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걸으라, 그대 가장 행복한 이여 - 비노바 바베 포토 명상집
비노바 바베 지음, 김진 옮김, 구탐 바자이 사진 / 예담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홀로 걸으라, 그대 가장 행복한 이여

비노바 바베 글, 구탐 바자이 사진, 김진 편역, <홀로 걸으라, 그대 가장 행복한 이여>, 예담, 2006.


책 읽고 간단히 메모를 하면서도 나는 항상 나의 느낌을 그리고 나의 주관을 쓰고자 했다. 그랬기에 제목을 내가 따로 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책만큼은 제목을 따로 붙일 수가 없었다. 책 제목 그대로 ‘홀로 걸으라, 그대 가장 행복한 이여’라고 다시 반복해서 썼다. 느낌을 몇 자 적는 것 역시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좋았던 구절을 그냥 옮기고, 그것을 옮기면서 명상하는 것으로 책 읽은 이야기를 마무리 할 것이다. 물론 그래도 몇 자 적고 싶을 때는 적는다. 다만 그것이 비노바 바베의 정신을 훼손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내가 비노바를 처음 접한 건 몇 년 되었다.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인물 평전에서다. 요가에 입문하고서 얼마 되었을 때 그 책을 봤다. 인도에는 간디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간디의 제자이면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 간디는 참 행복하다. 존경스러운 제자를 두고 있었으니.
간디가 벌인 운동은 ‘사티아그라하’ 즉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이때 비노바도 같이 했다. 그리곤 간디가 세상을 떠난 후 비노바는 ‘부단운동’ 즉 토지헌납운동을 다시 벌였다. 20여년 동안 맨발로 인도 전역을 다니면서 지주들에게 땅이 없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6분의 1의 토지를 공유하자고 호소했던 운동이다. 성과가 컸다. 지금 한국사회라면 코웃음치고 끝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책을 읽으며 꼭 그렇지만도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적인 힘이 그만큼 커지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대로 부자를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도로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음 태어날 때 그 순수했던 영혼을 일깨워 내는 방식인 것이다. “억압과 강제로는 아무 것도 이뤄낼 수 없습니다.....나는 모든 사람에게 선한 뜻을 전하는 겸손한 하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순례 도중에 강도들까지 그에게 자발적으로 찾아와 참회를 하며 재산을 헌납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사진도 곁들여 있다. 하긴 그 강도들도 처음부터 포악했겠나. 태어날 때부터 그렇진 않았을 것이다. 비노바가 믿은 것은 바로 그들에게 내재해 있는 신성(神性)이었던 것이다.
간디의 운동이나 비노바의 운동에는 공통점이 있다. 영성과 사회적 운동을 동시에 이뤄낸 것이다. 개인적 해탈보다 공동체적 깨달음을 중시했다. 영성과 혁명, 개인과 공동체, 신과 인간의 통전을 지향했던 것이다.
주변에서 영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무관심을 종종 본다. 거꾸로 사회개혁가들 중에 영성적으로 형편없는 사람들도 본다. 이 두 부류의 인간들 모두 부족하다. 그리고 그 부족은 실패로 귀결될 뿐이다. 내가 비노바에게 매료된 것은 물론 이 요인이 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그런 지향을 추구하는 사람은 많다. 비노바 만큼 제대로 실천해내지 못할 뿐이다. 특히나 나는 영성보다 사회개혁 쪽에 치중했던 사람이기에 그에게서 참된 영성과 그 훈련을 더 주의 깊게 바라본다.
하지만 너무도 어렵다. 영성은 가부좌 틀고 폼 잡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가장 기본이 사유재산이다. 자본주의 세상에 살면서 이게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러 공동체를 이루며 버림과 나눔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것 같다. 혼자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동체도 영성이 충만하지 못하면 내부 분란만 커진다. 국내에도 변산 등에서 그런 실패 사례를 볼 수 있다. 그 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그의 가르침을 옮기며 명상할 뿐이다. 지금 나의 단계에서는.
“사회와 괴리된 진아 탐구는 그 가치를 상실한다. 하지만 사회 활동을 아무리 정열적으로 하더라도 진아에 대한 탐구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결함을 갖게 된다. 또한 자아에 대한 탐구 없는 사회활동이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듯이, 사회활동 없는 진아 탐구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은 그 둘에게 모두 해가 된다.”
토지 기증운동을 벌이며 전국을 순례할 때 그가 했던 말, “나는 구걸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초대하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 말한다. “이 세계에서 일할 때 세 가지 길이 있다. 폭력의 길, 합법의 길 그리고 자비의 길이 그것이다. 폭력의 길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합법의 길은 사람이 지닌 자립적 주체적인 힘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우리가 반드시 택해야 하는 길은 자비와 사랑의 여정이다.”
그가 이 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그의 나이 55세 때라고 한다. 그 나이에 그는 마치 자신이 어린 아이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고 한다. ‘어린 아이의 영혼’, 성경에도 나오는 구절이다.
그 운동의 과정에서 그는 타인을 희생시키지 말고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다. 그 희생이라는 단어. 너무도 어렵다. ‘끊임없는 희생, 기쁨에 찬 희생’, 비폭력을 실현하려면 집착을 없애야 하며, 동시에 우주적인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역시 어렵다.
그걸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 “항상 수련하는 사람은 계속 생기가 넘칠 서이다. 또한 늘 새로운 통찰과 생각을 갈구할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가 매일 목욕하고 집을 청소할 때 깨끗함이 유지되듯이 정신 또한 날마다 수련해야 깨끗하게 지속된다고 하셨다.”
그래서인가 그는 “내면의 혁명 없이 외면의 혁명이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헌신과 마음의 정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역시 어렵다. 그런 어려운 일을 비노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건, 신에 대한 믿음의 차이 때문일까. 그는 신을 “영혼의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말한다. “만약 이 지상에서 우리의 몸이 사라진다 해도 우리를 주도하는 의식은 남아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의 세계인 것처럼 동시에 우리는 보다 큰 세계의 일부분이며 우리의 의식은 더 위대한 전체의 부분입니다. 그 전체가 곧 신입니다.”
인간의 선함을 믿는 것이 신에 대한 믿음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 믿음이 있기에 그의 삶은 가능했던 것 같다. 사람에 대한 믿음? 나는 요즘 이게 많이 사라졌다. 그래서 자꾸만 나 혼자의 세계로 도주한다. 이건 바른 명상이 아니다. 알면서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을 키우지 못해서다.
명상도 한 방법이겠다. 하지만 그는 명상을 따로 폼 잡고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때론 홀로 떨어져서 자신을 살피는 게 필요하다. 그러나 본질에선 명상과 행동, 지식과 행동, 봉사와 영적 수련 사이에 어떤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행동이 명상의 일부분을 구성할 때 명상의 힘은 발휘된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행동에 헌신하는 일 그 속에서 명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상은 사회의 온전함을 향해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육체적 노동도 강조한다. “육체적 노동을 통해 신께 예배드린다”라고 말한다. 노동과 예배는 하나라는 것이다.
그는 늘 학생이자 선생이었다. 그래서 선생으로서 세 가지 자질을 말한다. 첫째 학생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사랑을 주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 다음은 끊임없이 지식을 탐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식 탐구보단 애정이 먼저다. “사랑이 부족하지만 지식에 대한 지성과 헌신이 뒤따른다면 당신은 철학자나 국가에 크게 기여하는 위대한 사상가는 될 수 있겠지만 결코 선생은 되지 못할 것이다.” 대단하다. 선생을 철학자나 위대한 사상가보다 높이 평가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이어지는 그의 교육관. “교육은 학생들의 머리를 정보로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갈증을 유발시키는 것”이라 한다. “교사와 학생 모두는 접촉을 통해 서로 배우는 학생일 뿐”이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교육의 목적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두려움을 모른다 함은 다른 존재를 노예로 만들지 않고, 또 비굴하게 다른 존재에게 굴복하지도 않는 것이다.

“나는 산술적 평등을 원치 않는다. 내가 원하는 평등은 다섯 손가락 사이의 평등과 같다. 다섯 개 손가락은 각기 길이가 다르지만 완전히 협동 속에서 수많은 일을 함께 수행해 낸다. 우리는 올바른 분별과 조화로운 평등을 원한다.” 화엄 사상과 통하는 말 같다.

그는 처음 어머니의 가르침을 통해 영적 성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음은 그가 말하는 어머님의 가르침이다.
“베푸는 자는 신이고, 축적하는 자는 악마이다.”
“작음은 좋고 많음은 해롭다는 것을 기억하라.”
“음식은 배를 채우는 정도면 충분하고, 옷은 몸을 가리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이다.”
“만일 성자들이 몸소 실천하는 금욕의 힘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떻게 건재할 수 있었으랴.”
“지혜로운 이들의 말과 신들의 말, 그리고 성자들의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귀담아 듣지 마라.”
이런 가르침이 있어서 그랬나. “내 것이 남아 있는 한 그곳에는 영적인 자유가 있을 수 없다.” “내 것이라는 사고가 우리를 자유가 아닌 노예로 만든다는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무소유하라는 것이다. 가진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가 열반에 든 것은 1982년이다. 그는 가기 전에 “나를 잊으라, 그러나 <바가바드 기타>는 기억하라”라는 말을 남겼다. 깊은 내적인 행동의 길로 들어선 사람은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드러내려 한다면 그것은 시험을 당하는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시험당하며 그리고 매번 그 시험에 넘어가고 있다. 알면서도 그렇다. 에고에 대한 집착이 아직은 많이 남아 있어서다. 그러나 서두름 없이, 가려고 노력한다. 이런 책을 읽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직은 아니지만 늘 염두에 두고 싶다.
“비노바 바베,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 따뜻해지는 사람이여”
그래서 홀로 걷는 모양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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