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05년 11~12월 - 통권 85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녹색평론> 2005년 11-12월호(통권 85호)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무척 혼돈스런 시대를 살고 있다. 물신숭배가 극에 달한 시대이다. 방폐장 유치를 위해 주민투표를 벌이고, 과정은 무시한 채 결과만을 중시하는 황우석 애국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 마디로 절망하고 싶은 계절이다.

이 절망의 계절에 이번 호 <녹색평론>은 그래도 내가 살아있어야 함을 일깨워 주었다. 이번 호 권두언은 김종철 선생이 아니라 변홍철 선생이 썼다. 그 권두언 시작이 위의 시다. 테레사 수녀의 시라고 한다. 변홍철의 말처럼 이 시를 접하면 "깊은 수긍과 동의의 뜻을, 침묵과 눈빛과 미소로 나타"낼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시작과 실천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테레사 수녀는 무슨 대단한 능력과 수완으로 일을 했던 게 아니다. 그도 역시 한 번에 한 사람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었다. 단지 그는 "지금 시작함으로써" 그리고 "한 번에 한 사람씩 손을 잡음으로써"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켰다. 그에 비해 나는 얼마나 조급했던가. 대단한 변화, 한꺼번에 이뤄지는 그런 변화만을 꿈꾸지 않았던가. 하루를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그래서인가 이 시는 내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비록 그것이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에 불과할지라도 우리가 그 한 방울의 물조차 붓지 않는다면 그 바다는 한 방울의 물만큼 줄어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저 검은 절망의 광풍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말고 서로의 등을 토닥이며 가야한다. 그래서인가 나는 테레사 수녀의 시를 "기도와 투쟁에 대한 간절한 호소"로 읽었다.

스치다 다카시가 쓴 <공생공빈의 길>이라는 책이 이제 곧 번역되어 나오는 모양이다. 그 책의 서문을 소개한 코너가 있었다. 그 글만으로도 이 책을 사봐야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위의 테레사 수녀의 글처럼 많은 위안과 함께 길을 제시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고 외면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걸음씩 일상의 삶 속에서 쌓아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작은 노력을 되풀이하는 것은 즐거움이며 살아가는 자신과도 관계되어 있습니다."
"부처가 4고와 제행무상을 현실로 인지하면서부터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밝으냐 어두우냐가 아니라 엄중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곳에서부터 길이 열리리라 생각한다."
"엄청나게 어려운 미래일지라도 그것이 불가피한 일이라면 작은 노력들을 쌓아가면서 대비하는 것 이외는 길이 없다."
"무상불(無上佛)이라 칭한 것은 형태 없이 계심이다. 형태도 없으므로 자연이라 칭한 것이다. 자연이야말로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잔재주가 많은 인지(人知)와 선악을 초월하여 자연에 몸을 맡기는 경지의 의미를 설파한 것이리라."
그는 인간의 과학기술 문명을 손오공의 모험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신통력이 있다고 오만해졌을 때 고통은 스스로에게 돌아온다...공해 문제로 고통 받으며 환경문제로 고민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사는 데 있어서는 자기의 의지를 초월한 큰 힘에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감사할 일이다."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정치이며 사회이다. 돈을 추구하며 악착같이 사는 세상이다. 느긋하게 사는 것을 잊어버렸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활기 있는 상태를 '경기가 좋다'고 하면서 기뻐하고 있다. '바쁘다'는 것은 '마음을 망치는 것'이며 경쟁하고 효율을 추구하여 사람 사이를 갈라서 다투고 서로 상처를 입히게 된다."
"호흡을 지배하려고 하면 숨이 답답하게 되는 것과 같이, 자력의 극치에 있는 과학기술로 인해 오만해질 때 손오공의 금테가 조이듯 머리가 아프게 된다."

이계삼 선생의 글 '흙의 신앙, 인간의 교육'도 아주 느낌 좋게 읽었다. 물론 시대가 달라졌다. 그도 그걸 인정한다. 이오덕 선생의 책에서 인용하던 그런 시대는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심하다. "이곳에서도 흙의 신앙은 사라져 버렸다. 그러므로 인간다움의 기억을 정초할 바탕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도 기억도 없는 곳에서 가치 있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은 밥이니 밥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휴대폰을 먹고 컴퓨터와 자동차를 먹으며 살아야 한다는 도착된 논리 속에서 우리는 살게 되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요즘 시대엔 휴대폰이 신체의 연장이다. "아이들은 제 옆으로 질주하는 자동차는 무심히 비켜가지만 교실에 날아든 한 마리의 벌을 보고는 기겁한다."
"자연으로부터 쫓겨나 한국교육이라는 집단가학 시스템 속으로 유폐된 이 아이들은 제 자연적 본성을 돈을 주고 구매하는 말초적 즐거움에, 디지털로 분절되는 기계적 단순성에, 남을 밝고 일어서야 한다는 고독하고도 야수적인 경쟁의 논리에 가탁하면서, 서서히 영혼 없는 사회의 복제품이 되어간다. "
"아주 상식적인 그러나 고통스런 대안, 아이들을 다시 흙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 말고는 달리 다른 길이 ㅇ벗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루과이의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책에 대한 서평부분에서 옮긴다.
"개발도상국이라는 말은 얼마나 달콤한, 그러나 파괴적인 마약인가. 한 번 중독 되면 죽을 때까지 열심히 뛰게 되지만 언제나 뒤따라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브라질 주교 돔 헬더 까마라의 지적처럼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부르지만, 왜 먹을 게 없느냐고 물어보면 빨갱이라고 부르는" 뒤집혀진 패러독스의 세상이 바로 갈레아노가 본 '자본주의의 리얼리즘'인 것이다.
그의 시도 인용되어 있다. 다시 옮긴다.

공무원들은 공무를 보지 않고,
정치가들은 떠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유권자들은 투표하나 선출하지 못하고
미디어는 정보를 허위로 알려준다.
판사는 희생자들을 처벌하고
군대는 자기 동포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
경찰은 범죄를 저지르느라 너무 바빠서
범죄를 소탕하지 못한다.
이윤은 사유화되고
파산은 사회화된다.
돈이 사람보다 더 자유롭고
사람은 물건이 마음대로 한다.

그런 사회 바로 "끊임없이 돈을 벌어야 하고, 이것은 다시 끊임없는 소비로 이어진다. 소비는 더 많은 빚을 낳고 더 많은 경쟁을 야기한다. 결국 우리는 사람들끼리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물건과 살고, 물건을 사랑하면서 진짜 삶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작가란 정직해야 합니다. 자신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사고파는 존재가 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작가란 스스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스스로 인간으로서, 직업적 작가로서의 위엄을 지켜야 합니다. 자기들이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해야 합니다. 말은 진짜여야 합니다. 말은 가슴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짜입니다."
평자의 말처럼 "정치적 억압의 시대보다 소비상품주의 사회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작가로서의 위엄을 지키기가 더욱 어렵다."
그러나 "너무나 소중하고 성스러운 인간의 언어를 하나의 상품으로 내던지지 않을 신념"을 가져야만 하다. 그게 이 팍팍한 시대를 견디는 힘이 될 것이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