게 생태계는 계속 이어지게 된다.
그러기에 당연히 베지테리안이 육식을 할 때는 반드시 동물에 대한 감사와 영혼의 윤회를 기도하는 의식을 치른다. 버팔로를 신으로 모시며 사냥을 했던 인디언과 심심풀이로 총질을 해댔던 백인과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채식을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육식을 할 경우 한 사람이 먹을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양의 사료가 필요하다. 그 사료를 키우는 토지면적은 10인의 식량을 키우는 면적과 똑 같다. 즉 채식을 하면 같은 면적에서 10명이 먹을 것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화를 위해서도, 빈민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채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환경운동가들, 생태운동가들은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베지테리안이 되어야 한다.

그런 속에서 우리가 꿈꾸는 세계는 만들어진다. 계속 톨스토이의 이야기. 그는 "인류의 협동과 연대를 향한 영혼의 동경을 사랑이라 부르고 이 사랑을 삶의 법칙으로 삼은 자세를 가리켜 무저항주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이은 사람이 바로 간디라고 한다.

그 간디의 이야기. "평화로의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이매진>이라는 노래를 부른 존 레논, 이 역시 베지테리안이다. 아나키스트이기도 하고. "천국도 지옥도 국경도 없고, 죽이는 일도 죽는 일도 종교도 없고, 소유도 탐욕도 굶주림도 없이 사람들이 평화롭게 형제자매의 인연으로 이어진 하나의 세계" 그가 꿈꾼 세계이다.

힘이 들어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직접 노동을 하고, 그렇게 말이다. 귀족 톨스토이도 노동을 했다. 밭을 갈았다. 글도 쓰고. "글을 쓰는 창작과 밭을 가는 농경은 매우 유사한 일이다.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온갖 정성을 기울여 작물을 키우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창작이든 농경이든 수확을 거두는 기쁨으로 이루어지는 생산활동이다. 펜을 쟁기로, 쟁기를 펜으로 구사하며 살아간 사람들은 세상에 무수히 많다. 톨스토이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나도 그 중 하나가 되고 싶다. 빠른 시간 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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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6년 1~2월 - 통권 86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녹색평론> 2006년 1-2월호.




요즘 잡지 중에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잡지가 바로 <녹색평론>이다. 1990년대, 이 잡지를 처음 접했고 한동안 정기구독을 했었으나 오래 동안 끊기도 했다. 버거웠기 때문이다. 김종철 선생은 끊임없이 내가 수용하기 어려운 생태적 가치들을 요구했고 나는 그것을 감당할 힘이 없었기에 숨어버렸던 것이다.

물론 그 후에 다시 구독해 보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살 순 없어도 그런 글을 읽는 것만으로 대리적 책무를 다한다고 위안하며 그랬었다. 그러나 버겁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런 버거운 책이 얼마 전부터인가 가장 친숙한 책이 되었다. 내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세상 꼴을 보고 난 후부터였을 것 같다. 진보 보수 막론하고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껴졌을 때 생태주의가 비로서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젠 머리로만 하는 그런 생태주의가 아니었다.

이번 <녹색평론>엔 버릴 글이 없다. 다 좋다. 예전에 번역문 등 일부 기사는 따분했으나 이번엔 번역문도 좋았다.

먼저 이연학 수도사의 글이다. 골프장 반대 싸움을 하면서 쓴 글인데, 수도자다운 원칙이 있어서 좋았다. 우리가 느끼는 고민 그대로를 잘 풀어놓아 주었다.
“환경주의자들의 주장이 집단 이기주의의 발로로 치부되는 이유는, 우리 시대의 몸통을 실핏줄마저 속속들이 지배하고 있는 어떤 근본적인 가치관 때문이다. 돈이 된다면 환경쯤이야 좀 짓밟고 지나가도 된다는 ‘지속 불가능한 발전’의 논리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배아의 생명쯤이야 희생시켜도 된다는 저 반생명의 논리와 정확히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그것의 이름은 다름 아닌 물신(마몬), 신이 되어버린 자본이다. 더 많이 가지는 것,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행복이라고 세뇌하는 이 ‘거짓의 아비’는 마치 육식 공룡처럼 닥치는 대로 먹어 삼키고도 늘 배가 고파있는 짐승이라는 사실을, 작금의 골프장 난립 상황에서 너무도 실감나게 관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천년 전에 마몬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가르침을 주신 바 있거니와, 참으로 오늘날 우리는 돈만 된다면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를 팔아먹고 불자도 부처님을 팔아먹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싶다.”
본질을 정확히 지적했다. “돈만 된다면”. 맞다. 그런데 그의 말대로 예수는 마몬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답은 나와 있다. 실천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마몬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

그걸 공선옥은 구체적으로 내게 들이민다. ‘먹고 사는 일의 엄중함’이라는 글에서 “이 시대에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 생존 이외의 부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 부를 절대로 타인과 나누려 들지 않는 사람들이 ‘먹고 살기 어렵다’는 말로, 정말로 먹고 살기 어려운 사람들로부터 도용하였다. 정말로 삶이 힘든 사람들은 결코 먹고 살기 어렵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살아갈 뿐이다. 처연하게 혹은 한없이 순결하게.”
여기서 가슴 후비는 소리. “생존 이외의 부”. 이것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 나 역시 이들이 가엽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나라고 해서 그 대열에서 벗어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 항상 긴장해야 한다. 내가 생존 이외의 부 때문에 본질을 놓치는 건 아닌지. 앞의 수사님 글에서처럼 마몬을 섬기고 있지 않은지를.

마몬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다 떠난 사람 중에 이선관이라는 시인이 있었다. 작년 말에 돌아가신 모양이다. 그이 유고 시들이 몇 편 실려 있고, 그의 삶에 대한 글이 같이 실려 있다. “시인의 사명은 생명을 옹호하고 지키면서 그것을 위협하는 불합리한 사회여건과 맞서는 것이다.” 이건 비단 시인만의 사명은 아닐 것이다. 역사가 역시 그런 사명을 가지고 있다. 시대적 소명에 누구보다 민감해야 하기에.
근데 이선근 시인은 정말 하느님을 섬겼던 모양이다. 그 화려한 중앙 무대에서 폼을 잡은 게 아니라 지방에서 소박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다. 역시 마몬의 유혹 대신 하느님을 택한 삶이다. 여기서 나의 삶을 반추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지 않은가. 남의 시선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내 삶(하느님)에게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본질을 다루고 있는 마당에 황우석 파동이 빠질 수 없다. 이 역시 따지고 보면 과학계의 마몬 숭배가 가져온 해프닝이다. 다음은 강양구의 ‘지금 여기, 과학기술의 파시즘’이라는 글 중 일부다.
“황 교수가 강조했던 난치병, 장애인 치료의 대의에 공감한 탓이라는 설명은 군색하기 짝이 없다. 난치병을 가진 환자가 도대체 몇 명인지 파악도 못하고 있는 사회에서 또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보장해 달라고 온 몸에 쇠사슬을 감고 절규해도 수년 간 눈 하나 깜짝 않던 사회의 구성원들 입에서 나올 법한 얘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한가지뿐이다. 바로 ‘돈, 돈, 돈’하는 한국사회의 분위기와 황교수의 연구가 궁합이 맞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진단이다. 돈 안 되는 학문은 이미 찬밥인지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대학은 개판이다. 특히 인문학은 이런 사회 풍토에 일침을 가해야 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따라가고 있다. 부러워하고 있다. 다음은 박경미의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옮긴 글이다.
“이런 종류의 인간들이 득세하는 장소로서의 오늘날의 대학은 급진적이지도, 지적으로 모험적이지도 않으며 가장 인습적이고 방어적인 집단이 되었다. 대학이야말로 파괴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산업주의 근면성이 지배하는 곳이 되었다. 현대과학은 이러한 오늘날 대학과 아무런 모순이나 갈등관계를 이루지 않으며, 도리어 그 선봉에 서 있다. 그리고 인문학을 비롯한 여타 분야는 지적 무기력에 빠져 있으면서도 과학의 ‘모범’을 따르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대학이 ‘산업주의 근면성이 지배하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근면한 건 좋은데, 산업주의 근면성이라면 문제다. 다들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하루를 살아간다. 이건 참 불쌍한 일이다.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정해 놓은 통제방식에 복종하는 것일 따름이니까 말이다.
박경미는 계속 말한다. 황우석 사태가 무엇을 말해주는지를.
“이 자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사람의 몸을 공격한다. 우리 밖에 존재하는 유형무형의 재화가 돈이라는 교환가치로 환산되는 시대는 옛날이고, 이제 자본주의는 생명과학의 힘을 빌려 우리 몸을 돈으로 환산하려 한다. 거대 자본이 투입된 현대과학은 인간의 몸 자체를 공격하여 교환 가능한 죽은 살덩어리로 만드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생명을 빼앗긴 난자가 고깃점이 되어 기계를 상대하고 있다. 난자가 기계에게 강간을 당한다.”
“그것은 탄생이 아니라 번식 (중략) 사랑의 연가가 아니라 해부학적 섹스”
“사람이 영혼을 잃고 온 세상을 얻은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맞다. 영혼을 잃으면 안 된다. 어떻게 죽는가는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이다. 우리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 우리 삶을 둘러싼 신비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잘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은 죽음에 저항하도록 우리를 부추기지만, 잘 죽을 수 있도록 우리를 가르치지는 못한다.”

결국 늘 그렇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가 화두다. 오늘 여기선 공선옥의 ‘생존 이외의 부’라는 말을 깊이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 수준의 부까지도 갖추지 못하면 주변에 폐가 된다. 그러나 그것 이상의 부는 오히려 삶의 근본적 목적을 잃게 만든다.
물론 사회보장제도가 워낙 허술한 한국사회이기에 노후를 대비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만큼은 철저히 경계할 일이다. 누가? 나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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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5년 11~12월 - 통권 85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녹색평론> 2005년 11-12월호(통권 85호)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무척 혼돈스런 시대를 살고 있다. 물신숭배가 극에 달한 시대이다. 방폐장 유치를 위해 주민투표를 벌이고, 과정은 무시한 채 결과만을 중시하는 황우석 애국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 마디로 절망하고 싶은 계절이다.

이 절망의 계절에 이번 호 <녹색평론>은 그래도 내가 살아있어야 함을 일깨워 주었다. 이번 호 권두언은 김종철 선생이 아니라 변홍철 선생이 썼다. 그 권두언 시작이 위의 시다. 테레사 수녀의 시라고 한다. 변홍철의 말처럼 이 시를 접하면 "깊은 수긍과 동의의 뜻을, 침묵과 눈빛과 미소로 나타"낼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시작과 실천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테레사 수녀는 무슨 대단한 능력과 수완으로 일을 했던 게 아니다. 그도 역시 한 번에 한 사람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었다. 단지 그는 "지금 시작함으로써" 그리고 "한 번에 한 사람씩 손을 잡음으로써"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켰다. 그에 비해 나는 얼마나 조급했던가. 대단한 변화, 한꺼번에 이뤄지는 그런 변화만을 꿈꾸지 않았던가. 하루를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그래서인가 이 시는 내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비록 그것이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에 불과할지라도 우리가 그 한 방울의 물조차 붓지 않는다면 그 바다는 한 방울의 물만큼 줄어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저 검은 절망의 광풍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말고 서로의 등을 토닥이며 가야한다. 그래서인가 나는 테레사 수녀의 시를 "기도와 투쟁에 대한 간절한 호소"로 읽었다.

스치다 다카시가 쓴 <공생공빈의 길>이라는 책이 이제 곧 번역되어 나오는 모양이다. 그 책의 서문을 소개한 코너가 있었다. 그 글만으로도 이 책을 사봐야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위의 테레사 수녀의 글처럼 많은 위안과 함께 길을 제시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고 외면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걸음씩 일상의 삶 속에서 쌓아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작은 노력을 되풀이하는 것은 즐거움이며 살아가는 자신과도 관계되어 있습니다."
"부처가 4고와 제행무상을 현실로 인지하면서부터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밝으냐 어두우냐가 아니라 엄중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곳에서부터 길이 열리리라 생각한다."
"엄청나게 어려운 미래일지라도 그것이 불가피한 일이라면 작은 노력들을 쌓아가면서 대비하는 것 이외는 길이 없다."
"무상불(無上佛)이라 칭한 것은 형태 없이 계심이다. 형태도 없으므로 자연이라 칭한 것이다. 자연이야말로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잔재주가 많은 인지(人知)와 선악을 초월하여 자연에 몸을 맡기는 경지의 의미를 설파한 것이리라."
그는 인간의 과학기술 문명을 손오공의 모험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신통력이 있다고 오만해졌을 때 고통은 스스로에게 돌아온다...공해 문제로 고통 받으며 환경문제로 고민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사는 데 있어서는 자기의 의지를 초월한 큰 힘에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감사할 일이다."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정치이며 사회이다. 돈을 추구하며 악착같이 사는 세상이다. 느긋하게 사는 것을 잊어버렸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활기 있는 상태를 '경기가 좋다'고 하면서 기뻐하고 있다. '바쁘다'는 것은 '마음을 망치는 것'이며 경쟁하고 효율을 추구하여 사람 사이를 갈라서 다투고 서로 상처를 입히게 된다."
"호흡을 지배하려고 하면 숨이 답답하게 되는 것과 같이, 자력의 극치에 있는 과학기술로 인해 오만해질 때 손오공의 금테가 조이듯 머리가 아프게 된다."

이계삼 선생의 글 '흙의 신앙, 인간의 교육'도 아주 느낌 좋게 읽었다. 물론 시대가 달라졌다. 그도 그걸 인정한다. 이오덕 선생의 책에서 인용하던 그런 시대는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심하다. "이곳에서도 흙의 신앙은 사라져 버렸다. 그러므로 인간다움의 기억을 정초할 바탕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도 기억도 없는 곳에서 가치 있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은 밥이니 밥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휴대폰을 먹고 컴퓨터와 자동차를 먹으며 살아야 한다는 도착된 논리 속에서 우리는 살게 되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요즘 시대엔 휴대폰이 신체의 연장이다. "아이들은 제 옆으로 질주하는 자동차는 무심히 비켜가지만 교실에 날아든 한 마리의 벌을 보고는 기겁한다."
"자연으로부터 쫓겨나 한국교육이라는 집단가학 시스템 속으로 유폐된 이 아이들은 제 자연적 본성을 돈을 주고 구매하는 말초적 즐거움에, 디지털로 분절되는 기계적 단순성에, 남을 밝고 일어서야 한다는 고독하고도 야수적인 경쟁의 논리에 가탁하면서, 서서히 영혼 없는 사회의 복제품이 되어간다. "
"아주 상식적인 그러나 고통스런 대안, 아이들을 다시 흙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 말고는 달리 다른 길이 ㅇ벗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루과이의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책에 대한 서평부분에서 옮긴다.
"개발도상국이라는 말은 얼마나 달콤한, 그러나 파괴적인 마약인가. 한 번 중독 되면 죽을 때까지 열심히 뛰게 되지만 언제나 뒤따라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브라질 주교 돔 헬더 까마라의 지적처럼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부르지만, 왜 먹을 게 없느냐고 물어보면 빨갱이라고 부르는" 뒤집혀진 패러독스의 세상이 바로 갈레아노가 본 '자본주의의 리얼리즘'인 것이다.
그의 시도 인용되어 있다. 다시 옮긴다.

공무원들은 공무를 보지 않고,
정치가들은 떠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유권자들은 투표하나 선출하지 못하고
미디어는 정보를 허위로 알려준다.
판사는 희생자들을 처벌하고
군대는 자기 동포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
경찰은 범죄를 저지르느라 너무 바빠서
범죄를 소탕하지 못한다.
이윤은 사유화되고
파산은 사회화된다.
돈이 사람보다 더 자유롭고
사람은 물건이 마음대로 한다.

그런 사회 바로 "끊임없이 돈을 벌어야 하고, 이것은 다시 끊임없는 소비로 이어진다. 소비는 더 많은 빚을 낳고 더 많은 경쟁을 야기한다. 결국 우리는 사람들끼리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물건과 살고, 물건을 사랑하면서 진짜 삶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작가란 정직해야 합니다. 자신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사고파는 존재가 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작가란 스스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스스로 인간으로서, 직업적 작가로서의 위엄을 지켜야 합니다. 자기들이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해야 합니다. 말은 진짜여야 합니다. 말은 가슴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짜입니다."
평자의 말처럼 "정치적 억압의 시대보다 소비상품주의 사회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작가로서의 위엄을 지키기가 더욱 어렵다."
그러나 "너무나 소중하고 성스러운 인간의 언어를 하나의 상품으로 내던지지 않을 신념"을 가져야만 하다. 그게 이 팍팍한 시대를 견디는 힘이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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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5년 9~10월 - 통권 84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녹색평론> 2005년 9.10월호




열린 우리당에서 간판으로 내세웠던 장애인 의원, 장향숙의원이 대표발의를 해서 지금 '수돗물 불소화' 법안이 통과될 기세에 있는 모양이다. 안타깝다. 그 분의 순수한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불소가 실제 인간의 중추신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심각한 보고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현실에서, 수돗물 불소화가 입법을 향해가고 있다는 건 분명 슬픈 일이다. 가난한 아이들의 치아 건강이라는 좋은 취지가 왜 하필이면 엉뚱하게도 불소라는 위험 화학 물로 귀결되고 있는가.

이 논란과 관련해서는 예전에 나 역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내 홈피 시사칼럼을 찾다 보면 있을 것이다. 설혹 아무리 불소가 옳다고 하더라도 그걸 공권력으로 일제히 투약한다는 건 분명 파시스트적 발상이다. 민주주의 시대에 이런 발상 자체가 순수한 의도라는 이름으로 횡행하는 것도 무섭다.

이번 호 <녹색평론>은 이 수돗물 불소화 입법을 막아야 한다고 아주 긴급하게 김종철 선생이 호소하는 글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전혀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는 한국사회 교육현실,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이라는 말 그대로 참담함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평택 미군기지 문제가 조금 다뤄졌고, 이 시대에 분노를 잃어버린 시(詩)를 말하고 있다. 책 마지막에 실린 서평 중에 아나키스트들의 자서전 2권을 소개했는데, 역시 이 부분에 대해 공감하는 바가 컸다.

어쨌거나 총체적 문제는 돈의 가치만을 향해 온 사회가 달리기를 하고 있는 현실, 그러다 보니 더욱 더 망가져가는 사회, 이에 대한 진단과 나름의 비판 그리고 대안제시가 책의 주류다. 이건 상상력 결핍 때문이다. 비전과 상상력을 결핍했기에 그저 현실의 돈의 가치만을 따라가는 것이다. 철학의 부재, 이 말과 같다. 이건 시(詩)의 세계에서 '분노'를 잃어버린 허접한 시들만이 난무하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백무산 등은 1980년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후 시는 죽었다고 진단한다. 분노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문재의 글이다. "한국시는 요즘 분노하지 않는다. 꽃과 나무와 하나가 되기 위해 세련된 이미지를 제출하거나, 산사로 들어가 한 소식 얻기 위해 장좌불와 한다. 디지털 기호를 적극 끌어들이기도 하고, 여성의 해방을 소리 높여 외치기도 한다. 생태시라는 근본주의적인 흐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한국시는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있다. 일상적 현실의 안쪽으로 들어가 있지 않다. 한국시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와 접점이 거의 없는 서정시 일색이다. 한국시의 최근은 자폐적이다."라며 현실에 맞서는 응전력 상실을 질타한다.

한데, 요즘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그런 서정마저 없다. 그들에게 "좋은 삶이란, '겨우'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업을 얻어서 그럭저럭 사는 것에 불과했고, 이것을 회의하는 사람에게 그 너머를 응시할 상상력은 허용되지 않았다 "
밀양 밀성고 교사 이계삼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아이들이 '홀로' '스스로' 존재하는 시간은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아이들의 시간을 거의 장악한 이 시스템 속에서 아이들은 하나의 대상물, '객체'가 되었고 말하자면 '교육 시스템'의 우리에 갇혀 최적화된 환경이 제공해주는 '교육 서비스'를 오물오물 받아먹기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내면세계는 심각하게 황폐화되었다. 내가 국어고사로서 아이들에게서 가장 우려하는 것은 지금 아이들이 서정시를 쓰거나 서정시를 향유할 능력이 눈에 띄게 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연에서 쫓겨나 '한국교육'이라는 집단가학 시스템 속으로 유폐되어 서서히 영혼 없는 사회의 복제품이 되어가는 이 시대의 아이들, 그들이 서정시를 쓰지 못하고, 서정시의 언어를 '닭살스럽게' 느끼는 것은 실로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나 역시 같은 교사로서 이계삼 선생의 진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상상력 결핍의 시대, 철학 부재의 시대, 서정이 말라버린 시대에 우리 아이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게 창조적 일탈이다. 이건 나의 지향 아나키스트가 내세우는 가치다.
"현대의 '우등생'의 대부분은 미리 정해진 규칙에 따라 생산되고 있는 제품에 불과하므로, 운명을 선택하는 결단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의미에서는 극히 '무의지'적이고 수동적인 반(半)제품에 지나지 않습니다.....친구를 끌어내리기에 열심이거나 선생님 마음에 들기 위해 친구의 사소한 규칙위반을 밀고하는 '우등생'들 쪽에, 인간의 기본적 덕성을 유린하고도 아무렇지도 않는 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입니다....'불량'학생이 정확하게 학교 교사의 사회적 성격을 파악하고 있는 데 반해, 자신의 사회적 성격에 대해 무자각적인 교사는...구제불능의 '청년장교'이며 '통제관료'인 것이다."
이건 일본의 반체제 사상가인 후지타 쇼조의 에세이에 나온 글이다. 우리 현실과 똑깥다. '무자각적인 교사', 내 주의에 너무도 많이 널려있다. 일탈하지 못하는 교사, 상상력 결핍의 교사, 그들 밑에서 배우는 학생들..... 끔찍하다.

이 상상력과 비전의 결핍이 어쩌면 과거 '친일파' 형성과도 밀접할 것이다. 이건 예전에 김종철 선생이 한 말이다. "그들이 현상(현재)을 넘어 볼 수 있는 비전이나 상상력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친일이라는 기회주의적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현실의 돈 가치 추구에 그저 문제의식 없이 몸을 내어 맡기는 것도 그 너머에 대한 상상력이 없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결핍은 곧 경험의 결핍이다. 후지타 쇼조는 "경험이란 대량생산품과 같이 미리 정해진 틀을 따라 일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의 조우를 통해서 사물의 저항을 받으면서 그것과 상호교섭을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규칙으로 정해진 고정 질서의 궤도로부터 벗어난 '예기치 못한 일'에 직면하여 '숨겨진 경의'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경험의 정신적 내용"이라는 탁월한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경쟁력 강화라는 국민적 신화’에 도취되어 기계의 부품처럼 살아간다. 서울대 정운찬 총장의 발언은 그래서 끔찍하다. “한명이 수만 명을 먹여 살린다”라니? 그렇다면 그 수만 명은 뭔가? 짐승인가? 노예인가? 그런 모토는 삼성의 것이 될 수 있을지언정 국립대학의 교육이념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통해서는 공동체가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박경미 73쪽)
물론 많은 사람들이 문제 제기를 하긴 한다. 그러나 불평불만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박경미는 “자기 삶에 대해 주권이 없는 노예는 불만불평과 비겁함을 내적 본성으로 가진다. 불평은 하되 저항은 않는 비겁함과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사람들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라고 말한다.
이필렬도 비슷한 말을 한다. “자본과 대항해서 해방의 싸움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향해서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필렬은 최근 아무런 저항 없이 번지는 황우석 신드롬에 대해 최소한 인문학이라면 안티를 걸어야 할 것 아니냐는 갑갑함에서 이런 말을 했다. 과연 이필렬의 말대로 “생명을 위해 생명을 빼앗는 것이 정당한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사회가 온통 자본적 가치에만 물들어있다 보니 황우석의 행위도 결국 얼마를 벌어들이는 신기술인가 하는 쪽으로 모아진다. 생명 존중? 그건 모순이다. 성찰적 이성 없이 도구적 이성만이 횡행한 결과다.

이러고 보면 모든 게 엉망이다. 내가 선 자리, 교육도 앞서가면 앞서가지 결코 제 몫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교사들부터 이 모양이라서 그렇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진정 “전쟁과 살육의 한가운데서도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것이 인간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르칠 자격이 있다. 아우성과 비명소리 들리는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되지만, 어린 눈망울들을 앞에 두고 제 눈앞의 창과 칼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람은 선생 될 자격이 없다. ....... 정말로 교육을 생각하는 사람은 경쟁의 비바람에 제 몸이 휘청거리면서도 경쟁력 강화가 교육의 목표라고는 차마 말 못한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시가 시답기 위해선 이제 다시 분노를 찾아와야 한다. “분노하지 않는 시는 죽은 시일 때가 많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시는 깨어있는 시가 아니다.”(206쪽)
이미지에 경도된 그대로 나이브하게 흘러갈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급소를 겨냥하는 메시지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말랑말랑한 감수성을 표현하거나 자연 속의 신비한 현상만을 읊조려서는 안 된다.

틀을 깨는 일, 자본이 주도하는 흐름에 대 놓고 딴죽 거는 일, 그런 삶이 오히려 더 알찰 것 같다. 무모하게 현실을 외면할 것은 아니지만, 멍청하게 현실만을 따라갈 건 더욱 아니다. “고정 질서의 궤도로부터 벗어난 예기치 못한 일에 직면하여 숨겨진 경이를 발견하는 일”,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이것이야말로 삶다운 삶이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면 나 역시 신채호의 사상적 변이와 닮아가는 구석이 있다.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민족자강론에서 상호부조론에 기초한 아나키스트, 그러기에 상호부조론을 제시한 크로포트킨을 언제 시간 내어 차분히 읽고 싶어진다.

“우리사회 전체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기관과 제도를 통해 체계적으로-어떤 수단을 쓰든지 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전투적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경쟁을 부추길 수 있는 것은, 그 전투의 경과 반드시 전사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의 약자들을 철저히 외면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상상력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 그 상상력을 다시 회복하는 일, 세상의 미친 돈 노름에 맥없이 끌려가지 않는 일, 그리하여 그 헛된 추종 앞에 자존으로 버틸 수 있는 힘, 그걸 다시 회복해야 한다.

<녹색평론>을 접으며 다시 상상력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인간의 자존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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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5년 7~8월 - 통권 83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녹색평론> 2005년 7-8월호.




책이 달라졌는가, 아니면 내가 달라졌는가?
몇 년 전까지 <녹색평론>은 솔직히 좀 갑갑했다. 원칙적인 이야기, 그리고 외국서적 번역물, 이런 것들은 분명 소중한 원고이긴 했지만, 인내심 작은 나로서는 별로 달가와 하고 싶지 않은 요소들이었다. 그런데 요즘 <녹색평론>은 정말 좋다.
내가 변한 것인가, 아니면 <녹새평론>이 변한 것인가? 둘 다이다. 나도 변했다. 보다 근본주의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을 만큼 세상이 많이 망가졌기에 나의 가치관도 훨씬 <녹새평론>에 가까이 다가섰다. 책도 변했다. 보다 현실적인 문제로 많이 내려와 있다. 그리고 번역물도 많이 줄어 읽기도 수월하다. 그래서 더 좋아진 것 같다.

이번 주제 역시 근본은 같다. 약육강식의 자본논리, 그 논리 속에 성장(?)하는 세계, 국토의 균형발전이라고 떠드는 것도 같은 맥락이며, 황우석 쓰나미도 같은 현상이다. 이에 대한 성찰이 이번 호의 핵심이다. 개발주의, 발전주의에 주박(呪縛)된 이 현상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박'이라는 표현을 보았다. 맞다. 우린 정말 그렇게 주박되어 있다. 그래서 못 벗어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베버가 말하는 '주술의 정원'일 뿐인데도 말이다.

서문에서 김종철은 최근 지자체를 내실화한다면 노무현 정부에서 취하고 있는 정부부처의 지방이전, 국토의 균형 발전이 사실은 막힌 자본에게 활로만을 열어주고 있는 '광란의 잔치'라고 비판한다. 예리한 지적이다. 나는 정부부처 지방 이전에 있어서 제주도에도 좀 더 많이 배치하지.... 등의 한심할 정도로 지방분권에만 고민을 두었지, 이것이 지방까지 말아먹는 현상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한국사회의 성장신화는 사실 박정희에게도 귀결된다. 해방 60년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으되, 핵심은 그 60년 간 앞만 보며 성장만을 가치로 삼고 달려온 광란의 질주였을 뿐이다.
그 질주에는 국가주의가 또 한 몫을 했다. 그리고 그 국가주의를 강화한 도구는 단연 학교다. 그 "국민교육이 반생명적, 반평화적인 전쟁시대를 미화하고 아이들을 전쟁으로 내몰았다."
그 과정에서 교사들은 "저급한 윤리의식, 천박한 열심을 빙자해서 신성한 교육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풍토"가 되었다. 이런 교사를 인도의 간디는 "돈이나 생각하는 교사는 도둑"이라고 했다 한다. 자기자신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을 때, 결코 제도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 그리고 사회가 그걸 강요하니, "예전에 비해 가난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만이 유일한 자아실현의 길이라고 끊임없이 부추기는 사회에서 나 혼자 입장 거부 당한다고 느끼"게 되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불행한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가난은 이제 무능과 나태함의 증거로 이해된다. '안빈낙도'가 이젠 아주 우스워져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기 몸값 높이기에만 매달리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따지고 보면 스스로를 저잣거리에 팔 물건으로 내 놓으며 살겠다는 말이다. '인간적 품위'대신 값을 따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자존심으로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경쟁 위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잃은 것은 인간적인 품위요, 얻은 것은 진실한 삶에 대한 냉소주의다. 우리는 삶을 향유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황우석 쓰나미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언론에서 온통 황우석 찬양 뿐이다. 윤리를 거론했다가 인터넷에서 몰매를 맞는다. 하지만 "윤리는 과학기술의 발목을 잡거나 과학시술의 발전에 발맞추어야 하는 저급한 분야가 아니다. 과학기술의 기반이어야 한다. 일부 계층의 생명 연장이나 돈벌이가 아니라 후손의 생명을 생각하는 과학기술이라면 윤리의 기반 위에서 연구해야 한다."
그래서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책임이 중해지는 것이다. 당연히 여기선 아이슈타인의 예가 등장한다. 그는 사회주의자이자 철저한 반핵운동가였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경제성장 논리와 결합된 과학기술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인간의 영혼이 달러의 품 안에서 쉬기를 바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상황인데도 우리는 마치 "타조가 위험을 보지 않으려고 제 머리를 모래 속으로 파묻어버리는"것과 비슷하다. 오일 피크가 코 앞에 닥쳐왔는데도 그냥 우리는 타조처럼 살아간다. 머리만 묻으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암 때문에 죽는 사람보다도 그것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사는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 참으로 슬프고도 희극적으로 다가왔다. 현대과학, 현대의학의 뒷모습이다. 자본주의는 그렇게라도 하면서 돌아간다.

비판에 대한 비난을 막는 인상적인 글귀도 있었다.
'나의 자연과학에 대한 설명이 몹시 과격하게 들린다면 나는 한가지 말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연극비평가가 연극의 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비평가는 과학의 적이 아니다. 과학비평가가 과학연구의 변질에 대해서 혹은 많은 과학자의 태도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하고 양심을 잃은 과대광고에 자극된 세간의 지나친 기대를 경계하며 나아가서 과학연구에 지출된 팽대한 자금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의견을 말하다고 해서 그가 과학의 적이 될 수는 없다."

최근 자연의학을 공부하는 주변 지인들 덕에 뵈었던 양동춘 선생님의 글도 재미있었다. 서평이었는데 그 서평의 대상이 된 책 역시 내 관심을 끌었던 책이기에 더욱 호기심이 났다. 황종국 판사가 쓴 <의사가 못 고치는 환자는 어떻게 하나>였는데, 그 황판사의 노력과 예리한 시각, 사명감에 십분 공감을 했다. 그러면서도 양동춘 선생은 황판사의 주장에 전폭적인 '대동(大同)의 감동을 하면서 몇 몇 대목에서 소이(小異)의 노파심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러나 그건 다순한 소이가 아니었다. 황판사 처럼 훌륭한 분들도 자칫 우리의 민중의학을 내세우다 보면 턱없는 민족주의 국수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종종있다. 양동춘 선생은 이걸 지적했다.

암튼 이래저래 읽을 게 많았던 이번 호다. 점점 더 <녹색평론>이 좋아져 간다. 다시, 내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녹색평론이 달라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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