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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5년 9~10월 - 통권 84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녹색평론> 2005년 9.10월호

열린 우리당에서 간판으로 내세웠던 장애인 의원, 장향숙의원이 대표발의를 해서 지금 '수돗물 불소화' 법안이 통과될 기세에 있는 모양이다. 안타깝다. 그 분의 순수한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불소가 실제 인간의 중추신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심각한 보고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현실에서, 수돗물 불소화가 입법을 향해가고 있다는 건 분명 슬픈 일이다. 가난한 아이들의 치아 건강이라는 좋은 취지가 왜 하필이면 엉뚱하게도 불소라는 위험 화학 물로 귀결되고 있는가.
이 논란과 관련해서는 예전에 나 역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내 홈피 시사칼럼을 찾다 보면 있을 것이다. 설혹 아무리 불소가 옳다고 하더라도 그걸 공권력으로 일제히 투약한다는 건 분명 파시스트적 발상이다. 민주주의 시대에 이런 발상 자체가 순수한 의도라는 이름으로 횡행하는 것도 무섭다.
이번 호 <녹색평론>은 이 수돗물 불소화 입법을 막아야 한다고 아주 긴급하게 김종철 선생이 호소하는 글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전혀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는 한국사회 교육현실,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이라는 말 그대로 참담함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평택 미군기지 문제가 조금 다뤄졌고, 이 시대에 분노를 잃어버린 시(詩)를 말하고 있다. 책 마지막에 실린 서평 중에 아나키스트들의 자서전 2권을 소개했는데, 역시 이 부분에 대해 공감하는 바가 컸다.
어쨌거나 총체적 문제는 돈의 가치만을 향해 온 사회가 달리기를 하고 있는 현실, 그러다 보니 더욱 더 망가져가는 사회, 이에 대한 진단과 나름의 비판 그리고 대안제시가 책의 주류다. 이건 상상력 결핍 때문이다. 비전과 상상력을 결핍했기에 그저 현실의 돈의 가치만을 따라가는 것이다. 철학의 부재, 이 말과 같다. 이건 시(詩)의 세계에서 '분노'를 잃어버린 허접한 시들만이 난무하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백무산 등은 1980년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후 시는 죽었다고 진단한다. 분노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문재의 글이다. "한국시는 요즘 분노하지 않는다. 꽃과 나무와 하나가 되기 위해 세련된 이미지를 제출하거나, 산사로 들어가 한 소식 얻기 위해 장좌불와 한다. 디지털 기호를 적극 끌어들이기도 하고, 여성의 해방을 소리 높여 외치기도 한다. 생태시라는 근본주의적인 흐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한국시는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있다. 일상적 현실의 안쪽으로 들어가 있지 않다. 한국시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와 접점이 거의 없는 서정시 일색이다. 한국시의 최근은 자폐적이다."라며 현실에 맞서는 응전력 상실을 질타한다.
한데, 요즘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그런 서정마저 없다. 그들에게 "좋은 삶이란, '겨우'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업을 얻어서 그럭저럭 사는 것에 불과했고, 이것을 회의하는 사람에게 그 너머를 응시할 상상력은 허용되지 않았다 "
밀양 밀성고 교사 이계삼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아이들이 '홀로' '스스로' 존재하는 시간은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아이들의 시간을 거의 장악한 이 시스템 속에서 아이들은 하나의 대상물, '객체'가 되었고 말하자면 '교육 시스템'의 우리에 갇혀 최적화된 환경이 제공해주는 '교육 서비스'를 오물오물 받아먹기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내면세계는 심각하게 황폐화되었다. 내가 국어고사로서 아이들에게서 가장 우려하는 것은 지금 아이들이 서정시를 쓰거나 서정시를 향유할 능력이 눈에 띄게 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연에서 쫓겨나 '한국교육'이라는 집단가학 시스템 속으로 유폐되어 서서히 영혼 없는 사회의 복제품이 되어가는 이 시대의 아이들, 그들이 서정시를 쓰지 못하고, 서정시의 언어를 '닭살스럽게' 느끼는 것은 실로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나 역시 같은 교사로서 이계삼 선생의 진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상상력 결핍의 시대, 철학 부재의 시대, 서정이 말라버린 시대에 우리 아이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게 창조적 일탈이다. 이건 나의 지향 아나키스트가 내세우는 가치다.
"현대의 '우등생'의 대부분은 미리 정해진 규칙에 따라 생산되고 있는 제품에 불과하므로, 운명을 선택하는 결단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의미에서는 극히 '무의지'적이고 수동적인 반(半)제품에 지나지 않습니다.....친구를 끌어내리기에 열심이거나 선생님 마음에 들기 위해 친구의 사소한 규칙위반을 밀고하는 '우등생'들 쪽에, 인간의 기본적 덕성을 유린하고도 아무렇지도 않는 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입니다....'불량'학생이 정확하게 학교 교사의 사회적 성격을 파악하고 있는 데 반해, 자신의 사회적 성격에 대해 무자각적인 교사는...구제불능의 '청년장교'이며 '통제관료'인 것이다."
이건 일본의 반체제 사상가인 후지타 쇼조의 에세이에 나온 글이다. 우리 현실과 똑깥다. '무자각적인 교사', 내 주의에 너무도 많이 널려있다. 일탈하지 못하는 교사, 상상력 결핍의 교사, 그들 밑에서 배우는 학생들..... 끔찍하다.
이 상상력과 비전의 결핍이 어쩌면 과거 '친일파' 형성과도 밀접할 것이다. 이건 예전에 김종철 선생이 한 말이다. "그들이 현상(현재)을 넘어 볼 수 있는 비전이나 상상력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친일이라는 기회주의적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현실의 돈 가치 추구에 그저 문제의식 없이 몸을 내어 맡기는 것도 그 너머에 대한 상상력이 없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결핍은 곧 경험의 결핍이다. 후지타 쇼조는 "경험이란 대량생산품과 같이 미리 정해진 틀을 따라 일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의 조우를 통해서 사물의 저항을 받으면서 그것과 상호교섭을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규칙으로 정해진 고정 질서의 궤도로부터 벗어난 '예기치 못한 일'에 직면하여 '숨겨진 경의'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경험의 정신적 내용"이라는 탁월한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경쟁력 강화라는 국민적 신화’에 도취되어 기계의 부품처럼 살아간다. 서울대 정운찬 총장의 발언은 그래서 끔찍하다. “한명이 수만 명을 먹여 살린다”라니? 그렇다면 그 수만 명은 뭔가? 짐승인가? 노예인가? 그런 모토는 삼성의 것이 될 수 있을지언정 국립대학의 교육이념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통해서는 공동체가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박경미 73쪽)
물론 많은 사람들이 문제 제기를 하긴 한다. 그러나 불평불만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박경미는 “자기 삶에 대해 주권이 없는 노예는 불만불평과 비겁함을 내적 본성으로 가진다. 불평은 하되 저항은 않는 비겁함과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사람들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라고 말한다.
이필렬도 비슷한 말을 한다. “자본과 대항해서 해방의 싸움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향해서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필렬은 최근 아무런 저항 없이 번지는 황우석 신드롬에 대해 최소한 인문학이라면 안티를 걸어야 할 것 아니냐는 갑갑함에서 이런 말을 했다. 과연 이필렬의 말대로 “생명을 위해 생명을 빼앗는 것이 정당한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사회가 온통 자본적 가치에만 물들어있다 보니 황우석의 행위도 결국 얼마를 벌어들이는 신기술인가 하는 쪽으로 모아진다. 생명 존중? 그건 모순이다. 성찰적 이성 없이 도구적 이성만이 횡행한 결과다.
이러고 보면 모든 게 엉망이다. 내가 선 자리, 교육도 앞서가면 앞서가지 결코 제 몫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교사들부터 이 모양이라서 그렇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진정 “전쟁과 살육의 한가운데서도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것이 인간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르칠 자격이 있다. 아우성과 비명소리 들리는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되지만, 어린 눈망울들을 앞에 두고 제 눈앞의 창과 칼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람은 선생 될 자격이 없다. ....... 정말로 교육을 생각하는 사람은 경쟁의 비바람에 제 몸이 휘청거리면서도 경쟁력 강화가 교육의 목표라고는 차마 말 못한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시가 시답기 위해선 이제 다시 분노를 찾아와야 한다. “분노하지 않는 시는 죽은 시일 때가 많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시는 깨어있는 시가 아니다.”(206쪽)
이미지에 경도된 그대로 나이브하게 흘러갈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급소를 겨냥하는 메시지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말랑말랑한 감수성을 표현하거나 자연 속의 신비한 현상만을 읊조려서는 안 된다.
틀을 깨는 일, 자본이 주도하는 흐름에 대 놓고 딴죽 거는 일, 그런 삶이 오히려 더 알찰 것 같다. 무모하게 현실을 외면할 것은 아니지만, 멍청하게 현실만을 따라갈 건 더욱 아니다. “고정 질서의 궤도로부터 벗어난 예기치 못한 일에 직면하여 숨겨진 경이를 발견하는 일”,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이것이야말로 삶다운 삶이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면 나 역시 신채호의 사상적 변이와 닮아가는 구석이 있다.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민족자강론에서 상호부조론에 기초한 아나키스트, 그러기에 상호부조론을 제시한 크로포트킨을 언제 시간 내어 차분히 읽고 싶어진다.
“우리사회 전체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기관과 제도를 통해 체계적으로-어떤 수단을 쓰든지 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전투적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경쟁을 부추길 수 있는 것은, 그 전투의 경과 반드시 전사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의 약자들을 철저히 외면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상상력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 그 상상력을 다시 회복하는 일, 세상의 미친 돈 노름에 맥없이 끌려가지 않는 일, 그리하여 그 헛된 추종 앞에 자존으로 버틸 수 있는 힘, 그걸 다시 회복해야 한다.
<녹색평론>을 접으며 다시 상상력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인간의 자존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