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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5년 7~8월 - 통권 83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녹색평론> 2005년 7-8월호.

책이 달라졌는가, 아니면 내가 달라졌는가?
몇 년 전까지 <녹색평론>은 솔직히 좀 갑갑했다. 원칙적인 이야기, 그리고 외국서적 번역물, 이런 것들은 분명 소중한 원고이긴 했지만, 인내심 작은 나로서는 별로 달가와 하고 싶지 않은 요소들이었다. 그런데 요즘 <녹색평론>은 정말 좋다.
내가 변한 것인가, 아니면 <녹새평론>이 변한 것인가? 둘 다이다. 나도 변했다. 보다 근본주의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을 만큼 세상이 많이 망가졌기에 나의 가치관도 훨씬 <녹새평론>에 가까이 다가섰다. 책도 변했다. 보다 현실적인 문제로 많이 내려와 있다. 그리고 번역물도 많이 줄어 읽기도 수월하다. 그래서 더 좋아진 것 같다.
이번 주제 역시 근본은 같다. 약육강식의 자본논리, 그 논리 속에 성장(?)하는 세계, 국토의 균형발전이라고 떠드는 것도 같은 맥락이며, 황우석 쓰나미도 같은 현상이다. 이에 대한 성찰이 이번 호의 핵심이다. 개발주의, 발전주의에 주박(呪縛)된 이 현상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박'이라는 표현을 보았다. 맞다. 우린 정말 그렇게 주박되어 있다. 그래서 못 벗어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베버가 말하는 '주술의 정원'일 뿐인데도 말이다.
서문에서 김종철은 최근 지자체를 내실화한다면 노무현 정부에서 취하고 있는 정부부처의 지방이전, 국토의 균형 발전이 사실은 막힌 자본에게 활로만을 열어주고 있는 '광란의 잔치'라고 비판한다. 예리한 지적이다. 나는 정부부처 지방 이전에 있어서 제주도에도 좀 더 많이 배치하지.... 등의 한심할 정도로 지방분권에만 고민을 두었지, 이것이 지방까지 말아먹는 현상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한국사회의 성장신화는 사실 박정희에게도 귀결된다. 해방 60년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으되, 핵심은 그 60년 간 앞만 보며 성장만을 가치로 삼고 달려온 광란의 질주였을 뿐이다.
그 질주에는 국가주의가 또 한 몫을 했다. 그리고 그 국가주의를 강화한 도구는 단연 학교다. 그 "국민교육이 반생명적, 반평화적인 전쟁시대를 미화하고 아이들을 전쟁으로 내몰았다."
그 과정에서 교사들은 "저급한 윤리의식, 천박한 열심을 빙자해서 신성한 교육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풍토"가 되었다. 이런 교사를 인도의 간디는 "돈이나 생각하는 교사는 도둑"이라고 했다 한다. 자기자신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을 때, 결코 제도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 그리고 사회가 그걸 강요하니, "예전에 비해 가난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만이 유일한 자아실현의 길이라고 끊임없이 부추기는 사회에서 나 혼자 입장 거부 당한다고 느끼"게 되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불행한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가난은 이제 무능과 나태함의 증거로 이해된다. '안빈낙도'가 이젠 아주 우스워져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기 몸값 높이기에만 매달리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따지고 보면 스스로를 저잣거리에 팔 물건으로 내 놓으며 살겠다는 말이다. '인간적 품위'대신 값을 따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자존심으로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경쟁 위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잃은 것은 인간적인 품위요, 얻은 것은 진실한 삶에 대한 냉소주의다. 우리는 삶을 향유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황우석 쓰나미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언론에서 온통 황우석 찬양 뿐이다. 윤리를 거론했다가 인터넷에서 몰매를 맞는다. 하지만 "윤리는 과학기술의 발목을 잡거나 과학시술의 발전에 발맞추어야 하는 저급한 분야가 아니다. 과학기술의 기반이어야 한다. 일부 계층의 생명 연장이나 돈벌이가 아니라 후손의 생명을 생각하는 과학기술이라면 윤리의 기반 위에서 연구해야 한다."
그래서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책임이 중해지는 것이다. 당연히 여기선 아이슈타인의 예가 등장한다. 그는 사회주의자이자 철저한 반핵운동가였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경제성장 논리와 결합된 과학기술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인간의 영혼이 달러의 품 안에서 쉬기를 바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상황인데도 우리는 마치 "타조가 위험을 보지 않으려고 제 머리를 모래 속으로 파묻어버리는"것과 비슷하다. 오일 피크가 코 앞에 닥쳐왔는데도 그냥 우리는 타조처럼 살아간다. 머리만 묻으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암 때문에 죽는 사람보다도 그것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사는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 참으로 슬프고도 희극적으로 다가왔다. 현대과학, 현대의학의 뒷모습이다. 자본주의는 그렇게라도 하면서 돌아간다.
비판에 대한 비난을 막는 인상적인 글귀도 있었다.
'나의 자연과학에 대한 설명이 몹시 과격하게 들린다면 나는 한가지 말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연극비평가가 연극의 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비평가는 과학의 적이 아니다. 과학비평가가 과학연구의 변질에 대해서 혹은 많은 과학자의 태도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하고 양심을 잃은 과대광고에 자극된 세간의 지나친 기대를 경계하며 나아가서 과학연구에 지출된 팽대한 자금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의견을 말하다고 해서 그가 과학의 적이 될 수는 없다."
최근 자연의학을 공부하는 주변 지인들 덕에 뵈었던 양동춘 선생님의 글도 재미있었다. 서평이었는데 그 서평의 대상이 된 책 역시 내 관심을 끌었던 책이기에 더욱 호기심이 났다. 황종국 판사가 쓴 <의사가 못 고치는 환자는 어떻게 하나>였는데, 그 황판사의 노력과 예리한 시각, 사명감에 십분 공감을 했다. 그러면서도 양동춘 선생은 황판사의 주장에 전폭적인 '대동(大同)의 감동을 하면서 몇 몇 대목에서 소이(小異)의 노파심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러나 그건 다순한 소이가 아니었다. 황판사 처럼 훌륭한 분들도 자칫 우리의 민중의학을 내세우다 보면 턱없는 민족주의 국수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종종있다. 양동춘 선생은 이걸 지적했다.
암튼 이래저래 읽을 게 많았던 이번 호다. 점점 더 <녹색평론>이 좋아져 간다. 다시, 내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녹색평론이 달라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