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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6년 1~2월 - 통권 86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녹색평론> 2006년 1-2월호.

요즘 잡지 중에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잡지가 바로 <녹색평론>이다. 1990년대, 이 잡지를 처음 접했고 한동안 정기구독을 했었으나 오래 동안 끊기도 했다. 버거웠기 때문이다. 김종철 선생은 끊임없이 내가 수용하기 어려운 생태적 가치들을 요구했고 나는 그것을 감당할 힘이 없었기에 숨어버렸던 것이다.
물론 그 후에 다시 구독해 보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살 순 없어도 그런 글을 읽는 것만으로 대리적 책무를 다한다고 위안하며 그랬었다. 그러나 버겁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런 버거운 책이 얼마 전부터인가 가장 친숙한 책이 되었다. 내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세상 꼴을 보고 난 후부터였을 것 같다. 진보 보수 막론하고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껴졌을 때 생태주의가 비로서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젠 머리로만 하는 그런 생태주의가 아니었다.
이번 <녹색평론>엔 버릴 글이 없다. 다 좋다. 예전에 번역문 등 일부 기사는 따분했으나 이번엔 번역문도 좋았다.
먼저 이연학 수도사의 글이다. 골프장 반대 싸움을 하면서 쓴 글인데, 수도자다운 원칙이 있어서 좋았다. 우리가 느끼는 고민 그대로를 잘 풀어놓아 주었다.
“환경주의자들의 주장이 집단 이기주의의 발로로 치부되는 이유는, 우리 시대의 몸통을 실핏줄마저 속속들이 지배하고 있는 어떤 근본적인 가치관 때문이다. 돈이 된다면 환경쯤이야 좀 짓밟고 지나가도 된다는 ‘지속 불가능한 발전’의 논리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배아의 생명쯤이야 희생시켜도 된다는 저 반생명의 논리와 정확히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그것의 이름은 다름 아닌 물신(마몬), 신이 되어버린 자본이다. 더 많이 가지는 것,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행복이라고 세뇌하는 이 ‘거짓의 아비’는 마치 육식 공룡처럼 닥치는 대로 먹어 삼키고도 늘 배가 고파있는 짐승이라는 사실을, 작금의 골프장 난립 상황에서 너무도 실감나게 관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천년 전에 마몬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가르침을 주신 바 있거니와, 참으로 오늘날 우리는 돈만 된다면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를 팔아먹고 불자도 부처님을 팔아먹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싶다.”
본질을 정확히 지적했다. “돈만 된다면”. 맞다. 그런데 그의 말대로 예수는 마몬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답은 나와 있다. 실천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마몬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
그걸 공선옥은 구체적으로 내게 들이민다. ‘먹고 사는 일의 엄중함’이라는 글에서 “이 시대에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 생존 이외의 부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 부를 절대로 타인과 나누려 들지 않는 사람들이 ‘먹고 살기 어렵다’는 말로, 정말로 먹고 살기 어려운 사람들로부터 도용하였다. 정말로 삶이 힘든 사람들은 결코 먹고 살기 어렵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살아갈 뿐이다. 처연하게 혹은 한없이 순결하게.”
여기서 가슴 후비는 소리. “생존 이외의 부”. 이것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 나 역시 이들이 가엽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나라고 해서 그 대열에서 벗어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 항상 긴장해야 한다. 내가 생존 이외의 부 때문에 본질을 놓치는 건 아닌지. 앞의 수사님 글에서처럼 마몬을 섬기고 있지 않은지를.
마몬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다 떠난 사람 중에 이선관이라는 시인이 있었다. 작년 말에 돌아가신 모양이다. 그이 유고 시들이 몇 편 실려 있고, 그의 삶에 대한 글이 같이 실려 있다. “시인의 사명은 생명을 옹호하고 지키면서 그것을 위협하는 불합리한 사회여건과 맞서는 것이다.” 이건 비단 시인만의 사명은 아닐 것이다. 역사가 역시 그런 사명을 가지고 있다. 시대적 소명에 누구보다 민감해야 하기에.
근데 이선근 시인은 정말 하느님을 섬겼던 모양이다. 그 화려한 중앙 무대에서 폼을 잡은 게 아니라 지방에서 소박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다. 역시 마몬의 유혹 대신 하느님을 택한 삶이다. 여기서 나의 삶을 반추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지 않은가. 남의 시선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내 삶(하느님)에게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본질을 다루고 있는 마당에 황우석 파동이 빠질 수 없다. 이 역시 따지고 보면 과학계의 마몬 숭배가 가져온 해프닝이다. 다음은 강양구의 ‘지금 여기, 과학기술의 파시즘’이라는 글 중 일부다.
“황 교수가 강조했던 난치병, 장애인 치료의 대의에 공감한 탓이라는 설명은 군색하기 짝이 없다. 난치병을 가진 환자가 도대체 몇 명인지 파악도 못하고 있는 사회에서 또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보장해 달라고 온 몸에 쇠사슬을 감고 절규해도 수년 간 눈 하나 깜짝 않던 사회의 구성원들 입에서 나올 법한 얘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한가지뿐이다. 바로 ‘돈, 돈, 돈’하는 한국사회의 분위기와 황교수의 연구가 궁합이 맞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진단이다. 돈 안 되는 학문은 이미 찬밥인지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대학은 개판이다. 특히 인문학은 이런 사회 풍토에 일침을 가해야 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따라가고 있다. 부러워하고 있다. 다음은 박경미의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옮긴 글이다.
“이런 종류의 인간들이 득세하는 장소로서의 오늘날의 대학은 급진적이지도, 지적으로 모험적이지도 않으며 가장 인습적이고 방어적인 집단이 되었다. 대학이야말로 파괴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산업주의 근면성이 지배하는 곳이 되었다. 현대과학은 이러한 오늘날 대학과 아무런 모순이나 갈등관계를 이루지 않으며, 도리어 그 선봉에 서 있다. 그리고 인문학을 비롯한 여타 분야는 지적 무기력에 빠져 있으면서도 과학의 ‘모범’을 따르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대학이 ‘산업주의 근면성이 지배하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근면한 건 좋은데, 산업주의 근면성이라면 문제다. 다들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하루를 살아간다. 이건 참 불쌍한 일이다.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정해 놓은 통제방식에 복종하는 것일 따름이니까 말이다.
박경미는 계속 말한다. 황우석 사태가 무엇을 말해주는지를.
“이 자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사람의 몸을 공격한다. 우리 밖에 존재하는 유형무형의 재화가 돈이라는 교환가치로 환산되는 시대는 옛날이고, 이제 자본주의는 생명과학의 힘을 빌려 우리 몸을 돈으로 환산하려 한다. 거대 자본이 투입된 현대과학은 인간의 몸 자체를 공격하여 교환 가능한 죽은 살덩어리로 만드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생명을 빼앗긴 난자가 고깃점이 되어 기계를 상대하고 있다. 난자가 기계에게 강간을 당한다.”
“그것은 탄생이 아니라 번식 (중략) 사랑의 연가가 아니라 해부학적 섹스”
“사람이 영혼을 잃고 온 세상을 얻은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맞다. 영혼을 잃으면 안 된다. 어떻게 죽는가는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이다. 우리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 우리 삶을 둘러싼 신비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잘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은 죽음에 저항하도록 우리를 부추기지만, 잘 죽을 수 있도록 우리를 가르치지는 못한다.”
결국 늘 그렇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가 화두다. 오늘 여기선 공선옥의 ‘생존 이외의 부’라는 말을 깊이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 수준의 부까지도 갖추지 못하면 주변에 폐가 된다. 그러나 그것 이상의 부는 오히려 삶의 근본적 목적을 잃게 만든다.
물론 사회보장제도가 워낙 허술한 한국사회이기에 노후를 대비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만큼은 철저히 경계할 일이다. 누가? 나 자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