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07년 7~8월 - 통권 95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무엇을 위한 성실함인가

<녹색평론>95호 207. 7-8월호




몸이 아프다. 예전 같지가 않다. 예전엔 며칠 쉬면 거뜬히 일어났는데, 이젠 그게 안 된다. 많이 쉬어도 회복이 어렵다. 책 읽는 횟수도 시간도 줄어든 건 당연하다. 책을 읽기만 해도 위산이 역류한다. 그냥 쓰러져 잔다.
‘내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아함경에 나온 구절이었던가. 병이 있어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오만한 인간이 스스로들 돌아보는 기회가 된다. 그러기에 병은 축복이라고 한다. 성찰하기 싫어도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고선 할 게 없다. 고마운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열심히 살았다. 부지런히 살았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 꼴이다. 그러니 다시 살펴본다. 성실한 것은 맞는데, 무엇을 위한 성실이었나를 생각한다. 그것이다. 나 자신의 내면을 위한 게 아니었다.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서 열심히 했노라고 하지만 사실 그 밑바탕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우선이었을지 모른다. 하여 다시 묻는다. 나는 왜 무엇 때문에 성실하게 살았던가.
어쩌면 나의 성실함이나 현재 한국사회의 맹목적 개발주의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강수돌이 맑스의 공산당 선언을 패러디한 표현(209쪽)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온 세상에는 자신감 넘치는 하나의 해괴한 망령이 돌아다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개발주의’라는 망령이다”라는 게 결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본질에서 놓고 보면 같을지도 모른다.
물론 차이는 있다. 나의 성실함이 물질주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경제’가 신앙이 되어 버린 한국사회의 그 맹목적 일중독과는 다르긴 하다. 사실 경제가 신앙이 된 것도 아니다. 돈이다. 무엇을 위한 돈은 중요하지 않다. 그냥 많이 벌어야 한다는 강박이 강할 따름이다. 그러니 내 문제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한 돈 벌이인가’와 ‘무엇을 위한 성실인가’가 다르지 않다. 본질에서 내면을 중심에 놓은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우선하고 있다는 점에선 같다. 돈을 향해 가는 것도 결국은 남에게 꿀리지 않기 위함이요, 내가 성실한 것도 어쩌면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같다. 내가 좋아서 한다고는 하지만, 누구의 신선도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를 의식하는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독자적 개성이 아주 강하다는 인상을 남기려는 의도. 그렇게 남이 나를 인정해주길 바라는 욕망.
이번 호 <녹색평론>에선 그런 내용만이 다가왔다. 사실 표지에도 실렸듯이 이번 호는 권정생 선생님 서거(서거라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분의 소박함을 생각한다면)가 특집이다. 1937년 생이니까 약 70년의 생을 사셨다. 그리곤 올해 5월 17일 삶을 마치셨다.
그 열정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늘 가난과 병고 속에 있었다. 그분의 노력에 걸맞은 영광이 주어지려고 하면 그는 늘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 예수의 참 모습은 왕이 아니라 헐벗고 굶주린 민중이었기에. 그래서 도법 스님마저 그분에게 야단 맞으셨다. 도법 스님의 최근 행보는 결코 부처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이 사시는 곳에 찾아와 예배드리는 사람들에게 “승용차를 타고 오라는 것도 하느님의 뜻인가”라고 직설적으로 묻는다. 기름을 찾아 떠나는 이라크 파병과 승용차 이용은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행동이 과연 예수님이 가르친 것과 어긋나진 않는가하고.
근데도 나는 권정생 선생님의 글보다 그리고 김종철 선생님의 탁월한 세상 읽기보다 뒤에 실린 서평에 눈길이 많이 갔다. 내 처지를 반추하는 구절들이 많아서였다. 나 역시 중독이다. 일 중독. “경쟁 노동의 외적 압박을 내면화해 자기자신이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 일 중독의 핵심”이다. “쉬운 말로 남들이 시켜서가 아니라 과로사나 자살 등 죽음에 이를 때까지 알아서 기는 것이 일 중독의 핵심”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폭력의 체계적 경험과 내면적 자율성이 결핍에 따라 생기는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방어’의 수단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하버마스의 ‘내적 식민지’ 혹은 맑스의 ‘우리 안의 자본’과 일맥상통한 대목이다.
나 자신을 다시 들여다본다. ‘내면적 자율성의 결핍.’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다. 나 스스로 남보다 내면적 자율성이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다. ‘인정투쟁’에 지독하게도 매달리고 있었다. 그랬기에 언제나 기준은 밖에 있었던 것이다.
현대 문병의 병폐를 고민하고 지적하고 있는 게 요즘의 나다. 하지만 나 역시 그 함정 안에서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 물질 위주의 성장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 사회. 역시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다. 성장을 앞세우고, 개발을 해 댄다. 남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다. 그게 나의 성실함과 뭐가 다를까.
자발적 가난을 이야기했지만 본질에서 나는 아니었다. 물질적으로 그렇게 떠벌였을 뿐, 정신적인 면에서 그 누구보다 탐욕스러웠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가난해져야 한다. 그게 진짜다. <성경> '산상 수훈'에 있는 그 구절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라는 말이 이제야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병 속에서 다시 생각한다. 나의 성실함. 그건 탐욕이었다. 두려움에 기초한 자기 방어였다. 지금의 나의 병은 그 문제를 다시 성찰하게 하는 약이다. ‘내면의 자유’로 다가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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